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천국 – 마흔 아홉 번 째 이야기)
“아! 야훼 나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 예레미야 1 : 6
“야훼님, 제가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그 때마다 옳은 것은 하느님이셨기에 법 문제를 하나 여쭙겠읍니다. 어찌하여 나쁜 자들이 만사에 성공합니까? 사기밖에 칠 줄 모르는 자들이 잘되기만 합니까?”– 예레미야 12 : 1 – 2, 공동번역
‘아무도 전적으로 고립해서는 못산다’고 한 쟌 돈(John Donne)의 명언이 옳다면 오직 우리에게 대한 불가피한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 때에만 우리는 참된 실존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매 순간마다 소속 의식을 가지라는 요구가 아니다. 의식해야 될 것은 우리가 현재대로 곧 우리는 전체적인 인간 상황에 참여하는 자로서, 따라서 더불어 살 뿐만 아니라 다른 자들로부터, 그리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노먼 피텐저(Norman Pittenger)의 “사후(死後, After Death) – 하나님 안에서의 삶(Life in God)에서
겨울이 성큼 다가온 주일 아침입니다.
주일 아침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서 이어가는 예레미야 이야기의 방향을 조금 바꾸어 봅니다. 그의 예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다가 그가 겪었던 삶에 고뇌, 고통, 괴로움들과 그런 아픔들을 어떻게 그가 받아 들이고 살아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방향을 바꾸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미 우리들이 만나 온 다른 예언자들 – 일테면 이사야, 아모스, 미가, 하바꾹 등 –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다른 예언자들은 하나님에게 받은 명령이나 신탁 등을 예언하고 선포하는 일에 거의 주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비록 야훼 하나님의 명령일지라도 묻고 따지고, 때로는 대들기도 합니다. 그는 야훼의 명령을 따르다가 받는 고난이나 고통에 대해 깊이 후회하고 회의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야훼 하나님께 매인 자로서 자신이 짊어진 짐을 지고 두벅두벅 그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입으로 선포하다가 그 입을 막을 때 그는 글로써 예언의 사명을 이어갔습니다. 쓴 글들이 불살라지자 그는 또 다시 씁니다. 그렇게 죽는 순간까지 그 짐을 내려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때때로 구약의 예수로 비유되는 삶을 살다 간 것입니다.
그런 예레미야는 진정 외로웠던, 외로움을 심히 고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인생길을 걷는 첫걸음부터 그리 흔쾌히 디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태 속에 있을 때부터 야훼 하나님이 주신 숙명을 받아 태어난 사람입니다.
“내가 너를 점지해 주기 전에 나는 너를 뽑아 세웠다. 네가 세상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너를 만방에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 – 예레미야 1 : 5
그러자 그가 보인 반응입니다. “아! 야훼 나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 그가 가고 싶지 않은 길이었기에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 예레미야였지만 야훼 하나님의 강권과 보여주시는 환상들(살구나무와 끓는 가마 환상)로 인해 예언자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러나 그 길목에서 그가 만난 현실들은 그저 아픔 뿐이었고, 결국 눈물을 흘리는 일 뿐이었습니다.
“이 백성은 영영 살아날 길이 막혔읍니다. 가슴은 미어지고 마음은 터질 것 같습니다. ‘야훼께서 시온에 안 계시는가? 왕노릇 그만 하시려고 물러나셨는가?’ 이렇듯이 내 딸, 내 백성이 신음하는 소리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려 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직도 우상을 섬기며 내 속을 썩여 주느냐? 어찌하여 남의 나라 허수아비를 들여다가 섬기며 내 속을 썩여 주느냐?” “여름도 지나고 추수도 끝났건만 우리는 이제 살아 나갈 길이 없읍니다.
“내 딸 내 백성이 치명상을 입었는데 전들 어찌 아프지 않겠읍니까? 앞이 캄캄하고 마음은 떨립니다. 길르앗에 약이 떨어질 리 없고 의사가 없을 리 없는데, 어찌하여 내 딸, 이 백성의 상처를 치료하지 못합니까? 내 머리가 우물이라면, 내 눈이 눈물의 샘이라면, 밤낮으로 울 수 있으련만, 내 딸 내 백성의 죽음을 곡할 수 있으련만.” – 예레미야 8 : 18 -23
뿐만 아니라 그는 몸에 병을 얻기도 하고, 그런 그를 비웃거나 심지어 죽이려는 세력을 만나기도 합니다.
“야훼여, 저를 어루만져 주시어 마음의 상처를 고쳐 주십시오. 저를 붙들어 주시어 성한 몸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저는 주님 한 분만을 기립니다. 이 백성이 저를 비꼬아 말합니다. ‘야훼가 엄포를 놓더니, 어찌 되었느냐? 그렇게 야단치더니 어디 해보시지!’” – 예레미야 17 : 14 – 15
“그 말을 듣고 이 백성은 수군거립니다. ‘예레미야를 없애야겠는데 무슨 좋은 계책이 없을까? 이 사람이 없어도 법을 가르쳐 줄 사제가 있고 정책을 세울 현자가 있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 줄 예언자가 있다. 그러니 이자를 그가 한 말로 때려 잡자. 이자의 말마디마다 조심하여 듣자’ 고 합니다.” – 예레미야 18 : 18
그러나 현실은 야훼 하나님만을 믿고 당당히 나가려는 예레미야의 힘을 번번히 빼 놓을 뿐이었습니다.
“야훼님, 제가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그 때마다 옳은 것은 하느님이셨기에 법 문제를 하나 여쭙겠읍니다. 어찌하여 나쁜 자들이 만사에 성공합니까? 사기밖에 칠 줄 모르는 자들이 잘되기만 합니까? 하느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나무처럼 심어 뿌리를 박고 자라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군요. 그런 자들은 말로는 하느님과 가까운 체하면서, 속으로는 멀리 떠나가는 것들인데 말입니다.
야훼여, 주께서는 제 속을 환히 들여다 보십니다. 제 마음이 주께 있다는 것을 시험하여 보아서 아시지 않습니까? 저것들을 양처럼 끌어다 죽여 버리십시오. 갈라 내었다가 그 날 당장 죽여 버리십시오. 언제까지 가뭄 든 이 땅을 내버려 두시렵니까? 들풀이 다 마르게 내버려 두시렵니까? 이 땅에 사는 사람의 잘못으로 짐승이나 새가 죽어 없어져서야 되겠읍니까? 어떤 일을 하여도 주께서 보지 못하신다고 저들은 떠들어 대고 있읍니다.”” 예레미야 12 : 1 -4
착하고 의롭고 바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어렵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데, 못되고 불의하고 거짓되고 사기를 일삼는 자들은 떵떵거리고 살아가는 이 세상 속 현실은 도대체 뭐냐? 나쁜 놈들부터 먼저 죽여야만 되지 않느냐? 당신이 그렇게 안하니까 저들이 당신을 우습게 보는 것 아니냐? 온 세상을 당신 손안에 넣고 계시는 야훼 하나님께서 한번 답을 내 놓아 보아라! 예레미야가 야훼 하나님께 던진 물음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야웨 하나님의 응답은 실로 엉뚱한 것이었습니다.
“네가 사람과 달리기를 하다가 지쳐 버린다면, 어떻게 말과 달리기를 하겠느냐? 편안한 곳에서나 마음 놓고 살 수 있다면 요르단강 가 깊은 숲 속에서는 어떻게 살겠느냐? 너의 집 식구, 너의 동기들이 너를 헐뜯으며 배신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그들이 정답게 말을 걸어 오더라도 믿지 말라.” – 예레미야 12 : 5-6
“예레미야야, 네가 알면 뭘 그리 안다고 따지냐? 그저 나만 믿고 네 갈 길을 가라!”는 야훼의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인 예레미야가 마주치고 있는 “옳은 사람들이 겪는 불행, 나쁜 놈들이 누리는 행복”이라는현실 속 모든 부조리와 불의에 대한 해결책은 전적으로 야훼 하나님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닌 삶의 수수께끼 전체 문제의 흐름과 해답은 야훼 하나님 손 안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사람인 너는 그 믿음 안에서, 나 야훼 하나님이 내린 명령에 온 몸을 바쳐 따르고 행동할 것을 촉구하는 것으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야훼 하나님의 응답이 사람인 예레미야의 의문과 질문을 속 시원하게 풀어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연이어 야훼께 울부짖습니다. “제발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조름이었습니다.
“야훼여, 제 말을 잘 들어 주십시오. 원수들이 고발하는 저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 중략 – 저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을 야훼께서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죄를 벗겨 주시지 마시고 잘못을 용서해 주시지도 마십시오. 분김에 해치우시어 거꾸러지는 모습을 눈으로 보셔야 하지 않겠읍니까?” – 예레미야 18 : 19 – 23
제발이지 나쁜 놈들, 원수되는 자들을 죽여 없애달라는 애원입니다. 이 원수들은 모두 그의 동족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참을 수 없는 인간적인 분을 풀기 위해서라도 동족조차 나쁜 놈들은 다 죽여 달라고 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예레미야가 넘거나 뚫지 못할만큼 여전히 높고 단단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쏟아 내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인생 전체가 무의미함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읍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 들고 말았읍니다. 그래서 날마다 웃음거리가 되고 모든 사람에게 놀림감이 되었읍니다. 저는 입을 열어 고함을 쳤읍니다. 서로 때려 잡는 세상이 되었다고 외치며 주의 말씀을 전하였읍니다. 그 덕에 날마다 욕을 먹고 조롱받는 몸이 되었읍니다.” – 예레미야 20 : 7 -8
“저주받을 날, 내가 세상에 떨어지던 날,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 복과는 거리가 먼 날. 사내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한 그자도 천벌을 받아라.” – 예레미야 20 : 14 – 15
예레미아의 이 말들은 인생길 막장에 이르렀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근원적인 곳에서부터 거부하는 외침이었습니다. 더는 믿지 못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레미야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부터 야훼 하나님이 점지했다고 야훼께서 스스로 선포했었습니다. (예레미야 1 : 5) 이 장면에서 예레미야는 그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물론이요, 자신이 태어난 것을 축하했던 모든 이들까지도 저주하는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표현 하자면 “나를 낳고 미역국을 끓인 모든 자들조차…”가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짊어진 짐과 현실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낼 어떤 신적 체험, 신기한 기적, 신비스런 어떤 징조들을 끊임없이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체험한 것들은 그저 인간적인 체험들 뿐이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에서 저나 이 글을 읽고 계시는 그 누군가인 당신이 두 발 딛고 사는 세상에서 겪는 인간적인 체험들 말입니다. 저나 당신이 기도하고 바라는 일들에 대한 기적같은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고, 여전히 고통이나 아픔은 남아 있거나 오히려 깊고 아림이 더 하는 현실들 말이지요.
예레미야의 예언들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끊임없이 이어졌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구약에 등장하는 많은 카리스마적 인간들의 모습이 아니라 정말 인간적인, 연약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체험을 안고 그의 사명을 다한 사람입니다.
이제 그의 예언들을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