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에

<감사에>

장례예배와 하관예배 손님들 접대를 마치고 돌아와 맞는 저녁입니다. 왔던 아이들도 다 제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마치 한 열흘 동안 먼 여행을 끝나고 돌아와 앉아 있는 느낌입니다. 이젠 다 말라 없어진 줄 알았던 눈물이었는데, 얼핏 들리는듯한 아버지 목소리에 주르르 흘리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어제 밤 장례 예식에서 손님들에게 드린 제 인사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 감사입니다.

이 더위속에 저희 아버님께서 하늘나라 가시는 길에 함께 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 예식을 준비하여 주신 델라웨어 한인 감리교회와 정범구목사님 그리고 교우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멀리 타 주, 타 도시에서 함께 해 주신 분들께 송구함과 함께 드릴 수 있는 말씀 그저 감사 뿐입니다.

부활의 믿음 위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먼저 떠나가신 이들의 삶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다시 살아나곤 합니다. 저희 자식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제 아버님의 마지막 순간들을 고요하고 평안케 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총에 드리고 싶은 말, 역시 그저 감사, 감사, 감사 뿐입니다.

아버님 연세 만 아흔 여덞이셨습니다. 옛 우리 나이로는 아흔 아홉입니다. 이걸 옛날 어르신들은 백수(白壽)라고 했습니다. 백살에 한 살 못 미치는 나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즈음 백세시대라는 유행에 걸맞게 장수하셨습니다. 아버님은 타고나신 치아들을 거의 다 그대로 간직하고 떠나셨습니다. 떠나시기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안경없이 웬만한 글들을 다 읽으셨습니다.

게다가 돌아가신 병명이 없으십니다. 앓고 계시던 병이 하나도 없으셨다는 말입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나이를 다 사시고 아주 평온하신 모습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하여 또 감사입니다.

이것 하나 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년 전 먼저 떠나신 제 어머님과는 일흔 세해, 자그마치 칠십 삼년을 함께 사셨답니다.

그 어머님께서 저 하늘에서 지금 아버님께 재촉하신답니다. “이 양반아! 끝났으면 빨리 오시지 뭘 그리 꾸물거리시나?” 그 어머니 말씀에 제 아버님 지금 마음이 매우 바쁘다십니다.

하여 제 이야기 짧게 끝내겠습니다.

아버님의 어린 시절은 참으로 불우하셨습니다. 열살에 어머니 곧 제 할머니를 여의고, 열 여덟에 일본 탄광 노동자로 끌려 갔었고, 스물 다섯에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이 되어 전투중에 다리에 부상을 입은 상이군인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블구하고 제 아버님은 그저 감사함으로 자신의 삶을 사랑했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감사했던 분이셨습니다.

아들인 제가 제 아버지를 기억하는 단 한가지를 꼽으라면 “정말 착하게 사셨다”는 말일겝니다.

그렇게 저희 일가를 이루셨습니다. 하여 또 감사입니다.

제 이야기를 마치기 전 그런 아버지를 제가 새길 수 있게 해준 여자들에 대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제 어머님이십니다. 일찍 돌아가신 제 할머니의 빈 자리를 73년 그 긴 오랜 시간을 채우셨던 사람, 바로 제 어머님이셨습니다.

둘째는 제 세 누이들과 제 아내입니다. 제 어머님 마지막 삼 년, 그리고 어머님 먼저 가시고 아버지 홀로 지내셨던 사 년 세월을 제 아버지가 ‘정말 착하게’ 지낼 수 있게 옴 몸과 맘을 다해 함께 했던 제 누이들에게 정말 깊은 감사를 보냅니다. 특별히 제 누님의 노고가 정말 컸습니다. 막내 동생의 헌신은 늘 제 기대 이상이어서 그 고마운 마음의 크기가 참 큽니다. 아마 남편인 최준용 장로의 기도가 셌던 모양입니다. 멀리 살아서 늘 안타까운 마음으로 함께 했던 둘째에게도 똑같은 고마움을 보냅니다. 아내와 매형의 헌신과 기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고마움 목록들 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아버지께서 가르치고 남겨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총에 대한 믿음으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여러분들과 함께 보내는 오늘, 바로 이 시간이 정말 감사합니다.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이만 감사의 말씀을 접으면서…. 마치 제 아버님께서 부르시는 노래 같은 시 하나 읊으렵니다.

귀천(歸天)

          – 천상병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가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생각지도 않게 아버지의 삶을 기리는 공훈증서를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New Castle County Executive(카운티 행정관이니 군수라고 할까요)명의로 보내와 감사 목록을 하나 더했습니다.

** 오늘 하관예배 즈음에 100% 비가 그것도 폭우가 내릴 것이라는 예보는 보기 좋게 빗나가 제 감사의 크기를 한층 높게 쌓을 수 있었습니다.

*** 얼굴을 마주 대했거나, 목소리로 또는 글로, 이렇게 저렇게 얽힌 소셜 미디어를 통해 위로와 조의를 전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한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아버지

하루 사이에 긴 팔 옷을 찾아 입었다. 계절은 늘 그렇게 바뀐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쯔쯔쯔…  비단 내가 모르는 것이 계절 뿐일까?

내 뜰에 있는 나무들에게 계절 옷 입힌다고 삽질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보낸 카톡 영상을 받았다.

에고, 울 아버지, 내 아버지!  내겐 목사 이전에 참 사람으로 느껴지는 배목사님이 보내 준 영상이었다.

아버지에게 나는 늘 모자란 아들이었다.

모자란 나는 늘 아버지가 못마땅 했었다.

그 모자람과 못마땅의 차이는 내 세대에서는 흔히 널려 있는 그저 그런 평범한  아버지와 아들 관계  일 터이다.

그런 아버지가 ‘하늘나라 가시면 누구 보시게요?’라는 목사님의 질문에 답하신다. ‘그거 말 못해….’

아이고, 이제사 아버지 뜻 조금은 헤아릴 나이가 되었나 보다. 내가.

열린 내일을 감히 말할 사람 누가 있으랴!

아버지의 가르침.

그 가르침을 깨쳐준 배목사님께 감사 드리는 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른 초 가을날에.

9. 24. 22

소박(素朴)함에

삶의 여정 마지막 길목, 그 초입에 이르신 아버지가 어제 더듬더듬 내게 건네신 말씀. “사람 산다는 게 참 별게 아닌 듯도 싶고….”

오늘 일요일 하루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내리라 맘 먹고 아주 오랜만에 늦잠을 즐겼다.

어제 아버지가 던지신 말씀이 지워지지 않아 이런저런 책장을 넘기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살이 본바탕 생각이란 그리 변한 것 없다.

<사람들이 진정 돌아가야 할 곳은 밖으로는 천진함을 드러내고 안으로는 순박함을 간직하는 것이며, 사심(私心)을 줄이고 욕심을 적게 하는 것이다. – 노자 도덕경 19장>

<발의 존재를 잊는 것은 신발이 꼭 맞기 때문이며, 허리의 존재를 잊는 것은 허리띠가 꼭 맞기 때문이며, 옳고 그름을 잊을 줄 아는 것은 마음이 자연 그대로에 맞기 때문이며, 마음이 내적으로는 변함이 없고 외적으로는 대상에 끌리지 않는 것은 자기 처지에 안주하여 항상 편안하기 때문이다. 이 자적에서 시작하여 항상 자적(自適)의 경지에서 머무는 것이야말로 ‘자적조차 잊은 자적’의 경지이다. – 장자 외편 제 19장>

그리고 예수가 가르쳐 준 기도, 곧 주기도문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가르며 강조한 가르침이자 간절한 기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

사람살이- 그 모든 거창하고 거룩하거나 세계적 국가적 민족적 거대한 담론들 다 제(除)하고 그저 일상적이고 분명하고 평범한 것, 바로 신과 그리고 함께 부딪히고 사는 사람들 앞에 서 있는 오늘, 지금 나를 위한 기도.

바로 소박(素朴)함을 위하여.

더하여 얻은 깨우침 하나. ‘퀘이커 지혜의 책(A Quaker Book of Wisdom)’에서 로버트 스미스(Robert Lawrence Smith)가 처음과 끝에서 크게 강조하며 깨우쳐 알려 주는 말. –  “당신의 삶으로 말하라!(Let your life speak!)”

자유, 자적 나아가 삶의 혁명에 이르기까지. 든든한 밑천일 듯. 참 별게 아닌 듯 싶은 내 사람살이를 위하여. 아버지가 그러하셨듯이.

오후에 아내와 함께 가까운 펜실베니아 Ridley Creek 공원 숲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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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소리

포플러와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빼곡했던 내 어린 시절 놀이터에 매미소리가 가득차면 나는 미루어 두었던 여름방학 숙제에 매달리곤 했다. 매미소리는 여름방학이 끝났음을 알리는 전령사였기 때문이다.

신촌 연세대 뒷산은 내 어린 시절의 놀이터였다. 매미와 잠자리들을 잡으며 놀다가 상감(어린 우리들은 학교 수위를 그렇게 부르곤 했었는데 거기에 마마를 붙여 상감마마라 부르기도 했었다. 일제시대에 쓰던 산감(山監)을 그리 불렀던 것이다.)에게 잡히면 호되게 곤욕을 치루기도 했었다.

1960년 대 초였으니 어느새 육십 여년 전 일이다.

신촌, 내 고향이자 내 아버지의 치열한 삶의 터전이었다. 신촌역 앞 아버지의 작고 좁은 도장포겸 인쇄소도 내 어린 시절 놀이터였다. 활자로 한자를 가르쳐 주던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일본 탄광 노동 경험과  상이 용사가 된 전쟁 이야기들을 들었던 공부방이기도 했다. 그렇게 1930년대 이후 아버지의 경험은 내 삶에도 이어졌다.

이즈음 아버지가 누워 계신 병실은 전망이 아주 좋다. 이즈음 내 생활반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보이는 것은 온통 나무 숲이지만 , 내 집과 일터와 이즈음 오고 드나드는 곳들을 환히 알 수 있는 방이다. 그 방에서 아버지와 나누는 이야기는 거의 없다. 이즈음 들어 이따금 묻곤 하신다. ‘나 몇 살이야?’ 그러면 나는 되묻는다. ‘아버지 언제 났는데?’ 나이는 오락가락 하시지만 생년에 대한 기억은 아직 또렷하시다. ‘일천 구백…. 이십…. 육년?’

늦은 저녁 딸아이의 전화를 받다. 결혼 날짜를 코 앞에 둔 딸아이는 이즈음 전화가 잦은 편이다.  내가 차마 가 닿지 못할 아이들이 누릴 내일을 생각하며 잠시 신(神)을 찾는다.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혼잣말, ‘참, 백 년이라… 별거 아니네’

뜰엔 아내가 좋아하는 바람개비가 쉬지 않고 돌고, 매미소리 가득한 날에.

 

 

 

용사(勇士)

달포 전 일이다. 새벽 세 시가 조금 넘은 시간 누이의 다급한 목소리에 잠을 깻었다. 어머니가 잠자리에서 일어 나시다 넘어져 머리를 다쳐 병원엘 가야하니 빨리 와 달라는 전화였다.

어머니와 누이는 병원으로 가고, 아버지와 나는 새벽 시간을 함께 했다. 머리가 찢어져 제법 많이 피를 흘리신 상황을 설명하시며 아버지는 울음을 그치지 않으셨다. 나는 차갑게 말했었다. ‘아버지, 지금 우실 연세는 아니짆아요. 행여 어머니가 돌아가신다 한들 아버지가 우시면 안되지!’

다행히 어머니는 머리를 몇 바늘 꿰맨 후 집으로 돌아오셨고, 아버지는 그 날 하루 내 전화를 받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이즈음 없던 일도 만들어 내시고, 조금 전 일과 옛 일을 뒤섞기도 하고, 뻔한 일도 난 모른다고 딱 잡아 떼시기도 한다. 이런 생소한 모습의 어머니와 하루 종일 함께 하시는 아버지에게 난 여전히 차갑게 다가가곤 한다.

지난 달 생신상을 받으신 아버지는 1926년생이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소학교 4학년으로 교육은 끝냈고, 일본 탄광 노동과 6.25 전쟁 참전 그리고 다리 한 쪽 저는 상이군인 – 내 기억에 없는 세월 이야기들이 내 기억 속 시절 이야기들 보다 더욱 손에 잡힐 만큼 많이 들었던 아버지의 이야기.

당신은 이따금 그렇지 않다고 손을 내젓곤 하시지만 평생 그저 여리고 착하게 살아오신 내 아버지가 영문으로 기록한 이야기가 담긴 책을 어제 6월 25일에 받았다.

누구의 도움없이 영문 원고를 쓰시고 Amazon을 통해 스스로 발간하신 <Korean Peninsula and my Experience>다.

아직 안경없이 인터넷 검색을 하시고, 하루에 당근 세 토막 천천히 씹어 즐기시는 튼튼한 치아와 오늘 또 다시 내가 새롭게 할 수 있는 뭘까? 고민하시는 내 아버지.

그렇다. 아버지는 여전히 자랑스런 대한민국 화랑무공훈장이 빛나는 용사다.

용사 앞에 차가운 적 하나 있어야 마땅한 일이고.

Amazon 책 보기

아버지 책표지

산책

Newark에서 세탁소를 처음 열던 날, 아버지가 내게 던지셨던 말이다. ‘이 곳 이름이 Newark이니 New Ark이구나. 이 곳이 네 삶의 새 방주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어느새 서른 해 훌쩍 넘긴 저쪽 세월 이야기가 되었다.

이즈음 나는 그 세월 동안 자주 지나치면서도 알지 못했던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찾아 산책을 즐기곤 한다.

평생 운동 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내가 새삼스레 운동으로 하는 산책은 아니다. 깜작할 사이에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서서 지난 시간들을 다시 만나기고 하거니와, 때론 나와의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다가 올 시간들과 언젠가 만나게 될 미지의 시간들에 대한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산책을 하며 만나는 시간들은 아름답고 고요한 풍광들로 하여 감사로 휘감길 때가 많다. 하여 산책은 오늘 내 삶을 기름지게 한다.

오늘 아침, Newark 저수지 길을 걸으며 떠오른 오래 전 아버지의 기원 – 그저 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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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날에

아버지날 아침에 부끄러움으로 쓰다. – 6. 17. 18


제겐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습니다. 두 해 전에 결혼한 아들은 가까운 필라에 살고, 딸 아이는 뉴욕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과는 일 년에 몇차례 얼굴을 봅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건만 어느새 그 때 일들이 가물가물 먼 옛 일이 되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아이들을 키우면서 제일 힘들었던 계절이 해마다 이 맘 때 였던 것 같습니다. 긴 여름방학이 시작되어 아이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게 되지만, 우리 부부는 그 시간을 세탁소에서 보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때론 아이들을 데리고 세탁소에 나와 함께 있곤 했었지만, 세탁소 특유의 여름 더위를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은 곤욕이었답니다.

제가 무지했던 탓도 있었고, 게을렀던 요인도 있었지만 제 형편에 맞게 아이들을 보낼 summer camp나 여름방학 프로그램을 찾아 아이들을 보내는 일도 참 쉽지 않았답니다.

특별히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다녔던 기억도 없거니와, 하다못해 영화관을 함께 찾았던 일도 거의 없었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이들에게 정말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엇나가지 않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잘 자라준 아이들이 참 고맙습니다.

Father’s Day 아침에 제 두 아이들이 생각나서 몇 자 적어 보았답니다. 부끄러움으로 말입니다.

한가지 덧붙일 말이 있답니다. 제 부끄러움을 감싸는 감사함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저와 아이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감사함으로 하루 하루를 즐기며 살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버지로써, 아들로써, 딸로써 말이지요.

오늘, Father’s Day는 물론이거니와 한 주간 내내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하루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그 겨울, 일요일들

− 로버트 헤이든

일요일에도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
그 검푸른 추위 속에 옷을 입고는
한 주 내내 모진 날씨에 일 하느라
갈라져 쑤시는 손으로 재속의 불을
다시 살려 놓았다.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았음에도.

잠에서 깨어난 나는 몸속까지 스몄던 추위가
타닥타닥 쪼개지며 녹는 소리를 듣곤 했다
방들이 따뜻해지고 나서야 아버지는 나를 부르셨다.
나는 그 집 구석구석에 배인
분노를 경계하며 느릿느릿 옷을 입고는

추위를 몰아내고
내 외출용 구두까지 윤기나게 닦아 놓은 아버지한테
건성으로 말을 건네곤 했다
내가 그때 무엇을, 무엇을 알았을까
사랑이라는 엄숙하고 외로운 사명을.

6-17

I have a son and a daughter. My son, who got married two years ago, lives in Philadelphia and my daughter works and lives in New York City. I see them several times a year. Even though it seems like yesterday that they were students, those days became the dim and distant past before I knew it.

Looking back on the past, it seemed to be around this time of year every year when I felt it was most difficult to raise children. While they spent most of their time at home during the long summer break, my wife and I had to work at the cleaners for most of the day. From time to time, I brought them to the cleaners, but it was very difficult not just for me, but also for them, to endure the summer heat, especially at the cleaners.

Maybe I was a little ignorant and lazy, but it was not easy to find summer camps or summer programs for them which I could afford.

I have no special recollection of taking a trip with them and I hardly went to the movies with them. Now that I think about it, I feel so sorry.

Nevertheless, they have grown up well and are healthy in body and mind. I feel very grateful for that.

In Father’s Day morning, I wrote this with a shameful feeling, as my two children came to my mind.

I’d like to add one more thing. It is gratitude which enfolds my sense of shame. Today, my children and I live and enjoy our days in gratitude at our own places in life, as a father, a son and a daughter.

I wish that you’ll have a day with overflowing gratitude and joy, not just today, Father’s Day, but this week and beyond.

From your cleaners.

Those Winter Sundays

–          ROBERT HAYDEN

Sundays too my father got up early
and put his clothes on in the blueblack cold,
then with cracked hands that ached
from labor in the weekday weather made
banked fires blaze. No one ever thanked him.

I’d wake and hear the cold splintering, breaking.
When the rooms were warm, he’d call,
and slowly I would rise and dress,
fearing the chronic angers of that house,

Speaking indifferently to him,
who had driven out the cold
and polished my good shoes as well.
What did I know, what did I know
of love’s austere and lonely offices?

조선신궁과 가미가제

태평양전쟁 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6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1부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일본인들의 토속신앙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조선사람들의 정신을 송두리째 없애고, 조선을 착취(搾取)하기 위하여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다.”라는 뜻으로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구호를 만들어, 그런 것을 조선사람들에게 강요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행위는 그런 것 뿐만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다음, 조선인들에게 일본어 교육을 점차 실시해 나갔고, 조선의 민족적인 모든 문화활동을 못하도록 막음으로써, 우리 민족의 고유성을 말살해버리려고 했다.

그러한 목적으로 일본은 <내선일체>라는 것을 내세워 조선사람도 일본  사람처럼 <신사참배(神社參拜)>라는 것을 하도록 강요한 적이 있었다.

이쯤에서 그러한 ‘신사’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일본엔 그들의 고유한 토속신앙(土俗信仰)인 신도(神道)라는 것이 있는데, 그러한 신앙(信仰)의 대상이 되는 신(神, 가미)의 위패(位牌)가 있는 곳을 <신사(神社)>라고 한다. 그러한 <신사>란 일본 황실의 조상, 또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을 신(神)으로 받드는 사당(祠堂)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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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 모습>

그 중엔 다른 신사보다 격(格)이 높은 신궁(神宮)이라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일제 강점기 때. 서울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朝鮮神宮)’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조선신궁의 주제신(主祭神)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 (明治)천황이다. 일본 신화의 여신인 天照大神은 일본 황실(皇室)의 조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明治天皇은 일본이 조선을 빼앗을 당시의 일본 왕이다.

한데, 조선총독부 시절 특히 일제 말기 때, 그들은 조선사람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강요에 굴복하였다.

하지만, 그런 것에 굴복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반대운동을 하여 일제로부터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목숨을 잃은 주기철(朱基徹, 1897-1944) 목사도 그 중에 한 사람이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던 주기철 목사에 관한 기록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大百科事典]에 실려 있으므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각설하고, 신사(神社)엔 도리이 (鳥居)라는 일본 특유의 <기둥문>이 있는데, 그것은 불경(不敬)한 곳과 신성(神聖)한 곳을 구분 짓는 경계라고 한다.    달리 말하자면, 일반적인 세상과 성스러운 곳인 신사가 있는 곳은 그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그곳을 드나드는 경계에 도리이라는 문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한 도리이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고 몇가지 설(說)이 있을 뿐이다.

어떤 이론은 <닭이 머무르는 자리>를 뜻하는 한자인 <鷄居>에서 유래 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神道>에서는 닭이 <神의 전령(傳令)>이라고 여기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 것이야 어찌 되었건, 도리이의 기본적인 구조는 두 개의 기둥이 서 있고, 기둥 꼭대기를 횡목(橫木)으로 서로 연결해 놓는 형태이다.

도리이의 기본적인 구조와 거의 비슷한 모양으로 된 구조물(構造物)이 한국에도 있다. 홍문(紅門)이라고도 하는‘홍살문’이 바로 그런 것인데, 홍살문은 능(陵), 묘(廟), 궁전(宮殿) 등에 세우던 일종(一種)의 문이다.

홍살문의 구조는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고, 그 중간에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홍살문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洪陵)에도 있는데, 홍릉은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高宗, 재위 1863 – 1907)과 비(妃)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 – 1895)를 합장한 무덤이다.

역사에 관한 이야기는 연대순(年代順)으로 또는 시간 수서대로 하나씩  수직(垂直)으로 늘어놓는 것이 보통이다.

한데, 태평양전쟁 이야기를 적다 말고, 느닷없이 일본 온천 이야기와 그들의 토속신앙에 관한 것을 적으면서 도리이 (鳥居) 이야기를 적었다.

그리고,“도리이 와 비슷한 모양으로 된 구조물이 한국에도 있다.” 라는 설명을 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가 묻혀 있는 무덤에 관한 이야기까지 나왔다.

명성황후가 목숨을 잃게 된 이야기를 하자면, 미우라 고로 (三浦梧樓)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후 생긴 신정부(新政府)의 군인이 된 미우라 고로는 주한일본공사(駐韓日本公使)로 조선에 부임하여, 조선의 친로 (親露)정권을 무너뜨리고 친일정권을 세우고자,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그는 일본 자객(刺客)들을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시해(弑害) 하고, 그 시신을 불태운 국제적 범죄를 저지른 자다.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등 조선에 있는 러시아 세력을 없애고, 일본의 세력을 그 땅에 넓히기 위하여 미우라 고로 등 일본 자객들이 경복궁을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고도 한다.

그런 이야기가 담긴 텔레비전 연속극도 있고, 명성황후에 관한 이야기 는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므로 줄이고, 태평양전쟁 이야기를 계속한다.

가노야 비행장

나는“오사카(大阪)에서 지낼 때 일본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유치장 생활을 하다가 후쿠오카 탄광으로 되돌아가게 되었고, 그 탕광에서 또 탈출하여 다루미즈(垂水)라는 곳에서 전쟁이 끝나는 것을 보게 되었다.”라는 이야기까지 적었다.

나는 전쟁이 끝난 다음 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더 지내게 되었다.

시모노세키 (下關)나 하카타 (博多)항 부두엔 한국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배를 타기가 쉽지 않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귀국을 서둘지 않고, 다루미즈 근처에 있는 가노야 (鹿屋)라는 곳으로 갔다.

그곳엔 가노야 비행장이 있다.   마침 그 비행장에 들어와 있는 미군부대에서 현지인을 고용인으로 채용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가노야 시청 앞에서 그런 광고문이 있는 것을 본 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귀국할 때까지 임시로 그 비행장에 취직했다. 내가 맡은 일은 자동차 타이어를 수리하는 미군들의 일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조수(助手)다.

그 비행장은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자살특공대인 가미가제(神風)의 기지(基地)였다. 특히, 그 전쟁이 끝나게 될 무렵엔 전체 가미가제 수의 약 반(半)이 그 비행장에서 출격(出擊)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나는 70년 전에 있었던 것들을 더듬어 생각해보면서 이 글을 엮고 있는데, 내 기억을 더 생생(生生)하게 하려고 인터넷 검색도 해본다. 하지만‘오늘날의 일본은 내가 그곳에서 지내던 때의 일본이 아니다.’ 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말하자면,‘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 세상이다.’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지명(地名)도 그런 것 중 하나다.

내가 한국을 떠나던 해인 1984년엔 없었던 지명이 지금은 한국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일본도 그렇다.’라는 것이다.

몇 해 전에 일본 큐슈(九州)지방에 미나미큐슈시(南九州市)라는 도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지람특공평화회관(知覽特攻平和會館)이 라는 것이 그곳에 있다. 지람(知覽, 일본발음 지란)은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 육군 특공기지가 있었던 곳이다.

그 회관은 태평양전쟁 당시 폭탄을 실은 비행기 전체가 육탄(肉彈)이 되어 적함(미국 군함)에 몸으로 타격(打擊)한 특별공격대원의 유영(遺影), 유품(遺品), 기록 등 자료를 수집, 보전,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태평양전쟁 때 가미가제 특공대의 기지였던 가노야와 지란에 관한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그 전쟁이 절정에 달하자 일본은 자살특공대인 가미가제 특공대까지 내세워 그 전쟁을 버텨보려고 했다.

그러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知覽特攻平和會館 앞뜰엔, 다음과 같은   비문(碑文)이 있다.

‘아리랑 노래 소리로 / 멀리 어머니의 나라를 그리워하며 …..’ (원문은 일본어다.)

가미가제 특공대 …… 그들 중엔 조선 젊은이들도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비문이다.

***지람특공평화회관(知覽特攻平和會館)에는 조선인 대원도 11명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1945년 3월 29일 당시 17세였던 박동훈은 유서에 큼직하게 ‘결사(決死)’라는 단어와 함께 “몸을 던져 적함과 함께 옥쇄해 영원히 황국을 지키겠다”고 썼다. 하지만 그는 ‘육군이 가족을 책임져 준다고 해 어쩔 수 없었다. 동생은 절대 군대에 보내지 말라’며 아버지를 안고 울었다고 가족은 증언했다. 그는 오카와 마사아키(大河正明)라는 일본 이름으로 올라 있다.

24세 탁경현은 출정 전날 밤 식당 아주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조국의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다. 그는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아리랑’을 불렀다.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그는 교토 약학대 재학 중 학도병으로 차출돼 왔다.

가고시마(鹿兒島)로

태평양전쟁 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5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1부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가고시마(鹿兒島)로

경찰서에서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탄광으로 돌아간 나는 또 갱 안에 들어가 전과 같이 막장에서 석탄 가루를 마시며 석탄덩이를 운반차에 싣는 일를 했다. 그런 생활을 얼마동안 또 하게 되었는데, 더 견딜 수가 없었다.

탈출할 궁리를 하면서 얼마쯤 지내다가 또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오사카에서 일본 경찰에게 불심검문(不審檢問)을 받았던 경험도 있고 하여, 신변안전에 경계를 하면서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다. 그러던 중, 내가 찾아간 곳은 구마모도(熊本)지방에서 토목공사업을 하고 있는 하시모도(橋本)라는 조선사람의 집이었다.

당시 그는 조선인 노무자를 데리고 군용비행장 확장공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다른 노무자들과 함께 그 집에서 숙식을 하며 지내게 되었다.

앞에 오사카 이야기에도 적었듯이, 당시 일본에서도 식량과 옷 등 일상생활용품의 거래가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군수품(軍需品)을 다루거나 군사용(軍事用) 시설을 만드는 곳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편이었다.

내가 머물고 있던 집 주인은 가끔 노무자들에게 막걸리잔치도 베풀었는 데, 그럴 때 누군가 아리랑이나 타향살이 등 향수에 젖은 노래를 선창 하면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도 함께 불렀다.

그곳엔 나처럼 막연한 기대를 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도 있었고, 고향에 부모처자를 두고 징용으로 갔다가 그곳으로 옮긴 사람 등, 일본으로 가게 된 여러 가지 사연을 가지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거기서 얼마쯤 지내다 가고시마(鹿兒島)로 갔다.

내가 보통학교(초등학교)에 다닐 때, 교장 겸 담임선생이었던 일본사람인 사토나카 죠기찌(里中長吉) 선생의 고향이 가고시마(鹿兒島)라고 했다. 사토나카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나는 가끔 가고시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왕에 일본까지 온 것이니, 구경이나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그곳까지 가게 되었다.

가고시마(鹿兒島)에는 화산(火山)이 있다. 내가 간 곳은 사꾸라지마 화산(櫻島火山) 남쪽 해안에 있는 다루미즈 (垂水)라는 곳이다. 사꾸라지마 화산은 오늘날에도 화산활동(火山活動)이 진행 중이다. 그 화산은 하루에도 몇번씩 분화(噴火)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활화산 (活火山)이다.   그리고, 가고시마의 상징(象徵)으로 되어 있다.

<2015년 5월 26일에 있었던 사쿠라지마(櫻島) 화산 폭발 영상>

따라서 많은 관광객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한데, 내가 다루미즈에서 지내던 때엔 사정이 달랐다. 나는 그러한 화산 근처에서 한동안 지낸 적이 있었다.

내가 구마모도(熊本)지방에서 지내다가 그곳을 떠나 가고시마(鹿兒島) 현에 있는 다루미즈(垂水)에 갔을 때, 그곳엔 하다데구미(旗手組)라는 토목건설회사에서 일본군의 군용시설인 땅굴을 만드는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전쟁이 끝날 때까지 거기서 버틸 수 있었다.  그 공사장에서 일하는 일본인 부녀자(婦女子)들도 꽤 있었다.

하여간, 그 전쟁 때문이 수많은 사람들이 시달림을 받았고, 결국은  일본의 패전(敗戰)으로 그 전쟁이 끝나게 되었는데, 그 부분에 관한 것은 앞에 이미 적었기 때문에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온천의 나라 일본  

이번에는 일본 온천에 관한 이야기 몇 가지를 적어보려고 한다.  일본으로 가기전부터 그곳에 온천이 많다라는 것을 알고 있긴 해지만, 그곳에 가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지내보니 과연 <일본은 온천의 나라다.>”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데 온천이 많은 것뿐만 아니고, 일본 사람들은 혼욕(混浴)이라는 기괴망측(奇怪罔測)한 풍속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론 일본인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하여간 일본 땅에 그러한 괴상한 풍속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오사카에서 지낼 때는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규슈(九州)지방 에는 그런 풍속이 있었다.

우선, 일본엔 왜 온천이 많은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지구과학사전에‘환태평양 지진대(環太平洋地震帶, Circum-Pacific Seismic Zone)’이라는 지리학 용어(地理學用語)가 있다.  쉽게 말하자면 그것은 태평양을 들러싼, 세계에서 지진 활동이 가장 활발한 지진대로서 화산대(火山帶)와 지진대가 겹쳐 있고, 습곡산맥 (褶曲山脈, 참조 보기 1.)이 발달하고 호상열도(弧狀列島, 참조 보기2.) 가 분포되어 있는 지대다.

보기 1 : 지각(地殼)에 작용하는 횡압력(橫壓力)으로 인하여 지층이 물결모양으로 주름지어 이루어진 산맥.

보기 2 : 활등처럼 굽은 모양으로 죽 늘어서 있는 섬들.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화산 지대에 속해 있는 일본열도(日本列島)는 화산이 많고, 따라서 온천도 많다.

일본열도는 北海道, 本州, 四國, 九州 등의 큰 섬과 3,500여개의 작은 섬으로 되어 있는데, 규슈(九州) 남부지방인 가고시마(鹿兒島)에도 화산과 온천이 있다. 그곳엔 활화산(活火山)인 사쿠라지마(櫻島)화산과 기리시마(霧島) 화산이 있다.

일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온천에 관한 이야기를 적기 위해 화산 이야기를 늘어 놓았는데, 일본 온천 이야기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미 앞에 적은대로 그곳엔‘혼욕(混浴)’이라는 별스러운 풍속(風俗)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混浴’이라는 글자가 말해주듯이 섞여서 목욕한다는 뜻이 아니던가? 남녀가 같은 욕탕에서 목욕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그것도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옷을 훌렁 벗은채 나체로  함께 같은 탕에 들어가다니?

하지만, 그 땅에 그런 별난 풍습(風習)이 있게 된 데에는 그곳의 풍토 (風土)와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민속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들의 풍속이 그러한 것을 어찌하랴?

한데,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는 곳에서 자란 사람이 <남녀가 같은 욕탕(浴湯)에 몸을 담그는> 그러한 풍속이 있는 나라에 가서 <혼욕>이라는 것을 처음 대했을 때, 그것은 기절초풍  할 정도로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에서 자란 사람인 내가 어찌하다가 그런 망측스러운 행동을 스스럼 없이 하는 사람들 속에 섞인 적이 있었다.

요즘에도 그런 풍속이 그 땅에 남아있는지?

하여간, 일본은 온천이 많은 나라다.

일본 탄광으로

태평양전쟁 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4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1부 :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현해탄을 건너서 광부가 되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어느 봄날, 부산항 부두.

한 무리의 조선 청년들이 부둣가 한쪽에 몰려 있다.   그들은 일본 시모노세키로 가는 연락선에 오르려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나도 그 일행에 섞여 인솔자들(일본인)과 함께 배에 올랐다.  부산을 떠난 배는 다음 날 아침에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일본 땅에 배가 닿자 그 동안 싹싹하고 부드럽던 인솔자들의 말투가 갑자기 거칠어지고, 그들의 태도가 위압적으로 돌변했다.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그대로 탄광까지 따라 갔다.   일행이 닿은 곳은 후쿠오까(福岡) 지방에 있는 한 탄광촌이었다. 그곳까지 간 조선사람들은 숙소 겸 식당인 <함바(飯場)>라는 허름한 목조건물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광산측의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

나는 작업에 필요한 교육을 받은 다음 탄광 광부가 되어 막장에서 석탄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광부생활이 나로서는 아주 힘겨운 일이었다.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갱(坑) 안에 있는 동안 석탄가루가 섞인 탁한 공기 속에서 지내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그곳을 떠나기로 하고, 감시원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방법과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인가를 궁리하면서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

그렇게 지내던 중, 어느날 밤에 어둠이 짙은 야음을 틈타 그곳을 빠져 나올 수 있게 되었다.

japan

오사카

탄광에서 빠져나온 나는 오사카(大阪)로 갔다.
그 당시 일본은 군대의 인원보충뿐만 아니라, 전쟁하는데 드는 군수 물자 생산과 군사기지건설에 필요한 노동력 공급을 위해 조선사람들을 많이 데려갔다.

한데, 같은 일본 땅 안에서도 내가 지내던 그 탄광처럼 특정한 지역 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노무자들을 감시하는 곳도 있었고, 그런 제한을 받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곳도 있었다.

오사카가 그런 곳이었다.  당시 오사카에는 조선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나는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오사카까지 갔다.

하지만, 그곳까지 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큐슈(九州)와 혼슈(本州)를 연결하는 해저(海底)터널을 통과해야 되고, 당시 일본 해군의 거점인 구레(吳) 요새지(要塞地)를 지나가야 되기 때문이었다.  기차가 구레(吳)를 지나갈 때는 승객(乘客)들이 밖을 내다볼 수 없도록  모든 차창(車窓)을 가리고 지나갔다.

하여간 나는 오사카에 도달했다. 앞에 설명했듯이 오사카는 조선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숙소와 일자리를 쉽게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오사카에서 지내는 동안, 시우쇠를 불려 강철을 만드는 제강소에서 일했다. 용광로에서 나온 쇠 찌꺼기가 식은 다음, 그것을 떼어 밖으로 운반해 내는 그런 일이었다. 힘드는 일이긴 했지만 탄광보다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그렇게 지내고 있던 중 어느날 나는 혼자서 길을 걷고 있었는데, 한 경찰이 나를 불러 세웠다. 일본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린 것이다. 피할 길이 없었다.  경찰서로 끌려간 나는 그들의 심문을 받았다.

이유는 내가 조선사람이기 때문에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거기서 경찰서 유치장 생활을 했는데, 본적지 확인과 일본으로 가게 된 경위 등에 관한 조사를 받으면서 한 주일가량을 그렇게 갇혀 지냈다.

내가 갇혀 있던 방엔 일본인도 몇 사람 있었는데, 그들은 대개 식량을 암거래하다 붙잡힌 사람들이었다. 당시 일본은 전쟁 때문에 노동력만 부족했던 것이 아니고, 식량과 옷 등 일상생활용품의 거래가 자유롭지 못했다.

내가 조선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본 경찰에게 붙잡히게 되었고, 경찰서 유치장 생활도 해보게 되었다. 그렇게 지내던 중, 나는 조사실로 불려갔다. 탄광에서 사람이 와있었다.

탄광에 있을 때, 내가 지내던 함바(飯場)집 주인이 나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나는 그 사람에게 넘겨졌고, 그와 함께 후쿠오카 탄광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