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

가을이 편히 쉬고 있는 숲길을 걸었다. 먼 길 걸어와 노곤한 몸 따뜻한 온돌에 누인 듯 가을은 그렇게 쉬고 있었다. 이따금 이는 소슬바람과 내 발자국 소리가 가을을 깨곤 했지만 숲은 이미 가을을 깊게 품고 있었다.

횡재였다. 집 가까이 새로운 산책길을 찾은 오늘 내 운세다. 숲길에 홀려 걷다 보니 지나쳤던지 오랜만에 긴 낮잠도 즐겼다.

김진균이 쓴 ‘죽음과 부활의 신학’을 만지작 거리다 책장을 덮었다.

아침 나절 찾아 뵌 어머니는 넋 나간 눈길로 중얼거리셨다. ‘왜 이리 안 데려 가신다니…’.

아버지는 우리 네 남매 전화번호만 달랑 저장하고 있는 아이폰을 목에 걸었다 어깨에 걸었다 하시며 ‘빨리 받지를 못해요…’를 반복하셨다.

햇볕 잘 드는 창가에 놓인 쟁반에는 자른 사과 조각들이 마르고 있었다. 삐뚤빼둘 도무지 어느 한군데도 가지런한 곳 없는 조각들도 보아 아버지 솜씨였다. ‘아이고, 우리 아버지가 사과도 다 깍아서 말리시나?’하는 내 소리에 아버지는 나쁜 짓 하다 걸린 아이처럼 작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마른 사과 혹시 네 어머니가 자실까해서…’

가을이 쉬는 계절이다.

깨어날 봄을 믿으며… 숲길에서.

DSC08426 DSC08427 DSC08430 DSC08434 DSC08443 DSC08444 DSC08454 DSC08456 DSC08458 DSC08472 DSC08476 DSC08482 DSC08486 DSC08490

가을 밤

가을이 깊어 가는 화창한 토요일 오후, 아내와 함께 숲길을 걷다.

DSC08005 DSC08008 DSC08012 DSC08017 DSC08019 DSC08023 DSC08024 DSC08062 DSC08063 DSC08066 DSC08067 DSC08070

‘으흠… 나무들이 내쉬는 숨이 이 숲을 채우고 있다는 말이렸다!’ 아내는 어디서나 밝다.

1019191401

두어 시간 산책으로 한 주간 노동의 피로를 씻다. 날다 지친 잠자리 한 마리 내 등에 업혀 함께 걷다.

저녁 나절, 육영수가 지은 <혁명의 배반, 저항의 역사>를 훑어 읽다.

DSC08075

‘프랑스 혁명에 대한 주류해석이 가부장적 사고방식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을 페미니스트 입장에서 재성찰하고….’ 책을 소개하는 저자의 말이다.

그리고 그가 에필로그에 남긴 소명과 소망.

‘일상생활정치에서 자발적으로 왕따 당하려는 용기와 독립심은 나의 특권이며 역사적 소명이다.’

‘공장 바깥에 있는 노동자, 학교 바깥에 있는 학생, 감옥 바깥에서 생산되는 품행방정 남녀들, 국가 바깥에 있는 이주노동자와 다문화가정, 이들 모두에게 혁명은 실패나 성공으로 마감되는 권력다툼이 아니라 계속되어야 할 열정 그 자체이다.’

‘너와 나의 또 다른 시작은 일상적으로 가볍지만 정치적으로 진지한 저항의 박자에 실려 비누거품처럼 온 세상에 번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권력의 여의주를 움켜진 악마가 늙을수록 뻔뻔하고 노회해지는 것에 반비례해, 우리의 연대와 투쟁은 뱀처럼 매끄럽고 모꼬지처럼 흥겹고 늠름할 것이다.’

한국 여의도 광장을 비롯해 곳곳에서 실패와 성공을 넘어 열정 그 자체로 전혀 새로운 혁명의 역사를 쓰고 있는 대한민국의 시민들을 생각하며…

가을 밤에.

혼자 걷기엔 숲길이 딱 제 격이다. 동네 Middle Run Valley 숲길을 걷다. 나무 사이를 헤집고 들어오는 햇살을 타고 가을이 숲속에 내려 앉았다. 아직 미련이 많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여름도 그 숲속에 함께 했다. 두어 시간 숲길을 걷는 사이에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다. 일주일 쌓인 노동의 피로와 이런저런 삶의 염려들을 땀과 함께 숲속에 내려 놓다. 오늘따라 인적이 매우 드물어 숲속을 홀로 향유한 즐거움이 크다.

DSC07732

DSC07733

DSC07745

DSC07746

DSC07761

DSC07766

DSC07778

DSC07783

오후에 아내와 함께 필라 나들이를 다녀오다. 모국의 조국 정국에 맞추어 뜻 맞는 이들이 만든 행사에 머릿수 하나라도 채울 겸 해서 나선 길이다. 즉흥적으로 벌인 일이건만 준비들을 참 많이 했다. 생각이 엇비슷한 이들의 얼굴을 보는 일만으로도 살아있는 즐거움이다. 그 즐거움으로 또 한 주간의 삶을 맞자.

DSC07807

DSC07800

DSC07821

photo_2019-09-29_20-34-10

길 걷기

길을 따라 길을 걷다.

이즈음 틈나면 걷는 길 위에서 얻는 즐거움이 크다. 크다 하지만 뭐 행복 운운할 만큼 대단하지는  않거니와 삶의 뜻을 따질 만큼 깊지도 않다. 그래도 그 즐거움은 여전히 크다. Middle Run Valley 숲길은 그저 길을 따라 걸으며 얻는 즐거움이 아주 크다.

풀숲을 헤집고 걷는 길은 문득 신촌 안산 숲길에 가 닿기도 하고, 아름드리나무들 사이로 스민 오월 햇살에 홀리다 내 스무살 언저리 무주구천동에 이르기도 한다.

즐거움은 그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 부부가 노인들 식당이라고 부르던 Perkins Restaurant 가까이에 이런 깊은 숲길에 있다는 점이다. 올들어 아내와 내가 아침식사를 가장 많이 하는 곳, 바로 Perkins Restaurant이다. 집과 가게를 오가는 길 한 가운데 있는 숲길이다.

한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하루 길 넘는 먼 여행은 나설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동네 길을 찾아 걷기 시작한 일인데 그 즐거움이 여간하지 않다.

내 생각과 다르게 일상화 된 삶 역시 살만한 것이다. 아무렴!
DSC05655 DSC05656 DSC05657 DSC05659 DSC05665 DSC05673 DSC05676 DSC05681 DSC05687 DSC05688 DSC05694 DSC05695 DSC05696 DSC05697 DSC05699 DSC05701 DSC05706 DSC05713 DSC05716 DSC05719 DSC05720 DSC05722 DSC05724 DSC05740 DSC05741

이따금 산악용 자전거를 타고 길을 달리는 이들과 반려견과 함께 뛰는 젊은이를 만나기도 하고, 옛풍습을 따라 사는 Amish 마을 처자나  늙어가는 남편이 불안한지 잔소리를 이어가는 내 또래일 마나님과 그들 부부의 길을 안내하는 반려견을 만나기도 하며…

연휴에 느긋한 마음이 되어, 길안내 표지를 쳐다보지 않고 그저 길을 따라 숲길을 걸었다.

 

숲길

봄과 여름 사이의 빛깔. 오늘 숲길이 입고 있던 옷 색깔이다. 비록 한 시간 남짓 짧은 시간이지만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홀로 걷는 숲길에서 맛보는 기쁨은 참 크다.

한 주간 쌓인 내 삶의 피로 위에 세상 뉴스들이 얹혀주는 무게를 이고 걷다가 숲의 여린 빛깔과 고목에 깊게 패인 주름이 주는 위안에 내 걸음은 경쾌해 진다.

솔직히 교회에 가거나 내 방에 앉아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 숲길을 걸을 때 나는 신에게 더 가깝다.

DSC05194 DSC05196 DSC05197 DSC05205 DSC05206 DSC05211 DSC05214 DSC05218 DSC05222 DSC05225DSC05229 DSC05233

숲길

주일 아침 아내가 교회에 간 시간에 거닌 동네 White Clay Creek 공원 숲길은 이미 늦가을이었다.

낙엽 밟는 내 발자국 소리와 풀벌레 소리, 새소리에 취한 탓이었는지 생각은 자꾸 어린 시절 신촌 안산길을 걷고 있었다. 귓속말로 사랑을 나누던 노루 두 마리가 내 발자국 소리에 놀라 튀는 통에 화들짝 안산길에서 White Clay Creek 공원 숲길로 돌아왔다.

숲이 동네 가까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그 고마움을 이 나이에 깨달은 내가 이즈음 대견하다.

DSC04187A DSC04191A DSC04194A DSC04195 DSC04199 DSC04200 DSC04202 DSC04204 DSC04224 DSC04228 DSC04235

기차여행 – 14

요세미티 숲길을 걸어…

요세미티는 엄청난 위용으로 다가왔다.

dsc02274a

우리가 택한 진입로인 Tioga Pass 도로는 11월에서 이듬해 5월까지는 길이 폐쇄된다고 한다. 눈 때문이란다. 엄청난 위용으로 앞을 가로 막고 서 있는 Tioga Peak의 높이는 고도 11,526ft(3513m)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는 차창 밖 풍경을 보면서, 운전대 옆으로는 시선이 가지 않았다. 오금 저리는 절벽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dsc02277a

해발 9945ft(3031m)지점에 이르러서야 공원 입장권을 구입하는 입구가 나왔다.

dsc02278a

Porcupine Flat 지점에 이르러 우리는 숲길을 걷기로 했다.

3871985503_dabeac4260_z

dsc02291a

동네 언덕길 아니면 고작 펜실베니아 Pocono 산(2,133 ft ,650 m) 정도, 그것도 길어야  1마일 정도 걸어본 경험이 전무인 우리들에게 조금은 과감한 도전이었다. 기억컨데 설악산을 마지막으로 오른 이후 산행은 처음이니, 약 35년 만의 일이다.

dsc02307a

dsc02312a

우리는 왕복 8.8마일(약 14km) 거리를 걷기로 하고 떠났다. 그러나 이내 깨달았다.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dsc02315a

그것은 평균고도 8000ft(2440m)라는 고지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나이와 평소 소홀했던 운동 탓이었다.

우리는 왕복 4.4마일(약 7km) 거리인 Indian Rock을 오가는 것으로 급히 계획을 수정하였다. 그 수정은 아주 적절하였다.

dsc02322a

숲길을 걸으며 나는 그즈음 가슴 깊은 곳을 짓눌러 딱히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주던 내 쓰잘데 없는 걱정거리들을 버릴 수 있었다.

dsc02326a

dsc02342a

갑자기 쏟아진 폭우와 천둥번개는 하산길 도로 곳곳에 낙석을 깔아 놓았다.

비가 개인 후, 요세미티를 등진 하늘 끝에는 무지개가 파스텔화를 그리고 있었다.
dsc02348a

20160911_135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