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가을비일까? 겨울비일까? 비에 젖어 처진 잎들이 아직 가지에 달려 있는 것을 보면 가을인데, 이웃집 앞뜰은 이미 성탄인 것을 보면 겨울인 듯도 싶고… 을씨년스런 11월 마지막 일요일도 저문다.

몇 주 전 서울에서 여성 성가 합창곡 악보책을 구한다고 교보문고를 찾았던 아내를 따라 나섰다가 손에 넣어 들고 온 책,  로버트 알터(Robert Alter)가 쓴 <성서의 이야기 기술 The Art of Biblical Narrative>에 빠져 하루를 보냈다.

흔히 구약이라 부르는 히브리성경을 문학비평적으로 해석한 책이라고 하는데, 그냥 나 같은 얼치기도 쉽게 빠져 술술 읽을 수 있는 독자 친화적(?)인 책이다.

번역자는 제목에만 ‘이야기’라고 했을 뿐 본문에서는 ‘내러티브(Narrative)’로 일관되게 사용하면서 친절하게 그렇게 번역한 까닭까지 옮긴이의 말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만 나는 그저 줄기차게 ‘성서이야기’로 읽었다.

저자  로버트 알터(Robert Alter)가 히브리성서의 문학비평적 해석이라는 학문적인 노력을 지속한 까닭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성서 이야기는 인간이 시간이라는 매개체 속에서 변화를 거듭해가며 하나님을 직면하면서 살아야 하고 다른 인간들과 끊임없이 그리고 복합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기본적 인식을 구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인간들이란

<성서의 작가들이 그들의 기술을 통해서 알고자 한 것은 분열된 의식을 가진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의 의미이다. 형제를 사랑하지만 미워할 때가 더 많은 존재, 아버지를 원망하고 업신여기기도 하지만 또한 자녀로서 깊은 존경심을 가지는 존재, 형편 없는 무지와 불완전한 앎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존재, 격렬하게 스스로의 독립을 주장하지만 신이 계획한 사건들 속에서 붙잡혀 사는 존재, 외적으로 확고한 성품이지만 내적으로는 탐욕, 야망, 질투, 욕망, 경건, 용기, 열정, 그리고 그 이상의 것들을 품은 불안정한 소용돌이 같은 존재가 인간이다.> 라고 말한다.

이런 인간들과 신과의 관계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히브리성서(구약)의 문학비평적 접근이 필요함을 강조하는 이 책의 마지막 문단이다.

<히브리 성서의 작가들은 살아 있는 듯한 인물과 행동을 기교 있게 그려내면서 분명히 즐거움을 느꼈고, 그 결과 수백 세대에 걸친 독자들에게 사라지지 않는 즐거움을 줄 자료를 만들었다. 그러나 상상력이 풍부한 이 놀이의 기쁨에는 한편 거대한 영적 절박함이 배어 있다. 성서의 작가들은 복잡하고 때로는 매혹적인, 종종 격렬하게 개성을 고집하는 인물들을 만들어냈다. 그 이유는 각각의 남녀가 하나님을 영접하거나 무시하고, 하나님에게 응답하거나 저항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띠는 것이 고질적인 인간의 개성이기 때문이다. 이후의 종교적 전통은 우리로 하여금 대체로 성서를 즐기기보다 심각하게 대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역설적인 진리는 성서의 이야기를 좀 더 온전히 이야기로서 즐기는 법을 배울 때 그들이 우리에게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위험할 정도로 중요한 역사의 영역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던 바를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긴 이야기를 몇 개 문장으로 소개하는 일은 무지, 무엄한 일이 되겠다만 손에 들면 놓지 못할 만큼 흥미로운 책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구약 성서 속  많은 이야기들과 인물들을 나는 성서를 읽기 전 아주 어릴 적에 이야기로 전해 들었다. 유, 소년기에 들었던 그 이야기 속 인물들과 사건들은 머리 굵어진 후 성서를 읽거나, 나름 이런저런 학문적 또는 신앙적 해설서를 읽으며, 나아가 내 삶의 경험과 이웃들의  경험 속에 투영된 모습들을 통해 끊임없이 여러 모습으로 변하며 내게 다가왔다.

저자 알터(Alter)의  말마따나 수백세대를 이어져 온 이야기를 이제 저물어 가는 서녘에 서서 내 이야기로 되뇌어 본다.

마침 오늘 아침, 오랜 옛 벗이 우리들의 어릴 적 옛날 사진 몇 장을 이번 한국 방문을 계기로 만들어진 단톡방에 올려 놓아 내 되뇌임을 도와 주었다.

그렇게 다시 떠올려보는 몇 주 전 한국방문 때 들었던 홍길복목사의 설교 제목과 성서 본문이다.

그날의 설교 제목은 <목표 다시 가다듬기>였는데 영어로는 <Rebuilding our Final Goal>라고 되어 있었다. 이제와 곰곰 생각해보니 <목표 다시 가다듬기>와 <Rebuilding our Final Goal>는 하나로 연결되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일테면 ‘마지막목표 바로 세우기’정도로.

그날의 성서 본문이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립보서 1:20-21>

그렇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축복을 깨달을 나이가 되었다. 이제 내 이야기가 성서 이야기가 되어야 하고, 성서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비단 내게만 부여된 축복은 아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려는 모든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은총이다.

이쯤 을씨년스럽던 11월 마지막 일요일은 내게 감사다. 다가오는 성탄도. 다시 맞는 겨울도.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예수카페8변명같지만 살며 우리말을 길게 할 기회가 별로 많지 않답니다.

딱 그런 이유때문이 아니고 말이 짧고, 생각도 그다지 논리적이지 못하고, 어휘력도 짧은 탓이 먼저이지만 아무튼 변명이라도 좀 하고싶답니다.

성서 – 우리들의 이야기 여덟번 째 입니다.

편집을 좀 해서 올리면 좋겠다는 생각만 있을 뿐….

시간이 허락하질 않는답니다.

넉넉한 이해를…

 

성서 – 나와 너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

예수 카페어떤 일이 시작되는 연유를 보면 아주 사소하거나 우연적인 계기에서 비롯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의 제가 딱 그 모습이랍니다.

지난해가 저물던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적(籍)을 둔 교회가 있어서 이따금 나가곤 있지만 성실한 교인은 아니랍니다. 교회 입장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있으나 마나한 교인이지요. 저는 그게 좋답니다.

적을 둔 교회가 감리교회인데 교회에 속한 여러 모임 가운데 목장모임이라는 소그룹이 있답니다. 그전에는 속회라고 부르던 모임이랍니다. 장로교의 구역모임인 셈입니다. 예닐곱 가정들이 함께하는 작은 교회로 한달에 한번씩 각 가정을 돌아가며 모여서 성경공부도 하고 친교도 나누고 하는 모임이랍니다.

지난 십수년간 이 작은 모임에 함께한 적도 거의 없답니다. 제 집사람 혼자 가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굳어졌답니다. 그러다 두해 전 부터 이 소모임에 몇 번 참석을 하게되었답니다. 딱히 뭐 아내의 잔소리가 싫어서는 아니었고 어찌 하다보니 한달 걸러 한번, 아님 두달 걸러 한번 정도로 참석을 하였답니다.

그러다 지난해 11월 모임에서 아주 엉뚱한 사건이 일어났답니다. 제가 속한 모임의 구성원들 평균 나이는 60세 전후랍니다. 교회이력으로 따지면 제법 연식이 오래된 분들이고요. 그런데 그날 성경공부를 하다가 누군가가 “좀 체계적으로 성경을 알고 싶은데 마땅한 그런 계기가 없어 어떤 땐 좀 답답하다. 우리 모임에서 함께 그런 계기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하는 의견을 내놓았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고가면서 그 가운데 제 블로그 글들을 읽고 계시는 한분이 “김아무개가 좀 그걸 맡아서 해주면 어떨까?”하셨답니다.

그 모임을 주관하는 장로님께서 저에 대한 신뢰(?)가 깊으셨던지 “그거 좋겠다. 그렇게 해보자”고 하실 때, 응당 제가 철이 들었다면 “아이고, 그게 무슨…”하며 손사래를 쳤어야 옳았을 일이건만 회갑나이를 그저 숫자로만 먹어 온 이 철부지가 그만 “그러지요, 뭐”라고 한 것이지요.

그래 올 일월부터 모임 때마다 성서공부를 한 시간여씩 맡아 하기로 했던 것인데,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퍼득 정신이 들면서 “에라이, 이놈아! 나이살 먹고 어찌 그리 철이 안 날수가…”하는 생각이 제 뒷통수를 딱 치던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속 넓으신 장로님께서 그리하라고 하여도 그저 덥썩 “예”하면, 교회도 잘 나오지 않는 놈이 교회모임에서 성서 이야기를 하고 가르친다고 듣는 욕이나 악평이야 그 방면으로 연륜이 쌓인 제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이고! 모임의 수장인 장로님을 비롯한 속한 모임원들이 받을 그 많은 말들이 어찌 제 몫일 수 있으랴하는 생각이 든 것이랍니다.

그래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하고 모임원들께 넉넉하신 마음을 빌었지요. 그 대신 모두에게 누가 되지 않는 방법으로 성서 이야기를 나눌 방법들을 생각해 보았답니다.

그러다 바로 어제 일이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과 비지니스 모임을 온라인에서 하게 되었답니다. 몇 해전 세탁인 교실을 이 방식으로 한 두해 해 본적이 있는데 그 때와는 환경이 아주 많이 달라져 있었답니다.

비지니스 온라인 미팅을 끝낸 후 든 생각이랍니다. 그래 이 방식으로 단 한사람과 만나더라도 성서 이야기를 함께 해보자하는 생각이 든 것이었지요.

“삶은 독파하는 것이 아니라 음미하는 것이다.” – 크리스토퍼 필립스(Christopher Phillips)라는 이가 쓴 책 <소크라테스 카페>라는 책 첫 장을 넘기면 만나게 되는 문장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책의 소제목들입니다.

 1.  질문이란 무엇인가?(What is the question?)

2.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Where I am?)

3.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가?(Whom do you need?)

4. 이게 다 무슨 소린가?(What’s it all about?)

5. 왜 ‘왜’를 묻는가?(Why ask why?)

소크라테스가 고대 아테네 사람들에게 불어 넣었던 철학적 영감과 질문하는 삶을 오늘 현대인들이 되살려 일깨우는 일에 온몸을 다 던져사는 철학자 크리스토퍼 필립스(Christopher Phillips)의 물음들이 예수쟁이들에게도 그대로 유효하다는 생각으로 큰 간판을 “예수 카페”라고 올려봅니다.

성서를 마주 대하는 첫번째 자세는 ‘믿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는 마음의 주체는 바로 ‘나’입니다. 그래 “내”가 가장 소중합니다. 성서 앞에서 ‘나’를 바로 볼 때 비로소 ‘너’가 보입니다. “네”가 “나”처럼 신 앞에서 똑같이 소중한 사람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 ‘나’와 ‘너’들이 모인 “우리”들이 보입니다. 그런 ‘우리’의 울타리의 크기 곧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키우는 일을 위해 성서를 읽는 것입니다.

그래 작은 간판을 “성서 – 나와 너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로 새깁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얼마나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모릅니다. 그저 시작할 뿐입니다. 거의 많은 시간을 저 혼자 이야기로 꾸며질 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마 그럴 개연이 높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제겐 참 뜻있는 순례의 길이 될 것입니다.

제 아무리 백세 시대라 하더라도 예순 해 걸어 온 믿음의 길을 정리해 보는 마음으로 다시 읽어보는 성서는 또 새로운 가능을 열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묻지 않으면 침묵한다. 그런데 어떻게 묻느냐 하는 것이 그 대답을 유도한다. 우리는 성서를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이미 대답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성서 대신 아집에 정좌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려면 계속 성서를 향해 물어야 한다.” – 바로 이 맘으로 시작하는 일입니다.

컴퓨터로 제 얼굴과 제가 보여드리는 자료들을 보며 이야기를 들으실 수 있고, 전화나 스마트 폰으로도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매주 목요일 저녁 8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미국 동부시간) 한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그 첫시간은 이번 목요일(3월 5일) 저녁 8시 30분입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anymeeting.com/492-961-284

섞임 – 새 부족(部族) 2

(당신의 천국 – 열 세번 째 이야기) 

이것이 온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 속에 들어 와 몸붙여 사는 사람이 누구든지 실수로 살인을 했을 경우에 피신하도록 지정된 성읍들이다. 그들은 회중 앞에 출두하기까지 피살자의 앙갚음을 할 근친의 손에 죽어서는 안 된다. (여호수아 20: 9, 공동번역)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딱 50년 전의 일입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로자 팍스라는 흑인 여성이 알라바마주 몽고메리시에서 버스를 타고 좌석에 앉았다가 체포되는 일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난 흑인 해방운동의 선구자였습니다. 흑인들은 백인들이 타는 버스를 탈 수 없다는 당시의 몽고메리시 법안에 대해 항거하는 일에서 시작된 운동이었습니다. 

지금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있는 시대에서 보자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처럼 느껴지지만 고작 오십년 전의 일이랍니다. 

또 다른 이야기 하나. 

함흥냉면

제가 냉면이라는 음식을 처음 먹어 본 것은 대학을 막 입학하고 나서의 일입니다. 학교 앞 식당에서였습니다. 

그 때까지 저희 집에서는 어머니께서 냉면이라는 국수를 만들어 주신 적이 없었답니다. 한남동 토박이 경기도 사람이었던 어머니에겐 냉면은 타지의 음식이었을 뿐입니다. 어쩜 그 당시까지 어머니는 냉면을 전혀 모르시고 계셨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냉면은 이북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었을 뿐이었을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토속 지방 음식의 벽이 허물어진 역사적인 사건은 바로  6.25 전쟁입니다. 전쟁의 전 과정을 통해 마구 섞이게 되면서 지방 토속 음식 문화 역시 한정된 지역을 넘어서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어찌보면 지역에서 일어난 아주 작은 사건이 발단이 되어 역사의 흐름이 바뀌거나 전쟁이나 천재지변이라는 사건을 통해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는 경험은 인류 역사 가운데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흑인 해방 운동이나 제가 처음 먹었던 냉면의 경험처럼 말입니다. 

히브리족이 가나안에  정착하는 처음 이야기들을 보노라면 바로 이러한 바뀌는 경험들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섞임입니다. 

히브리족이 들어간 가나안에는 이미 그 땅을 차지하며 살았던 원주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야훼라는 신의 깃발 아래 뭉쳐져 침략(? – 원주민의 관점으로 보자면)한 히브리족 보다 먼저 그 땅을 차지하며 살았던 그 땅의 본래 주인인 셈입니다. 가나안족, 모압족, 미디안족, 블레셋 등등 숱한 그 땅의 먼저 주인들이 도시국가나 부족국가 또는 왕권국가로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히브리족을 기다리며 “어서오십쇼”하고 반기는 아무도 없는 땅이 아니라 이미 살던 주인이 있는 땅이라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족이 그 땅에 있던 원주인들을 밀어내고 새 주인이 되는 과정에서 그들이 내세우는 정의는 “야훼 하나님과의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의 이름으로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하는 히브리족은 가나안 도시와 성을 하나 하나 점령해 나갔던 것이지요. 

그런 과정을 통해 히브리족에서 이스라엘족으로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답니다.  바로 도피성을 기록한 저 위에 인용한 여호수아서 기록에서 그 단면을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 속에 들어 와 몸붙여 사는 사람이…” 

야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을 점령해 나가는 무리들과 원래 그 땅 가나안에 살았거나 다른 지방에서 유입된 무리들이 섞인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바로 여호수아와 판관(사사기)의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공동체가 바로 이스라엘 부족 동맹이라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이들은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됩니다. 그 계약의 중심엔 역시 야훼 하나님이 있는 것이고요. 애굽으로 부터 온 노예 무리인 히브리족과 본래 가나안 땅에 살았던 종족, 그리고 타지에서 흘러 들러 온 종족들이 야훼 이름으로 새로운 계약을 맺으며 이스라엘의 원형을 이루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새 계약에 대한 이야기는 내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