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여러 해 전에 필라에 사시는 지인께서선명회 합창단 공연입장권을 보내 주셔서 가까이 지내는 몇 가정 부부들과 함께 그 저녁 어린 천사들의 화음을 만끽하였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 밤 동행들에게오랫만에 누린 문화 생활이라고 말하였었고.

천사들이 마지막으로 청중들에게 선사한 노래는 우리 민요 ‘아리랑’이었는데 그 곳에 모인 모든 동포들이 목청 높여 함께 하였던 것이다. 그 밤 그 곳에 모인 모든 동포들이 한 목소리로 불렀던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대표적 구전민요이다. 이 아리랑과 뗄 수 없는 말은 ‘한()’이다. 아리랑은 대개의 다른 민요와 더불어 두레노레 곧 ‘노동요(勞動謠:일하면서 부르는 노래)’이었다. 

 

아리랑

어느 누구든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잊혀지지 않는 한의 응어리는 갖고 살게 마련이다. 일테면 가난에서 오는 한, 까닭없이 빼앗긴 것에서 오는 한, 부모를 일찍 여윈 한, 자식을 앞세워 보낸 한, 성차별애서 오는 한, 고부간의 갈등에서 오는 한, 남녀간의 사랑에서 말미암은 응어리진 감정 등등 이런 것들이 집단화 되어 공동의 노래가 된 것 중 하나가 바로아리랑이다.

 

비록 개인적인 넋두리에서 시작되었을지라도 집단화 되어 표현될 때 그것은 이미 직업 또는 사회공동체의 공통적 애환을 담아내는 노래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아리랑’은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민족적 동질성을 지탱하는 가락이기도 하였다.

 

아리랑이 언제 어느 때부터 불리워졌는지, 아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연구하는 학자마다 다 다른 소리를 하므로 바로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사랑하는 님을 떠난다’는 뜻을 갖고 있는 말에서 시작되었다는 아리랑(我離娘)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민중들이 괴로운 말만 듣게되어 “차라리 귀가 먹었으면 좋겠다.”한 말에서 나왔다는 아이농(我耳聾)설, 밀양 영남루의 아랑낭자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한 노래에서 나왔다는 아랑전설(阿娘傳說), 신라 박혁거세의 아내 알영부인을 찬미한 말에서 나왔다는 알영설(閼英說), 이밖에도 낙랑설, 아라리설, 아린설, 얄리얄리설등 연구하는 이마다 주장이 다르다.

 

그러나 이즈음은 노래의 조율성과 흥을 돋우기 위한 ‘무의미한 후렴소리’로 뜻이 모아지고 있으며, 노래의 기원은 입으로 입으로 전해지다가 구한말 이후 전국적으로 파급되었고 특히 1926년 나운규가 만든 영화 ‘아리랑’ 이후 급속도로 번져 민중의 민요가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나는 이십여 년 전에 발표한 정호완의 “아리다, 쓰리다”설에 귀를 귀울인다. 밀양아리랑에서 나오는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은 고유한 우리 말 ‘아리다’와 ‘쓰리다’에서 나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의 해석을 터로 한다면 “아리랑 고개를 넘는 일’이야말로 ‘아리고 쓰린’ 오늘을 이겨내는 일이며, ‘아리고 쓰린’ 한()을 훌훌 털어 냄 아닌가?

 

저마다의 아픔과 시림의 고개, 이민(移民)의 시림과 아픔의 고개 나아가 민족의 아픔과 시림 곧 조국의 분단 – 그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아니 아주 넘어선 후 부르는 <새 아리랑>을 기다린다.

 

새 아리랑은 감상적이고 슬픈 계면조(界面調)가 아니라 평안하고 화평한 평조(平調)에 담아 낼 일이며, 한에 응어리진 소리가 아니라 해원상생(解怨相生:원과 한을 풀고 모두 더불어 함께 사는)의 소리여야 할 일이며, 알량한 주의(主義)나 종파(宗派)가 아니라 ‘시리고 아린’고개를 넘어선 민족의 큰 정신 담아내는 노래라야 할 것이다.

 

그 새 아리랑 소리 높여 부를 날을 꿈꾸며.

 

이즈음 아내는 아리랑을 이용한 생활무용을 통해 한국어와 문화를 알리는 꿈에 젖어 있다.

 

꿈을 꾸는 한 삶은 아름다운 법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