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나쁜 놈들 – 1

조선의 오보, 오도가 아닌 계획된 조작보도를 보며

지난 4일(한국시간) 자칭 일등신문인 조선일보는”해양수산부의 세월호 시행령을 철회하라고 주장하던 이석태 세월호 특조위원장 등 일부 특조위 위원들이 정부 안을 수용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오는 6일 시행령이 국무회의 의결을 거치면 특조위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된다”는 보도를 하였습니다. 더하여 이 보도는”유족들과 지난 주말 대화를 거쳐 정부안을 받아들이기로 입장을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고 덧붙였습니다.

제가 이 기사를 본 것은 포털 다음을 통해서였습니다. 아침에 습관으로 눈을 떠서 yahoo로는 미국 뉴스를 포탈 다음으로는 한국뉴스들의 제목들을 훑어본답니다.

조선일보라는 생각을 미처 못하고 “결국 이렇게 끌려가고 마나?”하는 생각으로 일터로  나갔답니다. 가게에서 아침에 해야할 일들을 마치고 다시 이에 대한 연관뉴스를 검색해 보았답니다.

같은 날 저녁(한국시간) 오마이뉴스에는 이런 제목의 뉴스가 올라와 있었습니다.

-이석태 “정부안수용?” <조선>의 오도… 개정안 낼 것- 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기사의 내용인즉 조선일보의 보도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특조위원장인 이석태변호사는 “정부 시행령의 문제점을 설명해주긴 했으나, 유가족과 정부안을 수용하기로 협의한 적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보도는 <특조위도 이날 오후 5시 17분께 긴급 보도자료를 내고 “특조위 위원장을 비롯하여 특조위원들은 정부안을 수용하기로 합의한 적이 전혀 없다”며 “정부 시행령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하여 공포되면 시행령으로서의 효력은 발생하겠지만, 특조위는 더욱 강력하게 시행령 개정 운동을 펼쳐나갈 것”이라고 밝혔다.>고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 온라인 조선일보에서는 해당 기사를 찾을 수가 없답니다. 그 신문에서 세월호에 대한 기사를 검색해보면 <’장관급 공무원’신분으로 광화문에서 농성하는 세월호 특조위원장…>, <세월호 시위주도 외부단체 ‘제2의 5.18… 100만 대군 만들어야> 등 매우 부정적 의미의 제목들을 단 기사들이 눈에 뜨인답니다.

자! 이쯤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조선일보의 최초보도인 “세월호 특조위가 정부안을 수용하기로 합의했고, 유가족들도 동의했다”는 사실이 오보일까?하는 것입니다. 단언컨대 이 보도는 미리 조선일보가 계산하고 던진 의도된 조작보도입니다.

조선일보 및 그들과 배포를 맞춰 협력관계로 기생하거나 공생하는 세력들은 이미 이 의도된 조작보도로 얻을 것은  다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늘 그래왔듯이 말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만드는 정보 소비자들에게 이미 최상의 뉴스를 제공한 것이고, 그들이 연출하는 의도는 백프로 성공한 것입니다.

조중동을 비롯한 종편방송들 나아가 그들과 얼기설기 이어진 망으로 엮여있는 각종 sns 및 카톡 등등의 정보 공유 수단으로만 뉴스를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합의와 동의”라는 말이 각인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머리속에는 “다 합의하고 동의해 놓고는… 하여간 돈에 환장한 사람들과 좌빨들 때문에…”라는 이제껏 자신들의 생각들이 옳았다는 확신만이 자리잡을 것입니다.

이렇게 조선일보 등에 속거나, 속여야만 생존 가능한 한인들의 숫자가 최소치로 잡아도 50%가 넘고… 많게는… 글쎄요? “자신의 삶에 불필요한 것들이 끼여드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 보고 느끼는 것에 불편한 것들이 싫은 사람들, 나하나 아니 조금 넓혀서 내 가족 먹고 살면 그만인 사람들”까지 합친다면 족히 80-90%는 되지 않을까요?

이쯤 다시 되돌려볼까요.

분명 조선일보는 의도된 거짓말을 “뉴스”라는 이름으로 내보냈습니다. 이걸 좋게말해 오보 또는 오도라고 점잖게 왈 진보라는 매체가 보도를 합니다.

단지 시간이 하루지났을 뿐인데 조선일보는 “언제 내가 그랬느냐?”며 슬그머니 다른 주머니를 풀어 놓습니다. 그리고 남는 것은 “다 합의하고 동의했데메?”라는 소리들 뿐입니다.

오늘 2015년 한인사회의 현실입니다.

pedagogy우리세대 이른바 운동권들의 필독서 가운데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문맹률이 아주 높았던 1960-70년대 브라질 및 남미, 아프리카의 삶을 고민하던 파울로 프레이리가 세상에 던졌던 물음이자 해법이었습니다.

그의 물음과 해법이 문명의 2015년 바로 오늘, 문맹율 거의 0%에 육박하는 한인사회에 그대로 유효하다는 서글픈 생각들에 빠져있답니다.

정리대는데로다시 잇겠습니다.

소수라고?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해외에서 살고있는 한인들 가운데 뜻이 엇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전세계 동시 추모행사를 벌이고 있는 주간입니다.

이 행사에 함께하는 사람들을  숫자나 퍼센티지로  따지자면 아마 한반도 남북으로 나누어져 사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전세계에 퍼져사는 전체 한인인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어쩌면 무시해도 좋을만큼의 숫자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제 필라델피아 외곽 Ambler에 있는 작은 교회당에서 모인 필라델피아모임도 그 중 하나랍니다.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가까운 남부 뉴저지와 델라웨어주까지 포함하는 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수는  비록 고무줄 통계이기는 하기만 대충 4만명 정도로 가늠하곤 한답니다.

그 4만여명 가운데 약 50여명이 함께 한 모임이었답니다. 그야말로 그냥 무시해도 좋은 숫자랍니다.

 숫자 생각을 하다보니 딱 대비되는 것이 있답니다. 한국시간 4월 16일에 세월호 참사 일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시청앞에 모였던 사람들의 숫자랍니다. 5만명 정도(주최측 추산)라고 하더군요.

오천만 가운데 오만, 사만 가운데 오십명. 얼추 비슷한 대비지요.

아마 전세계 동시추모대회라고 이름을 붙인 이 행사에  참여한 한인들은 그지역에 사시는 분들 숫자 대비 얼추 비슷한 정도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그냥 무시해도 좋은 숫자라는 말씀입니다.

막말로 한줌거리도 안되는 사람들이 저마다 사는 곳에서 모여 “전세계 동시 추모…”운운하는 행사였답니다.

어제 필라델피아 추모행사에 참여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정말 무시해도 좋을만큼 적은 사람들이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답니다.

우선 어제 있었던 필라델피아 행사를 잠시 소개드리지요.

조촐하지만 정성드려 차린 제단에 헌화를 하며 묵념을 하므로 “내가 왜 여기 와 있을까”하는 물음에 대한 자답(自答)을 얻는  것으로 행사를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무용안무가 김정웅씨가 만든 세월호 참사 무용극과 추모단편 영화를 함께 보았답니다. 특별히 안무가 김정웅씨가 “이웃의 아픔을 온몸으로 듣고  가슴으로 공감하는” 몸동작을 생활화하자는 설명에  몸치인 저도 저절로  동작을 따라하고  있었답니다.

여러 순서들 가운데 제 생각으로 이 날의 하일라이트는 손정례님의 춤입니다. 한풀이 춤이었답니다. 이 동네에서는 알려진 고수(鼓手)인 정세영선생의 장고와 추임새에 맟추어 풀어낸 손정례선생님의 춤사위는 단연 이 행사의 으뜸이었답니다.

0416152020

그녀의 나이 올해 아흔이랍니다.

그리고…

참가한 이들이 저마다 모임에 참여하게 된 까닭과 생각들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답니다.

“ ‘제발 이젠 그만해라! 그거 왜 하냐?’하는 소리를 들으며 여기 왔습니다. 제 양심의 소리 때문에…”

“목사입니다. 목사여서 부끄럽습니다. 교회가 이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지 못하는 모습에 부끄럽습니다. 그 부끄러움을 안고 살고자 합니다.”

“아주 평범한 가정주부였습니다. 제가 이런 모임에 참석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젠 이런 모임에 함께하지 않고는 우리 아이들을 바로 바라보는 것이 부끄러울 것 같습니다.”

“늘 떠나온 모국이 잘 되기만을 바랍니다. 그래서 이런 모임을 주관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린 늘 소수여서 마음이 아픔니다.”

“왜? 우리는 역사를 정리하지 못하고 살아왔는지 그게 아픔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정리하지 못하면 우리 한인들의 미래가 고난에 빠질까봐, 행여라도 단절되지 않을까 그런 염려가 있습니다.”

등등의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아픔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린 소수라는 절박한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답니다.

그런데 저는 바로 그 지점에서 희망을 보았답니다.

“소수” – 바로 우리들은 적은 숫자라는 데에서 희망을 본 것이랍니다.

무릇 역사란 소수의 사람들이 이웃사람들을 생각하며 확장시켜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수이기 때문에 당해야만 했던 모든 아픔과 수모와 천덕을 이겨내면서 말입니다.

그 힘은 “그 길을 걷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에서 온답니다.

그 “기쁨”은 바로 소수만이 누리는 축복이랍니다.

성(聖)금요일 그리고 기억

성(聖)금요일, Good Friday 밤입니다.

예루살렘과 로마 권력, 그리고 당시 평범한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수난을 받던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일을 기억하는 날, 밤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하는 믿음의 고백은 바로 이 날 밤부터 일어난 일입니다. 그의 죽음은 나와 인류의 속죄 제물이었다는 신앙고백이 시작된 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에 대한 믿음이 시작되는 밤입니다.

예수의 부활 곧 믿음 가운데서 일어날 나와 인류의 부활은 바로 오늘밤이라는 예수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聖)금요일인 동시에 Good Friday입니다.

그리고 이천여년 전 이 날 밤 일어났던 일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해 우리들에게 남겼습니다.

<유다인의 대사제는 짐승의 피를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 가서 속죄의 제물로 바칩니다. 그러나 짐승의 몸은 영문 밖에서 불살라 버립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영문 밖에 계신 그분께 나아가서 그분이 겪으신 치욕을 함께 겪읍시다.> – 히브리서 13 : 11-13, 공동번역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의 죽음이 그가 수난과 고난을 겪었던 예루살렘 성안이 아닌 성밖에서 이루어진 것에 촛점을 맞추어 우리에게 그 죽음의 의미를 전해줍니다.

예수를 통한 구원이 성문밖에서 이루어졌다는 히브리서 기사의 해석은 오늘을 예수쟁이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명쾌한 삶의 해답을 줍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내 것으로 삼고자하는 삶을 살아가고저 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예수를 삶의 구세주로 믿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성문 밖에서 그리고 성문 밖의 사람들을 위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생각하며 그와같은 삶을 추구할 때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39940_29753_918오늘자 기독교타임즈는 <교회협 세월호 침몰현장에서 눈물로 성금요일 예배>라는 제목으로 팽목항을 찾아 예배를 드린 교회협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 말미에 이덕주 감신대 교수가 한 말들이랍니다.

“역사왜곡과 같은 역사적 실수가 반복되는 이유는 ‘기억’하지 않는데 있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억과 전망은 항상 같이 가야하며, 미래 역사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도 정확한 기억이 있어야만 제대로 된 비전을 수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난의 현장에 참여한 이유 역시 아이들의 꿈과 비전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었고, 살아남은 우리는 이들의 비전을 이뤄야할 의무가 있다.”

“이제는 잊으라고 하는 것은 제대로 된 기억을 방해하는 것이고 이는 역사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2015년 성(聖)금요일밤, 제가 무교회주의를 주창하지 않는 희망이랍니다.

말 잘하는 사람

00528025301_20150402소설가 최인호선생이 남기신 글 가운데 한토막입니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그만큼 거짓말을 잘한다는 뜻이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그만큼 남의 험담을 잘한다는 뜻이며, 말을 잘한다는 것은 그만큼 아첨을 잘한다는 뜻이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간질을 잘 시킨다는 뜻이며 말을 잘한다는 뜻은 그만큼 뻔뻔하다는 뜻이다.”

그가 월간지 샘터에 연재되었던 ‘가족’시리즈를 책으로 엮어낸 두번 째 책이름은 <이웃>이었습니다. 그가 나이 쉰을 향해 달려가던 무렵이었습니다. 그의 관심이 나와 가족을 넘어 이웃으로 확대되어가던 시기였습니다.

그 무렵 그는 평소 말이 많았던 자신을 뒤돌아보면서 “말하기보다는 듣는”것의 중요성을 글로 남겼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정말로 말 잘하는 사람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말을 잘하는 사람은 남의 말을 열심히 듣는 사람이다. 자신의 선입견이나 편견없이 남의 말을 있는 그대로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는 사람이다. 대화란 결국 남의 의견을,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겸손하고 진지하게 듣는 행위인 것이다.”

들을 귀와 듣고자하는 마음은 없고, 오직 뻔뻔스럽게 나불내는 입만 살아있는 사람들이 판을 치는 듯한 뉴스를 보면서 떠올려본 그에 대한 추억입니다.

 

희망의 빛

이제 꽉찬 한달을 맞는 이호진, 이아름 부녀의 삼보일배(三步一拜) 행진 소식을 봅니다.

11067514_373650812826590_1168410099292233094_n하루 한번, 그들이 어디까지 갔을까 아픈 마음으로 열어봅니다. 그들이 결코 외롭지 않을만큼, 딱 고만큼의 사람들이 함께하는 고된 순례의 행진이지만, 매일 이 소식을 통해 제가 예수쟁이이어야만 하는 확신을 다짐니다.

어제 삼배일보 순례길에서 제 딸아이보다도 어린 아름이가 남긴 글입니다. 그 아이의 글에서 가느다란 희망의 빛을 봅니다.

<한달이 다 되어갑니다. 출발할 때의 막막함과 두려움은 점점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냥 하루를 열심히 살고 있는 느낌입니다.하루 하루가 감사합니다.

그저 그런 하루가 아니라 감사하고 감사한 하루입니다.

길 위에서 절을 하고 있는 아빠와 저의 모습이 서글플 때도 있지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화가 나서 절을 했습니다. 제가 길바닥에 절을 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달라졌습니다.

믿을 수 있어졌습니다. 제가 이 길 위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출근한다 생각하고 아침에 길을 나섭니다. 그리고 퇴근하듯이 기쁘게 집으로 돌아옵니다.

내일 하루도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이들 부녀의 하루 소식을 접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호진 페이스북

 

만남 – 잊지 않을께

지난 3월 8일 필라델피아를 방문했던 세월호 유가족 동혁엄마 김성실님과 경빈엄마 전인숙님이 남긴 말입니다.

9<저희마음에 들어와 주십시오. 그리고 침묵하지 말고 노란리본으로 외쳐주십시오.

우리에게 직접 물어봐주십시오. 홈페이지에도 자주 들어와서 힘을 내라고 해주시고, 광화문과 팽목항과 분향소를 잘 지켜내서 온국민이 원하는 것이 진실이 되도록 힘을 합해주십시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수 있는 국민정신을 회복하도록 해외에서도 많이 알려주십시오.>

 

 

 

 

만남 – 필라델피아의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

“어찌 된 일이냐? 걱정하지 말아라. 하느님께서 저기서 네 아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다.” –성서 창세기 21장 17절, 공동번역

성서는 힘없고 약한 히브리인들의 울부짖음과 신음 소리를 들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성서는 강한 자들의 종교가 아니라 잃었던 권리를 다른 어떤 곳에서도 호소할 수 없는 약자들의 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아파하는 소리, 누군가가 호소하는 소리, 누군가가 절박하게 외치는 소리를 들어주는 일은 이미 신앙행위입니다.

때 : 3월 8일 일요일 오후 5시 ~ 8시
곳 : Phil-Mont Christian Academy
        35 E Hillcrest Avenue, Glenside, PA 19038

3-8-3

3-8-1

3-8-2

잊지 않는 일

어제(18일)부터 이번 토요일(21일)까지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 있는 힐튼 뉴올리언스 리버사이드 호텔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에 대한 뉴스를 보았습니다.

국제학 학회(International Studies Association) 주최로 열리는 56차 연례 학술대회(ISA’s 56th Annual Convention)에 대한 소식입니다.

이 학술대회에서 내일(20일) 우리들에게 아주 귀에 익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내일 오후 4시부터 열리는 이 행사에서 한국인 학자들 몇 분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회과학적 연구결과를 발표한다고 합니다. 보도는 그들의 연구결과를 요약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발표자 네명은 모두 한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활동하는 분들로서 남태현(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과), 서재정(일본 국제 기독교대학 정치학과), 유종성(호주 국립대 정치사회변동학과), 이윤경(미국 빙햄튼뉴욕 주립대 사회학과) 교수 등이랍니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를 한국의 민주화, 국가론, 신자유주의 정책, 부패 등 각기 다른 측면에서 다각적으로 분석하여, 이 참사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한국 사회 및 정치의 구조적 문제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임을 드러낼 것이라고 합니다.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결과물”<이윤경 (미국 빙햄튼 뉴욕 주립대 사회학과 교수)>, “참사는 부패가 불러온 당연한 결과”<유종성 (호주 국립대 정치사회변동학과 교수)>, 박근혜정부와 정치 엘리트들의 비민주성이 낳은 결과”<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과 교수)> 등 모두 고개를 끄덕이게하는 연구들인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 제 관심을 끌어들인 것은 서재정 (일본 국제 기독교 대학 정치학과 교수)의 주장입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신자유주의’라는 말과 ‘한국적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구별하는 듯합니다.

일반적으로 시장의 역할을 극대화하고 이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과정을 신자유주의라고 하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분단체제’가 파생시키는 국가안보의 필요성이 국가 권력을 강화하고 국가가 사회에 침투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한국적 신자유주의’란 모순구조라는 것입니다.

이 모순구조에서 일어난 세월호 참사는 신자유주의라는 말 속에 숨어있던 국가의 폭력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화의 비용과 국가 폭력행사의 결과는 시민사회의 희생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주장한답니다.

세월호와 조국분단을 한 평면에 올려놓고 분석하는 그의 이야기에 고개가 많이 끄덕여졌답니다.

이와같이 일어난 사건에 대한 지속적인 분석과 연구는 물론이거니와 실제적으로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과 재발방지를 위한 모든 노력들은 “한인”이라는 공동체에 묶인 모든 사람들의 몫일 것입니다.

지난 해 7월, 서울에서 열렸던 ‘2014 서울국제학술대회’에서 울리히 벡(Ulrich Beck) 독일 뮌헨대 교수가 했다는 말은 우리들의 몫을 다하기 위해 꼭 붙들고 있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고, 정치인들은 과거 관행을 답습할 것이다. 하지만 위험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정치제도의 정당성 약화가 거세지면서 정치제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시민들이 이러한 사태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잊지 않는 일” 말입니다.

여기 날짜로 치자면 오늘이 설날입니다.

ash wed어제는 기독교력으로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이, 자신과 인류를 위해 대신 죽은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잊지 않기 위해 지키는 사순절을 시작하는 첫날이었습니다.

설날은 우리 민족의 전통을 잊지 말자는 날이요, 사순절은 구원에 대한 신앙을 잊지 말자는 기간입니다.

“잊지 않는 일”의 중요함을 알리는 날들이 연이었습니다.

그들과 함께하라!

매서운 추위가 몰아친 주일 아침, 제 이메일함에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에 대한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인근에 사는 한인들 가운데, 지난해 대한민국 진도 앞바다에서 있었던 세월호 참사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모여 “잊지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까?”라는 물음을 줄기차게 던지며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이들이 오는 3월초에 세월호 유가족들 두 분을 초청하여 모시고 간담회를 개최한다는 내용과 그 간담회를 위한 준비사항들을 알리는 소식이었습니다.

그저 마음으로만 성원을 보낼 뿐 이런 저런 핑계로 적극적으로 함께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으로 이 글을 씁니다.

육년 전인 2009년 1월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뉴스를 전하는 화면에서는 엄청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즈음 날이 새면 터지는 IS(이슬람 국가)의 만행에 버금가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시간 2009년 1월 20일 아침 7시20분, 대한민국 서울 용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크레인에 실린 컨테이너 박스안에 있는 경찰 특공대들이 망루 양쪽을 잡아당겼습니다. 그러자 망루 틈이 벌어지고, 불기둥이 망루 아래로부터 솟구쳤습니다. 불은 삽시간에 망루 전체로 퍼지며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누군가가 외쳤다는 소리입니다.

“저기 사람이 있어요. 저기 사람이….”

애타는 맘으로 외쳤을 “저기 사람이 있어요. 저기 사람이….”라는 절규를 육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리고 열달 전인 2014년 4월 16일 대한민국 진도 앞바다, 바닷물 속으로 잠겨가는 여객선 세월호에 울려 퍼지던 소리 “가만히 있으라” – 그렇게 가만히 있었던 사람들은 단 한사람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2015년 2월, 오늘 우리들 귀에는 이런 소리들이 들립니다. 바로 “그만 하라!”입니다. “제발 지겹다. 이젠 좀 그만 하라.”는 소리 말입니다.

마음만 먹었다면, 뜻만 있었다면 충분히 살릴 수도 있었던 생때같은 가족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저기 사람이 있어요, 저기 사람이….”를 외치는 이들에게 “가만 있으라!”라고 외치는 자들 “이젠 지겨우니 그만 하라”고 외치는 자들의 목청만 높아가는 세월입니다.

성서 마가복음의 기자인 마가는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갈릴리에서 끝나는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 마가복음 1장 14-15절, 개역개정본>

갈릴리에서 일하던 요한이 잡혀 죽음에 이르게 되자 예수는 갈릴리로 나가 그의 일을 시작했다고 마가는 전합니다.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 마가복음 16장 7절, 개역개정본>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는 누구보다도 먼저 갈릴리로 간다는 마가의 전언으로 사실상 마가의 예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갈릴리” – 예수가 나아갔던 곳이고 일했던 곳이고 다시 살아나 달려간 곳입니다.

예수가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기전 사람들은 베드로가 예수 패거리였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렇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 마가복음 14장 70절)”

“갈릴리 사람이니 너 또한 한 패거리지?”라는 물음,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같지 않으신지요?

지친 예수“저기 사람이 있어요! 사람이…”라는 외침을 불온하고 불순하다고 낙인찍으며 “가만 있어라!”, “이젠 그만 하라!”외치는 자들을 향해 나아갔던 이, 바로 예수라는 믿음이 제 믿음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저기 사람이 있어요! 사람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는 곳, 2015년 오늘 “가만 있어라!”, “이젠 그만 하라!”고 강압하는 자들을 향해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는 이들이 있는 곳, 갈릴리에 예수가 함께 한다고 믿습니다.

매운 바람소리 온종일 그치지 않는 날,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 사람들의 모임”에서 전해 온 소식 가운데 만난 예수랍니다.

‘우리가 텍스트(성서)에 말을 걸기까지는 텍스트(성서)는 결코 우리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텍스트(성서)는 우리 자신의 언어로 대답한다. 그것이 사회학적인 언어이든 신학적인 언어이든지간에 그렇다. 간단히 말해서, 새로운 대답은 새로운 자료로부터 나오기보다는 새로운 물음으로부터 나온다.” – John Goodrich Gager(전 프린스톤대학 종교학 교수)가 쓴 <우리들은 적들과 손잡을 것인가? 사회학과 신약성서 (Shall we marry our enemies? Sociology and the New Tastament)>에서

금요일엔 돌아오렴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간다

학생들은 3박 4일의 수학여행을 마치고 금요일에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배에 갇힌 일반인 승객들과 더불어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것은 남겨진 가족들이 가닿을 수 없는 수백개의 금요일에 관한 기록이다.>

금요일엔 돌아오렴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대표 김순천, 이하 작가기록단)이 지난해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직후부터 12월까지 단원고 희생학생 유가족들과 동고동락하며 그중 부모 열세명을 인터뷰하여 펴낸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에 대한 출판사 서평입니다.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간다>라는 말이 절규로 들리기도 하고, 사명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딱히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간다>는 명제에 사로잡혀 뉴스를 훑은 것이 아니건만 생각은 자꾸 그리로 몰려갑니다.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박종철 사건’ 은폐 검사… 당시 고문치사 수사 축소·은폐> – 오늘자(2/2) 온라인 경향신문 머릿기사 제목입니다.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던 사건이요,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입니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으로 기록될만한 사건인 셈입니다. 그 사건의 한가운데서 진실을 은폐하여 자신의 직무를 유기했던 자가 세월이 흘러 대법관 후보자로 이름을 올렸다는 뉴스를 보며 도대체 우리들에게 30여년의 세월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또한 오늘자 오마이뉴스에는 <10월 10일 10시에 태어난 아이가 ‘종북’의 증거라고?>라는 제목의 기사가 머리기사들 가운데 하나로 올라와 있습니다.

“‘통일콘서트’를 열었다는 이유 등으로 구속된 황선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가 구속영장 실질심사에서 겪은 일과 앞으로 진행될 재판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담은 글을 남편인 윤기진씨에게 편지로 보내왔다. <오마이뉴스>는 황선 대표가 윤기진씨에게 보내온 편지 내용을 몇 편에 걸쳐 싣는다.”

이 기사를 싣는 까닭을 설명해주는 편집자의 글입니다.

그리고 이 기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편, 피의자는 2005. 10. 10. 북한 조선노동당 창건일을 기해 임신 중인 자식을 북한에서 출산할 목적으로 ‘아리랑 축전’ 관람을 빙자, 방북하여 북한 평양산원에서 자녀를 출산 후 소위 통일둥이 ‘윤겨레’라 이름 짓고, 같은 해 10. 25. 판문점을 통해 귀환함으로써 종북인사들로부터 ‘통일전사’란 칭송을 받았다.”

국가보안법으로 황선씨를 구속기소한 검찰측 기록입니다. 사실 제가 이 기사를 클릭했던 까닭은 10월 10일 10시라는 숫자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제 딸아이가 태어난 월 일 시(月日時)이기 때문입니다.

구속된 황선이라는 이는 10월 10일 10시에(시간은 오전인지 오후인지를 명확히 기록치 않아 모르지만 글의 흐름상 저녁시간인 듯) 한반도 북쪽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방문했던 10여년 전 바로 그 시간쯤 바로 그곳 평양에서 딸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엔 한반도 남쪽 대한민국 정부가 여행허가를 내주어 약 4천여명 가량이 그 가을에 북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황선씨는 그 중 한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제 아내는 그보다 십오여년 전 10월 10일 오전 10시쯤 이곳 미국 델라웨어에서 딸아이를 낳았답니다.

제 아내가 그 때나 지금이나 10월 10일은 제 딸아이의 생일일 뿐 조선노동당 창건일인 줄은 모르듯이, 아마 황선씨도 10월 10일은 그녀의 딸 생일일 뿐일 것입니다.

저나 제 아내가 그해 10월 10일에 제 딸아이가 이곳 델라웨어에서 세상에 나오도록 한 것이 아니듯이, 황선씨 역시 그 때 그 시간 평양에서 자신의 딸을 낳으려고 계획하고 그렇게 실행했다는 말 자체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1987년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발표를 진실로 만들려는 검사가 2015년 대한민국의 대법관이 되려는 현실로 본다면, 아마 황선씨도 자신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그 때 거기에서 출산할 수 있는 능력보유자가 될 수있다는 것이 그리 낯선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검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간다>는 사실을 명확히 정리해 주는 글이 있습니다.

오늘자 조선일보에 실린 그 유명한(?) <김대중컬럼>입니다. 제목이 <‘對北’에 올인하는 ‘박근혜 외교’>라는 글입니다.

그는 이글을 통해 미, 중 일 등 강대국들과의 적절한 외교가 우선인데 그를 도외시하고 박근혜정부가 통일에 매달려 대북관계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은 매우 염려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속내는 바로 <종북장사>를 하는 조선일보를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랍니다.

바로 이 대목들입니다.

<대통령이 철도·도로·특구(特區) 개발 등 대북 사업을 계속 언급하고 남북 대화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면 내각과 장관들은 대통령의 의중을 따라가기 마련이고, 그것이 최근 박 대통령의 외교 현장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민족’이라는 명제에 이끌려 자신의 이념적 스펙트럼을 넓혀 보이려는 감상(感想)이 작용한 ‘통일’이라면 위험하기까지 하다.>

금요일에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을 잊어서는 절대 아니되는 까닭입니다.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가는 경험을 후대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면, 지금 살아있는 자들이 잊지 말아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