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주일 아침에

어머니 일주기에 맞는 어머니 주일 아침, 어머니 생각하며 가게 손님들에게 편지를 띄우다.


제 어머니는 문맹이셨습니다. 초등학교 교육조차 받지 못했던 어머니는 영어는 물론이고, 한글도 읽거나 쓰지 못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어머니는 지극히 상식적인 분이셨습니다. 사람은 부지런해야 한다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남의 것을 탐해서는 안된다거나 부족해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등의 지극히 상식적인 것들에 충실했던 분이셨습니다. 때때로 엉뚱한 당신의 고집조차 상식적인 사람살이라고 우기시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딸 셋, 아들 하나를 다 키우시고 난 뒤인 쉰 넘은 나이에 한글을 깨우치셔서 성경도 읽게 되셨고, 영어로 당신의 이름 정도는 쓰실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제일 으뜸가는 관심은 가족이었습니다. 평생 제 아버지의 하루 세끼 식사는 물론 자식들의 건강과 안녕이 가장 우선하는 그녀의 관심사였습니다. 세 딸들은 비교적 그런 어머니의 바램대로 잘 살아온 듯 합니다만, 아들인 저와는 그렇게 잘 맞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젊은 시절에 저는 어머니의 속을 많이 썩였었습니다. 제 꿈이 너무 컷던 탓이었는데, 어머니는 그런 제 꿈들을 헛 꿈이라고 말하곤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먼저 미국으로 이민을 오셨고, 어머니의 초청으로 내가 크게 내키지 않았던  미국 이민을 오던 때 어머니가 제게 하셨던 말씀이랍니다. “이놈아! 이젠 헛 꿈들일랑 다 버리고 열심히 일하고 살어! 작업복 몇 벌만 가지고 와서 열심히 일하며 살아!”

그렇게  시작된 세탁소랍니다. 그 무렵 윌밍톤과 뉴왁시 일대에는 70군데 가까운 세탁소들을 한인들이 운영하고 있었답니다. 서로 간의 정보도 교환하고 상호 이익을 위해 힘을 합쳐 보자는 생각으로 세탁인 협회를 만들고, 나아가 델라웨어 한인 사회 일을 맡아서 하고, 필라델피아 인근 한인들을 위한 신문을 만드는 저를 보며 어머니는 혀를 차셨습니다. “쯔쯔, 네 팔자다! 아직도 헛 꿈을 버리지 못하니… “

그런 어머니를 제가 이해하게 된 것은 제 나이 60이 거의 다 되어서 였습니다. 세탁소가 제 천직임을 깨달은 것도 그즈음이었습니다. 이젠 그 세탁협회도 없어지고 당시 함께 했던 사람들 중 아직도 세탁소를 하고 있는 사람은 제가 유일하답니다.

오늘 저녁 어머니를 뺀 저희 모든 가족들이 함께 한답니다. 비록 모두 함께 한자리에 모이지는 못하지만 온라인 Zoom Meeting으로 함께 한답니다. 아버지와 제 형제들과 어머니의 손주들과 증손주들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한답니다.

어머니가 떠나신 지 일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저는 어머니가 헛 꿈이라고 말씀하신 그 꿈은 버리지 못했답니다. 다만 더 이상 그 꿈을 쫓지는 않는답니다.

어머니가 살아 생전 지켜왔던 상식들에게 만이라도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제가 아직 세탁소의 하루 하루를 즐거워 하며, 오늘 아침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제 어머니 덕입니다. 그래 감사하는 하루랍니다.

그 맘으로 당신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리며.

당신의 세탁소에서

https://conta.cc/3eyAS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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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단풍놀이 길 나서려 했었다. 오늘 지나면 올 가을도 제 길 찾아 떠나려 할 듯 하여서 였다. 나서려던 길 막은 놈은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지고 온종일 비가 추적일 것이라고 떠드는  일기예보였다. 때때로 예보는 정확하기도 하다. 먼길 나서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날씨였다.

집에 머무는 덕에 모처럼 참 좋은 친구 내외가 방문하여 이 심상찮은 세월에도 감사히 살아가는 일상의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어쩌다 내가 온종일 집에 있을 때면 부엌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셨다. 고구마를 굽거나 찌기도 하시고, 녹두를 갈아 빈대떡을 부치시기도 하셨고, 쑥 갈아 개떡을 만드시거나 바람 떡을 만드셔 내 입이 심심치 않게 하시곤 했다.

딱하게도 나는 입이 짧았고 성격도 모질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어머니께 던졌던 말이다. ‘에고, 제발 그만 두세요.’

어머니 생각하며 떡을 빚어 본 하루다. 팥소와 녹두소 넉넉히 만들어 저장도 하고, 콩가루, 녹두가루도 준비해 두었다. 올 겨울엔 옛 생각나면 떡을 빚어 볼 요량이다.

그렇게 콩가루와 녹두가루 입힌 인절미도 만들고, 녹두와 각종 너트 갈아 넣은 소에 단호박 쪄 넣은 찹쌀떡과 계피가루 입힌 옷에 팥소 넣은 찹쌀떡을 만들어 보았다.

아내가 제법 맛있다며 칭찬을 보탰다.

아버지와 두 누이들에게도 배달해 맛을 보였다.

어머니는 돌아가시 전 일년 여 알츠하이머 병세로 시간을 마음대로 넘나드시곤 하셨다. 그 무렵 종종 어머니는 육이오 전쟁통 피난길에서 떡장사 하셨던 때로 돌아가 계시곤 하셨다. 어머니가 절박한 기억에 휩싸이곤 할 때였다.

어머니 흉내 내며 떡을 빚은 하루. 어머니와 내가 다른 것 하나. 어머니는 절박했고 나는 여유롭다는.

그저 고마움으로, 어머니 덕에.

*** 오늘 동네 뉴스 하나. 우리들 실생활에 직접 다가오는 변화는 대통령 선거보다는 지역사회 일꾼들 선택에서 먼저 온다는 사실. 그리고 그 기사를 마무리하는 말. ‘유권자들은 어차피 지역사회 일꾼들이 내세우는 정책보다 자신들의 선입견이 우선’한다는…

내 책상 위에서 나를 바라보시는 어머니는 오늘도 ‘쯔쯔쯔’와  ‘그래 고맙다’를 반복하신다.DSC01266A

하루 – 22, 그리고 다시 일상

어머니 마지막 길 배웅하고 돌아와 새로운 일상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내가 어머니 속 끓이는 일을 하곤 하면 어머니는 머리 싸매고 곧잘 누우셨다. 그렇게 몇 끼 식사 거르시곤 당신 스스로 제 풀에 일어나 ‘이 눔아!. 이눔아!’하시며 일상으로 돌아가시곤 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내 일탈된 일상을 적어 놓고 싶어 하루를 세기 시작했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할 무렵 어머니가 더는 일상을 이어가시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어머니 떠나시고 오늘 장례를 치루었다.

이제 어머니가 늘 그러하셨듯이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오늘 예식에서 내가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그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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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증손들은 제 어머니를 왕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집안에 많은 할머니들 중에 연세가 제일 많으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머니는 저희 집안에서 실제로 왕이셨습니다.

왕은 왕이로되 섬기는 왕이셨습니다. 넉넉치 않은 소농의 6남매 중 둘째 맏딸로 태어나신 어머니는 딸로서 동생으로 언니로 누나로 출가외인이 되어서도 왕처럼 친정가족들을 돌보셨습니다.

시집와서 꽉 찬 30년, 홀 시아버님 한복 계절마다 시치시고 다려 준비해 올리셨습니다. 제 할아버지 마지막 임종을 지키신 이도 어머니입니다.

저희 네 남매를 섬기는 일은 그냥 어머니의 즐거움이셨습니다. 딱 일년 전 아흔 둘 연세에도 저희들에게 무엇 하나라도 맛있는 것 먹일 수 있을까 그 생각으로 늘 분주하셨습니다.

손주들과 증손자들을 위한 축복의 기원과 기도는 그냥 어머니의 일상이었습니다.

73년 함께 사신 제 아버님 삼시 세끼 어머니 손 안 거친 음식 잡수신 횟수를 셀 수 있을 만큼 지극히 섬기셨습니다.

어머니의 93년 한 평생은 온전히 가족들을 위한 삶이셨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어머니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그저 감사다’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머니의 아픔과 슬픔에 더해, 제가 눈치조차 채지 못한 어머니만의 아픔과 슬픔 모두 가슴에 묻고 오직 그저 감사로 당신의 삶을 정리하신 어머니셨습니다.

하여 오늘은 어머니처럼 모든 게 감사입니다.

먼저 어려운 때에 제 어머니 마지막 환송예배를 집례해 주신 송종남 목사님과 배성호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델라웨어 한인 감리교회 믿음의 성도 여러분들께 드리는 감사도 큽니다.

저나 저희 가족들이 알지 못하더라도 어머니 살아 생전 제 어머니에게 웃음과 기쁨을 선사해 주셨던 모든 분들께 속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제 가족들에게 보내는 감사도 큽니다. 어머니께서 누리신 마지막 일년은 제 누나의 극진한 정성 덕입니다. 외조 해 주신 매형과 누나에게 큰 감사를 드립니다.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전화 인사 이어와 어머니의 한 주간을 즐겁게 마치게 해 준 아틀란타 동생 내외에게 어머니가 전하는 감사 위에  형제들의 감사를 덧붙입니다. 우리 집안에 웃음과 활력을 도맡아 준 막내동생 내외 특히 우리 집안의 기도 담당 막내 매제 덕에 어머니 편하게 떠나셔 감사합니다.

어머니의 말 잘 안 듣는 집안의 유일한 골치거리이자 걱정거리였던  제가 그나마 이 만큼이라도 아들 노릇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제 아내에게 드리는 감사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73년 만에 맞는 아버지의 새로운 일상에 이어질 감사의 몫은 이제 왕을 잃은 우리 모든 가족들이 나눌 일입니다. 어머니처럼.

마지막으로 오늘 온라인으로 함께 한 저희 아이들에게 주는 감사 인사입니다.

In memory of your grandmother or great-grandmother, what I want to say is two things. The first is that she lived a life of dedication and sacrifice for her family; that is, your grandfather or great-grandfather, your uncles and aunts, me, and of course, all of you. The other one is that what she said most often in her lifetime was “Always and simply be grateful.”

I believe that she will reach heaven comfortably, thanks to you all being with me today.

Thank you all.

이 모든 감사를 오늘과 어머니와 우리들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루 – 21

교회 담임목사님이 장례식순을 보내 주셨다. 어머니 좋아하시던 찬송  ‘사철의 봄바람 불어 잇고’와 아버지의 뜻인 ‘이 세상 살 때에’를 모두 식순에 넣어 주셔서 감사했다. 다만 ‘고인 약력’ 순서가 내 맘에 걸렸다. 하여 목사님께 전화 부탁을 드렸다. ‘고인 약력’이라는 순서를 따로 넣지 마시고 제가 가족 인사 드릴 때 짧게 함께 말할 수 있도록 해주시면 감사 하겠노라는 부탁이었다.

솔직히 내 어머니의 약력이란 딱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을 만큼 단촐하다. ‘무학(無學)으로 평생 가족들을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다 가셨다.’ 이게 모두다.

어머니가 한글 성경을 읽으시고 오랜 미국생활에서 눈치코치 의사 소통을 하실 수 있던 것은 모두 아버지의 노력이 숨어 있었다. 그렇게 한글도 깨치시고 아파트 이웃 노인들과 인사치레는 하시고 사셨다.

그런 내 어머니의 삶이 ‘고인 약력’ 소개하는 말로 덧칠해지는 게 싫었다. 신앙으로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의 증손들은 어머니를 ‘왕할머니’로 불렀다. 아이들에겐 많은 할머니들 중에 제일 나이 많은 할머니였으니 ‘왕할머니’일 수도 있지만, 진짜 어머니는 우리 집안의 왕이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사셨다.

소농(小農) 가정의 삼남 삼녀 중 둘째 맏딸로 태어나 출가외인이 되어서도 오빠 동생들을 챙기며 섬기는 왕 노릇 하셨었다. 73년 함께 사신 내 아버지 삼시 세끼 어머니 손 거른 일, 손가락으로 꼽아도 좋을 만큼 섬기셨다. 당신 슬하 일남 삼녀 새끼들 뿐만 아니라 우리들 뱃속에서 낳은 손주 증손들까지 당신 생각에 최선이라고 하는 데까지 이르러 섬기셨다.

그렇게 고집 세셨다.

그런 내 어머니 말년에 자주 입에 달고 사시던 말 ‘그저 감사’다.

어머니의 마지막 일년 알츠하이머 증상으로 시간이 오락가락 하실 때, 이따금 돌아가 사시던 시간은 6.25 전쟁통과 70년대와 80년 대 초 내가 젊었던 시절이었다.

전쟁통 피난길의 고난과 첫딸을 잃어 버린 아픔 그리고 남편의 부상 등이 평생 어머니의 고통으로 남아 있게 된 시절은 나도 얼핏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종종 순사들이 당신의 아들인 나를 잡으러 온다는 말엔 ‘그 일이 그렇게…’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내 스물 나이 어간에 경찰서, 중정, 계엄사 합수부 등에 몇차례 끌려가 곤욕을 치룬 적이 있지만 당시 내 또래들이 겪은 일에 비하면 지극히 경미한 일이었거니와 딱히 내가 특별히 한 일도 없어 나는 이젠 다 묻은 일이다만 어머니에겐 평생 잊지 못할 아픈 시절이었었나 보다.

그리고보니 오늘이 한국 날짜로 5월 18일이다.

내 부모가 겪어낸 한국전쟁으로부터 광주항쟁 최근의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어머니들의 가슴을 후려 파내어 아직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는 사건들에 내가 이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까닭은 따지고 보면 다 내 어머니 덕이다.

거하게 무슨 신앙의 문제도 아니고 이념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내 어머니보다 더 뼈저린 아픔을 이고 살아간 그리고 또 살아갈 어머니들을 잠시라도 생각할 수 있어야 사람이라는 그 맘 하나, 내 어머니가 주셨다.

***오늘 하루 제일 기분 좋은 소식 하나. 지난 며칠 일기 예보의 변화다. 장례일에 비 예보가 80%에서 70%로 다시 60%로 줄더니 오늘은 0% 이따금 흐림으로 바뀌었다. 모두 내 어머니 복이다.

하루 – 20

‘이즈음 천국 앞 도로가 교통체증이 심해서 장례를 치르려면 좀 시간이 걸립니다.’ 장의사 직원이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모두가 하수상한 코로나 바이러스 시절 탓이란다. 우선 이즈음 돌아가시는 이들도 많거니와 묘지에서 안장하는 수를 극히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어머니의 장지는 십여 년 전에 미리 준비해 놓았었다. 모두 어머니 생각이었다. 이왕 당신 묘 자리 마련하는 김에 너희들도 다 한 자리 씩 준비하거라 하는 말씀에 가족 묘 자리를 준비했던 터였다. 아버지 어머니 나 아내가 한열로 그 아래 열에 매형 누나 막내매제와 동생 순으로 누울 자리를 마련하였었다.

그 묘지공원에서 이즈음에 주중인 월요일에서 금요일에 낮 열 두 시 단 한차례 한사람만 모신단다. 하여 내 어머니의 입장 순서가 정해졌는데 가히 국장(國葬)급 예전(禮典)인 9일장으로 치루게 되었다.

세상 일 다 해석하고 받아들이기 나름일 터. 바이러스로 세상 일찍 떠나시는 이들과 가족들에겐 정말 송구해서 할 말은 아니다만, 그 또한 내 어머니 마지막 누리시는 복이다.

또 한가지 장의사에게 들은 설명이다. 장의사(funeral home)에서 치루는 마지막 인사(viewing)와 예배에는 참석인원 10명을 초과하지 못하고 주어지는 시간은 최장 두 시간 이내여야 하고, 묘지 안장 역시 참석인원 10명 이내여야 하고 시간은 20분을 넘지 않아야 한단다.

우리 가족들만 다 모여도 30여명인데…

어느 정도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이기도 하여, 예식에는 우리 삼 남매 부부와 어머니의 막둥이 손자와 목사님 두 분 모시고 예식을 치루기로 했다. 머리 속에선 이즘 유행하는 zoom meeting으로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꽉차 있었다만 그래도 명색이 맏상주인 내가 zoom meeting을 한다고 왔다갔다 하기엔 그게 영 마뜩치 않아 차마 입을 열지 못하였다.

허나 그게 다 모두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어머니의 막둥이 손주놈에게 내 생각을 이야기 했더니 ‘걱정 말라’며 손주들 끼리 다 알아서 할머니와 가족 기록 영상도 만들고 zoom 으로 함께 할 수 있도록 할 터이니 염려 놓으란다. 하여 조지아 아틀란타 동생 식구들과 시카고, 워싱톤, 뉴욕, 필라델피아와 서울에 있는 손주와 증손들까지 모두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때때로 내 나이를 잊고 산다. 아이들이 그걸 깨닫게 해 준다.

내 어머니 최신의 소통 방법으로 인사 받으며 떠나시게 되었다. 이 또한 생각 나름. 어머니가 누리시는 복일게다.

오늘 어머니 사진 내 책상 가까운 벽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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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잘 보냈습니다.’ 인사 드린다.

이제 어머니의 하루는 새로 시작된다.

하루 – 19

방은 고요하다. 어머니 곁에 앉아 함께 숨을 쉰다. 아니 엄마와 함께 숨을 쉰다. 엄마는 종이장같은 가슴을 풍선처럼 만들어 큰 숨을 내리 쉬다가 순간 가슴은 다시 평면이 되어 고요해진다. 한손으로 차가운 엄마 손을 잡고  한손으로는 엄마의 얼굴과 이마를 쓰다듬는다. 엄마가 컥 소리와 함께 목에 모아 두었던 숨을 내쉬면 나는 안도의 숨을 쉰다.

저쪽 다른 침대에 누워 이 고요와 숨소리를 허락하며 조용히 주무시는 아버지가 고맙다. 아내가 카톡으로 찬송가를 들려드리라고 음악을 보내왔지만 나는 이 고요가 더 좋다. 아내의 재촉 카톡 소리에 찬송가를 들려 드리지만 어머니는 무반응이다. 엄마도 나와 함께 숨쉬는 게 더 즐거울지 모른다.

엄마가 잠시 안정적인 숨소리를 이어간다. 일어나 창밖을 본다. 누군가 오늘이 어머니날임을 알리는 예쁜 그림과 글씨를 길에 그려 놓았다.

5-10-20

엊그제였던가? 집으로 꽃병 하나 배달이 왔다. 아내와 나는 당연히 딸아이가 보낸 것이려니 했다. 꽃에 꽂힌 카드를 열며 아내가 ‘웬일이야!’하며 소리를 높였다. 우리 내외의 예상을 깨고 아들내외가 보낸 꽃이었기 때문이다. ‘며늘아이가 시켰고만…’ 내가 던진 말이다. 곰곰 생각해보니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보다 아들녀석 생각으로 헛웃음 짓다 떠올려 본 김광섭 시인의 시 <저녁에>이다.

저녁에

  • 김광섭

​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나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다시 만나랴”

어디서...

화가 김환기의 그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모티브가 된 시이다. 가수 유심초의 노래로 더욱 알려져 흥얼거리기도 했었다.

내 나이 스물 언저리,옛 명동 국립극장에서 본 연극의 제목이기도 하다. 소설 광장의 작가 최인훈의 작품이었고 그래서 그 연극을 함께 보았던 친구들 이름도 생각난다.

인연으로 치자면 엄마와 나는 수 억겁을 쌓은 연일 터이고 절대적인 만남의 예정이라면 신이 맺어 준 결단코 뗄 수 없는 만남이다.

고요한 방에서 그 연과 절대적 만남으로 이어진 엄마와 함께 ​숨을 쉬는 이 순간은 가늠하지 말아야 할 축복이다.

엄마의 손을 잡고 얼굴을 쓰다듬으니 입술을 달싹거리며 중얼거리시는데 소리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나는 ‘알았어  알았어’만을 반복한다.

엄마는 이제 별이 되려고 한다. 별이 되기 위해 마지막 한 모금의 숨조차 다 태우는 중이다.

정말 고마운 일 하나. 별과 사람, 하루와 천년 또는 오늘과 내일 그 공간과 시간을 넘어선 신을 엄마와 내가 믿고 있다는 사실.

허나 나는 아직 하루를 센다.

엄마 날에

하루 – 18

곡기 끊으신 지 딱 한 달 째이다. 과일즙을 끊으신 지도 한 열흘. 엊그제부터는 물까지 끊으셨다. 어머니와 헤어질 시간이 점점 다가오나 보다.

어머니는 여전히 곱다. 모두 세심히 곁에서 보살피는 내 누나 덕이다. 이따금 육이오 전쟁통으로 어머니를 데리고 가곤 하는 알츠하이머 증세조차 어머니에겐 마지막 좋은 벗일 수도 있다. 다섯 살 첫 딸을 피난 길에서 잃고, 전쟁터에 나갔던 아버지는 상이 군인으로 돌아왔던 그 시절이 어머니는 평생 아팟었나 보다. 종종 그 시절로 돌아가 우리들을 만나는 것을 보면.

날짜를 꼽아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두루 어수선하다. 허기사 늘 준비하고 있었던 터라 딱히 분주할 일은 없다.

‘하필 이 때….’라는 원망 섞인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만 만 아흔 세 해를 넘기신 어머니와 함께 하신 신에게 드릴 일은 아니다.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한강리 내 어머니가 나고 자란 고향이다. 지금의 서울시 한남동이다. 내 어릴 적 어머니는 내 손 꼭 쥐고 친정행을 하시곤 했다. 신촌 버스 종점에서 한남동 버스 종점까지 서울역에서 버스 한 번 갈아타고 가는 길, 나는 버스만 타면 졸았었다. ‘넌 버스만 타면 졸았지!’ 내가 서른이 넘을 때까지 들었던 어머니의 푸념이었다.

오늘 낮에 어머니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내게 건넨 말, ‘얘야! 가지 마라.’ 나는 웃으며 답했다. ‘내가 가길 어딜 가요. 항상 여기 있지.’어머니는 이내 다시 잠이 들었다. 나는 곧 자리를 떳다.

지난 해 어느날엔가 아버지는 당신들께서 세상 떠나는 예배를 드릴 때 읽어야 할 성서구절과 찬송을 적어 내게 건내셨다. 오늘 집에 돌아와 한참을 그 기록을 찾느랴 시간을 보냈다. 잘 간직한다고 놓아두면 그 놓아둔 장소를 잊곤 한다. 딱히 나이 탓은 아니다. 예전부터 있어 온 습관이므로,

아버지가 지정해 둔 찬송은 새찬송 609장 ‘이 세상 살 때에’다. 그 1절 가사다.

<이 세상 살 때에 수고와 슬픔/  나그네 인생길 빨리 지나네/ 돌아갈 고향은 주님의 나라/ 주께서 예비한 주님의 나라>

어머니의 하루가 지고 있다.

나물무침

어머니는 늘 당신이 내 울타리라고 우기셨고, 내게 어머니는 언제간 반드시 넘어야 할 담이었다. 물론 서로가 그렇게 말해 본 적은 없다. 어머니와 나의 관계는 그렇게 내 나이만큼 이어왔다.

불과 일년 전 까지만 하여도 어머니는 내 밥상에 당신의 손길을 올려 놓길 즐겨 하셨다.

십 수년 전 내가 밥을 짓고 음식을 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기 시작할 즈음, 어머니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못마땅해 하셨다.

그러시던 어머니가 어느날 부터인가  내가 한 음식이 맛있다고 하셨다.

이제 어머니는 더 이상 밥을 짓거나 음식을 하시지 못하신다. 이즈음  나는 어릴 적 어머니가 내게 해 주신 밥상차림을 생각하며 그 흉내를 내곤 한다. 어머니를 위하여.

어머니가 내 울타리를 포기할 즈음 나도 담을 뛰어 넘을 생각을 접었다.

하여 평안하다.

늦은 밤, 나물을 무치며.

마지막 간 맞춤은 아내에게 맡기다.

  1. 23. 20

욕심에

내가 잘하는 것 딱 한 가지, 잠을 참 잘 자는 습관 아님 버릇이다. 통상 밤잠 여섯 시간, 낮잠 삼십 분 , 정말 꿀잠을 잔다. 낮잠이든 밤잠이든 누우면 그만 깊은 잠에 빠져들고 딱 정해진 시간이면 눈을 뜬다. 세상 무너지는 걱정이 코 앞에 있어도 누우면 그냥 잠에 빠져든다.

그런 내가 간밤에 잠을 설쳤다. 깊게 잠들을 시간인 새벽 세시에 눈을 떠 그대로 아침을 맞았다. 그렇게 깨진 리듬으로 하여 뒤숭숭하게 하루 해를 보냈다. 가만히 따져보니 모두 내 욕심 탓이다.

지난 토요일에 찾아 뵌 아버지는 좁은 아파트 방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당신의 삶에 답답함을 토로하셨다. 이젠 그 답답함조차 다 그대로 받아 들이실 나이에 대해 말하는 내 이야기는 아버지에게 뿐만 아니라 내게도 그냥 공허할 뿐이었다.

이튿날, 아내와 함께 Longwood Garden 정원 길을 걸으며 더 늦기 전에 부모님 모시고 화사한 장식으로 꾸며진 이 정원을 함께 즐겨야 하겠다는  생각을 굳혔었다.

그리고 어제 정원이 비교적 한가한 아침 시간에 부모님을 모시고 정원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아이처럼 마냥 좋아하셨고, 어머니는 세상 꽃구경 다했노라시며 즐거워 하셨다. 한식당이 좋겠다는 어머니 생각에 따라 나눈 점심 밥상에서 두 분은 평소보다 많은 양의 식사를 하셨고, 그냥 좋다는 말씀을 이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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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거기까지였다. 어머니의 기억의 방은 그 즐거움을 담긴엔 이미 꽉 채워져 있었고, 아버지의 삶은 지난 토요일 좁은 아파트 방안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제 늦은 저녁까지 함께 했던 시간들에 대한 기억은 어머니에겐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어제 밤 내가 잠을 설친 까닭은 그래 모두 내 욕심 탓인게다.

그래도 그저 고마운 것 하나, 어머니가 아직은 아들 며느리 얼굴과 목소리 익히 알고 그저 고맙다는 말씀 이어가는 일.

어제 아내가 어머니를 웃게 했던 한 마디, ‘어머니, 봄에 꽃 필 때 다시 와요!’

늦은 밤,정호승의 시 하나 눈으로 읽다.

<어머니 장독대 위에/ 정한수 한 그룻 떠 놓고 달님에게 빌으시다.>

오늘 밤은 깊게 잠을 잘 수 있을게다.

 

성 금요일(聖 金曜日) 밤,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선생님의 생각을 꺼내 곱씹다.

‘때’가 이른 것은 ‘때가 왔습니다’할 때가 아니라, ‘이제’의 ‘이’ 소리가 나오는 때입니다. ‘이’라고 할 때도 실상은 과거가 됩니다만,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없는 것이 ‘이제’입니다.

우리는 이 ‘이제’를 타고 가는 목숨입니다.

이제가 이제, 이제, 이제, 자꾸 계속 되어도 났다 죽었다 하는 이 이제가 영원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 뜻으로 보면 우리의 모든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입니다. 새로 나오자 마지막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지금, 오늘이 귀하고 아름다움에 감사하다.

나의 ‘이제’ 뿐만 아니라 아내와 부모와 자식과 이웃들… 그렇게 귀하고 아름다운  ‘이제’를 누리는 사람들의 지경을 넓혀갈 수만 있다면…

기적처럼 집으로 돌아와 엊그제 생일 케익 앞에 앉으신 어머니와 앞 뜰에 핀 봄이 ‘이제’에 대한 감사를 북돋다.

성 금요일과 부활 아침 사이엔 셀 수 없이 많은 ‘이제’들이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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