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초상(初喪)입니다.

sewol22“내가 왜 수학여행을 와서, 내가 왜 세월호를 타서 , 나는 꿈이 있는데, 나는 살고 싶은데…”

침몰후 바다속으로 잠겨가는 배안에서 열일곱살 사내아이가 외쳤던  절규입니다. 고등학교 이학년이었던 김동혁군의 꿈은 그렇게 그의 절규와 함께 수장(水葬)되었습니다. 그때, 거기에 함께 있었던 305명 가운데 살아 뭍으로 돌아온 사람은 단 사람도 없습니다. 그 중 아홉명은 아직도 바다속에서 잠겨있건만 벌써 일년이 흘렀습니다.

예전 우리 조상들은 사람이 죽고난 후 일년이 지나면 소상(小祥)이라는 의례를 치루었습니다. 소상이라고 말할 때 쓰이는 상(祥)은 죽었다는 뜻으로 쓰는 상(喪)이 아니라 상서롭다는 뜻의 상자를 썻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 다시 봄이 되었으니 이제 슬퍼하는 마음을 잊고 좋은 계절을 맞으라는 뜻입니다. 슬픔에 겨워 식음을 전폐하던 세월을 접고 이제 새로운 세상을 맞으라는 뜻의 의례였습니다. 물론 이제는 거의 잊혀진 옛풍습일 뿐입니다.

이미 옛것이 되어 모두에게 잊혀진 이 풍습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들 바로 세월호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들과 기둥이자 삶의 의미였던 가족들을 잃고 난 일년맞이가 그들에겐 다시 초상(初喪)이 되었습니다.

2015년 4월 16일을 맞이하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실종자가족들은 다시 상복을 입고 삭발을 했습니다. 슬픔을 잊는 때가 아니라 슬픔에 아픔을 더하는 일년맞이입니다.

2014년 4월 16일, 봄이 흐드러진 제주의 풍광 대신 진도 앞바다 추운 겨울보다 차디찬 바다물 속으로 잠겨가며 외쳤던 김동혁군의 절규는 2015년 4월 16일 그의 어머니 김성실님의 소리가 되어 우리를 향해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어떻게 진상규명을 할지 이야기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다. 하나같이 다하는 이야기는 추모와 기억 뿐이다.”

2015년 4월 16일, 여기 필라델피아에서는 김동혁군과 305명의 넋을 추모하지 않으려합니다. 아직 그들이 소리치며 절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수학여행을 와서, 내가 왜 세월호를 타서 , 나는 꿈이 있는데, 나는 살고 싶은데…”

그들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아직 꿈을 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늘 삼보일배의 느린 걸음으로 광화문광장으로 향해 나아가는 그들의 아버지들과 누이들과 함께, 오늘도 봄이 가득한 안산과 광화문광장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그들의 꿈으로 사는 어머니들과 오라비들와 함께 숨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잊지 않으려합니다.

“우리는 외칠 것입니다. 하나 하나 떨어져 나가 단 한사람이 남더라도 외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돌이 되어 외칠 것입니다. 끝까지 단 한사람만이라도 남아 있기만 하다면 그 순간까지 부디 우리들을 잊지 말아 주십시요. 기억해 주십시요. 그것만이 우리들의 소망입니다. 그 바램으로 여기 필라델피아까지 우리들이 온 까닭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의 가슴에 잊지못할 당부를 남겨놓고 다시 상복을 차려입은 김동혁군의 어머니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 곧 잊어버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지키기 위해 잊지 않을 것입니다. 잊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아픔과 슬픔의 진실 규명을 위해 작은 노력이나마 게을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며 온몸, 온힘을 다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들의 꿈을 위하여 손톱이 다 빠지고 손가락이 까맣게 타토록 절규했던 넋들을 기리는 일은 바로 이제부터 우리들이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2015년 4월 16일, 이제 초상입니다.

416 참사 1주기 전세계 해외동포 동시 추모 집회 from SESAMO on Vimeo.

멋진 찬양 – 상상력

상상력구약성서에는 신인 야훼 하나님과 인간인 히브리(유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계약을 맺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여러 계약이야기들 가운데 유명한 것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야훼 하나님과 히브리족과 맺는 계약이야기와 다윗왕이 통일왕국을 이룬 후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는 계약이야기입니다.

이 두가지 계약이야기는 구약성서의 중심 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두개의 계약이야기를 서로 상충 곧 부딪히는 개념이라라고 해석한 사람이 있습니다.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이라는 미국의 성서학자입니다.

그는 다윗과 하나님과 맺은 계약의 밑바탕에 깔린 생각을 “왕권의식(Royal Consciousness)”이라고 규정합니다. 이는 다윗, 솔로몬과 그 후의 왕과 제사장들 중심으로 축복이 이어져 나가는 믿음과 소망을 바탕으로 한 계약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좀 더 쉽게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의 이야기를 풀어 쓰자면 이런 말입니다.

잘 사는 게 축복인데 잘 살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고 그 왕권은 바로 신이 부여해 준다는 계약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선민사상 곧 신에게 택함을 받은 백성인 유대족에게만 그런 왕권을 부여받은 메시아가 등장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계약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이 이따금 벌이는 국제 무법자같은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종종 개독교 소리를 듣는 오늘날 한인 교회나 신자들이 “예수 천당”이라며 ‘괴롭고 힘든 이 세상보다 천당가서 잘 살자’는 삐뚫어진 신앙을 외치는 일도 바로 이런 계약 정신이 한몫하고 있다는 해석이 따를 수 있답니다.

잘 사는 축복을 위해서라면 왕권이라는 신과의 중간 매개자가 필요하고 그 매개자가 억압과 착취를 하더라도 그 힘을 신에게 부여받았음으로 정당하다는 신앙이 자리를 잡게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계약은 무조건적으로 신이 이스라엘에게(특히 왕권에게) 내려준다는 계약입니다.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는 이와는 대척점에 있는 모세와 신과의 계약정신 바탕에는 “대안의식(Alternative Consciousness)”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합니다.

에집트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켜준 하나님과 노예에서 해방이 된 히브리족과의 쌍방계약인 이 계약은 잘사는 것에 초점을 두기보다 더불어 함께 먹고 사는데에 초점이 있다고 합니다.

잘살게 해준다는 약속을 빌미로 억압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매개자가 있는 계약이 아니라 올바른 정의와 공평이 강과 같이 흐르는 세상에 대한 계약이라는 것입니다.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이런 모세와 하나님과의 맺은 형태의 계약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상상력 특히 예언자적 상상력(Prophetic Imagination)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그의 책  <예언자적 상상력(The Prophetic Imagination)>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물음은 자유가 현실적인지, 실천 가능한지, 실현가능한지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상상할 수 있는 일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과 상상력이 왕권 의식에 의해 철저하게 공략당하고 흡수되어 버려서 대안적인 사고를 품을 용기나 능력까지 빼앗겨 버린 것은 아닌지 물어 볼 필요가 있다.

성취에 앞서 상상력이 와야 한다. 우리의 문화는 거의 모든 것을 성취할 만큼 힘이 있지만, 아무것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무력하기도하다. 어떤 것이든 남김없이 성취할 수 있게 해 주는 바로 그 왕권 의식이 상상력을 억눌러 버린다. 상상력은 위험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따라서 모든 전체주의 체제는 예술가를 두려워한다. 지배 현실에 도전하여 싸울 수 있는 수단으로써 마지막 남은 것이 시적 상상력이다.>

부활주일을 보내고,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바라보면서 2015년 오늘을 사는 한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한사람의 예수쟁이로서 떠올려 본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입니다.

종말론적 삶을 강조하는 신 앞에서  예언자적 상상력은 사람이 그에게 화답하는 정말 멋진 찬양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