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태평양전쟁 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1부 :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하와이 시간으로 1941년 12월 7일 이른 아침에, 한 떼의 일본 해군 비행기가 하와이 진주만(Pearl Harbor)에 있는 미국 군함들을 기습하여 공격함으로 생긴 것이 태평양전쟁의 시작이다,

우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도서실에 관한 이야기와 태평양전쟁 을 소재로 하여 만든 영화에 관한 이야기부터 적는다.

그 도서실에 있는 책들은 아파트 주민들을 위한 것인데, 나는 가끔 그 도서실에 가서 보는 책이 있다.

그 책은 도서실 안에서만 읽을 수 있도록 된 규정 때문이다.

책 이름은 ‘ILLUSTRATED WORLD WAR II ENCYCLOPEDIA’고, 모두 24권 으로 되어 있다.  책 이름이 말해주듯이 사진이나 삽화가 많이 들어 있는 것인데, 그 책에 실린 사진이나 삽화 등이 태평양전쟁 때의 내 기억을 더욱 생생(生生)하게 해주고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내가 살아온 것을 생각나게 해주는 것이 또 있다.

물론 내가 직접 겪은 것은 아니고, 그 당시의 세상이 그러했다는 것을 회상(回想)해볼 수 있는 내용이 담긴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이야기 한 토막을 적어보려고 한다.

내용은 이런 것이다.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하여 만든 영화에 관한 것인데 두 가지다.

그 중 하나는 1970년에 나온 <도라 도라 도라 (Tora Tora Tora)>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2011년에 나온 <연합 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 태평양 전쟁 70년 째의 진실>이라는 영화다.

<도라 도라 도라 (Tora Tora Tora)>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그곳에 있는 미합중국 태평양 함대를 공격함으로 일어나게 된  것을 다룬 다큐멘터리적인 영화인데, 1971년 아카데미 특수시각효과상(特殊視覺效果賞)을 받은 작품이다.

그 작품의 줄거리는 이렇다.

1941년12월 7일 (일요일) 아침, 진주만에 정박(碇泊) 중인 미합중국 태평양 함대는 그곳 상공에 갑자기 나타난 일본 해군 비행기들의 기습 공격을 받는다.

한나절도 못되어 그곳에 있던 미국 군함들의 대부분이 박살난다.

그 비행기들은 감쪽같이 하와이 가까이까지 접근한 일본 연합함대 항공 모함에서 날아온 일본 해군 함재기(艦載機)들이다.

일본군의 그런 공격으로 미일전쟁(美日戰爭)이라고도 하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한 것에 앞서, 독일, 이태리, 일본의 3국 동맹계약이 이루어지자, 일본 군부는 미국 함대들이 모여 있는 진주만을 기습공격할 것을 결정 한다.

여러 차례 거듭되는 비행사들의 훈련을 통해 진주만 기습작전을 빈틈 없이 꾸민 일본 전투기들은 마침내 진주만을 향한다.

한편, 그런 사실을 모르는 진주만의 미군 사령관은 전투기들과 항공 모함들을 한곳에 모아 배치해 놓고, 방심한 채 휴일을 보내려 한다.

그러나 일본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주시하던 미 정보부에서는 일본 대사관에 도착하는 비밀암호를 해독하여 일본의 전쟁 위협을 경고하지 만 상부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거듭되는 암호해독문서조차 제대로 전달 되지 않는다.

마침내 진주만 상공에 도착한 일본 전투기들은 작전성공을 알리는 암호인‘도라 도라 도라’를 외치고, 환호성을 지르며 진주만에 있는 미국 군함들을 향해 무차별 폭격을 시작한다.

진주만에 있는 미국 군함과 비행기들은 모두 박살나 버리고, 그곳은  수라장이 되어버린 채 불바다로 변한다.

한편, 일본은 공습 후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 미국인들은 일본의 야비한 행위에 대해 놀라고 있다.

그러한 와중(渦中)에, 진주만 섬 근처에 정박 중이던 미 항공모함과 전투기들은 일본 비행기들의 폭격을 피하고, 일본군과의 전투에 돌입 한다.

<연합 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 태평양 전쟁 70년 째의 진실>이라는 영화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제국 해군 연합함대 사령관인 야먀모토 이소로쿠 (山本 五十六)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 것인데, 일본의 침략적인 것은 제외하고 정치적 의도에 초점을 맞춰 만든 것으로, 야먀모토 이소로쿠 의 발자취를 통해 태평양전쟁의 개전(開戰)과 경과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1943년에 그는 전선시찰에 나섰다가 남태평양 상공에서 비행 중, 미군 비행기의 공격으로 목숨을 일었다.

한편, 일본의 진주만 공격 당시 침몰한 전함 애리조나호를 기념하는 그 배는 미국의 역사박물관이 돼어 있다,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일본이 시작한 태평양전쟁의 막이 오른 지 70년 이 지났다.   진주만은 그러한 역사가 숨쉬고 있는 곳이다.

그 전쟁이 끝나게 될 무렵에 일본은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끼(長崎)   에 떨어진 두 발의 원자탄 세례를 받았다.    역사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원자탄이 쓰여진 전쟁 …… 태평양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한 부분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의 추축국(樞軸國, the Axis)과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연합국(聯合國, the Allies) 사이에 일어난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다.

1931년에 일어난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일전쟁을 거쳐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시기를 일본에서는‘15년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한 전쟁 에서 원자탄 세례를 받은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항복 하고 패전국이 되었다.   그러한 것에 따른 이야기를 엮어보려고 한다.

1920년대 생 3 – 아버지

아버지의 글을 올리면서 딱히 맞추려고 맞춘 것은 아니건만 오늘이 아버지날입니다.

이제 제 아버님이 쓰신 글을 이 곳에 올리려고 합니다.

E-17제 아버님은 1926년 생입니다. 그리고 그 세대들이 겪은 일반적인 경험들 – 일테면 무학(無學)이나 낮은 학력을 비롯하여 일제 징용이나 징집, 국군 또는 인민군으로써 전쟁경험, 50년대에서 70년대 이르는 급작스런 변화기를 살아낸 소시민들의 경험들 –을 겪어오신 이입니다.

지난 두번에 걸쳐 쓴 1920년 생들의 일반적인 경험들과 특수한 사람들의 경험들을 함께 겪었거나 듣고 보고 살아오셨습니다.

우리들이 이즈음 종종 듣거나 말하는, 친일분자와 애국 독립 투사, 좌익 빨갱이와 우익 백색 테러단, 종분분자들과 꼴보수분자들 등등 한국 현대사의 극단적인 양극과는 거리가 먼, 아니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가질 겨를없이 먹고 살며 목숨 부지하기에 급급해 하며 살아온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지난 백년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며 살아온 사람들이지만 어찌보면 사(史)라고 이야기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살아오면서 실제 그 사(史)의 주인공이었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 바로 제 아버님이십니다.

나이 스물이 되도록 태극기를 본적이 없거니와 한국이라는 나라는 없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어쩌면 그 시대의 진짜 민(民)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민(民) 가운데 한분이 제 아버님이십니다.

화랑무공훈장으로 한 쪽 다리의 아픔을 평생 다스리고 살아오신 아버님이 이제와 돌아볼수록 다시 저린 이야기들이 넘쳐나지만, 그래도 그 이야기들 속에서 민초(民草)들이 품어야 할 희망과 소망에 대한 이야기들을 엮어서 제게 건네신 것은 이달 초의 일이었습니다.

나이 스물에 맞았던 해방이 어느덧 70년 전 일이 되었는데, 비록 민초이지만 아직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몇 자 느낌을 적어보았노라고 말씀하시며 건네주신 원고입니다.

조금 손을 보아 출판하려는 계획에 앞서 먼저 여기 제 블로그에 연재로 소개 드립니다.

큰 제목은 <태평양전쟁 과 광복 70년 –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입니다.

다음 글 부터는 제 아버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1920년대생 – 1

들어가는 글 1

지난 주 미 연방의회에서 상영된 한국영화가 있습니다. 올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국제시장>이라는 영화입니다. 제 주변에도 필라에 있는 영화관을 찾아가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이 울었다는 이들이 제법 있답니다.

영화를 즐겨 보는 사람도 아니거니와 이미 영화 줄거리가 워낙 알려져 있는 것이어서 저는 영화관을 찾지는 않았답니다. 워싱톤 영화상영 초대도 받았지만 웬지 앞뒤가 뻔한 행사라는 생각도 있고 제 시간도 바쁘고해서 가보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한 달포전에 집에서 흘끔흘끔 보기는 하였답니다. 아내가 어디서 다운 받았는지 이 영화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함께 보자는 아내의 권유가 있었지만 그 때 제가 급히 처리할 일도 있고 해서 TV와 제 pc사이를 눈이 오가곤 하다가 영화보는 일을 그만 두었답니다.

웬지 옛날 어릴 때 보았던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는 영화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작정하고 관객들의 눈물을 받아낼 의도로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이지요.

아무튼 이 영화는 1.4후퇴라는 한국전쟁에서 시작하여 가난, 서독 광부, 월남 파병 등등 해방후 오늘까지 평범한 사람들이 겪어낸 시대사를 주인공의 삶에 투영하여 그려낸 작품입니다. 물론 영화에 대한 호불호는 관람객 각자의 몫이겠지만 저는 웬지 만화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답니다.

주인공이 저보다 많아야 고작 열살 위 정도라는 설정이 많은 부분 제 직간접 경험과 겹치기도 하기 때문이었을 터입니다.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은 1940년대생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당신은 몇 년대 생이신지요?

1950년대생인 제가 젊었던 시절 자주 말하거나 듣던 이야기 가운데 이런 말이 있었답니다. “우리나라에는 불행한 세대들만이 존재한다.”

혹시 아직도 이런 말이 유효한 것은 아닌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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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현재 생존하고 있는 세대들 가운데 가장 불행한 세대를 꼽자면 단연 1920년대생이 아닐까 합니다.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나, 그것이 아주 당연한 일로 생각하며 자랐고, 어느날 문득 해방이라는 놈이 찾아와 내 나라라는 것이 있는 줄 알았고, 이게 좋은 건가하는 생각이 채 들기도 전에 좌익과 우익 어느 편엔가 줄을 서야 살 수 있겠다 싶었더니 전쟁이 터지고, 국군이 되거나 인민군이 되어 숱하게 죽어간 세대가 바로 1920년대생들입니다.

그 때 살아난 사람들이 바로 <국제시장>의 주인공보다 앞서 오늘의 대한민국의 터를 묵묵히 가꾸어 온 세대입니다.

현재 대한민국 인구분포 현황을 보면 이 세대에 속한 사람들의 수는 약 백만 명 정도를 추산됩니다. 전체 인구수의 약 2%에 못 미치는 숫자입니다. 그래도 살아있는 이 세대들이 장수시대의 선두 그룹이가도 합니다.

바로 그 가운데 한분이 제 아버님이십니다.

1926년생이신 제 아버님은 아직 타고난 당신의 치아를 사용해 식사를 하시고, 돋보기 없이 글을 읽고 쓰시며, 건반 악기를 두드리시며 여가를 즐기십니다.

제가 제 블로그에 “아버지의 90년”이라는 카테고리를 따로 여는 까닭입니다.

새 방주(方舟 New Ark)

눈이 내리고 추워진다는 일기예보 탓도 있거니와 오늘은 각급학교와 관공서들이 쉬는 Martin Luther King Day인지라 가게 드나드는 손님이 뜸합니다. 

몇 분 손님들이 제 아버님과 한국 역사에 대해 묻고, 자신들의 부모 이야기를 꺼내고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가 이어지는 하루랍니다. 손님들과의 화제가 그리로 흐른 까닭은 어제 제 가게 손님들께 보낸 이메일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아래는 어제 제가 손님들에게 보냈던 편지의 한글 번역과 영문 편지입니다. 이곳을 방문해 주시는 당신과도 함께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오늘은 제 아버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제 아버님은 1926년생이고 어머님은 1927년생이십니다. 1946년에 결혼하신 두 분은 올해 67주년 결혼기념을 맞이합니다. 두 분은 Pike Creek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계시답니다. 

제 아버님은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 교육을 받으셨습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릴 적부터 가난과 함께 고생을 많이 하셨답니다. 

그러다 17살 때 일본의 탄광노동자로 끌려갔다가 그 곳을 탈출하여 일본에서 떠돌던 중인 1945년 이차대전에서 패한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한국으로 돌아갔답니다. 

독학으로 영어를 깨우치신 후 서울에 주둔하던 미군부대에서 잠시 일을 하셨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군이 되어 참전하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다리에 수류탄 파편을 맞는 부상을 당해 상이군인으로 제대를 하게 되었답니다. 

이후 아주 작은 인쇄소를 운영하며 저의 형제들 1남 3녀를 다 교육시킨 후인 1984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오셨습니다. 

당시 Newark에 있는 인쇄소(후에 Glasgow로 이전) 공원으로 취직이 되어 일하시다가 은퇴를 하셨답니다. 

그런 아버지가 어찌보면 크게 감사할 것도 없는 당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정말 감사하고 기뻣던 삶”이었다는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셨답니다. 

A Veteran’s Living Stories라는 제목인데 한국에서 한국말로 출판된 것입니다. 한국말 제목은 “바람에 날려 멀리퍼지는 민들레처럼”이라고 지었답니다. 

출판사에서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이 책을 쓰게 된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대답이었답니다. “삶에 대한 기쁨과 감사입니다.” 

1991년 제가 K&L Cleaners를 시작할 때 제 아버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제부터 여기가 너의 새 방주(方舟 New Ark)이다. 평안한 마음으로 네 일을 즐기며 살아라.” 그 때에 태어난 제 딸아이가 이제 대학 졸업반이 되었습니다.(***제 가게가 있는 동네 이름이 Newark이랍니다.) 

제가 누리고 있는 넘치는 감사들입니다. 

새로 시작하는 한주간 당신이 보내는 시간들이 늘 New Ark이 되시길 빕니다.

parents

Today I would like tell you about my father. My father was born in 1926 and my mother in 1927. This year they will have their sixty-seventh anniversary as they got married in 1946. They are living in an apartment in Pike Creek now. 

My father was born as the son of a poor peasant, when Korea was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Four years in an elementary school was all the education which he ever got. As his mother passed away when he was very young, he grew up suffering from all kinds of hardships and abject pove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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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he was seventeen years old, he was forced to be taken to Japan as a coal miner. After he escaped from a mine, he drifted from place to place in Japan. Then, as Japan surrendered in 1945, he could come back to Korea which had become independent from Japan. 

After he learned English by teaching himself, he worked for the American military which was stationed in Seoul at that time. When the Korean War broke out, he joined the Korean army. During the war, he was wounded by shrapnel from a hand grenade and was discharged honorably as a wounded soldier. 

Then, he ran a small print shop and reared his children, three daughters and one son, me. In 1984, after my sisters and I finished school, he moved to America. 

In America, he worked at a print shop which was located in Newark at that time (it has since moved to Glasgow) and retired later. 

My father, whose life can hardly be happy and grateful to my eyes, looked back over the past years of his life and published a book in which he declares his life as “a really grateful and joyful life.” 

Its title is “A Veteran’s Living Stories” and is published in Korea. Its Korean title is named “Bah-rahm-e Nahlyu Muhli Pu-ji-neun Min-deul-e Churuhm (Like a Dandelion Spreading its Seeds Widely with the Wind).” 

The publisher asked my father: “What made you write this book?” My father answered, “I want to express joy and gratitude for my life.” 

I still remember what my father told me when I started K&L Cleaners in 1991. He said, “From now on, this is your New Ark. Enjoy your work and live your life with a peaceful mind.” And my daughter, who was born around that time, is a senior in college now. 

I feel overflowing gratitude which I’m blessed to enjoy. 

I wish that every moment you spend will always become a New Ark this week and beyo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