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천국 – 예순 여덟 번 째 이야기)
기띰 출신의 마케도니아 사람으로 필립보의 아들인 알렉산더는 페르샤와 메대의 왕 다리우스를 쳐부수고 그 왕권을 차지하여 그리이스 왕국을 손에 넣은 다음, 수없이 전쟁을 하여 숱한 성을 점령하고 세상의 많은 왕을 죽였다. 알렉산더는 땅 끝까지 진격하여 여러 나라에서 많은 재물을 약탈하였다. 온 세상은 그 앞에 굴복하였고 그는 우쭐하여 오만해졌다. 그는 막강한 군대를 모아 여러 고을과 나라와 왕국을 굴복시키고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그 후 알렉산더는 앓아 눕게 되었는데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 어릴 적부터 자기와 함께 자라난 장교들 중에서 뛰어난 사람들을 불러, 죽기 전에 자기 왕국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알렉산더는 십이 년 동안 통치하고 죽은 것이다. 그 장교들은 제각기 자기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는데 알렉산더가 죽자 모두들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들의 자손들도 뒤를 이어 오랜 세월을 두고 집권하였다. 그들이 집권하는 동안 온 세상은 그들의 학정에 몹시 시달렸다. – 마카베오상 1 : 1- 9, 공동번역에서
기원전 491년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는 당시 도시국가들로 형성되어 있던 그리스의 각 도시국가들에게 사절들을 보냅니다. 페르시아 제국에 공물(貢物)을 바치라는 친서와 함께 말이지요. 대부분의 도시국가들이 대제국의 요구에 무릎을 꿇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이 요구를 거부합니다. 심지어 아테네는 사절을 죽여 버렸답니다.
이 일로 인해 벌어진 것이 마라톤전투로 잘 알려진 그리스와 페르시아와의 제1차 전쟁이랍니다. 이 전쟁에서 페르시아는 6,400여명이 목숨을 잃은 반면, 그리스는 단지 192명의 전사자를 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0년 뒤에는 다리우스 1세의 왕위를 이어받은 크세르크세스가 260만명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로 돌격해 왔다고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토스가 그의 책 <역사>에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후세의 사가들은 이 숫자는 허풍이고 대략 35만 명의 페르시아 군대가 그리스 반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스파르타의 영웅적 싸움을 전하는 테르모필레 전투로 알려진 제 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 역시 해전에서 완승을 거둔 그리스 연합군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제국인 페르시아와의 싸움에서 이긴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역사의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각기 동맹을 형성하고 약 30년간에 이르는 오랜 전쟁을 치릅니다. 펠로폰네소스전쟁(기원전 431~404)이라고 불리우는 전쟁입니다. 이 전쟁으로 아테네는 멸망에 가까운 지경에 이르게 되고 반도의 주인은 스파르타가 되지만 그것도 잠깐이고 기원전 400년에 주인은 테베로 바뀝니다.
그 무렵 그리스 반도 북부에 있던 마케도니아왕국은 페르시아의 식민지였으며 그리스 반도 안에 있는 다른 도시국가들에 비해 그 세력이 미약하였습니다. 그 마케도니아에 필립 2세(필리포스 2세)가 왕위에 오른 것은 기원전 359년의 일입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고 기원전 336년 암살당할 때 까지 그리스 반도는 마케도니아 수중에 놓이게 됩니다.
필립 2세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사람이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입니다. 그이 나이 스무살 때의 일입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와 왕위 승계를 다투던 형제들을 모두 죽여 버립니다. 약관 스무 살 어린 왕을 우습게 본 그리스내 도시국가들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약 일년에 걸친 싸움에 모두 알렉산더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그의 나이 23살 때 잇소스 전투에서 페르시아를 무너뜨리고, 24살 때 이집트를 점령합니다. 이 때 예루살렘은 잽싸게 성문을 열고 항복을 합니다. 그리고 26살 때 페르시아를 점령합니다. 그리고 동으로 동으로 전진하여 인도 접경까지 이릅니다. 이 때 동으로 전진하면서 많은 신도시들을 세우고 도시의 이름을 하나같이 알렉산드리아라고 명합니다. 그 가운데 나중에 우리들이 관심을 가지고 찾아갈 곳은 이집트 북쪽에 있는 지중해의 진주라고 불리우는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알렉산더는 정복전쟁을 치루면서 군대와 함께 수많은 비전투원들을 거느리고 다녔습니다. 수행원들은 물론이고, 운동선수, 배우, 심지어 매춘부들 까지 거느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점령하는 곳 마다 그 곳 문화를 받아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이민족간의 결혼을 장려하기도 했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충돌하기도 하면서 융합되어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무서운 기세로 넓은 땅을 점령해 나가던 알렉산더의 나이 34살 때 그는 급작스런 죽음을 맞이합니다. 정복지 바벨론에서 급서한 그의 죽음에 대한 설명에는 여러 설들이 있습니다. 암살설, 지나친 음주 탓 설, 너무 빠른 성공으로 인한 의욕상실설 등이 있지만 대세는 말라리아 감염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답니다.
기원전 323년에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알렉산더 이후의 이 신흥 제국은 급격한 분열을 맞게됩니다. 그의 휘하에 있던 장수들 사이에 극심한 권력투쟁이 일어납니다. 이들을 ‘디아도치(diadochi)’라고 하는데 후계자라는 뜻이랍니다. 서로 서로 알렉산더의 후계자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약 20년 넘게 투쟁을 벌인답니다.
그리고 마침내 프톨레마이오스 왕국(305-30 BC, 주로 이집트지역), 셀류커스 제국(312-63 BC, 레반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등의 시리아지역), 마케도니아 왕국의 안티고노스 왕조(306-168 BC)로 나누어집니다.
이 가운데 우리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왕조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과 셀류커스 제국입니다.
알렉산더가 이집트를 점령하자 페르시아 식민지 유다는 이 신흥제국에 항복을 합니다. 페르시아 식민지에서 그리스 식민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즈음 사마리아에서 신흥제국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고 알렉산더의 강력한 보복이 이루어집니다. 이 때 대량학살 당한 사마리아인들의 유골이 발굴되어 그 때의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답니다. 여타의 다른 유다지역에서는 알렉산더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 드렸답니다.
알렉산더의 죽음 이후 나누어진 세 개의 왕국들이 치열하게 세 다툼 전쟁을 벌일 때 팔레스타인의 유다는 그 싸움의 한 복판에서 여러 피해를 입게 됩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북부 지방이 이들 세 왕조의 세력이 맞붙은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을 확보한 것은 이집트를 근거로 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였습니다. 이집트 헬레니즘이 지배하는 식민지가 된 것입니다. 페르시아 식민지였을 때는 유대계 총독과 성전의 대사제가 다스리는 체제였는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대사제를 명목상 유대의 수반으로 하고 이집트계의 민정관리인 총독을 두어 다스리게 했습니다.
페르시아의 식민지 시절보다 가혹한 공물과 조세부담에 시달리는 시대를 맞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공물이나 세금 징수를 맡는 관리들은 거의 유대인들이었으므로 같은 민족 안에서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극명하게 드러나기도 한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일어난 주요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유대 디아스포라들 사이에서 일기 시작한 유대인의 정체성 찾기 운동입니다. 팔레스타인을 떠나 살며 이미 그리스화된 유대인들은 그들의 말인 히브리어를 버리고 헬라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의 중심지로 떠오른 곳이 바로 이집트 북부의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이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다인들이 중심이 되어 성서의 그리스어 번역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또한 이들은 히브리즘과 헬레니즘을 융합시키는 주인공이 됩니다. 특히 이들은 정통 유대교가 형성되면서 혈통과 전통을 중시하는 이들 랍비 유대교로부터 배척의 대상이 되고, 후에 바울의 기독교 선교 운동의 첨병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의 항거들이 몇 차례 있기는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팔레스타인 지배는 기원전 198년까지 이어집니다.
시리아지역을 기반으로 세를 유지해 온 셀류커스 왕조의 안티쿠오스 3세가 팔레스타인 지배권을 차지한 것은 기원전 198년이고, 이 시대로부터 팔레스타인 유대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징후는 성전 권력의 썩을대로 썩은 부패로 부터 나타납니다. 이 무렵(기원전 174년경)부터 성전의 대제사장 자리를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일들이 벌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