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2월 1일) 연합뉴스는 다시 태어난 최인훈의 소설 <광장>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문학과지성사는 ‘광장’ 출간 55주년을 맞아 소설이 처음 발표됐을 때의 삽화 6점을 다시 추가한 개정판을 1일 내놨다는 것입니다.
작가 최인훈에 따르면 1960년 잡지 ‘새벽’ 11월호에 <광장>을 발표한 이후 오늘날까지 모두 열차례 정도 고치고 수정해 왔다고 합니다.
6ㆍ25 전쟁포로인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남북, 좌우를 모두 거부하고 중립국을 택해 가던 수송선 위에서 바다로 자신의 몸을 던져 죽음을 택합니다.
작가 최인훈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쓸 당시에 주인공이 그렇게 힘겨워한 일들의 뒤끝이 이토록 오래 끌리라고는 예감하지 못하였다.”
소설 광장이 발표되었던 때로 부터 55년이 흐른 2015년 현재 <광장>이 계속해 다시 쓰여졌다는 소식은 서글픔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상황은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아니, 상황이 전혀 변한 것이 아니라 더욱 나빠졌기 때문입니다. 1960년 소설 발표 당시 작가 최인훈이 썻던 서문(序文)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메시아’가 왔다는 이천년래의 풍문이 있습니다
신이 죽었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신이 부활했다는 풍문도 있습니다. 코뮤니즘(공산주의)이 세계를 구하리라는 풍문도 있습니다.
우리는 참 많은 풍문 속에 삽니다. 풍문의 지층은 두텁고 무겁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고 문화라고 부릅니다.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풍문에 만족지 않고 현장을 찾아갈 때 우리는 운명을 만납니다.
운명을 만나는 자리를 광장이라고 합시다. 광장에 대한 풍문도 구구합니다. 제가 여기 전하는 것은 풍문에 만족지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 한 우리 친구의 얘깁니다.
아시아적 전제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던 구정권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 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
2015년 오늘은 저 빛나던 1960년 4월에 비하면 ‘광장(廣場)과 밀실(密室)’ 모두 한반도 남북에서는 대중(시민, 인민, 국민, 민중 등 무엇이라 부르던간에)의 소유가 아닌 세월이기 때문입니다.
최인훈이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대중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 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 나온다”고 썻던 바로 그 ‘광장과 밀실’ 말입니다.
다만 <풍문에 만족지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했던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바다에 투신하는 죽음을 택했지만, 2015년 오늘 <풍문에 만족지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하는 현실의 주인공들은 황선처럼 감옥으로 끌려가거나 신은미처럼 강제추방을 당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도피보다는 살아 감옥에 가고 추방당하더라도 ‘광장과 밀실’을 누리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있어야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 나오”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한반도 남북 그 어디서건 대중(시민, 인민, 국민, 민중) 모두가 ‘광장과 밀실’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황선이 되고 신은미가 되어 <풍문에 만족지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 노력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