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 된 사내 이야기 – 3
<성서 우상숭배>
오바마를 일컬어 흔히들 검은 케네디라고한다. 케네디, 고작 40년 전 사람이다. 그의 바람기는 클린턴을 능가하였었고, 그의 업적은 미완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에게 “케네디”라고하는 분장을 덧입혀 형상화하였다.
온갖 문서는 말할 것도 없고, 영상자료와 일거수 일투족을 손바닥 손금 확대경으로 들여다 보듯하는 세상에서도 분장은 가능한 법이다. 하물며 조석간 신문은 커녕 흔한 찌라시 한 장 없던 2,000년 일이고 보면…
“루터에 의해서 성서 우상숭배가 시작된 것이다. 모든 우상 숭배가 많은 무서운 해독을 가져 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서숭배도 또 많은 무서운 해독을 흘러 내렸던 것이다”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말이다.
류영모 내촌 김교신 함석헌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에게서 유영모가 나오고 김교신이 나오고 함석헌이 나왔다. 내촌선생이 루터의 성서우상화를 철저히 공박하고 있으나 루터에 대한 존경심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일테면 그는 “신문명 또는 신세계, 신세대는 1517년 10월31일에 새로 태어난 것이다. 유대나라 베들레헴에 예수가 탄생하신 날을 제외하고 이날은 세계적인 가장 큰 하루이다. 시인 로웰의 한마디로 말한다면 이날 <용감한 루터, ‘아니오’라고 대답했던 바 그 ‘아니오’에 부딪혀 전 유럽은 동요했다>”라며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일을 예수사건 이래 인류 최대의 사건으로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선생이 왜 루터의 성서우상화를 통박하였을까?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 나가자. 나는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제 한국에서 세 명의 상고출신 대통령을 연달아 배출하였다고 자랑스럽게 상고출신임을 밝히는 것이 아니다. 세 분 모두 어찌보면 모두 난감한 처지인데 뭐 거기 빗댈 것 있겠나? 어쨋건 고등학교 시절 “상업미술”과목이 있었다. 워낙 그림 그리기에는 젬병이었던 나는 이 시간을 몹시도 싫어하였다. 어쩌면 그림 그리기가 싫었다기보다는 선생님이 싫었다는 것이 더욱 적합할 지 모르겠다. 일주일에 두 시간이었다고 기억한다.
첫 번째 시간에는 그림의 주제를 주고 그림을 그리게 한다. 주어진 시간에 다 못 그려도 좋았다. 돌아오는 시간까지 완성만 하면 되었기에 시간적인 제약은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시간 선생님은 아이들의 작품을 평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평가방법이 내겐 참 기가 찰 노릇이었다. 아이들은 열 명 단위로 교단 앞으로 나가 정렬하고는 자기가 그린 그림을 가슴높이로 받쳐든다. 선생은(이쯤해서 님자 빼자) 교실 뒤 끝 책상에 걸터앉는다. 그리고 “일 번” 호명을 하면 일 번 학생은 자기가 그린 그림을 머리 위로 치켜든다. 선생은 잠시 그 그림을 보다가 “우수, 가작, 낙선, 선외”중 하나를 택일하여 평가를 내린다. 아아! 나는 늘 선외였다.
어찌 그 선생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겠는가? 그 뿐이었다면 나는 내 그림솜씨를 탓하며 지금쯤에는 기억에도 없었을 것이다. 늘 선외를 받는데 부화가 치밀어 선생을 시험해 본 것이다. 하루는 우수평가를 받은 옆 반 친구의 그림을 빌려 가지고 머리위로 치켜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선생에게 매맞을 각오를 한 터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선외”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그 뒤로 선생을 미술선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내 어릴 적의 추억이다만 내촌선생의 성서우상화도 따지고 보면 이 정도의 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어려운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이야기를 바꾸자.
“성서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고 따라서 그것으로 족하다는 이른바 축자영감설의 신앙적 주장은 아주 편협하다”는 말이다. 그 같은 시각으로 성서를 읽는 한, 내촌선생께서 지적한 성서우상화의 길로 들어서는 일이요, 내 기억속 미술선생처럼 같은 작품을 쥐어 든 손에 따라 우수와 선외로 평가하는 우를 범할 수 있는 까닭이다.
자! 어떻게 성경이 형성되었고 갈릴리 바다를 살아 숨쉬며 활보하다 그 일로 죽은 예수가 진열장 속에 데드 마스크처럼 장식화 되었을까? 그 이야기를 찾아 떠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