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그리고 좌파

노동절 휴일도 저물었다.

어제 농사짓는 벗이 땡볕에서 땀 흘려 키운 열무 몇 단을 보내왔다. 그의 노동을 생각하며 열무김치를 담갔다. 실히 병 하나를 채우고도 남았다. 농사짓는 친구 덕에 이젠 김치도 곧잘 담게 되었다.

얼마전에 만두 먹으러 중국인촌에 갔다가 사서, 다듬어 얼려놓은 오리고기를 꺼내어 주물럭구이를 만들었다. 기름기가 노인들에게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아 고기만 저며 했더니 양이 참 적었다.

이즈음 다리가 불편해 거동이 힘드신 아버지는 “이게 다 6,25 때 박힌 수류탄 파편 탓”이라며 혀를 차신다. 내일 MRI 찍기 위해 병원 나들이를 하신다.

암기운이 다 가신  듯  가신 듯 하면서도, 잊힐만 하면 문제가 있다는 의사 소견에 움찔하시는 장모도 내일 병원 나들이를 하신다.

양쪽 노인들 몫으로 조금씩 떼어 놓고보니 우리 부부 양념에 비벼 한끼 식사로 딱 적합하였다.

이런 저런 뉴스들을 훑어 보다가 저녁나절 묵자(墨子)를 읽는다. 묵자를 읽는다기 보다는 문익환과 신영복을 읽는다가 맞겠다. 그 분들이 읽은 묵자를 내가 읽고 있기 때문이다.

묵자나 예수나 그들이 살았던 그 시대의 눈으로 비추어 보면, 아니 어쩌면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극단에 서 있는 좌파 일수도 있을 것이다.

“강자는 약자를 억누르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능멸하고, 귀한 사람은 천한 사람에게 오만하며 간사한 자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며, 천하의 화와 찬탈과 원한이 생겨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愛人若愛其身)”는 묵자의 가르침은 예수에 닿아 있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愛人若愛其身)”는 선언은 이미 혁명일 것이다. 입으로 말고 몸으로 서로가 실천하는 세상은 혁명 이후에나 가능할 것 아닐까? 극좌에 있는.

휴일 뉴스들은 나를 좌파로 몬다. 일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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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함’속에 희망이…

이즈음 빠져있는 일이 있어 온종일 컴퓨터 화면과 자판에 매달려 보냈습니다. 다루면 다룰수록 컴퓨터란 대단한 물건입니다. 짜여진 프로그램에 따라 넣어주면(input, 입력) 넣어주는대로 척척 답을 내놓습니다.(output, 출력) 짜여진 프로그램에 따라 말입니다.

그렇지요, 짜여진 프로그램에 따라 말입니다.

보통 사람들도 그렇지요. 일반적으로 배운대로(머리 속에 입력되는 대로) 사고하고, 행하기(출력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컴퓨터와 다른 점은 꼭 짜여진 프로그램에 따라서만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저녁 나절 밀린 뉴스들을 훑다보니 컴퓨터처럼 사는 사람들이 참 많은 듯합니다. 사람들을 컴퓨터처럼 만들려는 세력의 힘도 너무 커보이기도 하고요.

그런 제게 “아니요! 사람은 다릅니다!!”라고 가르쳐 주는 신영복선생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접습니다.


 

shin y. b.

완고한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미천한 출신의 바보 온달을 선택하고 드디어 용맹한 장수로 일어서게 한 평강공주의 결단과 주체적 삶에는 민중들의 소망과 언어가 감겨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달설화가 당대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한 농촌청년의 우직한 충절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은 이처럼 과거를 뛰어넘고 사회의 벽을 뛰어넘어 드디어 자기를 뛰어넘는 비약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평강공주와 함께 온달산성을 걷는 동안 내내 ‘능력있고 편하게 해줄 사람’을 찾는 당신이 생각났습니다. ‘신데렐라의 꿈’ 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당신이 안타까웠습니다.

현대사회에서 평가되는 능력이란 인간적 품성이 도외시된 ‘경쟁적 능력’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낙오와 좌절 이후에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한마디로 숨겨진 칼처럼 매우 비정한 것입니다.

그러한 능력의 품속에 안주하려는 우리의 소망이 과연 어떤 실상을 갖는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기억할 것입니다.

세상사람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당신이 먼저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직한 어리석음, 그것이 곧 지혜와 현명함의 바탕이고 내용입니다.

‘편한함’ 그것도 경계해야할 대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편안함은 흐르지 않는 강물이기 때문입니다.

‘불편함’은 흐르는 강물입니다. 흐르는 강물은 수 많은 소리와 풍경을 그 속에 담고 있는 추억의 물이며 어딘가를 희망하는 잠 들지 않는 물입니다.

– 신영복선생님의 < 나무야 나무야 > 에서 –

재미있게 살기 위하여

독감(毒感)이라더니 정말 독한 놈에게 걸려들었습니다.

약병은 커녕 바이타민 조차 곁에 두고 살지않던 제가 딱 두주째 약기운으로 지낸답니다. 초기 사나흘 앓고 하루 반짝해서 ‘감기가 그렇지 뭐’ 했었는데 웬걸, 그후 꼬박 나흘을 누워지냈었답니다. 그리고 또 하루 멀쩡해서 ‘어이구 독한 놈 만났었네’하고 이튿날이면 털고 일어날 줄 알았답니다. 헌데 정말 독한 놈을 만난 것입니다. 다시 눕고 사흘이 지났답니다.

가벼운 폐렴 증세까지 보이며 급기야 항생제를 넘기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제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충분한 수면과 휴식 뿐”이랍니다.

노인네들 한겨울 보내고 새 봄 되어 만나면 겨우내 폭싹 늙었더라는 말이 가히 남 이야기가 아닌 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나마 비록 양은 평소 절반이라도 정상적인 식사를 즐길 수는 있게 되었으므로 하루 이틀 후면 독감과의 동거 이야기를 추억 삼을 수 있게 될 듯합니다.

누워 지내며 두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얼마전에 돌아가신 신영복선생님께서 남기신 “강의”와 의사 이근후선생님의  책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싶다.”입니다.

이근후선생님의 책은 사실 암투병중인 장모님께 드리려고 구입한 것인데 제가 먼저 읽고 말았답니다.

신영복선생님의 고전강의인 “강의”를 읽으며 유영모, 함석헌, 김용옥, 강신주 등의 고전 강의와는 또 다른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직 배우고 깨닫고 행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으므로 우선 건강하고 볼 일입니다.

그리고 어제 아침, 이근후선생님의  책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싶다.”를 읽은 아주 짧은 느낌을 적어 제 가게 손님들에게 이메일 편지를 보냈었답니다. 그리고 제법 많은 분들께서 동감이라는 답을 주셨습니다. 책 제목이 좋다고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기 위해서라도 건강하고 볼일입니다. 무릇 “재미”란 주관적인 것임으로  각자 “스스로”들을 위하여.

(아래글은 손님들에게 보낸 편지)


이근후지난 주간에 책을 한권 읽었습니다. 책 제목이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싶다.”입니다. 50년 동안 정신과 의사로 일해오다 은퇴한 올해 81살인 한인 의사 이근후라는 이가 쓴 책입니다. 누구나 읽기 쉽게 쉬운 말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뒤돌아보며 느낀 점들을 기록한 책입니다.(아쉽게도 영문본은 없으니 제가 소개해 드립니다.)

저자 이근후씨 내외는 12여년 전부터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의 제일 어른이랍니다. 2남 2녀인 자식들이 결혼을 하고 다들 각자 따로 살다가 12여년 전에 모두 함께 모여 살면 어떻겠냐?는 생각으로 한집안에 모두 모여 살게 되었답니다.

이 제안은 그의 장남 내외가 먼저 꺼냈고, 다른 자녀들이 동의를 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박사 내외는 끝까지 망설이다가 함께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5 가정이 함께 사는 이 집의 구조는 매우 독특하답니다. 출입문이 각기 다를 뿐더러 서로가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구조를 지녔다고 합니다.

이근후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족들은 내 인생이다. 가족뿐만 아니라 내가 살아오면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바로 내 인생이다. 칙구, 제자, 동료, 환자들 그리고 여행지에서 만나고, 산에서 만나고, 봉사를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 수많은 인연들이 모두 나의 인생이었다.”

“나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들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누구라도 얼굴을 떠올리면 그가 가진 장점이나 좋은 기질 달란트를 기억해 낼 수 있다. 내 인생이기에…”

저는 그처럼 대가족을 이루고 살만한 능력도 없거니와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의 삶을 흉내낼 처지도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하더라도 내 가족 얼굴 하나 하나마다 내 세탁소 손님 한분 한분에게마다 그들을 떠올리 때면 내가 좋아지는 이미지나 의미를 새겨넣는 훈련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답니다.

재미있는 하루 하루들은 매일 새롭게 시작되는 한 주간이 되시길 빌며

당신의 세탁소에서

Last week, I read a book, entitle “I Want to Live a Fun Life until I Die.” It was written by Keun-hoo Lee, MD, who is an eighty-one year old retired neuropsychiatrist and professor.

It is a book in which he recorded what he felt, looking back over his life, in plain terms to make it easy to read. (Unfortunately, as it has not been translated into English yet, I’ll introduce it to you.)

The author, Dr. Lee and his wife head a family of three generations. His two sons and two daughters got married and moved out. But about twelve years ago, he, his wife and his children talked about an idea that all of them would live together in one house and decided to do so.

His oldest son and his wife brought up the idea, and the other son, daughters and their spouses supported it. Initially, his wife and he hesitated to consent to it, but then decided to go along.

The house in which five families live together has a unique structure. The entrance for each family is separate and different and no one interferes in what the others do.

Dr. Lee said:

“My family is my life. Not just my family, but all the people who I have met in my life are my life. Friends, students, colleagues, patients, those who I have met in traveling, hiking, and volunteering ― all those countless encounters were my life.”

“I don’t remember all of their names, but if I recall any of their faces, I can recollect his/her virtue, good disposition, or talents. Because they are my life…”

I don’t think that I can afford to lead an extended family in a house like him or to imitate his extraordinary life.

Having said that, I think that I can train myself to carve in my mind the good perceptions and images which match every face of my family and every customer of mine.

I wish that you will have a fun life every day this week and beyond.

From your cleaners.

뉴욕 나들이 후기

어제 딸아이 사는 모습 좀 보고 오느라고 뉴욕을 다녀왔답니다. 아이가 연휴면 종종 집에 오느터라 자주 가보지는 않는답니다.

뉴욕 맨하턴 나들이에서 제가 즐기는 몇가지가 있답니다. 주차비에 치이고, 맨하턴에서 차 사고를 한번 당한 이후에는 맨하턴 나들이는 언제나 기차 아니면 버스를 이용한답니다. 우선 그 교통 수단의 편안함입니다. 버스나 기차나 오고가는 시간에 누리는 편안함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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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하턴 한인거리에 있는 서점 방문과 한식당에서 누리는 한끼 입맛의 호사와 곁들이는 소주 한잔의 즐거움 등이 나들이를 풍요롭게 하는 것들이랍니다.

지난 가을에 뉴욕 나들이를 했을 때는 서점이 리모델링 공사중이라 문을 닫아 그 즐거움 가운데 하나를 놓쳤었답니다. 딸아이에게 서점이 공사를 끝내고 다시 문을 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여서 내심 알라딘을 통해 구입하려던 책들을 이번 나들이 몫으로 미루고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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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서점과 판매 서가에 꽂힌 책을 구입할 수 있는 책방과의 차이는 맛이 다름에 있지요. 같은 책을 구입해도 정말 맛이 다르답니다.

새로 꾸민 서점의 모습에 실망이라기 보다는 안타까움이 밀려 왔습니다. 우선 규모가 거의 절반으로 줄어 들었답니다. 그렇게 줄인 나머지 공간은 화장품 매장과 의류 매장으로 꾸며져 있었답니다.

그렇게 줄어든 공간에서 느꼈던 안타까움을 증폭시킨 것은 서가에 진열된 책들이었습니다. 웬 요리책들이 그리 많이 꽂혀있던지요. 좁은 공간에 거의 한 섹션을 이루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맹목적인 기독교 서적들과 자기 개발서들이 주는 안타까움이었습니다.

서점 비즈니스의 현실을 들어내고 있었답니다. 저만해도 서점 나들이는 그저 이따금 누리는 재미일 뿐, 아마존이나 알라딘이 편한 것을요. 그나마 서점을 그렇게 유지하려는 주인장의 아픔을 느꼈다할까요.

서점 방문에 앞서 들렸던 macy 백화점에서의 느낌도 새로운 것이었답니다. 사실 저는 뉴욕 macy 백화점 안에 들어가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랍니다. 아내와 딸아이가 샤핑을 할 때면 저는 늘 따로 놀곤 했었는데 이번엔 함께 했답니다. 늙어가는 징조일겝니다.

매장에 들어가서 제가 놀란 것은 매장 일층 로비를 장식하고 있는 치장들이었습니다. 중국의 춘절 곧 우리 설날을 중국풍으로 드러낸 장식들이었습니다. 그리고 2, 3, 4층으로 올라가면서도 똑 같은 느낌을 받았답니다. 바로 빨간색을 주조로 한 치장들이었습니다.

중국 소비자들의 위력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어제 서점에서 사온 책들을 훑어 보다가 눈에 들어온 대목입니다.

『논어』의 이 화동론(和同論)은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용과 공존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와 동은 철저하게 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동의 논리 아래에서는 단지 양적 발전만이 가능합니다. 질적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화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위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IMG_20150426_082042얼마전에 돌아가신 신영복 선생님의 책 ‘강의’ 162-163쪽에 실려 있는 말입니다.

세상은 늘 변하고 시대의 대세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도 변하기 마련입니다. 딱히 자본주의의 변화 뿐만 아니라 중국과 미국 또는 한국 이라는 국가 단위 공동체도 부단히 변해갑니다.

점점 설자리 잃어가는 서점 주인과 쇠락해가는 macy 뿐만 아니라  동(同)의 논리에 매몰되어 있는 이 사회가  화(和)를 주창하는 소리에 귀 기울여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이는 밤입니다.

어느 선생이 주는 교훈

l_2015042401003950000316611오늘 뉴스들을 훓어보다가 눈에 들어 온 경향신문 기사입니다.

10년 만에 신간 <담론>(돌베개)을 출간한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74)를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가 했다는 말을 여러번 곱씹어 봅니다.

“통일을 대박이라고 보는 것 자체가 경제주의적 발상입니다.

사실 통일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 과정에서 우리의 주체성이 보장되기 어렵다는 겁니다. 결국 사드는 배치하게 될 것이고 한·일 정상회담도 하게 될 것이라 봅니다. 그만큼 국가적 장래를 깊이 있게 생각하면서 결정 내릴 수 있는 자주성이 없지 않습니까.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동북아의 정치질서를 결정하고 남과 북이 발언권을 쥐는 것은 작습니다.

한반도의 오래된 민족사적 과제죠. 문제는 지도자, 정치인들이 역사적 의식이 없고 민족사적 관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치는 뿌리를 잘 펴는 정본(政本)입니다. 그 뿌리는 사람입니다. 즉, 사람을 인간답게 키워내고 그들이 지닌 창의성·인간성을 극대화하는 시스템 실천이 정치인데 오히려 정권 획득과 재생산이 전부라고 아는 천민적 사고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IMF, 2008년 금융위기 등 위기에 처했지만 그 역사적 계기를 성찰로까지 이끌지 못했습니다. 미봉책에만 급급했지요.

인간의 삶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고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사고가 얕습니다. 변화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깊이 있게 천착해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그것이 커져야 합니다.

최근 인문학적 관심이 고조되고 우리 삶에 대한 성찰성이 사회 일각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봅니다. 곳곳에 그런 작은 숲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작은 숲들끼리 소통의 연대를 만들어간다면 사회적 변화의 역량을 축적할 수 있습니다.”

“작은 숲들끼리 소통의 연대를 만들어 나가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소명이라는 생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