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가게 문을 닫으려고 준비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이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는 내용이 대개 뻔하다. ‘곧 문닫지요? 제가 맡긴 옷이 오늘 저녁 꼭 필요한데…. 지금 가고 있는 중인데…. 교통사정이 복잡해서…. 5분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대충 그런 내용의 전화가 대부분이어서 때론 내 귀가길을 한참 동안 붙잡곤 한다. 하여 반갑지 않다.

아내가 전화를 받더니 한국말로 응대를 한다. “잠깐만요…”하더니만,  “한국인데…”하며 내게 전화기를 건넨다.

“예, 여보세요…”하는 내 말에 수화기에서 들려온 말, “야! 나야, 나!”, 그 목소리만으로도 대뜸 누군지 알아채곤 던진 내 말. “엉? 너 아직 살아있냐?” 중, 고, 대학교 동창인 박(朴)이었다.

얼굴 본 지 십 수년이 지나 목소리로 만나 떠든 그와의 수다로 아내의 귀가 길 발목을 잡았다.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일도 정년으로 그만둔 지 벌써 다섯해가 되었단다. 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한 지도 제법 되었지만 아직도 낯설단다. 백세를 넘기신 그의 어머니 이야기와 아흔 여섯을 넘기신 내 아버지 이야기, 서로의 아이들 이야기…

“야! 니 목소리 들으니 넌 하나도 안 변하고 옛날이랑 똑같은 것 같은데…”라는 그의 물음에 내가 던진 말, “글쎄… 아무 생각없이 살아서 그런가?”

십 수년 전에 그를 만났을 때 혼자였던 그의 생활이 궁금해 내가 물었다. “그래, 누구랑 사니?”. 그의 대답, “응, 십년 됐어. 재혼한지.”

“그래, 잘 했다. 늙막에 함께 하는 동무 있어야지. 뭐 딴 거 있냐? 건강하자!”

집에 돌아와 저녁상 물린 후 뒷 뜰에 앉아 해질녘까지 시간에 대한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새롭게 다가오는 꽃들의 이야기도 들으며.

오래된 삶의 이야기들을 들으려 이즈음 다시 넘기고 있는 책장들은 그대로 덮어 둔 채, 내가 맺어 온 짧은 연(緣)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보내는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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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내가 26년생…. 지금은 22년…. 백 년이 얼마 안 남았네…. 참 오래도 살았다. 이젠 가야 되는데…” 휠체어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시며 중얼거리시는 아버지는 이즈음 정신이 아주 맑으시다. 식사량도 그렇고 잡숫는 즐거움도 맘껏 누리시는 편이다. 오늘 같기만 하시다면 백수(白壽) 아닌 백수(百壽)도 욕심만이 아닐 듯 하다.

어제 이발을 했다. 이발을 해주시는 이가 내게 덕담을 건넸다. “아니 어쩜 이 연세에 흰머리 없이 까마세요.” 그러던 그가 깜작 놀라며 조금은 호들갑스럽게 “아이고, 이거 어떡하죠? 여기 머리 빠진 걸 모르고 너무 짧게 짤라 버렸네요.  어떡하죠?” 하며 미안해 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뒤통수는 내가 볼 수도 없고, 내 머리 쳐다볼 사람도 없고, 설마 구멍난 거 본들 뭐 문제 있나요?”

“참 낙곽적이신데도 스트레스를 받으시나 봐요? 원형탈모는 스트레스 때문이라던데요…”계속되는 그 이의 말을 이렇게 막았었다. “스트레스는 무슨… 그냥 때 되니까 빠졌다 났다를 반복하는 것이지요. 아직은 다시 나니까 괜찮아요. 머리털 없이 사는 사람들도 많는데… 그저 나이들어 가는 증상일 뿐인걸요.”

오늘 아버지와 잠시 함께 했던 시간을 빼곤 온종일 뜰에서 지냈다. 화단에 잡초를 뽑고 멀칭을 입히고, 여름 구근과 응달 식물도 심고, 꽃씨도 뿌렸다. 토마토와 고추 모종도 심고, 완두콩, 시금치, 열무, 배추, 상추 등속이 올라오는 텃밭 잡초들도 뽑아 주었다.

백 년, 칠십 년이 아니라 내겐 아직 하루 해가 짧다.

저녁나절 간지러운 봄바람 타고 내 귀를 홀리는 새소리와 풍경소리에 이는 춘정(春情)을 달래려 한 잔 술을 벗삼다.

분홍 봄꽃은 비나리로 연등처럼 걸렸고 하늘엔 시간이 비행기를 타고 흐른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려 보는 말. “스트레스 없는 사람, 걱정과 염려 없는 사람, 분노와 미움 없는 사람이 있을까? 그냥 시간을 효소 삼아 사는게지.”

시간(時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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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정리를 하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내 서재 한구석에 쌓아 둔 상자 두개가 있다. 제법 많은 양의 VHS 테이프들이다.

당시만 하여도 제법 큰 돈을 들여 만들었던 우리 부부 결혼식 영상을 비롯해 아이들을 키우면서 담아두었던 기록들, 부모님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담긴 테이프들이다. 80년대에 비디오를 찍는 가정용 카메라는 가히 이즈음 방송용 카메라 정도의 크기였거니와 한국과 미국을 왕복할 수 있는 비행기 값보다도 비쌀 만큼 내겐 고가(高價)였다. 과감히 그 돈을 들여 담아 두었던 기록들이다.

그냥 버리자니 너무 아깝고, 쌓아 두자니 부피도 크거니와 딱히 누가 시간 내어 볼 일도 아니어서 그냥 한구석에 처박아 둔 것이다.

VHS테이프를 디지털화해서 CD나 USB 등에 담아 준다는 광고들은 이따금 보았지만 또 다시 돈 들여 그렇게 남겨둔 들 그게 뭔 소용이 있겠나 싶은 생각에 그야말로 유기상태로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상자들이다.

그러다 맘먹고 내 스스로 VHS테이프 영상을 디지털 파일로 변환시켜  USB에 담을 수 있는 방법을  구글에게 묻고, 다른 사람들이 올린 경험들을 찾아본 뒤 파일 변환기와 편집기를 구입해 작업을 시작한다. 따져보니 128기가 USB 하나나 두개면 족할 듯 하다.

저 큰 상자 두개를 내 새끼 손가락 하나 크기에 다 담을 수 있는 그야말로 천지개벽 세상이다. 물론 이즈음 젊은이들에겐 싱겁지도 않은 일이겠다만.

아무튼 세상은 그렇게 변했다.

아직도 날은 뜨겁다. 이제 겨우 팔월 초입이니 이 더위는 한동안 이어질 게다. 바이러스 확진자와 사망자 수는 큰 변화없이 이어지는데 사람들은 이미 다시 느슨해졌다.

또 다시 찌는 오후에 어머니와 장인, 장모 쉬시는 곳을 찾다. 우리 부부가 기억하는 한 어머니와 장인 장모는 아직 살아 계신다. 우리 부부의 삶에서 느껴야 할 족(足)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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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차마 인정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놀랍게 바뀌고 변하게 마련이지만 아주아주 오래전 먼저 깨달은 사람들의 고민들은 여전하고 답(答)도 이미 정해진 그대로다.

누구에게나 똑 같을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한 시간 또는 신(神)의 간섭은.

하여 오늘 하루 누린 시간에 대한 감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