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예루살렘인가?

성서 – 우리들의 이야기 열번 째

지난해 문창극에 이어 이번에는 황교안이 오늘날 한국기독교 또는 한국교회의 편협하고 천박한 신앙관을 세상에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에 교계나 교회가 부끄러워 하기는커녕 오히려 목청 높혀 그를 두둔하기 바쁜 모양새입니다.

심지어 <황 후보자는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는 일에 다니엘과 같이 쓰임받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에겐 천군만마와 같습니다. 아울러 여러분이 지인들 20명에게 이글을 전달하여 우리가 함께 기도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동참한 것이 될 것입니다.>라는 SNS의 글들이 퍼지고 있다고 신문은 보도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느끼기는커녕 몰염치의 당당함에 뻔뻔스러움을 더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일부(그 일부가 큰 세력이긴 하더라도) 한국교계나 한국교회가 천박한 모습을 더하면 더해 갈수록 옳게 믿으려하는 이들은 성서에 귀를 기울일 일입니다.

 

그들에게 계약이란?

성서 – 우리들의 이야기 6

이스라엘의 희망은 구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고난의 시대 이래로 수 세기 동안 유태인들을 괴롭혀온 참혹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살아있다.  최근사 아우슈비츠와 그 외의 다른 죽음의 수용소에서 조직적으로 근절되고, 탈출할 수 있는 모든 출구가 닫혀진 것처럼 보였던 나치 횡포의 무시무시한 시절까지도… (John Macquarrie  의 “인간이 되신 하나님”에서)

삶 – 그 축복에 대한 이야기

주일 아침입니다. 춘분도 지났으니 부활주일도 이제 곧 다가올 것입니다. 가게 손님들은 벌써”Happy Easter !”를 건넨답니다.

오늘도 수많은 교회들에서, 가정에서, 모임에서 예배를 드릴 곳이고 제물도 내 놓을 것입니다.

성서를 읽다보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는 대목들을 만나곤 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제사 장면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로 이 대목입니다.

3    때가 되어 카인은 땅에서 난 곡식을 야훼께 예물로 드렸고
4    아벨은 양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드렸다. 그런데 야훼께서는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5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지 않으셨다.  (창세기 4: 3-5, 이하 공동번역 인용)

한 사람의 제물은 받아드리고 다른 한사람의 제물은 반기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 까닭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불공평하기가 이를데 없습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해석자들도 있습니다. “가나안 농경문화가 섬기는 바알신앙과 유목문화였던 히브리인들의 야훼신앙의 충돌을 나타낸 것”이라는 해석 말입니다.

그러나 그 해석에 뭔가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지는 않습니다.

그래 성서에서 제사에 대해 두루 찾아봅니다. 오히려 성서의 해답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오늘날 무수한 예배들이 보여주는 행태 때문일 것입니다. 두 곳을 인용합니다.

21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22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제물로 바치는 살진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
23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24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 : 21-24)

23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24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 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 와 예물을 드려라. (마태 5 : 23-24)

그리고 예수카페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삶 – 그 축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6-7분 사이에 녹음 사정이 좀 나쁨니다. 이해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