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칩에

일을 마치고 돌아 오는 길,  동네 약국 체인점에 있는 사진 현상소에 들렸다. 재미 삼아 사진을 찍기 시작한 지 일여 년 만에 어제 밤 처음 사진 현상 주문을 해 보았다.

내일부터 나흘 동안 가게 문을 닫고 새 장소로 이전을 한다. 내가 해야 할 이전 준비들은 거의 끝났고, 장비와 기계 등 큰 이사짐들은 일이 맡겨진 이들의 몫이다.

나는 손님들을 맞는 카운터 공간을 꾸밀 생각으로 사진 현상을 맡겼던 터이다. 내가 찍은 사진 몇 장들과 내가 좋아하는 시 몇 편들을 새긴 판넬로 한 쪽 벽을 장식할 요량이다.

현상되어 나무판에 새겨진 사진들을 찾아와 한참을 들여다 보다 툭 튀어나온 혼잣말, ‘오호 제법인데!’

사진들과 함께 벽을 장식할 시편들을 새긴 판넬들을 찾아 든다. 영역한 이해인님의 시편들과 Thoreau의 생각들, 그리고 내가 참 좋아하는 Shel Silverstein의 관점 (Point Of View)이다.

추수감사절 만찬은 슬프고 고맙지 않다/ 성탄절 만찬은 어둡고 슬프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칠면조의 관점으로 만찬 식탁을 바라본다면.

나는 이즈음 한국(한반도) 뉴스 또는 한국(한반도)에 대한 뉴스들을 보며 Shel Silverstein의 관점 (Point Of View)을 떠올리곤 한다.

개인 사이의 관계, 집단과 집단과의 관계 나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 또는 나라와 개인 집단과 개인, 나라와 집단 등등 모든 관계들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Shel Silverstein의 관점은 신(神)의 관점이다.

바로 약자(弱者)의 관점에서 공감하는 능력이 최적화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바로 천국이다.

역사란 사람들이 천천히 정말 천천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그 곳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 아닐까?

내 욕심으로 살다 문득 문득 현상된 사진처럼 툭 정신을 차리게 하는 순간들이 있다.

몹시 추운 경칩(驚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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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에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생각 또는 생각의 틀을 바꾸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더우기 신앙이나 신념이라는 말로 포장된 생각들을 바꾸는 일이란 가히 혁명과 같다. 게다가 노인들의 생각에 이르면 이는 변하지 않는 진리가 된다.

그게 이젠 남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가 되었다.

하여 웬만해서는 내 또래나 웃어른들과는 신앙이나 신념에 이르는 주제의 이야기들은 그저 피하고 사는 편이다. 어차피 바꾸지 않을 생각들을 나누고 다투는 일을 토론이라고 포장하더라도 서로 간의 아까운 시간 낭비라는 생각 때문이다.

만나는 이들의 폭이 워낙 좁다보니 나보다 나이 어린 이들과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아주 적다만, 어쩌다 기회가 있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생각은 나이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곤 한다.

신앙이라는 면에서는 여전히 내 또래보다 더 중세(中世)에 갇혀 사는 젊은이들도 만날 수 있거니와, 신념에 이르러서도 케케묵은 이념이나 견강부회나 곡학아세의 틀에 갇혀 저 홀로 독야청청인양 목청 높이는 이들을 만날 수 있다. 이건 딱히 나이와 상관 없는 일이다.

어쩜 내 모습이기도 하고.

다만, 이따금 나 홀로 추스려 다잡는 생각 하나. 세상 지고지선 그 절대란 절대 없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사람이나 체제를 절대라는 위치에 올리는 일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아니다’라는 그 생각 하나.

철들어 굳어진 그 생각 하나 늙막에 내 고집으로 안고 살아야 할 터. 신앙이나 신념의 이름으로.

여유(餘裕)

모처럼 맞은 연휴, 습관으로 이른 아침에 일어나 서성이다가 창문을 여니 새소리와 풍경소리, 후두둑 떨어지는 비소리로 집안에 여유가 가득찬다.

무릇 신앙이란 치열해야 마땅한 일이지만 그 역시 삶의 한 부분일 뿐이니, 때론 소소한 감사에 취해도 족하다. 아침 뉴스 속 세상사가 온통 옳고 그름의 싸움처럼 다루어지지만, 사람살이가 매양 그렇게 치열한 것만은 아니다.

오늘 아침 내가 누리는 이 여유는 아마 엊저녁에 함께 시간을 보낸 벗들에게서 비롯 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에서 누리는 소소한 감사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 이야기 속에서 신을 확인하고 고백했다. 한 주간 부딪혔던 일상의 치열함은 각자의 몫일 뿐, 서로가 털어놓은 아주 작은 감사에 모두가 여유로웠다.

그 여유로 우리는 이웃 마을 필라델피아로 진출하여 식도락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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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에 개업해 4대 째, 거의 백 년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deli sandwich 식당의 sandwich 크기는 어마무시해서 허리띠를 풀고 즐겨야만 했다. 음식 뿐만 아니라 주인이나 종원업, 인테리어 까지 지나온 세월만큼 여유로웠다.

느긋한 포만을 즐기며 가는 비 내리는 도시의 밤거리를 걷는 재미를 누려본 적이 언제였던지 가물거렸다.

엊저녁 포만이 이어져 여유로운 아침에 장자 한편을 읽다.

무릇 눈과 귀를 밖이 아닌 안으로 통하게 하고 마음의 작용을 안이 아닌 밖으로 쏠리게 하면 귀신마저도 머무는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는 두말 할 나위도 없지 않은가!

夫徇耳目內通(부순이목내통) 而外於心知(이외어심지) 鬼神將來舍(귀신장래사) 而況人乎(이황인호)

 

어느 주일 일기(日記)

오늘 아침에 루이지애나(Louisiana)에서 세명의 경찰관이 피살되었다는 보도이다. 잇단 미국내 총기 사건 소식들 뿐만 아니라 며칠전 프랑스의 대혁명 기념일에 일어났던 프랑스 니스테러 사건을 비롯한 지구촌 사건 사고들은 끊이지를 않는다.

보고 듣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보이고 들리는 한국내 뉴스들에 이르면 이즈음 찜통 열기에 이는 짜증이 더해진다. 개 돼지에서부터 종놈, 상놈에 이르게까지, 2016년 이 문명의 세월을 조선시대가 아닌 고대로 되돌려 살아가려가는 무뢰배들을 향해 치미는 화 때문이다.

오늘은 모처럼 필라델피아 나들이에 나서 다민족, 다문화 일치를 내세우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후 한국마켓 장을 보고 돌와왔다.

다민족, 다문화를 내세운 교회에서도 한인교회 또는 전통적인 미국인들 교회들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모습에 크게 실망하였다. 제임스 파울러(James Fowler)라는 이는 사람들의 신앙 깊이를 여섯 단계로 나누어 신앙발달 단계를 설명한바 있지만 교회 공동체의 신앙고백 수준도 그곳에 맞출 수 있을 듯하다.

파울러가 말한 겨우 두번 째 단계인 신화적이고 문자적인 단계(mythic-literal faith)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교회들의 모습에 이젠 조금 지치기도 한다.

한국마켓 장을 보러 갔다가 찜통 더위 속에서 세월호 소식지를 배포하고 있는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반가움도 잠시 이내 답답함으로 변했다. 무지하고 뻔뻔하게 자기밖에 모르는 내 나이 또래 사내의 목청 높은 소리 때문이었다.

그 자리를 급히 떠난 까닭은 내게 일행이 있었다기 보다는 “이 나이에 내가 뭘…”하는 주눅이 앞섰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돌아와 습관으로 성서에게 묻는다.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신을 향해.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를 주문하다.

민중의 적

하늘이 내린 이틀 연휴였습니다. 비록 눈치우노라고 다섯시간 가까이 운동 아닌 노동을 하였지만 넉넉한 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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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덮힌 동네 한바퀴를 돌고나서 입센(Henrik Ibsen)의 희곡 “민중의 적( An Enemy of the People)”을 읽었습니다.

예상되는 눈폭풍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강설량을 비롯한 하늘의 변화를 거의 분단위로 미리 알아 맞추어 사람들에게 대비케하는 21세기에, 19세기말 작가의 작품이 가당키나 한 것이냐는 생각도 없지 않았답니다.

읽고난 후의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사람 사는 일 또는 사람이란 참 변하지 않는 구석과 변하더라도 더디게 정말 더디게, 수천 수만년을 겪어야 변하는 것들이 있구나”하는 생각이었습니다.

19세기말 노르웨이에서 그 당시 세계, 곧 유럽이 중심이었던 세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불었던  예술 운동의 하나였던 리얼리즘(realism)을 내세운 입센의 작품 가운데 하나인 ‘민중의 적’은 바로 변하지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리얼리즘적인 작품이었습니다. 현실주의(現實主義) 또는 사실주의(寫實主義)라고 번역되어지지만 그저 사람사는 일들을 사진 찍듯 표현한 사실(寫實)적인 희곡입니다.

정말 간단히 작품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주인공인 스토크먼은 자기가 사는 동네 발전에 유익하다고 선전하며 강행되고 있는 사업인  온천개발 사업이 사실상 오염된 온천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건 아니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돈에 눈이 먼 지역 이기주의들<권력(시장을 비롯한 행정, 정치권력), 언론권력, 일반인들(민중들)>에 의해 ‘민중의 적’으로 낙인찍히는 과정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민중을 위해 나선 주인공이 민중의 적이되는 과정을 그린 것이지요.

작품속에선 민중을 향한 두개의 서로 다른 목소리를 이렇게 전합니다.

스토크만: 내겐 진실이 있고 민중이 함께합니다. 온천은 오염됐으며 정치도 썩었다고 외치겠습니다.

시장(mayor): “이 나라는 지금 파산 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어쩌다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모두 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정의를 외쳐대는 사람들 때문이 아닙니까? 행정 당국이 파괴되면 남는 게 뭡니까? 혁명과 혼란을 원하십니까?”…. “난 5년 안에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을 세계 최고의 부자 시민으로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장하는 대로 온천의 작은 문제를 확대하고 과장하여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민주적 권리’를 주장해도 되겠습니까?…. 죽느냐 사느냐를 가르는 선은 분명하게 그어져야 하고, 누군가 그 선을 넘을 때는 우리 민중은 그자의 목덜미를 움켜쥐고는 ‘안 돼!’라고 단호하게 선언해야 할 것입니다.”

스토크만: “‘다수’가 깨닫기 전에 먼저 한 사람의 ‘소수’가 알아야 하는 게 아닙니까? 진리는 언제나 같습니다. ‘소수의 권리’는 ‘다수’에게 공격을 받더라도 신성한 것입니다. (시장이 ‘저자의 입을 막으라’고 소리친다) 모두 알아두셔야 합니다. 온천물은 오염되었습니다.

주민들(민중): “오염이란 말 한마디만 더 하면 가만 안 둔다!” “이 동네에서 살기 싫으면 짐 싸가지고 조용히 떠나라!” “저놈을 체포하라!” “저놈은 간첩이다!” “적이다, 적! 적이다, 적! 강물 속에 쳐 넣어라!” “적이다!배반자! 반역이다!”

그리고 이제 민중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적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제가 “민중”이라는 말을 배운 것은 서남동, 안병무 목사님들에게서 입니다.

특별히 안병무선생님께서는 “민중이란 예수”라고 말씀하셨던 분입니다. 그는 예수란 어떤 개인적 인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인격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신 어른입니다. 민중과 예수는 더불어 함께라고 하셨습니다. 민중이 곧 예수라고 말한 이였습니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건’들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쯤 흥미로운 것은 예수는 바로 입센의 ‘민중의 적’에 나오는 ‘민중’들의 외침 곧 “저놈을 체포하라!” “저놈은 간첩이다!” “적이다, 적! 적이다, 적! 강물 속에 쳐 넣어라!” “적이다!배반자! 반역이다!”라는 소리에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事實)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실(寫實)적으로 믿는 것은 신앙입니다.

내가 눈이 내리는 이곳에 사는한 겨울이면 눈은 내릴 것이고, 눈을 치울 힘이 있는한 눈을 치우며 살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있는한 누구나 때론 민중이 되기도 하고 민중의 적이 되기도 하며 살 것입니다.

그리고…

무릇 신앙이란 결단이어야 합니다. 민중이라는 말 없이도.

가을과 부끄러움

화창한 시월 일요일 오후입니다. 동네 한바퀴를 돌았습니다.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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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하늘을 담은 동네 어귀 개울물도 참 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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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남짓, 이른 가을 오후를 만끽하며 그렇게 걸었습니다. 이마와 등줄기에 땀이 흐를즈음 다시 들어서는 집뜰에는 가을 햇살이 가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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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걸으며 제 머리속에 오간 몇 가지 생각들입니다.

오늘 오전에는 모처럼 교회 예배에 참석했었답니다. 오늘 주일 설교 본문이었던 성경 말씀이 머리 속을 오락가락했답니다.

“예수께서 뭍에 내리시니, 그 동네에 사는 귀신 들린 어떤 사람 하나가 예수를 만났다. 그는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았으며, 집에 머물러 있지 않고, 무덤에서 지내고 있었다.”(누가복음 8: 27)

“그래서 사람들이 일어난 그 일을 보러 나왔다. 그들은 예수께로 와서, 귀신들이 나가 버린 그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이 들어,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서 두려워하였다.”(누가복음 8: 35)

마태와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는 군대귀신 들린 자를 예수가 치유하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 성서 본문을 들어 “옷을 입지 않았”던 귀신 들린 상태에서 “옷을 입”은 정상적인 사람으로 돌아온 모습을 대비하며 “성령의 새 옷을 입은” 신앙인의 모습을 일깨우는 설교 말씀이 이어졌었습니다.

걷는 동안 구름 한점없는 맑은 하늘아래 가려야하는 모습들을 생각해 보았답니다.

옷은 패션의 상징이기 이전에 부끄러움을 가리는 상징입니다. 가린다는 말은 숨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릴 줄 안다는 것은 깨달음의 시작입니다.

걸음과 함께 제 머리속에는 부끄러움이 드러날수록 오히려 목청이 커지고, 부리는 권세의 칼날을 더욱 번득이는 이즈음 세태들이 이어졌습니다.

모세와 예수와 모하메드. 그 모두의 시작은 “신앞에서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사람”의 모습에서였습니다.

오늘 이 순간 저 푸른 하늘 아래서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이름으로 “남의 부끄러움”만을 탓하는 세상은 모두 가짜입니다.

무릇 모든 참된 신앙의 바탕은 부끄러움을 아는 일이고, 가릴 줄 아는 일입니다.

가라(GO) –기적 8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35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네가 깨끗해진 것을 그들에게 증명하여라. (마가  1 : 44)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마가 2 : 11) 

주께서 자비를 베풀어 너에게 얼마나 큰 일을 해 주셨는지 집에 가서 가족에게 알려라.(마가 5 : 19)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 (마가 5 : 34) 

예수께서는 “저 마을로는 돌아 가지 말아라” 하시며 그를 집으로 보내셨다. (마가 8 : 26)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마가 10 : 52) 

죽었던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셨다. (누가  7 : 15)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누가 17 : 19) 

일어나 요를 걷어 들고 걸어 가거라.(요한 5 : 9) 

소경은 가서 얼굴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 왔다.(요한 9 : 7)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7 : 44) 

영어와 한국어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언어 학습에 있어 이런 차이점들을 인정하고 그 차이들을 그대로 받아드리는(외우는) 방법이 학습효과를 높이기도 합니다. 

우리말 “오다”와 “가다”인 영어의 “come”과 “go”의 차이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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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직업은 세탁업이지요.  세탁소에 손님이 들어옵니다. 그 순간 카운터는 가게 뒤에서 일을 보고 있습니다. 그 때 카운터는 손님을 향해 “I’m coming.”하면서 손님이 기다리고 있는 카운터로 움직입니다. 

이 때 “I’m coming.”을 “내가 옵니다.”라고 하지 않지요. “제가 갑니다.”가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나고 자란 제 두 아이들은 비교적 한국말을 잘 하는 축에 속합니다.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거의 두나라 말을 구사하는데 불편이 없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 모두 종종 헷갈리게 말하는 것 가운데 하나 역시 바로  이 “오다”와 “가다”입니다. 

집에 오기로 한 시간에 도착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묻습니다. “어디냐?, 언제오냐?” 그러면 아이들의 대답이지요. “지금 올께” 또는 “지금 오고 있어.” 바로 “I’m coming”을 한국식으로 표현한 말이랍니다. 

뭐 이 정도야 서로 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예수를 믿는 신앙에 있어서 이 come과 go, 곧 오다와 가다를 헷갈리면 정말 잘못된 신앙에 빠질 수가 있답니다. 

예수는 치유기적을 행한 이후  치료받은 이들을 향해 “가라”로 명하셨습니다. 어디로 가라고 했습니까? 바로 가족에게로 돌아가라. 네가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네 병을 고쳐 주었으니 나를 따르라”라고 하거나, “내가 네 병을 고쳐 주었으니 세상 끝까지 돌아 다니면서 이를 알려라.”라고 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병을 고치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를 찾아갔던 사람들이나, 예수가 찾아갔던 사람들의 본래 소망은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 남들과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에서 떳떳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시대 당시의 나병환자를 비롯하여 병자나 신체불구자들은 사회로 부터 차단되어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는 “가라”, “네가 그렇게 원했던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깊게 살펴볼 지점이 하나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실로암못에서 눈 먼 사람을  고쳐주는 예수의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눈이 뜨여 세상을 다시 보게된 전에 소경이었던 사람을 향해 예수는 “가라”고 명하십니다. 집으로 돌아간 이 눈이 다시 뜨인 사람에 대한 후기가 이어집니다.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요한 9 : 34) – 눈을 뜬 전에 소경었던 사람을 맞이한 고향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그를 다시 내 쫓아 냈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병을 고쳐주고 “가라”고 명했습니다만, 그가 “가는” 곳의 환경을 바꾸는 기적을 행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길게 보면 “환경이 바뀐 기적들”을 확인할 수가 있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만든 이들은 “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이 지점이 예수의 기적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이해한답니다. 

이에 관련된 글 하나 함께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제가 몇 해전에 쓴 것인데  제 이해를 함께 하시는데 도움이 좀 될 것입니다.

가라(GO)! – go and sin no more (링크)

믿음 – 신의 무상급식법 -3

(당신의 천국 – 네번 째 이야기) 

성서는 묻지 않으면 침묵한다. 그런데 어떻게 묻느냐 하는 것이 그 대답을 유도한다. 성서를 자명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이미 대답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성서 대신 아집에 정좌하게 된다. – 안병무 

수년 전에 받았던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이 생각납니다. 호주에서 삼십여년 이민 목회를 담당하시다가 이제는 은퇴하신 어느 목사님께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흰 눈이 내리는 계절에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에 감사하라.”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시월의 주일 아침, 창밖을 내다 보다가 문득 떠오른 카드에 대한 추억입니다. 

가을을 누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의 축복인 셈입니다. 

우리들의 천국 이야기를 더 이어가기 전에 전제해야 할 것, 이왕이면 꼭 한번 짚고 넘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신앙, 종교라고해도 좋겠습니다. 글을 쓰는 저나 단 한 분이라도 제 글을 읽는 누군가나 서로 불편한 마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짚어보자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대해 “옳다, 그르다”의 판단이나 “맞다, 틀리다”의 잣대를 사용하지 말아달라는 전제입니다. 다만 “같다, 다르다” 라는 관점으로 읽어 주시면 편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지요. 

일테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탈애굽을 한 일단의 히브리 노예족들이 광야로 나와서 한달 반 쯤 이후에 터져나온 불평과 불만들을 출애굽기와 민수기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출 16:1-12, 17:1-7, 민 11:1-6, 14:1-3 등등) 

불평과 불만의 주된 내용들은 “배고프다, 고기 먹고 싶다, 목마르니 물 달라” 라는 사람들이 살기 위한 아주 기본적 욕구에 대한 것들입니다. 

야훼 신은 만나와 메추라기와 므리바 반석의 물로 사람들의 불평과 불만을 잠재운다는 것이 성서의 기록입니다. 

이런 성서의 기록을 보면서 해석하고, 따지고, 묻는 사람들의 성향을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봅니다. 아마 일반적으로 믿음, 신앙, 종교 등에 대한 태도들 역시 비슷할 것입니다. 

물론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 또는 종교 무관심자론자들은 별 뜻없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사람 사는 모양이라는 게 다 저마다 다른 법이니, 관심있는 이들을 이렇게 세가지 범주로 나누어 보는 것이지요. 

Point of View

첫째는 있는대로 믿는다는 사람들이 있겠습니다. 만나를 내려주시고, 메추라기 떼를 몰아다 주시고, 반석에서 때아닌 생수를 쏟아내 주신 분은 야훼 하나님이시고, 성서의 기록은 실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는동시에 오늘날 자신들이 신뢰하는 과학이라는 것으로 검증 가능하다는 사람들입니다. 

두번 째는 그런 기록들은 다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일테면 당시 탈출 노예들의 수를 다 먹일만한 메추라기떼가 날아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과학적 이론을 들이대거나 지금도 시내광야에 가면 연지벌레로 인해 생기는 만나와 똑같은 먹을 거리를 볼 수 있음으로 만나란 단지 자연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세번 째로는 신앙적 고백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나가 자연적 현상이던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이던 그것의 중요성 곧 역사적 사실 여부의 중요성 보다는 당시 사람들의 공동체가 자신들의 경험을 어떻게 고백했는냐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그 고백을 믿고 공유하는 것에 촛점을 맞추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에 대한 이런 서로 다른 입장은 비단 종교적 관점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문득 재미난 예가 생각납니다. 나이들수록 점점 더 확고해 지는 생각 가운데 하나가  한민족은 참 종교적인 인자의 뿌리가 깊다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의 기초노령연금에 대한 기사들을 보면서 한국인의 종교성을 떠올린 것이지요. 

지난해 12월 대통령 선거 후보들의 TV토론에서 당시 박근혜후보는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월 20만원씩 일괄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합니다. 이에 토론 상대인 문재인후보는 그러려면 돈이 필요한데 세금은 더 걷지 않겠다면서 돈 마련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박근혜후보가 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대통령 되려고 한다.” 

그리고 박근혜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출애굽기 16장을 보면 배고프다고 불평하는 무리들에게 야훼는 “내가 준다”라고 선언을 합니다. 모세를 비롯한 지도부나 불평을 늘어놓던 무리들 누구도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라고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내린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며 야훼가 일하셨다고 믿습니다. 믿음입니다. 신앙입니다. 

다행히도 박근혜가 신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왜?”라는 물음이 필요치 않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신처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말한(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나, 그녀를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들이나 저는 종교적 신앙행위로 해석해 본답니다. 

신앙 또는 믿음에 대한 세 부류의 사람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쯤 제 믿음의 방법과 제가 글을 쓰는 관점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사람들의 행위와 고백을 통해 만났고, 지금도 만나고 있고, 이후로도 만날 신에 대한 믿음 위에서 이 연재를 이어간다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