여행에

엊저녁에 참석했던 온라인 회의에서 있었던 일이다. 내가 어떤 직책에 이름을 걸어 놓은 유일한 단체인 <우리 센터(Woori Center> 정기 이사회 모임이었다. 자칫 딱딱한 분위기가 이어지기 십상인 모임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참석자들에게 던진 이사장의 첫 물음은 내겐 사뭇 도발적으로 다가왔다. 참석자들의 이즈음 근황을 물으며 던진 질문이었다.

“만일 한 달 여행이 가능하다면 가장 가고 싶은 곳은 어딘가요?”라는 물음이었다.

꿈을 꾸었었고, 꿈이 손에 닿은 듯 했었다. 더 나이 들어 먼 길 다니기 힘들어 지기 전에 아내와 함께 일년에 달 포 정도는 여행을 즐겨보자는 꿈이었다. 수 년 전에 그 꿈의 첫발을 내 디뎠고 몇 차례 여행을 즐기며 ‘다음은 어디, 다음은 어디’하며 꿈을 부풀리다가 부모님들이 눕기 시작하면서 그만 멈추고 말았다.

그렇게 지난 사 오 년 사이 장모, 장인, 어머니 순서로 떠나시고 이젠 아버지 수발로 먼 길 나서는 일은 그저 꿈으로 남았다. 게다가 이어지는 COVID 상황은 꿈이란 그저 품었을 때 아름다운 것일 뿐이라는 자족(自足)을 키워 내었다.

그런 내게 던져진 “만일 한 달 여행이 가능하다면…”이라는 질문은 모처럼 나를 흥분케 하기 충분한 것이었다만, 오늘 세탁소 일을 하며 가라앉힐 만한 크기였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만기가 곧 다가오는 여권용 사진을 찍었다. 십여 년 만에 찍어 본 증명사진이었다. 운전면허용 사진은 디지털화 한지 오래 이고, 인화된 증명 사진은 단지 여권 갱신 때만 필요한 듯 하다. 앞으로 십 년 후는 또 어찌 변할지 모르는 일이고 보면, 살며 이제껏 찍었던 증명사진들만 놓고 보아도 세월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을게다.

아내는 즉석에서 인화된 사진을 보며 도저히 자기일 수 없다고 몇 차례 놀램과 실망을 털어 놓았지만 아내답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나이에 상관없이 성별을 불문하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대한 이중 잣대는 사는 한 늘 차고 다니는 법일게다.

십년 만기 여권 갱신 서류들을 챙겨 보내며 내가 맞이 할 새로운 십년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을 즈음에 맞이한 질문, “만일 한 달 여행이 가능하다면…”에 자칫 혹 할 뻔 하였다.

어느새 여러 해 전이 되어 버린 시간에 맛보았던 환희에 가까운 여행의 맛 하나.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본 그림들이다. 그림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는 거의 문맹에 가까운 내가 그저 가슴으로 느낀 희열이었다. 시대순으로 배열된 그림 속 얼굴들의 변화를 알아 챈 순간이었다. 중세에서 르네쌍스로 접어 들면서 그림 속 사람들의 얼굴엔 웃음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그 변화는 내게 제법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그 그림 속 얼굴들의 변화는 종교, 정치, 이념, 신념, 사상 등등 거창한 것들일랑 다 접고 사람 답게 사는 일이란 게 그리 큰 게 아니라는 가르침으로 내게 다가 왔었다.

그저 얼굴에 웃음 그리고 사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세상, 그게 바로 사람살이가 나아지는 세상이라는 배움을 얻은 여행이었다.

솔직히 이제껏 살아 온 시간들도 돌이켜보니 아는 것 처럼 느낄 뿐인데, 다가와  마주할 내일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 내게 여행의 꿈이 이어질런지, 새로 받을 여권에 몇 개의 도장들을 찍을 수 있을런지…

다만, 내 얼굴에 작은 웃음 잃지 않고, 마주 하는 이들에게 웃음기 전하는 시간 여행이라도 즐기며 살 수 있었으면…

여행에.

얼굴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 온 우리 부부는 한참을 웃었다. 집사람은 웃으며 거의 넘어갈 지경이었다. 우리 부부를 그렇게 웃게 한 것은 두어 주 전에 있었던 교통사고  경찰 기록이었다.

크게 다친 데는 없지만 이런 저런 사고 후유증들은 계속되고 있다. 우선 내 차는 폐차 처리가 되었으며 아내와 나는 어깨와 허리 통증으로 의사와 물리 치료사를 찾곤 한다.

내 쪽과 상대편 보험회사와 사고 처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장 중요한 기록은 사고 당시 경찰 기록이었다. 어느 쪽 과실이냐는 판단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경찰 리포트를 조회하려고 20달러 비용과 함께 조회 신청을 한 것이 열흘 전인데 오늘에서야 그 리포트가 배달되었다.

경찰 리포트에 따르면 100% 상대편 운전자의 과실이었다.

우리 부부가 그 리포트를 보다가 웃음을 빵 터트린 까닭은 양쪽 운전자들의 신상내역 때문이었다.

상대편 운전자는 26세 백인 여성이었다. 그리고 내 신상명세에 기록된 Race 항목엔 American Indian/Alaskan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 기록을 남긴 경찰관은 30대 백인 남성이었다. 그의 눈엔 내가 아메리칸 인디언으로 보였던가 보다.

따지고보면 아메리칸 인디언이나 알라스카 인디언이나 모두 아시아에서 건너 온 이 땅의 주인들일 터이니, 그 젊은 백인 경찰관은 내 얼굴에서 이 땅 주인들의 조상을 보았을 터.

웃으며 한주간을 마감할 수 있게 한 그 젊은 경찰관에게 감사를.

11/ 30/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