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사람, 사랑 – 한국여행6

6. 세대(世代)에

    유년시절에 주로 듣던 사투리는 강원, 충청이나 전라, 경상도 말이 아니었다. 평안, 함경도 바로 이북 사투리였다. 이번 한국여행 마지막 이틀 저녁 시간을 각기 함께 했던 박성규와 김종석은 모두 이북 사투리를 쓰던 친구들이다.

    박성규는 제법 나이 들어 사춘기에 이를 때까지 ‘그래서리, 저래서리’하는 함경도 말투를 지니고 살았다. 내가 이번 한국여행 계획을 처음 상의했던 친구는 바로 박성규였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참 착함을 너머 선한 친구이다.

    아직 열심히 일에 열중하는 건실한 기업인이다. ‘가기 전에 밥 한끼는 함께 해야하지 않느냐’며 그의 바쁜 시간을 쪼개 우리 내외에게 내어 주었다.

    어린 시절 추억에서부터 같은 대학을 다녔던 터라 그 시절의 이야기, 그가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겪어낸 어려움들과 이젠 잘 가꾸어 온 사업에서 어떻게 멋지게 떠나야 할까 하는 그의 기도까지 이젠 여유롭고 조곤조곤한 서울 말투로 이어진 그이 이야기를 듣던 그날 저녁은 마치 우리 세대의 활동사진들을 보는 듯 했다.

    헤어지며 그가 말했다. ‘고마워요. 우리 또 언제 보겠수…. 건강합시다.’ 한 해 아래라고 아직도 내게 형 소리를 놓치지 않는 참 좋은 친구에게 깊은 감사를.

    바람산 언덕배미 초입 종석이네 집에는 온통 피양도 사투리 뿐이었다. 꼬부랑 할머니부터 손가락 휜 아버지, 늘 부지런하신 어머니 정순덕권사님 모두 모두 이북 사투리였다. 우리들의 유년과 소년과 청년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은 기억들을 내가 품고 있는 친구 김종석이 시건방지게 지니고 있던 호(號)가 있으니 바로 우리들의 고향 이름인 신촌(新村)이다.

    여행 마지막 저녁시간을 그와 단둘이 보냈다. ‘뭘 먹고 싶수? 내가 세 가지를 생각해 봤는데…. 하나 골라보슈!’ 그렇게해서 내가 고른 곳이 연탄구이 돼지갈비집이었다. 그렇게 그 저녁 우리들은 우리들의 스물 언저리 비록 가진 것 없이 꿈만 있었던 B급 청춘시절부터 칠십줄에 놓인 우리들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곤고했던 그의 마포, 인천 시절의 청춘 이야기에서부터 발 딛게 된 대학 사무처 일,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해야 할 일들은 반드시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들에는 결코 한눈 파는 법 없이 오르고 오르던 그의 지난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는 그의 첫 시집 ‘고물시계’를 자꾸 떠올렸었다.

    그 역시 성실했고 착했고 선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비록 고물시계가 돌아가는 세월을 지나왔을지라도, 어쩜 지금도 그 고물시계가 돌아가는 세상일지라도.

    지하철 역에서 헤어지며 우린 한참을 꼭 껴안으며 서로에게 말했다. ‘건강하자!’, ‘건강합시다!’ 그 역시 내게 ‘형’ 소리를 놓지 않는 신촌, 그래 신촌친구다.

    나는 이번 한국여행에서 철원과 제2 땅굴과 평화전망대를 두루 돌아볼 수 있었다.  선배 차용철형과 친구 안병덕과 후배 김종민과 김환조목사 등의 배려 덕이었다. 내가 두루 돌아 걸어 본 그 길들은 거의 이십 여년 전 내 아버지가 여든 무렵에 마지막으로 한국여행을 가셨을 때 걸으셨던 길이였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로 알려진 그 고지 한군데에서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상이군인이 되었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찾았었던 곳에 내가 서서 아버지와 내 세대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그 부상으로 인해 대구 육군병원에 후송되었다가 그곳에서 욕과 원망과 아픔을 호소하는 다른 병사와 달리 부상 중에도 밝고 매사 긍정적인 이웃 병상 동료에 매료되어 예수쟁이가 되었었다.

    그런 아버지 덕에 아직 기역 니은도 모르던 나이에 다니던 곳이 신촌 대현교회였다. 그 추억을 찾아 떠났던 이번 한국여행이었다. 우리들의 세대도 저무는 즈음에.

    축제

    우리 동네 Chinese Festival은 제법 연륜이 쌓인 중국계 시민들의 큰 잔치이다. 중국계 뿐만 아니라 중국 문화나 음식에 관심 있는 동네 주민들의 잔치이기도 하다. 매해 이 맘 때 주말 이틀간 열리는 이 행사는 지역 언론들이 잘 다루어 주는 연례행사이다.

    내가 이 행사를 주관하던 중국인 회장 임박사를 처음 찾았던 게 2000년도이니, 제법 세월이 흘렀다. 당시 동네 한인회장이었던 나는 임박사를 만나 Chinese Festival이 아닌 Asian Festival을 한번 열어 보자고 제안을 했었다. 그 해 처음으로 한국 무용, 서예, 태권도와 한국음식으로 그 행사에 함께 했었다. 일본계와 인도계 등에게도 제안을 했었는데 반응은 신통치 않았었다.

    이후 Asian Festival이 아닌 Chinese Festival은 이어졌고 해마다 한국을 대표하는 팀이 함께 해 왔다. 한인회가 아닌 한국학교의 이름으로. 이 일엔 내 아내의 끈질김이 함께 했다.

    세월이 흘러 이젠 해마다 추석이면 Korean Festival로 Chinese Festival에 버금가는 행사를 치루게 되었다. 이젠 한인회의 이름으로. 그 역시 한국학교가 함께 한다. 한인회나 한국학교의 이름으로 봉사하는 후대들을 보면 자랑스러운 동시에 안쓰럽다. 나의 자부심과 그 보다 크게 쌓인 부끄러움 탓이다.

    아무튼 오늘 아내는 이 행사에서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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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세대들에게 사물놀이를 가르치는 아내의 벗들은 쉬는 날에 흔쾌히 북채와 장구채를 잡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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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처럼 만난 임박사는 나와 아내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나 우리나 많이 쇠했다. 허나 우리 동네 중국계나 한국계나 다음세대들은 활기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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