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왕(新生王) 장광선선생

어제 장광선 선생님 떠나신 지 두 해를 맞아 그를 기리는 조촐한 모임이 있었다. 아직도 그의 숨결과 손길을  느낄 수 있는 뉴저지 최남단 펜스빌(Pennsville) 선생님 댁에서였다. 변하지 않는 영원한 동지들인 선생의 가족들과 그를 따르던 선배, 동료 그리고 그의 뜻을 따르고자 애쓰는 후배 몇몇이 함께 한 자리였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장선생님을 미주 한인들이 이어온 한반도 통일 민주 민중 운동의 커다란 한 축이었던 사람, 또는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한 미국 동북부 한민족 자주 통일 민주 민중 운동의 선구자라고들 한다.

나 역시 그런 그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만, 그를 그렇게만 기억하진 않는다. 나는 그를 참 예수쟁이였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는 생전에 많은 글들을 썼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까닭도 그의 글 때문이었다. 한 동안 그는 지금은 없어진 한겨레신문 블로그였던 한토마에 그의 생각들을 거침없이 쓰곤 했다. 한토마를 비롯해 여러 지면에 글을 쓰면서 몇 개의 필명을 사용했던 그가 가장 많이 사용했던 필명은 신생왕이었다.

신생왕 바로 새로 태어난 왕이 바로 장광선선생이었다. 내가 그를 참 예수쟁이로 기억하는 까닭은 그가 말한 신생왕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사람, 사람들 바로 너와 나 그리고 그들 모두가 신과 사람 앞에서 왕이 되는 존재라는 생각으로 살았던 이었기 때문이다.

생전에 그는 오늘날 교회 모습에 대해 그야말로 신랄한 언사들을 마구 쏟아 내었다만, 나는 그의 말 속에서 그가 얼마나 예수쟁이로 살려고 애쓰는 지를 느끼곤 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예수를 따른다는 뜻이고, 따른다는 것은 예수와 자신이 동일하다는 생각으로 사는 것일게다.  예수 시대에 예수가 살았던 것 처럼 장선생은 그가 살았던 시절에 예수처럼 살려고 애썼던 사람이었다.

바로 사람답게 사는 삶을 생전 끝까지 쫓으려 했던 사람이 장광선선생이었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온 몸으로 그 삶을 추구하며, 이웃을 똑같이 그런 사람들로 바라보려 애썼던 사람이었다.

그의 민중, 민주, 통일 그리고 자주라는 뜻도 사람, 사람 하나 하나가 모두 신생왕이라는 그의 마음가짐과 눈높이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남도 장흥 사람 장광선선생, 그가 품었던 남도에서 백두까지 나아가 미주에서 전 세계까지 사람살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모두가 신생왕이 되는 세상을 꿈꾸는 씨앗 뿌리고 떠난 사람.

그를 기리며.

  1. 15. 2021

*** 지난 주에 텃밭에 뿌린 아욱과 근대들이 파랗게 싹을 틔우다. 한국 뉴스 속엔 광복회장 김원웅이 던진 말 돌멩이 맞은 이들이 난리 맞은 모양새다. 김원웅이 큰 물꼬 하나 텃다. 누군가들은 또 그 터진 물꼬 막으려 애쓸 것이고, 때론 예전보다 더 큰 뚝이 생길 수도 있겠다만 한번 터진 물꼬인데….언젠간 큰 물길 생기기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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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왕(新生王) 장광선선생

그는 왕이었다. 스스로 일컬어 신생왕(新生王).

참 이상한 일이었다. 뉴저지(New Jersey) 최남단 쇠락한 마을 펜스빌(Pennsville) 촌로였던 그에게 왕관은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1946년 전남 장흥 출생.

장흥에 대한 그의 기억 하나.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 학교에서 문예지를 만들었어요. 그때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해였는데, 저희 학교에 사범학교를 갓 졸업하고 오신 여선생님이 두 분 계셨어요. 한 분은 영어선생님이고 한 분은 국어 선생님이셨거든요. 국어 선생님이 허숙자 선생님이신데, 학생들을 모아 놓고 뭘 했으면 좋겠는가 물었어요. 그때 제가 “우리 문예지 한번 만들어봅시다.” 그랬더니, 아 그거 좋은 생각이라고 그러면서 문예지를 만들게 되었죠. 교실마다 돌아다니면서 아이들한테 글을 모집하고 등사판을 밀어서 만드는 거죠. 제가 며칠 밤을 세워가면서 글을 등사지에다 써 가지고 문예지를 만들었어요, 너무 기쁘잖아요. 각 교실마다 열 권 씩 배부를 했지요.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교장실에서 저를 부른 대요. 교장실에 들어갔더니 허숙자 선생님이 발발발 떨고 있더라고요. 교장선생님이 제가 들어가자 마자 지휘봉으로 머리를 막 때리는 거예요, 너무 황당 하잖아요.  들어가자 마자 얻어맞으니까요. 머리를 감싸 안고 왜 그러시냐고 항의를 했죠. “이 새끼 누구 죽일라고 그러냐” 고 그러는 거예요. 문제는 ‘동무’ 였어요. 교과서에도 ‘동무 동무 새동무’라는 문구가 있었고.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교장은 일 학년 짜리가 동무라는 말을 썼다고 누굴 죽일려고 그러냐고 다짜고짜 화를 내는 거요. 쓰레기 소각장으로 가더니 거기다 처넣고 불지르라는 거예요. 내가 태웠었요. “이게 교육이냐?” 어린 마음에 너무 뼈저린 거예요. >

그는 이미 왕이 될 상이었다.

탄피 하나 팔아먹을 재간 없이 월남 참전 용사 로 돌아 와 남도에서 농사짓던 그가 미국에 온 까닭이란다.

<대한민국 농촌 진흥원하고 미국 4H 클럽 사이에 한국 농업 연수 계획을 맺었대요. 농촌에서 4H 지도 활동을 하던 사람들을 미국에 보내가지고 선진 농업을 배워 와서 한국 농업을 발전시킨다, 이게 취지였거든요.>  – 그렇게 1972년에 밟은 땅 미국.

두 해 뒤 이민으로 이 땅에 삶을 디딘 후 오늘에 이르기 까지 고향 땅 한 번 다시 밟아보지 못하고 이 땅의 참 주인으로 살았던  신생왕.

그가 왕이 되기로 결심한 때는 아마도 1980년 광주 항쟁이 일어난 해일게다.

매사 진지했던 사람 장광선. 그는 온 몸, 온 삶으로 왕이고자 했다.

1980년 미주 5.18 진상규명 및 전두환 군부독재 타도 위원회를 조직한 일을 시작으로, 독립신문 편집장, 한국 수난자 가족 돕기 위원회 간사, 해외 한민보 편집장 및 논설위원, 미주 민주 국민연합 총무, 재미 한국청년연합 및 국제 평화 대행진 활동, 재미 한겨레 동포연합 재정부장 등등 그를 필요로 하는 곳에 늘 함께 했다.

그가 왕 노릇 하던 방법이다.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 운동하시는 분들이 제게 자주 질문을 해요. 그럴 때마다 저는 정말 부끄러운 것 밖에 없어요. 제가 뭘 했다거나 내세울 만한 게 정말 없어요. 제가 뭐 그런 이야기하면 뭐 겸손 떤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있는데 겸손해서가 아니고 사실 없어요. 실지로 없어요.>

<함께 쓰는 화장실 들어갔는데 화장지가 다 떨어졌으면 나오기 전에 새 화장지를 끼워 놓고 나오는 거…. 식사하러 식당에 들어갔다가 먹고 나서는 접시 하나 저쪽으로 옮겨줘서 일하는 웨이트리스들이 가져 가기 쉽게 해주는 …. 그게 모든 운동의 시작일 거예요.>

그렇게 왕 노릇 하시던 장광선 선생이 어제 밤 떠나셨다. 향년 일흔 셋. 떠나셨어도 왕관은 여전히 그의 것이다. 더욱 빛날….

사람 사랑, 조국 사랑으로 몸서리 치며 앓던 그의 삶을 되새기며…

왕과 함께 숨 쉬었던 짧은 시간 속에서 내가 누렸던 영광에 감사하며…

평안함이 함께 하시길.

**** 신생왕(新生王)은 선생의 필명 가운데 하나이다. 언젠가 나는 선생에게 말했었다. “장선생님은 천상 크리스챤이예요.” 그 때 그는 빙그레 웃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