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cis교황이 오늘 워싱톤 앤두류 공항에 도착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밟는 미국 땅에도 그가 꾸어온 평생의 꿈인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회”가 넘쳐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영상 뉴스를 보았습니다.
교황을 맞이하는 공항 모습에서 “왜 교황이 미국 땅을 밟았는가?”하는 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의전적 응대를 통해서였습니다. 오바마 대통령 내외와 두 딸들, 바이든 부통령 내외와 가족들이 교황을 맞는 모습은 교황이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세계가족대회(the World Meeting of Families)에 참석하는 뜻을 극대화 시킨performance였습니다.
아이들을 대하는 따듯한 교황의 모습을 보면서 지난 해 여름, 한국에서 보였던 교황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아이들을 잃고 애통해하는 세월호 가족들을 위로하던 교황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잇달은 생각입니다.
세계가족대회(the World Meeting of Families)와 교황(Pope)이라는 말들에 들어있는 몇 개의 명사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가치는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입니다. 세계, 대회, 가족, 교황들 가운데 말입니다.
‘세살버릇 여든간다.’, ‘천성은 못고친다.’는 말들은 사람의 성품이나 습관이 쉽게 바뀌지 않음을 표현한 예들이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어릴 때부터 지녔던 못된 습관들과 성품들이 몸에 베어서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허나 예외없는 법칙이 없듯, 나이들면서 변하고 바뀐 것들도 있다. 일테면 ‘옳고 그름을 다투는 일’보다는 ‘같고 다른 것을 구별하는 일’을 우선하는 버릇들은 나이들어 바뀐 아주 좋은 예이다.
젊어서는 사물이나 사건 또는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옳고, 그름’이라는 잣대에 두었다면(물론 그 판단대로 살지도 못했지만) 인생의 어느 지점을 지나면서부터인지 나도 모르게 그 판단기준을 ‘같고, 다름’에 두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옳다, 그르다’의 기준으로 세상사를 바라보면 삶의 긴장감에서 오는 맛을 느낄 수 있지만, 자칫 삶의 여유를 놓칠 수도 있다. 반면에 ‘같다, 다르다’의 기준으로 세상사를 바라보면 삶이 품을 수있는 여유를 한껏 넓힐 수는 있지만, 자칫 삶의 가치를 잃을 수도 있다.
어느덧 나이들어 ‘세상사 다 좋은 게 좋은거지라며 사니 참 편하더라’는 말이다. 이런 늘늘한 내 삶의 여유를 깨트린 것은 바로 바뀌었다고 생각했던 내 성품이었는데, “세월호 참사 500일 추모행사” 포스터를 보는 순간이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필라 인근에 사는 한인들중 이 포스터를 보는 순간 “아니, 아직도 세월호?”하시는 이들이 태반을 넘어 대다수를 차지하지 않을까싶다. “그게 언제적 이야긴데… 책임질 사람들 다 책임졌고… 보상금 다 주었고… 그만큼 국가가 애썻고… 더더군다나 놀러가다가 일어났던 사건인데… 그만큼 했으면…”이라는 말끝에 “이래저래 사는 일도 바쁜데… 아니, 아직도 세월호?” 라는 모습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헤드뉴스를 장식하는 기사들이 하루도 아닌 시간에 따라 바뀌는 세상에서 500일이나 지난 사건, 빨리 잊혀지기를 바라는 어둡고 아픈 사건을 구태여 자꾸 꺼집어내는 것은 분명 피곤한 일이므로 그 당연함에는 설득력도 더해진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만일, 만일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하나도 책임을 지지 않았고, 국가가 배보상금을 한푼도 주지 않았고, 국가는 사고원인과 책임을 감추기에 급급했고, 사고의 원인은 물론 책임자를 가리는 일을 방해했고, 향후 유사한 사건사고를 대비하자는 목소리마저 외면했다면…” 그게 언제적 이야기냐고 반문해서는 안되는 바로 오늘의 문제가 될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나름 삶을 늘 성서에 묻고사는 예수쟁이라고 내세우며 살고 있는 처지이므로 바로 이 지점에서 던져지는 질문으로하여, “세월호 참사 500일 추모행사”에 한번 기웃거려 보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가족을 잃은 아픔을 안고 사는 이들의 삶은 원상회복되어야 마땅한 일임에도 그들의 신음소리가 외면받고, 그들의 삶이 소외받는 처지로 내몰리는 지경은 바로 성서가 말하는 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무릇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거나 같을 수도 있거니와 처지와 환경에 따라 옳고 그름의 기준은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소외되었다고 아픔을 호소하는 소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일은 옳고 그름이나 같고 다름을 떠나 사람이기에 당연히 흉내라도 내보아야 마땅한 일일 것이다. 나아가 소외되는 현장에 사람이 있는 한 “아니, 아직도?”라는 물음 보다는 “아니 어떻게?”라는 물음이 우선해야 할 일이다.
오늘 한 사내가 오늘까지 살아온 삶과 그가 오늘 겪고 있는 모습을 읽으며 제 가슴 속에 커다란 돌멩이가 하나 달렸습니다.
사내의 이름 박래군입니다. 그는 지난 4월에 있었던 세월호 추모집회에서 불법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한국시간으로 어제 구속 수감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기사들을 훑어본 바에 따르면 이번이 열 두번 째 겪는 일인 듯합니다.
제가 세월호참사에 대한 관심을 갖고 뉴스들을 찾아 읽고는 했지만 박래군이라는 이름이 낯설었던 까닭은 이른바 ‘운동’이나 ‘운동가’들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월호 국민대책회의 공동위원장이자 4.16 연대 상임 운영위원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구속되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현 대한민국 정권이 그들의 예정대로 세월호참사 마무리 작업 수순에 들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박래군이 누굴까?’하는 궁금증이 일었답니다. 그래 그와 관련된 뉴스들을 검색해 보았답니다.
우선 눈에 먼저 뜨인 것은 그가 지난 달 어느 야외집회에서 박근혜대통령을 향해 막말을 늘어놓았다는 기사였습니다.
지난 6월 22일자 TV 조선의 “뉴스특급 730”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세월호 대책위 “박근혜 마약?” 발언 파문>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세월호대책회의 박래군 공동운영위원장이 “청와대를 압수수색해 마약 했는지 안 했는지, 한 번 확인해봤으면 좋겠다”, “대통령이 세월호 당일 ‘피부미용, 성형수술 등을 하느라고 보톡스 맞고 있던 것 아니냐. 보톡스 맞으면 당장 움직이지 못하니까 7시간 동안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하는 의혹도 있다”, “청와대 곳곳을 다 뒤져서 마약이 있는지 없는지, 보톡스 했는지 안 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등등의 말을 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설혹 그런 의심과 밝히고 싶은 굴뚝 같은 마음이 있다하더라도 그래도 대통령인데 좀 과했다는 생각과 함께 그의 구속 사유에는 “괘씸죄”도 한 몫 했겠다는 생각이 더해졌답니다.
그냥 그쯤해서 “자기 과시형 운동권 사내”쯤으로 치부하고 그에 대한 관심을 끄려고 했었답니다. 그런데 그의 이력이 그에 대한 검색을 더하게 만들었답니다.
참으로 몹쓸 학연이나 지연이 그에 대한 관심의 끈을 잇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이력을 보니 저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가 적혀 있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졸업하던 그 해에 그는 입학을 했다고 합니다. 저에게 딱 10년 후배인 셈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민 보따리를 꾸리던 그 때 그는 본격적으로 운동을 업(?)으로 삼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제 관심은 급격히 높아졌답니다. 그래 낮일을 제끼고서 그에 대한 본격적인 검색에 들어갔답니다.
그리고 하루해를 접는 이 시간, 박래군 생각에 가슴에 돌덩어리 하나 메고 있습니다. 그 묵직한 아픔은 그가 살아온 지난 30년 세월 때문이 아니라 그가 어제 영어(囹圄)의 몸이 되면서 남긴 말에 그의 30년이 오롯이 녹아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구속되더라도 416연대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안전사회 건설 목표를 향해 변함없이 국민과 함께 행동 할 것”이라는 그의 말속에는 그가 30년 인권운동에 몸바쳐왔던 생각과 꿈과 희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다음은 지난 2012년 11월에 한림 국제대학원 정치경영연구소에서 그와 대담한 내용들 가운데 발췌해 소개드리는 박래군의 생각들입니다. 당시 대담 제목은 “별 11개 단 이 사람, 인생 제2막에서 던진 돌직구”입니다.
그의 생각들을 곱씹으며 동시대를 가슴으로 안고 살아온 한 사내에게 빚진 마음으로 무거운 밤입니다.
“운동권 진영에서 가장 큰 문제가 정파적인 문제다. 이런 것들이 자꾸 운동을 왜곡시키고 대중들의 참여를 막고 그들의 자발성이 분출되는 것을 막는 것 같다. 정파가 종파화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식으로 가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역량을 결집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라며 대중과 유리된 채 정파 이익 중심의 운동을 전개하는 운동권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나는 지금 인생의 제2막을 살고 있다. 소설가가 되려는 꿈을 갖고 대학에 들어가서 소설을 썼던 것까지가 제1막이다. 그다음은 원치 않는 운동권이 되어 운동을 사는 게 제2막이다. 2막을 60살까지 살려고 한다. 제3막의 삶은 1막에서 못 이룬 소설가의 꿈을 이루는 것이다.”
“운동을 하다 보면 내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거지 운동의 주체는 당사자들이 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의 성과도 그 사람들이 가져가는 게 맞고 패배도 그들의 질 수 있어야 한다.”
“인권운동하면서 나도 모르게 어느 정파에 속해있기도 했는데 그게 참 별 볼일 없다는 생각을 했다. 예를 들어 유가협에서 장례를 치르는데 NL열사면 내가 NL이 아니라고 해서 안 갈 것인가? 그렇지 않은 거다. 그 죽음 앞에서 내 입장에서 다르다고 하더라도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파적인 것을 내려놓자고 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보적 인권운동론을 주창하는 사람이다. 인권을 가지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청춘은 그런 중에서도 되게 더럽다.(웃음)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대학에 들어갔기 때문에 1학년 때는 학생운동 이런 것은 일절 무시하고 소설 쓰고 술만 마셨다.(웃음) 그때가 참 행복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악마의 손길에 의해(웃음) 운동권이 되었고 그 뒤로는 정말 치열하게 살았다. 한 1년 동안 학생운동을 하다가 이제는 재밌게 운동하나 보다 하다가 강제징집을 당했고, 일주일 동안 서대문경찰서에서 두들겨 맞고 그날로 강원도 양구에 있는 훈련소 가서 또 두들겨 맞았다. 맷집이 약했으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웃음)”
“프랑스 철학자 자끄 랑시에르가 ‘이 사회의 주류가 아닌 비주류, 소수의 사람들이 하는 것이 진짜 정치지 주류가 하는 것은 지배’라고 얘기를 했는데 참 똑똑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진짜 정치란 누군가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갈등들을 조절하고 자기 권리를 못 찾고 있는 사람들로 주체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하는 인권운동은 아주 훌륭한 정치라고 생각한다. 이런 훌륭한 정치를 30년 이상 해온 것이니까 정치에 미련이 있겠는가.(웃음)”
“1998년 ‘양지마을 사건’이라고 큰 이슈가 되었던 일이 있었다. 충남 연기군에 한 부랑인 수용시설이 있었는데 진짜 감옥보다 더한 비참한 곳이었다. 거기에서 탈출했던 어떤 한 사람의 얘기를 듣고 일주일 동안 조사를 해서 당시 국민회의 이성재 의원과 몇몇 단체와 함께 그곳에 쳐들어가 거기에 갇혀 있었던 300여 명이 되는 사람들을 전부 해방시켰다. 그 사건이 터지고 언론에는 ‘노예의 섬’이라고 해서 기사화되었고 우리는 거기서 나온 사람들을 위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대행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 상당수가 가족들에게 버림받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사회복지시설은 죽어도 가기 싫다고 해서 더 이상 손 쓸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나중에 수소문 해보면 이들 대부분은 노숙인이 되어버리거나 죽어 있었다. 이 일을 겪으면서 ‘과연 무엇이 잘못됐나’ 고민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모든 것을 대행해서 언론에 폭로도 하고 소송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옆에서 돕고 그들이 스스로 이 문제를 풀도록 했으면 그 사람들이 이후 노숙자가 되고 알콜중독자가 되어 거리에서 죽어가는 일이 없지 않았겠느냐 하는 생각을 했다. 인권센터를 통해 대리하는 운동이 아니라, 피해자가 스스로 주체로 서게 하는 인권운동과 사람들이 차분히 인권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자기의 권리를 찾아가는 길을 밟아갈 수 있는 대중적 기반의 모델을 만들어 가고 싶다.”
“독재 정권 때는 억울하다는 생각조차도 못 했었고, 조금 상황이 나아졌을 때는 억울하지만 어떻게 해볼 수 없으니까 그냥 지나쳤던 것이 지금은 사람들의 의식이 좀 높아져서 자신이 인권을 침해당한 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소송까지 가는 경우들이 꽤 있다. 그런데 이것들이 굉장히 이기적으로 수용되어 있다.
‘이기적으로 수용되어 있다’는 말은…
‘내 인권피해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이 인권침해를 당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그것을 굳이 뛰어들어서 휘말려? 송사에 휘말릴 수도 있는데?’ 하면서 문제제기를 안 한다는 거다. 이렇듯 인권문제가 철저하게 개인화 되어 있고 이기적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운동진영에도 존재한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매일 욕하는 것이 ‘평소에는 남의 인권에 대해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너네 해고당하면 인권운동 찾느냐?’라는 것이다. 인권운동이라는 것은 일종의 ‘품앗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평소에 정말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공감하고 같이 싸울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특히 IMF 이후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던 연대의 가치들이 철저하게 깨져 나갔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진보운동이 엄청난 패배를 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1위고 범죄율도 엄청나게 높아지고 있지 않나. 사람들이 옆에서 죽어나가는 대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있다. 내 일이 아니기도 하고, 이런 일들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웃음)”
박래군 – 그의 말처럼 이제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안전사회 건설 목표를 향해 변함없”는 길을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하게 마련이다. (Those who do 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 – 미국의철학자이자 시인이었던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가 한 말입니다.
또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씀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나아가 선생은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한국이 되니 이것이 어쩐 일이냐. 이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것은 노예정신이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라는 교훈으로 늘 역사에게 오늘을 묻고 내일을 설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E. H. Carr(Edward Hallett Carr)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가 과거의 어떠한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선택할 때 존재할 수 있다.”라고 명징한 대답을 내민 바 있습니다.
저는 이즈음 뜻이 맞는 몇몇 사람들과 역사공부를 함께 하려고 시간을 좀 내고 있습니다. 조금 뜬금없는 일이기도 합니다만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다.
세월호참사 일주기를 넘어가는 시점에서 결성된 4.16연대가 ‘이젠 인권을 이야기 할 때’라며 제안한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뉴스에서 이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바로 “뜬금없이 이게 뭐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사람 살아가는 모든 모습들을 다 담아낼 수 있는 엄청난 크기의 그릇에 “세월호”를 주어담는다는 게 적절한 것인가?라는 스스로의 물음 때문이었습니다.
가뜩이나 시간이 흐르면서 “세월호”라는 말조차 피로감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즈음에 이런 접근이 과연 옳은 것일까?라는 질문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습관처럼 이런 물음을 들고 성서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성서가 제가 준 응답은 에스겔(에제키엘) 34장에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너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목자들에게 그들을 쳐서 이르는 내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망하리라. 양을 돌보아야 할 몸으로 제 몸만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아! 너희가 젖이나 짜 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 먹으면서 양을 돌볼 생각은 않는구나. 약한 것은 잘 먹여 힘을 돋구워 주어야 하고 아픈 것은 고쳐 주어야 하며 상처입은 것은 싸매 주어야 하고 길 잃고 헤매는 것은 찾아 데려 와야 할 터인데, 그러지 아니하고 그들을 다만 못살게 굴었을 뿐이다.
양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 온갖 야수에게 잡아 먹히며 뿔뿔이 흩어졌구나. 내 양떼는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내 양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 다니는 목자 하나 없다.
그러니 목자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내가 맹세한다. 나의 양떼는 마구 잡혀 갔고, 나의 양떼는 목자가 없어서 들짐승에게 찢겼다. 그런데도 내가 세운 목자들은 나의 양떼를 찾아 다니지 않았다. 제 배만 불리고 양떼는 먹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목자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주 야훼가 말한다. 목자라는 것들은 나의 눈밖에 났다. 나는 목자라는 것들을 해고시키고 내 양떼를 그 손에서 찾아 내리라. 그들이 다시는 목자로서 내 양떼를 기르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양떼를 그들의 입에서 빼내어 잡아 먹히지 않게 하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보아라. 나의 양떼는 내가 찾아 보고 내가 돌보리라.’> – 에스겔 34 : 1 – 11, 공동번역
바로 “존엄과 안전 지대에서 내 팽개쳐져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위로이자, 그렇게 “사람들을 내 팽개친 권력자들”에 대한 응징의 소리였습니다. 나아가 신의 직접통치를 선언하는 대목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본 응답이었답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 살아온 모습 곧 역사에 묻기로 한 것입니다.
혼자 역사 앞에 서서 묻기보다는 여럿이 함께하는 일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평소 뜻이 엇비슷한 이들과 함께 나선 일입니다.
어디까지가서 어떤 응답을 얻을런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행여 헛수고가 되도라도 뜻을 새길 수는 잇겠다는 생각입니다.
‘인권’이라는 큰 그릇 속에서 지금은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세월호에 얽힌 피맺히고 한맺힌 소리들이지만 언젠가 그 그릇을 꽉 채워 세상을 향한 큰 울림이 되는 날을 그리며 역사에 묻고자하는 것입니다.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함이요, 미래를 열기 위함이요, 세월호를 역사적 사실로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는 그의 짧았던 공생애를 통해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야기들을 남겼습니다. 그는 그가 말한 이야기만 남겼던 것이 아니라 일(행위)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에 대한 모습을 실천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그가 행했던 여러 기적들과 치유 행위들 그리고 용서의 행위들이 바로 그런 일들입니다.
예수는 눈먼 자의 눈을 뜨게하고, 귀먼 자의 귀를 열어주었습니다. 누워 자리보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곧 죽어가는 이를 일으켜 세웠고, 죄(간음)로 인해 사람들의 돌팔매에 맞아죽울 지경에 처한 여인을 용서하며 살리기도 했습니다.
성서는 이러한 예수의 일하심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상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끝내 침묵하고 우리들에게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성서가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침묵한 것들입니다.
눈과 귀가 멀고, 병으로 고통받거나 심지어 자신의 행위로 인해 죽음 앞에 놓인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고 용서하는 일을 하면서도, 그 아픔과 고통들의 원인이 무엇인지 또는 거기에 담긴 신의 뜻이 무엇인지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설명 따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러한 아픔과 고통과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 대해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어떤 평가에 대해서도 일체 묵언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병고침이나 기적 또는 용서의 행위를 내렸던 사람들은 모두 당시의 관습으로 보아 죄인들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격리, 소외되어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좀 더 거센 표현을 하자면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없는 마치 짐승이나 물건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 이쯤에서 이야기를 멈추고 한가지 정리를 합니다.
예수 이야기와 얽혔던 사람들 모두 지금은 없습니다. 다 죽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때” 다 죽었습니다. 긴 역사의 눈으로 보면 병을 고쳐서 좀 더 살았든, 돌팔매에 맞아 죽는 일을 피해 좀 더 살았든, 아니면 그 당시에 배 두드리며 떵떵 거리며 살았든 모두 찰라를 살다 죽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기적과 용서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사람이 겪는 아픔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아픔은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아픔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또는 소수의 사람들이) 사람들(또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왕따돌림을 당해 소외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예수의 일하심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삶이란 “사람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회”를 기적으로 치유로 용서로 “사람이 사람답게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로 바꾸고자 했던 것이라고 성서는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이천년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제 고작 일년이 갓 지난 세월호의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이 <인권>을 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명해야만 할 성서적 물음입니다.
한국 또는 한국인들을 특정지어 표현하는 말들을 꼽자면 긍정적인 말에서부터 부정적인 것까지 꽤 많을 것입니다.
엊그제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계획이 취소되었다는 짧막한 보도와 함께 전세계에 퍼진 것은 메르스와 한국을 동시에 연상케 하는 뉴스들입니다.
급기야 오늘에 이르러서는 “세계보건기구(WHO)가 현장조사 중이지만 메르스와 다른 한국판 메르스(Korean MERS)라는 뜻의 코르스(KORS)로 확인될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 또는 한국인과 연관지어지는 신종어가 생길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개인이나 단체나 국가나 좋고 나쁜 면들이 모두 있게 마련이지만 아무렴 좋은 면들이 많이 드러날수록 정말 좋은 일이겠지요. 저처럼 한반도에 돌아가 누울 한 뼘의 땅조차 없이 완전히 떠나와 이민의 삶에 뿌리를 내린 사람이라도 모국인 대한민국과 한국인들과 연상되어지는 말들이 나쁜 것이라면 정말 쓰리답니다. 좋으면 그냥 좋은 것이고요.
옛날 중국의 노자(老子)선생은 “이웃나라와 가까와서 닭이나 개의 소리가 들릴지라도, 자기네의 음식과 의복에 만족하고 스스로의 고유한 관습과 각자 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낀 나머지,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이웃나라에는 가고싶지 의욕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정부 또는 정치가 최상이라고 끔 같은 말씀를 남기신 바 있지만, 거기 발뒤꿈치에 이르지 못할지언정 이즈음 듣는 모국 소식들은 참담하기 이를데 없어 정말 아프답니다.
그저 아리고 쓰릴 뿐이지 딱히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없거니와 “떠난 놈이 뭔 신경?”이라는 물음에도 그럴듯히 내세울만한 답변조차 없답니다.
애들 다 키우고, 부부가 덤덤하게 노년을 준비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터에 좋은게 다 좋은 거라고 안보고 안듣고, 생각 아니하고 살면 노자선생이 말한 세상이랍니다.
그런데 어디 살아있다는게 그런가요? 아리랑 쓰리랑을 흥얼거리거나 듣노라면 그냥 눈물이 흐르는 천상 조선놈인것을요.
숱한 뉴스들 가운데 제 가슴을 후비며 정말 아리고 쓰리게 다가오는 소식이 있답니다.
한국시간으로 어제 날짜인 6월 11일 109일 째 일보삼배 행진을 하고 있는 이호진, 이아름 부녀의 소식이랍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로 아들이자 동생을 잃은 부녀입니다.
메르스를 위시한 블랙홀 같은 뉴스들에 묻히거나 의도적으로 언론들이 다루어주지 않아 그들의 몸짓이 얼마나 절박하고 절실한 것인지, 그들의 몸짓에 조금만이라도 눈길을 주었다면 오늘 메르스가 코르스가 되는 국면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못하는 지금의 상황이 참 아프답니다.
삼십만 번의 절을 하며 걸어온 길, 이들 부녀가 이제 사흘 후면 광화문광장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제 이아름양은 자신의 페북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광화문에서 저를 기다리는 게 무엇이든 감사할 것이고 기억할 것 입니다.”
그 아이에게 감사함과 기억할 꺼리를 안겨주어야겠습니다. 비록 물리적으로는 광화문 광장에서 그들 부녀를 맞지 못하더라도 손편지 한 장, 작은 감사의 표시, 그도 아니면 페북에 “참 장하다”는 말 한마디라도 함께 나누실 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단 한 분 만이라도.
한국 또한 한국인을 특정지어 표현하는 말은 바로 저 하나, 이 글을 읽는 바로 당신 한 사람이 만들 수도 있기에….
용산구청에서 일정을 마무리 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기자언니가 물어 봅니다. 다 끝나면 가장 먼저 뭘 하고 싶냐고. 집에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소감이 어떠냐고 물어보는 언니에게 자신있게 시원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속소로 가는 차 안에서 다시 생각했습니다. 정말로 시원한지.
아빠와 제가 팽목항에서 첫 절을 올리고 이 곳 용산까지 오는 데 109일이 걸렸습니다.
아빠와 제가 이렇게 바닥을 기어 오는 걸 얼마나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지, 알고 계신다면 그 분들은 아빠와 저를 어떻게 보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빠와 저는 이렇게 해야 했습니다. 그게 살아있는 아빠와 저의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하늘에 있는 승현이와 아이들만 믿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빠와 저의 마음을 아이들이 알아준다면 잘 될 것만 같았습니다. 어떻게 끝나야 잘 끝나는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일기에 제가 썼던 말이 기억납니다.
광화문에서 아빠와 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우리 승현이 였으면 좋겠다고.
이틀.
제가 이렇게 길바닥에서 금쪽같은 우리 승현이에게 속죄할 수 있는 시간 입니다.
저에게 109일 이라는 시간은 우리 승현이를 만나기 위해 팽목으로 달려가는 그 순간만큼 길었습니다.
주일아침, 유교(儒敎)의 경전 가운데 하나인 역경(易經)에 있는 가르침을 우습게 아는 이들이 차고 넘쳐나는 세상 뉴스를 보면서 몇 자 적어 봅니다.
주역(周易)이라고도 부르는 역경을 보면 태극, 음양, 사상, 팔괘 등등의 용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64괘가 있고 그 64괘 중 제일 윗자리에 건위천(乾爲天)이라는 괘가 있습니다.
이 건위천이라는 괘에 해당하는 사람의들 운세는 이렇게 설명되곤 합니다.
“용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형상이다. 사업에 비하면 盛業(성업), 完全操業(완전조업)을 의미한다. 따라서 긴장한 상황 속에 있으며 또한 책임도 무겁다. 그래서 이 괘는 가장 좋은 괘이다. 너무나 좋기 때문에 모든 것은 차면 기운다는 것으로 도리어 불길한 것으로 역전할 우려가 있다.”
“현재 귀한 위치에 있는 이거나 또는 평소에 부지런하고 자신을 잘 다스리는 사람에게는 지극히 좋은 괘이지만, 평소에 근면하지 아니한 사람, 거짓말이 많은 사람, 오만한 사람들에게는 악운으로 역전되기가 십상이다. “
“보통 사람들에게 운이 꼭대기에 다다른 것이서 오만심을 불러일으키기 쉬우니 조심하라.”
“너무 높이 올라간 용의 형국이다. 용은 떨어질 우려가 있다.”
그리고 주역(周易) 건위천(乾爲天)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아감은 알되 물러남은 알지 못하며<知進而不知退(지진이불지퇴)>, 존함은 알되 망함은 알지 못하며<知存而不知亡(지존이불지망)>, 얻음은 알되 잃음은 알지 못하니<知得而不知喪(지득이불지상)> “
“나아감은 알되 물러남은 알지 못하며<知進而不知退(지진이불지퇴)”라는 말은 얼핏 승승장구하는 군대나 연전연승하는 스포츠팀이나 선수들에게는 아주 듣기 좋을 수도 있겠습니다.
조선시대 양반과 관료사회에서는 이 역경의 가르침을 벼슬아치들이 반드시 곱씹어야 할 교훈으로 삼았었다고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벼슬자리 곧 권력을 부리는 자리에 앉다보면 계속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제 목적을 이루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갖은 권모술수와 부정하고 부패한 방법으로 제 목적을 달성했지만 끝내 패가망신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그런 개인이나 집안의 패가망신 뿐만 아니라 자칫 나라가 절단나는 사단이 될 수도 있겠기에 벼슬아치들에게 곱씹기를 강조했던 말 “나아감은 알되 물러남은 알지 못하며<知進而不知退(지진이불지퇴)”라는 교훈이 뼈저리게 들려야만하는 오늘입니다.
제 자리 아닌 것은 탐하지 말 일이며, 설혹 그 자리에 올랐다 하더라도 제 자리가 아닌 줄 알면 물러나야 개인이나 나라에 득이 될 일입니다.
자기가 오른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도 모르고 공주놀음에 빠져있는 대통령을 비롯해 부정부패의 교본으로 기록될 만한 이들이 연이어 국무총리 자리를 놓고 출사표를 던지는 인간들, 입으로는 독감정도의 감기라면서 그 조차 수습못해 전 국민을 유언비어의 도가니속에 빠뜨려 놓고 허둥지둥 거리는 장차관 이하 실무 담당 공무원들, “경제가 세월호에 발목잡혀…”운운히며 한(恨)조차 풀지 못하고 죽은 귀신 불러내어 제 면피에 급급한 국무총리 대행이라는 인간들이 오늘 절실히 곱씹어 마땅한 “知進而不知退(지진이불지퇴)”입니다.
오체투지(五體投地)나 삼보일배(三步一拜)라는 말들은 제게 좀 낯선 말들이랍니다. 제가 그런 행위들을 해본적도 없거니와 귀에 익은 말들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비롯된 이 말들은 제 일상과는 거리가 좀 있답니다.
금강경이나 반야심경 같은 경전들의 번역본들이나 벽암록 같은 선문답집 등을 곁에 두고 읽는 까닭은 그저 제 지적 유희일 뿐이지 불교의 심오한 바닥을 느끼고자하는 지경은 아니랍니다.
그러니 오체투지(五體投地)나 삼보일배(三步一拜)같은 수행방법들은 저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랍니다.
사실 108배니 천배니 삼천배니 하는 말들은 소설속 또는 야사 등에서 들어보았지만 오체투지니 삼보일배니 하는 말들을 들은 것은 근자에 이르러서입니다.
세월호 희생자인 고 이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씨와 누나 아름양이 팽목항에서 광화문을 향해 삼보일배 걸음을 내디딘지 백일을 맞는답니다.
세걸음 걷고 큰 절 한번하면서 520km의 거리를 온몸으로 걷고 있는 것이지요. 지난 2월 23일에 시작한 이 고행의 걸음은 오는 이달 중순경 광화문에서 끝을 맺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무릇 모든 종교 수행 방법에는 고행이라는 수단이 있습니다. 세 걸음 걷고 한번 큰절을 하는 삼보일배만 하더라도 자신이 지은 모든 나쁜 업을 뉘우치고, 깨달음을 얻어 모든 생명을 돕겠다는 서원하는 불교의 수행법입니다.
삼보일배는 문자 그대로 세걸음 걷고 절 한번 하고라는 뜻 위에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의 삼보(三寶)에 귀의한다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곧 부처님께 귀의하고, 진리에 귀의하고, 수행자에게 귀의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호진씨 부녀의 삼보일배 고행이 비단 그런 종교적 수행만은 아닐 것입니다. 두 부녀의 고행길은 자신들이나 가족들의 구원이나 깨달음을 위한 수행만은 아닐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마 지난해 4.16일 이전의 이호진씨 부녀에게 이런 고행길이란 차마 꿈속에서라도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들 부녀가 이런 고행과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일이 일어났을까, 그 의미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예수쟁이인 저는 이런 고통의 의미를 성서에게 묻게 된답니다.
성서 욥기는 바로 이호진씨 부녀와 같은 처지에서 육체와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해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학작품입니다.
욥기의 주인공인 욥은 죄없는 자들이 당해야만 하는 고통과 그 고통을 정당화하는 체제(신학, 신앙)에 대한 그리고 그런 종류의 신(고통을 정당화하는 이들이 말하는 신)에 대한 반항이자 도전입니다.
그러나 욥기 저자는 끝내 욥이 당하고 감내해야했던 고통에 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적 또는 설득력있는 설명이나 해석을 내리지 않습니다. 욥기는 죄없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란 가장 비인간적 상황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그것을 이겨내야만 하는 몫은 바로 사람에게 달려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신이 함께 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호진씨 부녀가 사개월여에 걸친 520km 삼보일보의 고행을 광화문에서 마친 후에도 아마 두 부녀의 고통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지난 일여년 동안 세월호 유가족들과 그들과 함께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바램들이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삼보일배의 고행은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이 될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딱 일주일 전 이 시간쯤이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사람답게 살며, 이웃을 사람으로 여기며 사는 세상”을 꿈꾸며 살아온 필라에 사시는 김경지선생께서 전화를 주셨답니다.
35주년 5.18을 맞아 조촐한 간담회를 개최하려고 준비 중인데, 광주항쟁을 기념하면서 4.16 세월호 참사와 기독교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참석하겠노라고 응답드리고나서 이런 저런 뉴스들과 자료들을 뒤적이고 있었답니다. 그러다 제 눈에 들어 온 말들입니다.
“하나님이 (세월호를) 공연히 이렇게 침몰시킨 게 아닙니다. 나라가 침몰하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은 그래선 안 되니, 이 어린 학생들, 이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준 것입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
이른바 기독교인들이 했던 말들 입니다. 그것도 자칭타칭 기독교계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목사들이 한 말들입니다.
해당 기사들을 훑어 보다가 든 생각이랍니다. 과연 이런 생각들이 그들만의 것일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월호라는 이름은 분명 잊혀져가는 사건, 또는 잊혀져야만 하는 사건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대다수일 것입니다.
처음 사건이 일어났을 때만 하더라도 안타까움, 동정하는 마음, 웬지 그냥 아리고 슬픈 마음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어떻게 이런 일이….”하던 이들도 이젠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그게 언제적 일이냐고?”, “제네들은 뭘 더 바라는거야?”, “그건 지나간 일이고 우리들이 이젠 살아야지!”, “아니 누가 그때 제주도를 가라 그랬냐고?”, “저게 아무래도 종북 빨갱이들이 뒤에 있을게야…” 등등등
누가 하는 소리냐고요? 바로 믿는 분들이 하시는 말씀들이랍니다.
아마 이 순간에도 유가족 이호진씨 부녀는 광화문을 향한 삼보일배 고된 여정을 계속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 거의 다달았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을 터입니다. 그러나 그들 부녀가 광화문광장에 도달한다하여도 세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고, 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 그리고 그들의 외침에 귀 기울이고 있는 이들이 함께 소리쳐 외치는 함성은 “진실규명”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원인 “진실규명”은 시간이 갈수록 잡기 어려운 길목으로 들어서는 듯합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진실규명”은 비록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이 없는 지금 보고 듣고자하는 이들에게는 이미 진실에 다가서고 있다고 믿습니다.
다만 진실보다 거짓에 익숙한 삶을 살아 온 공동체가 진실을 말하는 이들을 조롱하고, 멸시하고, 능멸하는 사회가 너무 오래 지속되어 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또 그렇게 그들의 외침은 스러져 갈 것이라는 생각들이 지배적인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 끝에서 희망을 보았답니다.
바로 바울이 이야기했던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 15)는 명령에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넓고 깊게 연대해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구약 성서에는 각기 전체 이야기에 큰 기둥이 되는 사건들이 하나씩있습니다.구약에서는 출애굽사건이요, 신약에서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출애굽사건은 해방에 대한 이야기이고, 십자가사건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신앙고백이라고 말합니다. 성서는 바로 신앙고백서이고 그 고백서의 핵심은 바로 해방과 구원 이야기다라는 전제를 바탕으로하면서 제 발제를 시작하겠습니다.
출애굽 또는 탈애굽이라는 해방사건이 노예들이었던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있었던 역사적, 신앙적 경험이었던 것처럼, 우리 한민족에게는 70년 전에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난 해방의 역사적 경험이 있습니다. 피지배민족이라는 사슬에서 벗어난지 올해로 70년이 되었지만, 그 역사적 경험을 민족 공동체가 깊게 되새기는 시도는 아직도 여전히 부족하거나 오히려 되새기는 일이 금기시되는 지경에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1945년 해방이후 한반도에서는 무수한 사건 사고들이 이어져왔습니다. 이런 사건 사고들은 비단 한반도 남북에 국한되어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역사이래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공동체 겪어 온 경험들입니다.
다만 각 민족 또는 국가 공동체들이 자신들이 당한 사건이나 사고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넘어가느냐는 것은 각기 다릅니다.
오늘 저는 우리들의 경험들 곧 1945년 이래 한반도 남쪽에서 일어났던 사건 사고들을 아주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 사건 사고들 가운데 자연재해 등의 천재 이런 것들은 제외하고 국가권력을 비롯한 공권력이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일어났던 굵직한 사건들을 몇가지 꺼내어 짚어보고자 합니다. 사건이나 사고는 연도순으로 짚어봅니다.
우선 제주 4.3사건을 들수 있겠습니다. 미군정 치하였던1948년 4월 3일부터 시작해서 대한민국정부 치하인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이렇게 약 6년 동안 이어져온 제주 4.3사건 또는 제주항쟁에서 약 3만에서 8만명으로 추정되는 제주도민이 학살당한 사건입니다. 당시 제주도민 7-8명당 1명 꼴로 죽임을 당한 사건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이 사건 개시일로부터 약 55년이 지난 2003년 10월에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 처음으로 사과를 하고, 2005년에는 국가 차원에서 최초로 4.3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총리후보였던 문창극이 4.3폭동이라고 규정하는 등 현 집권세력 및 동조세력들은 이 사건을 좌익 빨갱이들을 토벌한 사건으로 만들려고 여전히 애쓰고 있습니다.
다음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어났던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들수 있겠습니다. 국민보도연맹(정식 명칭은 국민보호선도연맹)은 남한 내 공산주의 세력 약화를 위해 과거 좌익에 몸담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가입시켜 만든 단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1949년에 이 단체를 만들면서 관료들이 실적을 높이기 위해 마구잡이 또는 강제로 양민들을 이 단체에 가입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국가는 이 단체에 속한 사람들은 과거 전력 때문에 북에 동조할 염려가 있다면서 산골작이로 이들을 끌고가 무차별 학살을 자행합니다. 이 사건으로 학살당한 사람 수는 적게는 6만에서 많게는 60만에 이른다는 설들이 있는데, 대략 20만 추정설이 강한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이 역시 노무현대통령이 2008년 1월 24일 울산 국민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한 과거 국가권력의 불법 행위에 대해 포괄적으로 사과하였지만, “보도연맹”이라는 말 자체가 여전히 금기시되는 사회라는 것이 오늘의 솔직한 모습일 것입니다.
다음은 역시 전쟁 중에 일어났던 국민방위군 사건을 들 수 있겠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한때 압록강까지 진출했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합니다. 이른바 1.4후퇴입니다. 이때 국가는 다시 적의 지배지역이 될 곳에 사는 장정들을 적들에게 뺏기지 않을 목적으로 만 17살 이상 40살 이하의 장정을 제2국민병에 편입한 뒤 제2국민병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을 만듭니다.
그리고 전국에서 해당 연령층에 있는 사내들을 징집합니다. 문제는 이들을 수용할 시설도 식량도 의복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원된 장정들은 2인당 한명꼴로 가마니 한장을 지급받은 채 무조건 각자 알아서 부산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한겨울 추위, 전쟁통에서,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한 이들 국민방위군 총수 50만명 가운데 약 20%의 10만명이 굶어죽거나 얼어죽은 사건입니다.
훗날 이 사건이 세상에 들어나면서 국회조사단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민방위군을 위한 국가 예산 대부분인 당시돈 50-60억이 국민방위군 재정을 실질적으로 총괄한 부사령관 윤익헌 등 당시 국가 권력자들의 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죽어 간 사람들 가운데 정부가 인정한 사망자수는 꼴랑 331명입니다.
그리고1970년 4월 8일에 일어났던 와우아파트 붕괴사건과 이듬해인 1971년 8월 10일 전라도 광주가 아닌 경기도 광주에서 일어났던 광주대단지 대봉기사건입니다.
이 사건들은 개발독재 시절 국가권력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들입니다.
1960대 서울은 경제성장으로 인해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로 인해 짧은 시간에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던 시절이었습니다. 늘어나는 인구에 비해 그들이 살 집들 곧 주택은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그러다보니 서울에는 하꼬방이라고 불렀던 무허가 판자집들이 넘쳐났습니다. 청계천 일대를 비롯하여 정동을 중심으로 한 신문로 일대 등 서울 곳곳에 하꼬방들이 즐비했습니다.
그즈음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판자집 좀 정리해 보라”는 명령을 내리고, 블도저시장이라는 닉네임이 갖고 있던 그의 충복 김현옥 서울시장 은 이른바 시민아파트라는 새로운 주거공간과 신도시 건설에 앞장서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시민 또는 국민이라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 건설사업이 아니라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사업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마구잡이 사업이었습니다.
당시 세워진 시민 아파트들 대부분이 서울에 있는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는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의 말은 이 사건들을 압축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높은데 있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니냐?”라는 말입니다.
6개월만에 세워진 5층 아파트가 완공된지 5개월만에 주저 앉았는데 나중에 조사해보니 철근 70개를 써야하는 기둥에 철근 5개를 썻다는 것이 밝혀졌답니다. 아무튼 이 사고로 33명이 죽고 40여명이 크게 다쳤답니다. 제 고향이 신촌이라 이 사건에 대해 할말이 많지만 일던 여기서 접고요.
광주대단지 봉기사건으로 넘어갑니다.
무허가 판자촌 해결에 봉착한 당시 박정희 정부는 일부 무허가 주택은 개량해서 허가 주택으로 양성화하고 나머지는 새로운 주택단지를 세워 무허가 주민들을 이주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경기도 광주에 대단지 주거 공간을 만든다고 공표를 합니다.
주로 청계천과 서울역 부근에 거주하던 빈민층 10만여명에게 “다시는 서울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각서에 서명하면 광주에서 살 집을 마련해 준다”는 약속을 하고 이들을 경기도 광주로 이주시킵니다.
문제는 10만명이 이사를 한 광주에는 도로, 교통, 시장 등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좀 더 간단히 설명을 드리자면 떵 몇 평을 주고 여기서 살되 각자 알아서 살아라는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휘발유를 부어 불을 붙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주를 권유하면서 평당 당시 돈 200원에 주기로 한 땅을 8000원에서 16000원씩을 내라고 국가 공권력이 강제한 것입니다. 국가의 사기질에 불이 붙었습니다. 자그마치 약속보다 40배에서 80배를 요구한 것입니다.
대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약 6만여명이 시위를 하면서 경찰 차량을 포함한 약 22대의 차량에 불을 지르는 등 대규모 항거가 일어납니다. 이들이 “서울로…”라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당시 서울시장 양택식이 사과하고 이들의 요구를 다 들어 주기로 하고 사흘만에 이 봉기는 막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주동자 22명은 “폭동을 일으킨 주범들”로 낙인 찍히고 맙니다.
이 사건은 이후에 일어난 부마항쟁, 광주항쟁 등 민중항쟁의 한 표본이 되기도 하는데 현재 많은 진보인사들 가운데도 이 사건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1980년 5월 18일 광주항쟁이 일어납니다. 아니 일어난 게 아니라 일으킵니다, 누가 국가권력이. 이 부븐은 제가 건너 뜁니다.
자, 다음은 성수대교 붕괴 사건과 삼풍백화점 사건입니다. 이게 어떻게 국가 권력과 상관이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1994년 10월 21일 서울시간 아침 7시 48분경에 일어났던 성수대교 붕괴사건은 전세계사에서 보기드문 안전불감증에 걸린 국가권력을 대변하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듬해인 1995년 6월 29일에 일어난 단군 이래 최대의 참사라고 일컬어지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역시 이에 맞닿아 있습니다.
이 두 사건 이후 실시된 정부의 안전 평가 실시 결과를 보겠습니다. 정부의 발표입니다.
전체 고층 건물의 1/7(약 15%)은 개축이 필요한 사태이다.
전체 건물의 80%는 크게 수리할 부분이 있다
한국내 전체 건물의 2%만이 안전한 상태이다.
1995년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있었던 진단입니다.
그리고 이제 세월호입니다.
세월호 사건은 해방후 겪었던 모든 사건들을 축약해서 드러낸 사건입니다.
2014년 4월 16일 대한민국 진도 서해앞바다 에 배가 가라 앉았고 이내 탑승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구출되었다는 뉴스에서부터, 건국이래 최대의 구조 작업이 펼쳐지고 있다는 뉴스가 이어졌지만 단 하나의 생명체가 구출되었다는 보도는 없었습니다.
이제껏 되돌아보았던 사건들의 공통점입니다. 국가권력과 공권력이 주도했거나 책임과 의무를 방기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사건들입니다. 그리고 결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왜 그랬지?”라고 묻는 사람들은 불순분자, 좌빨, 종북 등등으로 불온의 낙인을 찍어 버립니다. 그리고 국민, 시민들에게 그 사건을 빨리 잊어버리라고 종용합니다.
2015년 오늘까지 자그마치 70년을 이어져온 것입니다. 역사를 되새겨 곱씹을 줄 모르는 공동체의 아픔입니다.
이제 다시 성서로 돌아갑니다.
저는 해방과 구원이라고 말씀드렸고, 그것은 신앙적 고백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해방과 구원의주인공은 누구입니까? 신이라고요? 아닙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 지금 노예인 상태, 억눌린 상태, 억압받은 상태 바로 우리말로 이야기하자면 한을 품은 상태에 놓인 사람이 바로 주인공입니다.
바로 성서가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 가난한 사람들에 정의는 시대에 따라 많이 달라집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 강단에서 이 가난한 자들에 대한 황당한 정의들이 난무하는 뉴스들을 보곤합니다. 실제로 가난한 자들이란 바로 부자들이라는 논리입니다. 부자들이 누리는 부와 권력 때문에 사람들에게 까닭없이 지탄받고 소외되고 미움을 받기 때문에 그들이야말로 진짜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황당하다고요?
저는 어제 한국의 경향신문에서 “국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역사의 피해자가 되게 하고 있다.”라고 시작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 말은 새누리당 한 중진의원이 한 말이랍니다. 바로 부자가 가난한 사람이다라고 우기는 한 전형입니다.
해방은 노예, 피압박, 억압, 굴종 등의 상태에서 풀려나오는 것입니다. 구원은 죄의 상태 곧 죄인에서 자유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는 이렇게 해방과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을 일컬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가 말한 가난한 사람들이란 바로 그들이 처한 물질적, 도덕적, 정신적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정치적 상황에서 가진자, 권력자와 그에 기생하는 사람들로부터 경멸받고, 손가락질 받고, 불온시 당하면서도 그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드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교육자이자, 철학자이며 사회운동가였던 파울로 프레이리는 이렇게 억눌리고, 불온시 당하며 그것이 당연한 일로 받아드리며 사는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내세 곧 죽음 이후의 세상에다 촛점을 맞우는 종교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해방되고 구원받는 바로 한풀이하는 세상을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1960, 70년대 브라질과 남미 민중들이 스스로 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다수가 문맹자였던 농민과 빈민들에게 문해교육 곧 글을 깨우치는 교육에 전념했습니다.
혹자는 2015년 문맹률 0%에 가까운 한민족에게 파울로 프레이리가 무슨 뚱딴지냐고 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입니다. 대한민국 국민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들의 문맹율은 0%에 수렴하고있지만 문해력, 곧 어떤 글을 이해하는 능력은 현재 OECD 국가들 중에 꼴지라는 것입니다.
자신, 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이나 지역에게 유리하고, 편리한 것들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보고 듣기에 불편한 것들은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하고 간편하게 불온으로 찍어 버리면 그만입니다. 분단 상황은 이들에게 아주 유용하고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권력자들은 이런 상황을 아주 적절히 이용합니다. 남북대화록을 마구 까댈 수 있었던 까닭이나, 앞뒤 논리가 맞지않고 심지어 허위사실까지 적시했던 헌법재판소의 정당해산 판결문을 다 까서 공개하는게 거림낌이 없는 만용들은 바로 읽지 않고, 듣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고, 아니 이해하지 않으려하는 민, 곧 국민, 시민, 민중의 속성을 잘 이용하는 권력자들의 횡포입니다.
이제 제 발제를 마치려합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희망을 보아야합니다. 해방 이후 숱한 사건과 사고들을 겪어오면서, 피해자 가족들이 이렇게 끈질기게 자발적으로 가난의 상태에서 해방되고 구원 받고자 했던 전례가 없습니다. 바로 세월호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들이 지난 일년 동안 줄기차게 목청높게 외쳐온 진실규명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희망을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투쟁과 외침에 귀기울이고, 이해하려는 해외동포들의 연계작업 바로 우리들에게서 희망을 보아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