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反逆) – 왕국 14

(당신의 천국 – 스물 아홉 번 째 이야기) 

솔로몬은 무려 칠백 명이나 되는 후궁을 거느렸고 그 외에 수청드는 여자가 삼백 명이나 되었다. 왕은 여인들에게 빠져 마음이 흐려졌으며 진실을 보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 열왕기상  11 : 3 

야훼께서 솔로몬에게 노하셨다.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를 마음으로부터 저버렸기 때문이었다. – 열왕기상 11 : 9 

(예언자) 아히야는 자기가 입고 있던 새옷을 벗어서 열 두조각으로 찢었다. 그러면서 여로보암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 중략 – “잘 들어라. 내가 솔로몬의 손안에 있는 이 나라를 찢어 너에게 열 지파를 주리라.” – 열왕기상 11 : 30- 32, 이상 공동번역 

혹시 해동증자(海東曾子)라는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해동(海東)은 옛날 중국에서 한반도를 지칭하는 말 가운데 하나랍니다. 증자(曾子)는 아주 뛰어난 공자(孔子)의 제자로서 적통을 이어 받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답니다. 특히 증자는 효(孝)에 관한 한 대가로 알려져 있고 그가 쓴 책이 효경(孝經)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해동증자, 곧 한반도의 증자같은 사람은 누굴까요? 아마 아주 예상 밖의 인물일 겝니다. 바로 백제의 마지막 임금이랍니다. 삼천궁녀로 유명한 바로 그 의자왕(義慈王)입니다. 누가 그렇게 기록하고 있느냐고요?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당서(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편에 나오는 말이랍니다. 

낙화암

백제  31대 임금인 의자왕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답니다. 그 첫번 째 까닭은 역사의 승리자였던 신라 위주로 기록한 김부식의 삼국사기 때문이지요. 이제는 여러 연구 결과들로 인해 의자왕의 제 모습들이 많이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가 삼천 궁녀 이야기지요. 물론 의자왕이 술과 여자를 좋아했던 것은 틀림없었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삼천 명의 궁녀를 거느리는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의자왕으로부터 약 750년 쯤 뒤에 생긴 조선시대 임금들이 거느린 궁녀 수가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을 때 600 – 700명 정도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일이랍니다. 

그런데 왜 삼천궁녀 소리가 나왔을까요? 한마디로 뻥이고요, 중국의 천자는 삼천궁녀를 거느린다는 민간적 속설(이 또한 뻥이랍니다.)이 의자왕 이야기에 결합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솔로몬이 거느렸었다는 천명의 여자들은 사실일까요? 

그  또한 불가능한 일이랍니다. 솔로몬 역시 여색을 즐긴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거느리는 여자들이 많았다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 많다는 뜻으로 천이라는 숫자가 사용되었다는 것이지요. 

일테면 “만백성”의 ‘만’이 숫자가 아닌 온나라의 사람들을 뜻하듯이, ‘천’이라는 숫자는 보통사람들은 상상하지 못할만큼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고 살았다는 이야기를 강조한 것이지요. 

그런데 솔로몬이 천명의 여자를 거느리고 살았건, 만명의 여자를 거느리고 살았건, 이미 야훼 하나님이 약속하신 부귀 영화인데 도대체 무슨 잘못이 있었을까요? 그만큼 누리는 게 다 야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말입니다. 

사실 솔로몬은 다윗의 그늘 아래 있는 인물입니다. 솔로몬이 여색을 밝힌 것 까지는 그 당시의 여건으로봐서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랍니다. 다만 그 여자들 중 많은 이들이 이스라엘 전통을 지닌 여자들이 아니라 다른 문화 전통을 이어받은 이른바 외국 출신들이라는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여건을 만든 것은 솔로몬이 아니라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이 가나안을 통일하면서 내건 정책이 바로 포용정책이었지요. 남쪽 유대, 북쪽 이스라엘, 가나안 원주민, 블레셋 등등 모든 것들을 포용한 것이지요. 

성서 기록에 따르면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자마다 첫 번 째로 한 일이 이집트 왕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었답니다. 이른바 결혼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열왕기상 3: 1-2) 이런 일은 바로 다윗이 시작한 일이랍니다. 그리고나선 온갖 주변 이방 출신 여인들을 맞아 드립니다. 

짧은 시간에 급격하게 문화가 섞이면서 좋은 점 나쁜 점들이 극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우선 좋은 점들은 당시 이집트면 중동의 중심 문화권이었으니 앞서 나가는 문화들을 받아 드린 것이겠지요. 이를테면 문자, 건축, 법률, 산술을 비롯하여 아주 중요한 세제(세금 거두는 일) 등등을 새롭게 받아 드린 것이지요. 왕국이 발전 할 수 있는 요인들이지요. 

수많은 그런 긍정적인 요인들을 단 한숨에 날려버리는 부정적인 요소는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를 이방 여자들이 섬기는 신들과 같은 반열에 놓거나 때론 외면하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답니다. 바로 “사람”의 “한계”를 솔로몬이 보여주는 것이지요. 제 아무리 송사에 대한 재판에 능한 지혜를 지닌 솔로몬도 베겟머리 송사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는 것이고, 그런 일들은 사람 일반의 문제라는 깨달음이지요. 

두번 째 요인 역시 아버지 다윗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다윗의 인구조사 또는 병적조사인데요. 야훼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다윗은 하고 말았지요, 성서는 그것을 죄라고 단정했지요. 도대체 왜 그 일이 죄가 될까요? 바로 솔로몬이 그 일이 죄가 된다는 것을 인증하게 된답니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지만 옛날의 인구조사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행해진 일입니다. 바로 백성들에게 의무를 지울 목적이 있었던 것이지요. 세금과 부역(군사및 노역), 곧 돈을 거두어 들이고 군대에 병력으로 차출하거나 국가적으로 벌이는 노역에 차출하는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었답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그런 일들은 신의 권한이라고 믿었고, 사람이 사람들을 향해 그런 권한을 누릴 수 없다고 고백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처음 왕국을 세울 때 야훼 하나님과 양보와 이해의 선을 긋는 이야기들은 지난 이야기에서 이미 말씀드린 적이 있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선을 양보하면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알고 계셨던 것이랍니다. 솔로몬이 그걸 보여 준 것이랍니다. 

야훼의 성전, 솔로몬의 성전을 비롯한 주요 국가 시설물들을 건축하는데 필요한 것은 바로 돈이지요. 그 돈이 어디에서 날까요? 누가 그 노동을 했을까요? 

다윗 시절만 하여도 성서는 세금 이야기를 전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꿈이었고, 솔로몬은 현실이었지요. 

솔로몬는 이제 세금을 거두어 드리게 되고, 처음엔 자의 힘으로 거두었다고 생각한 노예 또는 이방인들을 노동에 동원시키지만 손이 딸리면서 동족인 유태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까지 그런 일에 동원하게 된답니다. 

이제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될까요? 

반역(反逆)이랍니다. 

통일왕국이 무너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도 다윗의 치맛폭(?) 부성의 힘이 작용한답니다. 솔로몬대 까지는 아비 다윗의 충성 때문에 봐 준다는 것입니다. 성서가 그렇게 기록하고 있답니다. 그렇게 솔로몬은 야훼의 약속대로 모든 영화를 다 누리며 아비 다윗이 간 길을 간답니다. 

이제 우리들이 누리고 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 이야기는 세 번 째로 큰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평등, 계약. 

제가 지난 글들에서 말씀드렸던 중요한 낱말들입니다.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는 ‘예언’ 입니다.

성공신화 – 왕국 12

(당신의 천국 – 스물 일곱 번 째 이야기) 

하느님께서 솔로몬에게 대답하셨다. “부귀영화를 청하지도 않고 원수의 목을 청하지도 않으며, 오래 살도록 해 달라고 청하지도 않고 내가 맡겨 준 이 백성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갖추어야 할 슬기와 지식을 달라고 청하다니, 네 뜻이 갸륵하구나. 슬기와 지식 뿐이랴? 내가 너에게 부귀와 영화도 주리니, 너와 같은 임금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다시 없으리라.” – 역대기하 1 : 11-12, 공동번역 

아주 오래 전 중국에 제자백가(諸子百家, Hundred Schools of Thought) 또는 백가쟁명(百家爭鳴, Contention of a Hundred Schools of Thought)의 시대가 있었지요. 공자, 맹자, 노자, 장자, 순자 등이 노닐던 시절 이야기 말입니다. 이름하여 춘추전국시대의 일이었지요. 춘추시대가 시작한 것이 기원전 770년 경 쯤으로 알려져 있고, 우리들이 이제 이야기할 솔로몬시대가 기원전 1000년 전후의 일이니 그 보다는 약 250년 뒤에 일인 셈입니다. 공자가 기원전 500년 경의 사람이니 그렇게 따진다면 솔로몬 이야기는 공자보다도 500년 전의 일인 셈이군요. 

공자(孔子)보다 약 300년 뒤에 살았던 사람으로 진시황제(秦始皇帝)로 알려진 사람이 있지요. 진(秦)나라의 첫번 째 황제라는 말이지요. 그의 본명은 영정(嬴政)이었답니다. 이 양반이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을 통일시켰지요. 

이천 여 년이 훨씬 지나서 중국의 언어를 통일시킨 마우쩌둥(모택동)이 좋아했던 인물이 바로 이 진시황이라고 합니다. 만일 진시황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중국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처럼 갈라져 있지 않았을까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아무튼 그 전까지는 나라의 임금을 왕(王)이라고 불렀답니다. 나라들이 많았으니 왕들도 많았겠지요. 진시황은 천하통일을 이룬 후 자신은 왕으로 불리우는 게 싫다고 황제(皇帝)라고 부르라고 했답니다. 진나라의 첫 황제일 뿐만 아니라 중국의 첫 황제가 된 것입니다. 이 황제의 의미에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있지만 신과 동일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었답니다. 

역사기록인 진시황본기(秦始皇本記)에는 이런 기록이 있답니다. “짐은 시황제이다. 후세는 숫자로 계산한다. 이세부터 삼세, 만세까지 영원무궁하도록 전해지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자신의 자식들이 진이세황제,…진만세황제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지요. 

그는 또 불로장생 곧 늙지 않고 오래 사는 약을 찾았던 것으로도 유명하지요. 

그의 나이 39살이었던 기원전 221년에 통일업적을 이룬 진나라 초기에는 여러 개혁정치가 성공하면서 빠르게 제국을 안정시켜 나갔답니다. 그 전까지 봉건제로 왕과 봉건군주들이 나라를 다스렸던 체제를 버리고 군과 현을 만들어 모든 관리를 중앙에서 파견하는 중앙 집권체제를 세움으로 황제권을 강화시켰답니다. 또한 화폐, 문자, 도량형 등의 통일을 시도하기도 하였답니다. 

그러나 지나친 사상 개혁으로 인해 생긴 분서갱유사건을 비롯하여 아방궁, 진시황릉, 만리장성까지 과도한 토목사업 등으로 인한 민심의 급격한 이반이 일어났답니다. 

결국 황제의 자리가 자신의 자손 만대까지 이르리라는 그의 호언은 고작 이대황제에서 끝나버린답니다. 자신이 황제가 된지 만 15년 뒤에 일어난 일이랍니다. 

그리고 불로장생의 꿈도 그의 나이 쉰 살에 그만 마치고 말았답니다. 불로장생 약으로 믿고 먹었던 수은중독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죽기 전 말년에는 미신에 빠져들어 정신도 오락가락 했었답니다. 

들꽃

이제 솔로몬보다 천 년 후에 가나안 땅 갈릴리 바닷가를 걸으며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입지 못하였다.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나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마태복음 6 : 29-30)라고 한 예수의 선포를 곱씹으며 솔로몬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솔로몬의 뜻은 샬롬 곧 평화라고 합니다. 워낙 아버지인 다윗이 전쟁터에서 피를 보고 살아 온 탓에 지어진 이름일 것입니다. 물론 야훼 하나님께서 그리 하라고 명하시기도 했고요.그러나 솔로몬이 왕이 되는 일은 그리 순탄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평화스럽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열왕기상 1장과 2장의 기록들을 보면 당연한 일들이 순서적으로 일어난듯이 보이지만 아마 솔로몬 당시의 상황은 그렇게 여유롭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배다른 형제인 아도니야와 사무엘과의 왕위 계승 쟁탈전이 결코 만만치 않은 싸움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은 다윗왕의 가신들 면면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평생을 다윗의 오른팔 심복으로 전쟁터를 누볐던 요압 대장군 – 그는 밧세바의 전 남편인 우리야를 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다윗의 심복이었던 것을 기억하시길, 또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하여 다윗과 대적했을 때 다윗의 아들을 죽이고서도 다윗의 신임을 잃지 않았던 다윗 권력의 핵심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과 제사장 에비아달 – 이 사람은 다윗이 왕국을 통일하고 제사장 임명의 권한까지 틀어 쥐었을 때 첫번 째로 임명된 제사장임을 기억하시길 -, 등이 아도니야편에 서서 그를 왕위에 앉히려고 합니다. 

반면 솔로몬쪽에는 나단 선지자와 사제 사독, 그리고 어머니 밧세바 등이 함께 합니다. 

열왕기상 1장 초입의 기사에 따르면 솔로몬을 따르는 쪽의 세가 좀 약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답니다. 

나단과 바셋바의 계략이 성공하여 마침내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한 첫번 째 일들은 바로 정적을 과감히 제거해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형제 아도니야와 아버지 다윗의 오른팔이었던 요압을 죽여버립니다. 에비아달은 죽이지는 않았지만 사제직에서 영원히 쫓아버리는데 이는 사제직을 담당하는 가문을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엘리 가문에서 사독 가문으로 제사장의 권한을 바꾸어 버리는 어찌보면 당사자의 죽음보다 더 큰 보복이었던 셈입니다. 

그렇게 이름처럼 평화롭지만은 않은 왕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솔로몬의 초기 통치 시절은 아버지 다윗처럼 승승장구의 세월을 누리게 됩니다. 

우선 영토에 있어서 아버지 다윗보다 영역도 넓히고 왕권의 권위도 높히게 됩니다. 특히 아버지 다윗에 비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세움으로써 왕권을 더욱 강화시키게 되는데, 다윗시절까지 있었던 전통적인 부족개념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12개 지방관리 체제로 전환하고 그 관리들을 중앙의 왕이 통제하는 체제를 세운 일입니다. 

이 체제 아래에서의 솔로몬 제국은 그야말로 태평세월이었고, 모든 군사와 말들까지 배부르던 시절이었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유프라테스로부터 불레셋 땅을 지나 이집트 국경에 이르는 지역 안의 모든 왕국을 지배하였다. 그들은 솔로몬이 살아 있는 동안 조공을 바치며 섬겼다. 솔로몬의 하루 양곡은 고운 밀가루 삼십 섬, 거친 밀가루 육십 섬, 기름진 소 열 마리, 목장 소 스무 마리, 양 백 마리였고 그 밖에 수 사슴, 산양, 수노루, 날짐승이 있었다. 

그는 답사에서 가자에 이르기까지 유프라테스 서쪽 전지역을 다스려 사방으로 평화를 유지하였다.

이렇게 솔로몬이 다스리는 동안, 유다와 이스라엘은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마음놓고 살면서 저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두 발 뻗고 잘 수 있었다. 

솔로몬에게는 병거를 끄는 말을 둘 마굿간이 사천 간 있었고 말이 만 이천 마리있었다. 그리고 이들 관리들이 솔로몬 왕과 솔로몬 왕의 식탁에 참석하는 이들을 위하여 각기 한 달씩 부족함이 없게 양곡을 내었다. 그들은 병거 끄는 말과 짐 나르는 짐승들이 먹을 보리와 밀짚을 지정한 곳으로 가져왔다.> – 열왕기상 5 : 2-8, 공동번역 

그의 영화는 이런 부(富)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이런 인간적 부에 속한 일로 치부한다하여도 야훼 하나님께서 머무르시는 성전 역시 그가 지었다는 일입니다. 

솔로몬 초기의 영화스런 모습은 성공신화의 최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사극(史劇) – 왕국 11

(당신의 천국 – 스물 여섯 번 째 이야기) 

이제 네가 한 아들을 얻을 터인데, 그 아들은 태평을 누리게 될 것이다. 내가 사방에 있는 적들을 다 물리쳐 태평을 누리게 해 주리라.그러니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하여라. 나는 그가 다스리는 동안 이스라엘의 번영과 평화를 내릴 것이다. 그가 바로 내 이름으로 불릴 성전을 지을 사람이다. – 역대기상 22: 9, 공동번역 

다윗은 죽을 날이 가까와지자 그의 아들 솔로몬을 불러 훈계하였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야 할 것 같다. 힘을 내어 사내 대장부가 되어라. 야훼 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그분이 보여주신 길을 따라 가며 또 모세법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법도와 계명, 율례와 가르침을 지켜라.” – 열왕기상 2: 1-3, 공동번역 

민족과 국가의 대영도자 따위의 관념은 이스라엘의 (예언자적)  전통이 아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사울의 왕권을 거부하고, 다윗과 솔로몬의 왕조체제를 비판했다. 그리고 왕권에 대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솔로몬에 대한 르호보암의 항거이다. – 송기득이 쓴 ‘인간’에서

이제 다윗 이야기를 마치려 합니다. 다윗 이야기 가운데 인구조사 이야기를 건너 뛰었습니다. 솔로몬 이야기의 후반부 세금과 노역 부분에서 함께 다루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다윗 이야기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다시 돌아봅니다. 우리들이 만나려고 하는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스물 세번 째 글에서 저는 “계약”이라는 말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모세를 통한 야훼 하나님과 히브리족 사이에 맺은 계약과 다윗을 통한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 사이에 있는 차이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이거 머리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이랍니다. 

야훼 하나님과 맺는 계약의 범위가 넓어졌다고 했습니다. 또한 계약의 틀을 제도화하고 한 곳에 모이게 하는,  이른바  중앙집권화를 이룬 것이 다윗 때에 이르러서의 일이라고도 말씀드렸습니다. 

그 차이를 계약이 다윗 이전과 이후로 달라졌다는 말씀으로 요약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성서 사무엘서를 마치고 열왕기와 역대기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넘어 가기 전에 지나온 곳들 두군데를 다시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신명기  30장과 사무엘하  7장 두 곳입니다. 

신명기 30장은 광야에서 히브리족과 야훼와 맺은 계약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계약을 지키면 살고, 안지키면 죽는다.”입니다. 계약의 ‘갑’과 ‘을’이 있고 서로 하는 의무가 있는 계약입니다. 

사무엘하 7장은 무조건적으로 야훼가 다윗으로 대변되는 이스라엘왕국에 대해 내릴 은총에 대한 계약 곧 약속입니다. 

바로 이 약속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기다리는 유대족들의 메시아니즘, 구세주를 기다리는 염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위대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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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마지막 모습을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서 왕의 장례식에 따르기 마련인 장엄하고 웅장한 의식에 따라 장사되었다. 더우기 막대한 돈이 다윗의 시신과 함께 매장 되었다. 얼마나 막대한 양의 돈이 함께 묻혀 있는지는 아래의 사실에서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부터 1,300년 후 데메트리우스의 아들로서 피우스라고 부르는 안티오쿠스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돈을 내면 포위를 중단하고 물러가겠다고 했을 때 대제사장 힐카누스는 돈을 모을 방법이 없자 다윗 무덤의 한 방을 열어 3,000달란트의 돈을 꺼내 그 일부를 안티쿠어스에게 주어 포위를 풀게 한 일이 있다. – 중략 – 그 후 오래 지난 헤롯왕이 또 다른 방을 열어 거액의 돈을 꺼냈다.> –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7권 15장에서 

그렇게 다윗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갈 때 나이가 일흔살이었다고 합니다. 

그 길을 떠나기 전 다윗의 모습은 정신도 오락가락 했을 뿐만 아니라 몸에 마비증상도 자주 찾아왔습니다. 다윗의 마지막 부인 아비삭은 이런 다윗의 몸을 녹여주는 동녀(童女) 노릇을 한 여인입니다. 그녀가 슈넴 출신이라고 하여 슈네미티즘(Shunammitism)이라는 말이 생겼는데 바로 동녀회춘라는 뜻입니다. 

아무튼 그 무렵부터(다윗의 정신이 거의 오락가락할 무렵) 왕위 승계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진답니다. 다윗과 학깃 사이에서 난 아도니야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생긴 솔로몬과의 싸움입니다. 

다윗을 평생 따르던 가신 그룹이 아도니아와 솔로몬파로 둘로 갈라져 치열한 다툼을 벌입니다. 바로 그 순간 한 수 하는 사람이 바로 밧세바이지요. 

마치 이조시대 왕궁에서 일어나는 사극을 보는 듯 하답니다. 

그렇게 사극처럼 시작하는 솔로몬 이야기는 앞으로 세 번에 걸쳐 잇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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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케어 – 마켓플레이스 해설 3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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