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이후 달라진 풍경 가운데 하나는 온라인 모임인 zoom meeting의 일대 유행이다.

나는 온라인 모임 프로그램을 십 수년 전부터 사용해 왔다. 이즈음 유행인 zoom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한 프로그램을 이용했었는데 사용료는 월 120불 정도의 고액이었다.  미주 전역의 세탁인들과 정보를 나누고 대화를 잇는 목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사용했었다. 내가 세탁업으로 거부가 된 사람도 아니거니와 지식도 일천하지만, 그저 세탁업이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조금씩이라도 어제보다는 나은 세탁소를 운영해 가는 방법들을 함께 나누던 지난 세월 이야기다.

나이는 점점 들어가고 일이 힘에 부치기 시작한다는 생각에 하나 둘 일을 정리하면서 그 일도 접었다.

그래도 온라인 미팅은 이어와 이즈음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젠 나도 zoom을 사용하고 있고, 매주 한 번 모이는 모임에는 세탁인들이 아니라 필라 인근에 살며 세월호 가족들과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이 모인다. 나는 이들에게서 참 많은 것들을 배우며 산다.

팬데믹 이후 아내가 나보다 zoom meeting을 더 많이 사용한다. 한국학교 수업 및 교사회의, 이사회, 한인회 등등 이즈음 아내는 가히 유행 따라 산다.

아내가 참석하는 온라인 모임 가운데 옛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이 있다. 일주일에 한 차례 모이는 이 모임이 시작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어린 시절에 교회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족히 사십 년 넘는 세월이 흐른 후 화상으로 얼굴 맞대고 만나는 모임이다.

카톡 등으로 간간히 서로 간의 소식을 주고 받던 친구들 가운데 한 친구가  중한 병을 얻었단다. 그 친구를 위해 서로 기도해 주자고 시작한 온라인 모임이란다. 그렇게 한 주간 한 차례 씩 모여  함께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며 사십 여년 만나지 못하고 살아 온 지난 세월들의 이야기도 나누곤 한단다.

그 친구들 몇몇은 나도 익히 기억하고 있다. 아내와 나는 한 교회를 다녔고 내게는 사 년 후배가 되는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그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 또래 친구들을 생각했다.

한 해 후배인 종석이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난 말이유,  어릴 때 주일학교라도 다녔기에 요만큼이라도 살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우.’ 그를 본 지도 어느새 십년이 흘렀다. 그가 은퇴를 코 앞에 두고 있던 때였다.

최근 몇 년 사이 노부모들이 연이어 병상 생활을 하시다 한 분 두 분 떠나시며, 먼 여행길은 한 해 두 해 미루어져 왔다. 이즈음엔 한 분 홀로 남으신 아버지 얼굴 한 번 들여다 보는 일이 일과이다. 더더우기 지루하게 이어지는 팬데믹 까지 한국 여행은 이젠 계획에서 멀어졌다.

나는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옛 벗들을 생각한다.

어찌 보냈건 흘러간 세월들에 감사를, 어떤 연으로 잇던 오늘의 소식들에서 서로 간에 위로를, 지나간 세월에 비해 턱없이 짧을 내일에 대한 소망과 희망을 나누는 만남들이 되기를 빌며.

믿음이란 딱히 극적일 까닭도 없고 절벽 끝에 서야만 만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므로.

우리 부부가 다니던 교회 이름은 대현大峴교회. 큰고개(大峴)에서 함께 뛰놀던 옛 벗들을 생각하며.

(십년 전, 딸아이와 함께 찾았던  옛 시간은 지금도 소중하다.)

봉준호라는 이름으로 하여 고향생각에 젖어 보낸 한주간 생각을 내 가게 손님들과 함께 나누다. 내가 태어난 곳은 부모님의 피난지였던 부산이지만 그 곳에 대한 기억은 없다. 유년의 첫 기억부터 청년의 끝물까지 아련한 세월을 묻어 둔 곳은 신촌이다.

문득 따져보니 신촌 (새마을 , New Village)에서 보낸 세월보다 이 곳 델라웨어 Newark(새 방주, New Ark)에서 세탁소를 하며 지낸 시간들이 더 길어졌다. 그 생각 끝에 편지를 띄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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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가게 손님 몇 분들이 한국영화 ‘기생충’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셨답니다. 그 영화가 올해 4개의 오스카상을 탔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인들에게는 그 수상 소식이 매우 큰 뉴스였답니다.

영화나 아카데미 영화제에 대한 관심이나 지식이 깊지 않은 제가 영화나 영화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랍니다.

그 영화 감독인 봉준호라는 이름 때문에 떠올린 제 고향 이야기를 드리려 한답니다.

제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보낸 곳은 대한민국 서울시 신촌이라는 동네입니다. 지금은 시내 한복판이 되었지만,  제가 살 때만 하여도 서울 중심부에서 서쪽 외곽에 떨어져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신촌이라는 동네 이름의 뜻이 새마을이랍니다. 새로 생겨 도시와 시골 분위기가 함께 어우러진 동네였답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야기들을 풀어 놓으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여서 제 블로그에  ‘신촌연가’(신촌을 그리워 하며 부르는 노래)라는 제목으로 연재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답니다. 벌써 십 수년이 지난 오래 전 일이랍니다.

연재의 마지막 글에 ‘봉준호’라는 이름으로 댓글이 달렸었답니다. “글을 인상깊게 잘 읽었다. 신촌에 대한 이야기들을 더 듣고 싶다. 당신이 살았던 때의 거리의 풍경, 많이 보던 나무들 등등….”이라는 글과 함께 그의 이메일 주소가 남겨 있었답니다.

저는 그 댓글을 남긴 봉준호라는 이가 영화 기생충의 감독 봉준호와 동일인인지는 알 수 없답니다. 제가 응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랍니다.  그 이름이 유명한 영화감독 이름인지도 몰랐거니와 알았다한들 역시 응답은 하지 않았을겝니다.

그렇게 지난 주 봉준호라는 이름을 들으며 다시 떠올리게 된 제 고향이랍니다. 이따금 아주 이따금 내 고향 신촌과 함께 떠오르는 얼굴들이 그리울 때가 있답니다. 언젠가 한 번은 가 봐야겠다는 생각 위로 한 해 한 해 세월의 숫자만 쌓여가고 있답니다.

따지고 보니 제가 신촌에서 산 세월보다 Newark에서 세탁소를 하며 보낸 시간들이 더 길답니다. 세탁소는 현재 진행형이고, 언젠간 은퇴할 것이고 이곳에서 노년을 보낼 계획이니 또 다른 고향이 Newark인 셈입니다.

신촌(새마을 , New Village)에서 Newark(새 방주, New Ark)까지의 내 삶을 추억하게 한 지난 주 다시 만난 봉준호라는 이름에 감사하며.

지난 일요일 아침 Newark 저수지 방죽길에서 찍은 내 제2의 고향 Newark 사진 몇 장 함께 나눕니다.

그리워하는 모든 것들로 하여 새 힘이 솟는 시간들이 되시길 빌며…

당신의 세탁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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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week, some customers talked to me about the Korean movie, “Parasite.” That was because it won four Oscars this year. Of course, it was very big news to Korean people.

I don’t have much knowledge about movies and Academy Awards, and I’m not trying to talk about them.

The name of the director, Bong Joon-ho, reminded me of my hometown, and I’m going to talk about it.

The place where I spent my childhood and youth was Shinchon in Seoul, South Korea. Now it has become a part of the heart of the Seoul Metropolitan area, but when I lived there, it was like a village distant from the downtown of Seoul. The meaning of “Shinchon” is “new village.” As it was a newly developed village, it had the urban atmosphere alongside the countryside feeling.

If anyone starts to reel off a story about the hometown where he/she grew up, it would be endless. Like anybody else, I have lots of stories and memories about my hometown. I had posted a series of them at my blog site with the title, “Shinchon Yeon-ga (a song for missing Shinchon).” It was more than a decade ago.

At the last post of the series, a comment was written under the name of “Bong Joon-ho.” It said, “I read the series of your posts and was impressed. I’d like to hear more about Shinchon, such as scenes of trees, streets and so on when you lived there…” He also left his e-mail address.

I’m not sure whether the comment writer, “Bong Joon-ho,” and the director of the movie “Parasite” is the same person. That’s because I didn’t respond to the comment. At that time, I didn’t know that it was a famous director’s name. Even if I had known it, I would not have responded.

Like that, when I heard the name, “Bong Joon-ho,” last week, I recalled my hometown. Occasionally, really occasionally, I have missed faces sweeping across my memory along with my hometown. On the thought that I’d visit there sometime, the number of years has been heaping one by one.

After calculation, I realized that the years which I have spent in Newark running a cleaners are longer than ones which I spent in my hometown, “Shinchon.” Furthermore, I’m running a cleaners now, and I’ll retire sometime in the near future and spend the rest of my life here. So, Newark is definitely my second hometown.

Thanking the name, “Bong Joon-ho,” for prompting me to go on a trip down my memory lane from “Shinchon (New Village)” to “Newark (New Ark).”

I’m sharing with you some pictures of my second hometown, Newark, which I took at the causeway of the Newark Reservoir last Sunday morning.

I wish that you will be reinvigorated with thoughts of everything and everyone that you are missing.

From your cleaners.

과정(過程)

국민학교 몇 학년 때 였던가? 아마도 여름방학을 앞 둔 이 맘 때 쯤이었을게다. 신촌 신영극장 뒷길을 걷다 바라 본 하늘엔 하얀 뭉게구름들이 포근한 솜처럼 피어 있었다. 입 헤벌리고 그 하늘을 쳐다보며 걷는데 벌이 내 눈가를 쏘았었다. 그야말로 눈탱이가 밤탱이 되었던 그 여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어제 오후 가게 밖 하늘 풍경은 딱 그 때였다. 1960년대 어느 여름 신촌 그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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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문 닫고 돌아오는 길, Curtis Mill Park 숲길을 걷다. 새소리 물소리, 길가 강아지풀에 담긴 옛 생각들을 잡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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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아 주어야 할 것이 어찌 잡은 물고기 뿐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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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하루 치매끼가 더해 가시는 노인들과 이제 막 신혼을 꾸미고 인사차 들린 처조카 내외를 보며  든 생각 하나.

무릇 삶은 놓아 주어야 할 과정의 연속.

첫 눈 그리고 고향

카리브해에 있는 아루바(Aruba)가 자기 고향이라고 하는 가게 손님이 있다. 아일랜드계 이민으로 뉴욕에서 낳고 학교를 다닌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초등학교 초기까지의 유년 시절을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그곳에서 보냈기 때문이란다. 그녀는 여행을 참 좋아한다. 여행을 다녀 올 때면 늘 작은 선물을 잊지 않아 우린 늘 미안하다. 그런 그녀가 가지 않는 곳, 바로 그녀의 고향 아루바다. 이따금 뉴스들 속에서 만나는 아루바를 보면 자신의 기억속에 있는 고향과 너무나 다르단다. 아름다운 추억들이 새겨진 고향 아루바를 찾는 순간 평생 간직해 온 고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모두 잃어 버릴 것 같아 결코 그 곳을 찾는 일은 없을게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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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런 그녀를 백번 이해한다. 나는 이미 수 년 전 내 고향 신촌을 찾았을 때  그녀의 염려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이즈음 매 주 한차례 한국 근현대사를 배우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훑기 시작한 이야기가 어제로 1960년 4월 혁명 전후 시절까지 이어져 왔다. 1960년 어간 한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들을 설명하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잠시 내 고향 생각에 빠졌었다.

그리고 첫 눈 치고는 제법 눈이 많이 내린 오늘, 손님 발길이 뚝 끊긴 가게에서 내 고향 신촌 생각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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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나는 왼쪽 가슴에 크고 하얀 무명 손수건을 달고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내 아버지가 아직도 소학교라고 하시듯 나 역시 국민학교가 맞다. 소학교나 국민학교나 일본식이라고 하여도 우린 그때 그렇게 불렀으므로. 물론 내 이야기가 아닌 한 초등학교라고 부르려 애는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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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몇 안되는 내 유년의 기억 가운데 가장 또렷한 것이 1960년 4월 19일일 것이다. 전쟁 후 태어난 아이들은 많고 학교수는 적고,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었어도 한반에 70명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한 울타리 안에 국민학교와 뒤늦게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위한 공민학교가 함께 였다. 아무튼 당시엔 4월에 새학기가 시작되어 막 입학한 나는 운동장에서 ‘앞으로 나란히’, ‘옆으로 나란히’같은 유희 반 질서 교육 반의 교육을 마치고, 교실을 배정받아 책 걸상에 처음 앉아 보는 날이었다. 그날이 4월 19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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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반이었던 나는 ‘이놈아, 늦겠다! 어여 빨리 가라!’는 어머니의 채근을 뒤로 하고 학교로 향했다. 신촌 노타리 앞 큰 행길을 건너야 학교를 갈 수 있었는데, 내가 그 행길 앞에 섰을 즈음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거대한 시위 행렬이었다. 연대생들이 문안(우린 그 때 사대문四大門안이라는 뜻으로 서울시내를 그렇게 불렀었다.)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이었다. 나는 그 행렬을 구경하노라고 뒤늦게 텅빈 학교를 찾았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그날 밤이든가 이튿날 저녁이든가 고등학교 다니던 동네 형 하나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로 골목이 흉흉하였던 기억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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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항쟁, 3선 반대 시위, 교련반대 시위, 그리고 유신 후 여러 시위들과 1980년 봄 그날의 시위까지 나는 그 거리에서 돌멩이와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유, 소년과 청년 시절 30여년을 보냈다. 때론 구경꾼으로 때론 그 시위대의 한 가운데서.

올들어 몇 권의 역사책들을 읽었다. 몇 권의 프랑스 혁명사와 미국사 및 미국 민중사 그리고 한국 근현대사와 일본 현대사들이 그것들인데  2018년 올 한 해가 내게 참 소중히 기억될 연유이다. 더하여 가르쳐 주는 선생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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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읽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 이제껏 내가 살아오며 생각해 온 세상보는 눈(觀點) 이랄까, 믿음(信仰)이랄까, 그게 거창하다면 그저 내가 지금 사는 모습이 크게 엇나가지 않았다는 안도를 느꼈다.

그것은 또한 사람 살아온 세상, 지금 사는 세상, 앞으로 사람들이 살아갈 세상이란 결국 어제보다는 나은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내 믿음에 대한 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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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내 믿음의 바탕은 바로 내 고향 신촌 그 거리 거리에서 만났던 내 고향 사람들일 터이다.

그렇다. 고향은 찾아가야만 하는 곳이 아니라 마음에 간직하는 곳이다. 생각날 때면 언제나 첫눈 같은 설램으로 마주하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바로 그 곳.

아루바 또는 신촌.

  • 첫눈 오는 날 가게 앞에서 담은 사진들

옛 생각

이민 보따리를 꾸리며 처분했던 물건 가운데 주소와 전화번호들을 빼곡히 기록해 놓은 공책과 명함첩들이 있다. 벌써 서른 해를 넘어선 저쪽 일이다. 그것은 내 유소년 그리고 청년과의 결별이었다. 이 땅에 건너와 살면서 인근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회를 한 두어 번 기웃거린 적은 있다만 모두 이민 초기의 일일 뿐, 이제껏 무관하게 살았다.

인터넷 세상이 열린 후 간간히 이름깨나 팔리게 된 옛 벗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Social Media가 판치는 스마트한 세상이 되자 늙지 않으려는, 아니 젊게 살려는 옛 동무들의 모습들과 느닷없이 마주치곤 한다. 이럴 때면 이따금 오래 전에 버린 주소록과 명함첩들이 생각나곤 한다. 비록 이미 다 변해 버렸을 주소와 전화번호일 터이지만.

이달 초 마광수 형의 부음으로 하여 나는 오래 전 신촌 시절을 더듬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며칠 후 후배 페북에 올려진 옛 동무 딸아이 결혼식 사진은 나를 며칠 동안이나 1970년대 신촌 거리로 내몰았다.

딸아이 혼례를 치른 옛 동무는 함께 마셔 댄 신촌 시장 주막집 막걸리 동이가 제법 되는 진짜 어깨 동무 개 동무였다. 그와 마지막 술 잔을 나누었던 곳은 그의 단칸 신혼방 이었는데 동네는 어디였는지 가물 가물하다.

문득 그 시절 동무들이 그립다.

마광수 형은 그 때도 그랬다. 음담패설을 이용한 우스개는 단연 뛰어났다. 나는 그의 학문이나 문학에 대해 논할 만한 지식이 전무하다. 다만 70년대 청년 마광수에 대한 인상은 아직도 또렷하다. 신촌 목로주점 아니면 북한산을 오르던 길이었을게다. 그는 말했었다. ‘우스운 일이야! 참 우스운 일이라고!’ 그가 고등학교 때 대학교 백일장에 응모해 시 부분에서 장원을 했던 일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하던 끝에 뱉은 말이었다.

‘그 시가 말이지,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남의 것들 베껴서 조합해 놓았단 말이야. 그게 장원이었다니까! 우스운 일이야! 참 우스운 일이라고!’

나는 당시 광수 형이 기성 체제에 대해 항거하거나 비틀어 조롱했다고 단언하지는 못하지만, 그는 당시 이미 자유인이었다. 그는 그렇게 자유인 청년 마광수로 삶을 접었다. 그리 살며 느껴야만 했던 외로움 역시 오롯이 그의 몫으로 품고 갔다.

구글링을 통해 광수형의 길을 쫓다가 낯익은 이름들도 만났다. 대학에서 광수형과 척진 곳에 서있었다는 이들이다. 이미 다들 은퇴 이후이다.

모두 1970년대 신촌거리에서 아주 멀리 왔다.

먼저 떠난 이에게는 안식을, 아직 산 자들에게는 강녕을.

이상동몽(異床同夢)

<홍길복 목사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에 수강 신청을 하며….

해마다 이월은 내 생각을 좀 넓히는 때이다. 뭐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만큼 좀 한가하다는 말이다. 이맘 때면 춥고 눈도 많이 오곤 해서 내 가게가 좀 한가하다. 일요일 말고도 하루 이틀은 눈 때문에 가게 문을 닫고 쉬기도 하거니와 가게 영업시간을 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돈은 좀 덜 들어온다. 허나 시간은 좀 풍부해진다. 그러다보니 평소에 생각지 아니했거나 못했던 것들이 보이게 되어 생각의 폭과 깊이가 넓고 깊어지는 나름 내가 좋아하는 이월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삼월 초이면 언제나 내 지갑은 가난하다. 삼월 초 내 생일을 해마다 늘 그렇게 맞는다.

그런데 올해는 좀 다르다. 눈도 전혀 오지 않았고 날씨도 추워 본 적이 없다. 가게는 내가 많은 짬낼 틈없이 바빳다.

이 달초에 호주에 계시는 홍길복목사님께서 이메일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그 편지를 소화해 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 생각의 용량을 초과하는 것이어서 생각과 돈 모두 풍족하게 삼월 내 생일을 맞게 되었다.

이달 초에 홍목사님께서 보내주신 편지 내용이다.

참 오랜만 입니다. 그동안 어찌 지내셨습니까? 안부를 묻는 일조차 쉽지 않은 세상에서 그래도 벌써 해가 바뀐지 한달이 지났습니다. 한가닥 작은 희망에 대한 희망 조차도 사라져 가는 땅 입니다. – 중략 – 시드니에서 작은 ‘인문학 교실’을 열었습니다. 한 달에 두번 모입니다. 첫번 모임에 그래도 마음을 함께하는 친구들 한 30여명이 모였습니다. – 중략 –  옷은 새 것이 좋지만 사람은 옛 사람이 좋네요.

그랬다. 홍목사님과 헤어져 그는 호주로 나는 미국으로,  함께 했던 한국이라는 삶의 자리를 바꾸었던 시절에 그는 30대였고 나는 20대였다.

이제 그이는 70대 중반의 은퇴목사이고, 나는 은퇴를 바라보는 60대 중반이 되었다. 그래, 우린 서로 옛사람이었다. 다만  거기에 수식어 하나를 얹는다. <변하지 않은…>이라고.

‘각자 삶의 자리는 다르지만 이 교실을 통하여 이상동몽(異床同夢)하는 <인문학 친구들> 입니다. <異床同夢>! 이 얼마나 멋진 말 입니까? 잠은 각기 다른 데서 자지만 꿈 만은 같이 꾸기를 소망합니다.’

그 이가 첨부파일로 덧붙인 <시드니 인문학 교실> 강의록에 적어놓은 말이다.

나는 홍목사님의 허락을 받고, 그 이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강의록을 이 곳에 올린다. 더하여 내가 참 사랑하고 존경하는 필라 인근의 친구들과 함께 한 달에 두번씩 이 강의록을 참조하면서 인문학 공부를 쫓아가려 한다.

자!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로  ‘들어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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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살며 딱 두 교회에 적을 올렸다. 한국의 신촌 대현교회 – 그 곳에서 만났던 많은 친구들은 내 삶을 지배했다. 홍목사님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내 아내 역시. 수 년전에 아내와 딸과 함께 그 곳을 찾았었다. 그리고 이민와서 한 곳…. 나 역시 옛이 그립다.>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

 교실문을 여는 글 1 – 왜 인문학인가? 

일찌기 다산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기 전 한양에 있을 때 몇몇 친구들과 계(契) 모임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이름하여 ‘죽란시사’(竹欄詩社)라 했습니다. 한 시대를 살아가며 세상을 걱정하며 자아를 성찰하는 선비들이 모여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일종의 풍류계(風流係)였습니다.

우리도 지금 ‘시드니 인문학 계’를 통하여 인생의 시름과 아픔은 서로 위로하고 시대와 인간을 피차 보듬어 주면서 이 절망의 땅에서도 함께 희망의 무지개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같이 먹고 자면서도 꿈과 생각은 서로 다른 동상이몽(同床異夢)가들이 아니라, 각자 삶의 자리는 다르지만 이 교실을 통하여 이상동몽(異床同夢)하는 <인문학 친구들> 입니다. <異床同夢>! 이 얼마나 멋진 말 입니까? 잠은 각기 다른 데서 자지만 꿈 만은 같이 꾸기를 소망 합니다.

지난 12월 이 모임을 준비하던 이들은 ‘시드니 인문학 교실’의 목적과 기대를 다음과 같은 말로 다듬어서 표현했습니다.

(1) 동양과 서양에서 이어온 인문학의 전통과 역사, 목적과 내용, 방법론과 한계를 함께 공부해보자. – 클라스의 진행은 주로 준비된 강연, 토의, 책읽기와 나눔 등이 될 것이다.

(2) 이를 통하여 인문학적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개인적 사고의 깊이를 심화 시키고 또 그 틀을 좀 더 넓혀 나가자. – 우리는 종교단체들 처럼 무엇을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하고 의심하고 고민하고 진솔하게 마주침으로’ 더 바른 삶이란 무엇인지를 추구해 나가려고 한다.

(3) 이런 사유의 깊이는 인문학 교실에 참여하는 친구들 개개인의 삶에 의미와 보람을 갖게 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4) 더 나아가 우리는 이 교실을 통하여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으로 하여금 보다 정의롭고 사랑과 평화가 넘실거리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약간은 논리적으로 서술된 이런 <시드니 인문학 교실의 목적>을 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야기들을 통하여 좀 유연하게 풀어보겠습니다.

 

유언비어– 전야(前夜) 5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7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마가복음 4 : 21 – 25, 개역개정본에서 

‘강남’이라는 말이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게 다가가게 된 까닭은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 덕이고, 그  배경에는 구글과 유튜브라는 현대판 통신수단이 있습니다. 십여년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강남의 일부인 잠실을 제가 어릴 적에 어떻게 갔는지 알려 드릴까요.  제 어머님의 외가가 당시 잠실이었답니다. 제가 살던 신촌에서 잠실을 가려면 우선 신촌에서 버스를 탑니다. 지금의 신촌노타리가 당시 버스의 종점이었습니다. 동대문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그 곳에서 전동차를 갈아 탓습니다. 전동차로 광나루까지 가서 나룻배로 갈아 탓습니다. 나룻배로 한강을 건너고 모래사장을 걸어 올라가면 논밭이 이어졌답니다. 그리곤 어머니의 외갓댁 잠실에 가 닿을 수 있었답니다. 꼬박 하루길이었습니다. 언젠 적 이야기냐고요?  1960년대 초였답니다. 

느낌은 옛날 고려적 이야기지만 고작 50여년 전의 일이지요. 

자!  이즈음의 시간 차이는 빠르게 변하지만  옛날 정말 고려적에는 그런 빠른 변화가 있었을까요? 칠백 여년전 고려 말이나 천이 백여년 전 고려 초나 아마 생활의 변화 속도란 이즈음 십년에 미치지 못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하물며 이천 여년 전에는 어땠을까요. 

이런 저런 역사적인 사건들이 이어지지만 실제 보통 사람들의 삶의 변화란 백년 전이나 백년 후나 크게 변한 것들이 없었던 시절이었을겝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삶이 급변하는 어떤 계기들이 있게 마련이랍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제가 중학교 들어가던 해인 1965년에 개통한 제2한강교를 들수 있겠습니다.  이 다리를 놓는데에 약  2년 6개월이 걸렸다면 이즈음 사람들은 “정말이래?” 할 수도 있겠는데 정말 그만큼 걸렸거니와  당시 신촌사람들에게는 정말 신촌(新村)이  새 마을이 되는 새로운 역사의 계기였답니다. 신촌이 더 이상 버스 종점이 아니라 시내 중심가가  되기 시작한 때랍니다. 

다시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으로 넘어갑니다. 

팔레스타인에 살던 다시 유대인들의 삶이 급격한 변화를 격게되는 시초는 헤롯1세가 왕위에 오른 때로부터 로마의 총독시대가 이루어지던 무렵이었습니다.  이로부터 약 70여년에 이르는 동안 그 땅에서는 무수한 반란과 도적(이 도적을 의적 또는  혁명가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들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자칭 메시야라고 하면서 사회 혁명을 꿈꾸거나 사람들을 규합하여 테러를 일삼거나 하는 무리들이 넘쳐나던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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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알렉산더대왕이 “당신의 소원을 말해보시요. 내가 다 들어 드리겠오.”라는 말에 거적깔고 드러누운 노숙자인 주제에 “좀 비켜 주시겠오, 햇볕 가리지 말고….”라고 대답했다는 전설적 이야기의 주인공인 디오게네스로 유명한  견유철학자(犬儒哲學者)들도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많았답니다. 

견유철학들자들의  삶의 태도를 잘 나타내는 유명한 말이 있답니다. 

“나는 내가 배고프지 않을 만큼, 목마르지 않을 만큼 가졌다. 벗지 않을 만큼 입었다. 밖에 있을 때는 저 부자 칼리아스보다도 더 떨지 않고 안락하다. 안에 있을 때는 따듯한데 왜 옷이 필요한가?”  견유철학자(犬儒哲學者)의 시조인 안티스테네스의 말입니다. 

빈정거리며 사회와 등을 지거나 저항하거나 하는 무리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유대는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기후는 아니랍니다. 특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쪽 유대 지방은 그리 농사에 적합한 땅은 아니었답니다. 그에 반해 갈릴리 호수 주변의 땅들은 농사에 적합했다고 합니다. 그 지역의 농산물들이 유대의 젖줄이 되었던 셈이지요. 

그런데 로마시대 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수입은 수확물의 반도 가져가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이마저도 자기 농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만큼 각종 세금으로 이들에게 뺏어가는 것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농토의 많은 부분들은 예루살렘 중심의 권력자들의소유였고 농지는 대부분 소작농들이 경작을 하는 현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를 살던 소작농들을 더욱 어렵게 했던 것은 당시 부자들이 즐겨 사용한 매점 매석행위였다고 합니다.  농사가 잘 된 해에 마구 거두어 들여 창고에 쌓아 놓았다가 흉년이 들 때 엄청 높은 값에 파는 일들이었는데  당시 기록에 보면 16배 정도의 이득을 남기기도 하였답니다. 

당시 떠돌던 유언비어에는 이런 것들이 있답니다. 

“어떤 랍비의 일년 수확은 예루살렘 시민이 십년  동안 먹을 정도이었다.”, “마을 천개와 배 천 척을 가진 부자들도 있었다.”, “성전에 바치는 십일조가 송아지 만 삼천마리인 부자가 있었다.” (안병무가 쓴 갈릴래아의 예수에서) 등등이랍니다.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가질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마가 4 : 25)라는 성서의 말이 그대로 적용되는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로마에게는 인두세 및 각종 간접세들을 내야하고 유대 종교 자치기관에게는 성전세(이 세금은 빈부의 차이없이 유대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냈답니다.) 와  십일조세(당시만 하여도 정확히 지켜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를 내야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점점 살기가 팍팍해 갔답니다. 

그렇게 하루살이조차 힘들어진 사람들에게 수많은 “하라”와 “말라”라는 율법들은 애초 지키기 힘든 굴레였을 뿐입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 판국에 종교적, 전통적, 관습적 죄인이 되어 사는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신촌연가 8

탈신촌기(脫新村記)

대야성, 복지, 캠퍼스, 독수리…

찻값 꽤나 부조했던 다방 이름들입니다.

누나네 집, 페드라, 태정식당…

막걸리값 수월치 않게 건네 주었던 술집들 이름이지요.

꽉 찬 10년, 제 대학생활은 그렇게 신촌과 함께 했었지요.

대학을 다니던 그 어느 한 해도 제대로 수업을 다 해 본적 없는 학교생활이었지요.

큰 딸은 간호대학 나와 조신하게 있다가 시집 보내고, 아들놈은 대학교수를 시키고… 아버지의 소박한 꿈을 허문 것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누나와 제가 거의 동시에 벌린 일입니다.

대학 졸업을 코 앞에 두고 있던 누나는 탈신촌(脫新村)을 선언하였습니다.

“전 졸업하면 미국으로 취업이민 가요.”

고집 세신 어머니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누나는 그렇게 훌쩍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아버지의 머리칼이 세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들이닥친 형사들이 아들을 찾을 때만 하여도 아버지는 “큰 일 아니겠지”하셨답니다. 아들을 만나러 경찰서로 유치장으로 구치소로 들락거리시던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하얗게 세셨습니다.

학교도 짤리고 골방에서 쳐 박혀 있는 아들을 보시며 아버지는 아직 꿈을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이 바뀌고 아버지의 꿈을 다시 살리시던 1980년 5월.

피신한 아들 덕에 평생 처음 무서운 곳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하셨던 아버지는 그렇게 자랑스러워 하시던 화랑무공훈장을 탓하시며 이민짐을 꾸리셨습니다.

그 해 벌어진 어머니, 아버지의 탈신촌입니다.

이따금 신촌거리를 배회하던 제게 신촌은 이미 제 어릴 적 신촌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신촌을 떠나신 지 7년 후.

요식행위일 뿐이라며 내어민 종이에 각서라는 것을 쓰고 받아 든 대한민국 여권이었지요. 그날 밤 미국에 계신 어머니는 전화통에 대고 신신당부를 하셨지요.

“이 눔아! 책 같은 걸랑 하나도 갖고 오지 말어! 일할 수 있는 작업복만  챙겨 가지고 와!”

그렇게 신촌을 떠났답니다.

<그리고 13년 후>

11박 12일.

13년만의 귀향이었다. 아기자기한 반도의 산하(山河)모습을 한 창 밖 구름들을 보며 서울이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크고 깨끗한 영종도 새 공항과 빠르고 친절한 입국절차에서 엄청나게 변한 도시를 예감할 수 있었다.

새벽, 시원히 뚫린 공항로를 달리며 바라 본 낯 익은 산들과 거기 휘며 춤추듯 자라는 나무들이 열 세해의 공백을 메워버렸다. 김포쯤해서 눈에 들어 온 거대한 아파트군(群)들은 한강 호위병처럼 서서 강변을 따라 끝없이 이어졌다. 강 건너 난지도에 솟아 오른 두 개의 산봉우리는 흐른 세월이 만만치 않았음을 말하고 있었다. 잘 꾸며진 강변 고수부지 공원들과 제법 푸른 도시 녹지공간들은 남산을 가로 막은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들의 삭막함을 덮기에 충분하였다.

그 뿐이랴! 짐을 풀기 바쁘게 나선 서울거리는 정말 깨끗하였다. 담배꽁초 하나, 휴지 한 조각 찾을 수 없는 거리는 매우 낯 선 것이었다. 시내는 물론 외곽도시까지 잘 연결된 깨끗하고 시원한 지하철은 그 끈끈하고 무더운 날씨를 잊게하기에 충분하였다. 모든 거리를 뒤덮은 자동차의 행렬은 이미 나를 주눅들게 하였지만 그 복잡함에 비해 제법 질서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서울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튿날, 내 고향 신촌을 찾아 가는 길에서 나는 급작히 무너지고 말았다. 지하철 신촌역에서 내리자 이십대 아니 십대들의 물결에 휩쓸리고 말았는데 그들을 뚫고 친구들과의 약속장소로 가는 채 1Km도 안되는 그 짧은 거리에서몇 번이고 주저앉고 싶었다. 아아! 내 유년과 소년, 청년을 보냈던 그 거리 어디에서도 낯 익은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슬픔이었다.

스무명 남짓한 옛 벗들의 만남의 장소로 갈비집을 택한 까닭을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이미 그 곳을 떠나 사는 친구들모두가 기억할 수 있는 장소란 스무 해 넘게 한 곳에서 장사하는 그 갈비집밖에 없었으므로.

완전히 변모한 거리 모습에 비해 벗들의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은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더러는 흰머리를 이고 더러는 대머리를 겸연쩍어 하며 악수를 나누었지만 세월의 두께로도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잊게 할 수는 없었다. 바쁜 서울생활에 나 뿐 아니라 그 곳에 사는 친구들끼리도 오랜만인지라 서로의 근황과 옛 시절을 이야기하며 우리는 그 도시의 복잡함을 쉽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우리들이 어린시절 드나들던 목로주점이 그 시절 그 모습대로 있다는 것을 떠 올렸고 우리는 한 목소리로 그것이 사실이야고 되묻곤 일어나 우르르 그 집을 찾아 나섰다.

그랬다. 이제는 없어진 신촌시장 한 귀퉁이 바로 그 자리에 옛날 모습을 안팎으로 고스란이 간직한 채 막걸리와 소주그리고 동태찌게 안주를 파는 목로주점이 있었다.  그 밤 우리는 “이 곳을 역사 보호구역으로 정하자”는 흰소리를 해가며 마시고 마시고 그렇게 취했다.

그 밤 그 곳에서 함께 취했던 벗들은 모두 서울을 버티는 중년들이었다. 정치인, 회사중역, 대학교수, 행정가, 변호사,목사, 성공한 자영업자 – 서울을 버텨 내야만 하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그 밤 나는 그들이 지쳐 있음을 보았다. 그들의얼굴 어디에고 서울의 버팀목으로서의 자부나 자신을 찾을 수 없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모습, 채울 수 없는 허탈, 마지못해 버티는 무력감들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그랬다. 그 밤 서울은 내게 내 벗들의 지친 얼굴처럼 다가왔다. 헤어져 돌아가는 길, 그 거리를 사랑하는 법을 생각해보았다. 그 어떤 모습일지라도 내 고향이므로. 내 조국이므로. 내 어머니의 땅이므로.

문질러도 문질러도 희어 질 수 없는 피부색처럼 끈질긴 인연의 땅이므로.

(2001. 7. 17)

그리고 다시 십년 후인 2011년의 추억들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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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딸과 함께 옛 추억속으로

신촌연가 7

<그리운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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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지금도 변화의 연속인 곳이 대한민국입니다만 그 변화무쌍한 것들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교육정책과 입시제도일 것입니다.

나이가 한 삼년 차이만 나면 아마 다른 교육정책과 입시제도 아래서 성장을 했을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입학을 할 때부터 달라진 것은 이른바 동일계 진학이라고 해서 인문학교의 경우 고등학교를 무시험으로 그대로 그 학교로 진학을 하는 것입니다. 일테면 A중학교를 나왔으면 한 울타리에 있는 A고등학교로 무시험 진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업계 고등학교는 입학시험을 치루게 되어 있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중학교만 있는 경우였지요. 한 울타리에 고등학교가 없으니 갈 데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 각 인문학교의 학급 수를 조금 늘린 것이지요. 그렇게 늘린 숫자만 입학전형을 통해 학생을 선택하였던 것이지요.

지금도 생각해보면 도대체 어떤 짱구가 그런 입시제도를 생각해 냈는지 이해를 못하는 것이지요. 평등, 형평이라는 개념이 탑재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었지요.

어쨋거나 제가 다니던 중학교 한 울타리에 같은 모표를 쓰는 고등학교는 경기상업고등학교였답니다. 중학교 동창들 가운데 거의 많은 아이들이 별 선택없이 한 울타리 안에 학교를 선택했지요.

물론 제 짝궁 상태처럼 비좁은 경쟁을 뚫고 당시 일류학교라는 인문계 K학교에 입학을 한 경우도 있으니까 다 제 탓이겠지만, 공정한 게임은 아니었다라는 생각이지요.

한국의 돌아가신 두 분 대통령님께서 상업고등학교 출신이셨지요. 두 분 다 정말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들이시지만 두 분들께 따라다니는 수식어 “똑똑했지만 가난했기 때문에” 상업학교를 나왔다는 말에는 불만이 좀 있답니다.

똑똑한 아이들도, 가난한 아이들도, 잘 사는 아이들도, 덜 똑똑한 아이들도 갈 수 있는 곳이 실업계 학교이고, 실업계학교가 대우받은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는 생각입니다. 제가 상고를 나와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실업계를 보는 눈이 달라져야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쓰다가 올 초에 받은 “도상(道商) 45회” 수첩을 꺼내 보았습니다.  이젠 다들 중늙은이가 되었습니다. 참 좋았던 때였습니다.

그 시절에 제 평생에 영향을 끼친 몇 분들을 만났습니다.

우선 신촌 대현교회의 황인기목사님이십니다.

“고난받는 예수”를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영문학을 전공하신 분답게 늘 영어로만 하셨지요. Suffering Jesus라고요.

그리고 또 한 분. 박대위교수님입니다.

까까머리 고등학교 남학생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지혜를 주십시요. 이 아이들이 이 나라의 앞날입니다. 지금은 공부할 때입니다. 아이들 잘 때 빤스 속으로  손 집어 넣지 않게 해 주십시요.”

그리고 고등학교 담임선생님 김기영선생님입니다.

제가 공부를 지지리 못했습니다. 우선 주판이 싫어서 주판으로 스케이트 타다가 선생님께 꿀밤 맞기 일수였고, 타자시간에는 소설책 읽다가 걸려서 인도산 고무라는 롤라로 머리 터지기 다반사였지요.  성적은 늘 뒤에서 세어야 빨랐고요.

영어선생님이시던 김선생님께서 고등학교 이학년 어느 날 저를 부르셔서 하신 말씀이지요. “니 아직 안 늦었다. 공부해서 대학가라. 니 글을 쓰던 언어학을 하든 대학가라.” 그렇게 아주 구체적으로 제 길을 선택해 주셨지요.

그 김선생님 훗날 제가 졸업한 후 전근 가신 곳이 제 아내가 다니고 있던 고등학교였답니다. 그래 제 아내의 영어선생님이시기도 하지요.

아! 제 아내의 얼굴을 교회가 아닌 하교길 버스 안이나 길에서 종종 마주친 것도 그 무렵이었지요. 아내는 중학교 또뽑기 학번이라 세검정 꼭대기에 있는 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이지요.

백년대계라는 교육정책만이라도 일관성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시절 “대망의 70년대”라는 플랭카드가 신촌, 이대앞 구름다리를 비롯한  신촌 곳곳에 내 걸리기 시작했답니다.

 

신촌연가 6

<말표 운동화>

신작로(新作路), 문(門)안.

신촌 우리 또래들이 쓰던 말 가운데 제2한강교가 들어선 후 빠르게 사라진 말들입니다. 사방으로 새로운 길들이 열리거나 넓혀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대문(四大門)안이라고 해서 “문안에 들어간다”던 말도 잃게 되었습니다. 이젠 시내(市內)라는 말을 쓰게 되었고 신촌은 이미 시내 중심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딱지치기, 구술치기(다마치기라고했지요), 다방구,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비석치기등 동네 놀이에서도 졸업을 하게되었습니다.

중학교시절엔 이렇다 할 추억이 별로 없습니다.

중학교 정문 앞에서 일어난 1.21사태라는 무장공비 사건이 있었군요. 자하문 앞이지요. 저희 학교 학생 하나가 목숨을 잃었지요. 지금 그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해 여름에 그 친구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반공영화를 학교에서 찍은 기억이 납니다. 땡볕에서 몇 시간이나 전교생들이 서 있었지요. 몇몇 아이들은 더위에 지쳐 쓰러지기도 하고…

그즈음에 제 즐거움은 서대문에 있는 4.19도서관에 가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인쇄소는 날이 갈수록 번창했습니다.

옵셋 인쇄기가 들어오고 부터는 총천연색 인쇄물을 찍는 진짜 인쇄소가 되었답니다. 그즈음부터 아버지의 인쇄소는 제게서 멀어졌습니다. 제 또래의 사환 아이도 들어오고 인쇄기술자와 도장을 파는 견습생까지 달린 아버지의 가게에서 마땅히 제가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상태라는 단짝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의 집은 독립문 부근이었지이요. 아직 사직터널이 생기기 전이었으므로 상태와 저는 방과후 신문로까지 꼭 함께 걸었답니다. 그리고 거기서 각자 신촌과 독립문으로 가는 버스를 탓었지요.

어느 날인가 누구랄 것도 없이 서대문까지 걸어가자는데 뜻이 통해 좀 더 걷다가 발견한 곳이 바로 4.19 도서관이었습니다.  거기서 만난 것이 소설책들입니다. 학교가 파하자마자 그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친구 상태와도 멀어졌지요. 춘원 이광수에서 시작하여 정비석, 장용학에 이르기까지 학교 수업시간에도 어제 읽었던 그 소설에 빠져 있곤하였답니다. 뭔 소리인지도 모르고 읽은 헷세의 데미안에서부터 카네기 인생론, 간디… 제 즐거움이었지요.

신촌 동네친구들은 주로 교회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네친구들 사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층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국민학교 때까지는 몰랐는데 일류학교, 이류학교, 삼류학교의 계층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거기 더하여 잘 사는 아이들, 못 사는 아이들이라는 계층 형성이 시작된 것입니다.

운동화.

그즈음 제 신발은 줄기차게 까만 말표운동화였습니다.

물론 학교에서도 단화라고 부르던 학생구두를 신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저처럼 까만 말표운동화였답니다.

그런데 주일 날 교회에 가면 이야기가 달라졌지요.

단화에서부터 그 무렵 쏟아지기 시작한 각종 무늬의 이른바 이즈음의 스포츠 운동화들을 아이들이 신기 시작한 것이었지요. 교회 모임이 끝나면 아이들은 새로 생긴 분식집으로 몰려가곤 했지요.

저는 꾸준히 말표운동화이었고, 삼시 세 때 어머니가 해 주신 밥만 먹고 살아야 정석인 줄 알았지요.

어느 날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놀고 있는데 얼굴 하얀 계집아이가 저를 향해 한 마디 던졌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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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는 촌스럽게 맨날 말표운동화야!”

아이들은 그 말 한마디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고요.

그래 어쨋냐구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말표운동화로 그냥 쭉 나갔답니다.

대학교 때는 말표 하얀 고무신 신고 학교를 갔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