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 성(聖)과 속(俗) -그 마지막 이야기

이른 아침 숙소를 나선 우리는 로마 구시가지로 향했다. 그리고 해가 질 때까지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오후 두어 시간은 골프 카트를 타고 안내자인 Willy에게 그 거리 구석구석에 담긴 이야기들 들으며 로마의 옛 모습들을 눈에 담았다.

비록 짧은 지식이지만 로마의 신화와 전쟁, 권력 암투, 정복, 제국이 품은 종교 또는 종교가 품은 제국에 대한 역사들을 떠올려 보며 그 거리들을 걸었다. 때론 영화 벤허와 로마의 휴일 등을 떠올리기도 했었다. 비록 그 유적지는 가보지는 못했다만 사람 베드로와 바울의 여정을 떠올려 보기도 했었다.

로마는 그야말로 이야기의 도시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 앞에서 겪은 일이다. 우리 일행은 사진도 찍고 남들처럼 분수를 뒤에 지고 분수 연못에 동전을 던지기도 하며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아주 애띤 얼굴의 젊은 한 쌍의 동양 아이들이 우리들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한국분들 이시지요?” 누구랄 것도 없이 “예’라고 응답했더니, 아이들이 하던 말, “저희들 사진 좀 찍어 주실 수 있어요?” 사진을 찍어 준 후 물었었다. “어디서들 오셨나요? 서울 아님 다른 곳?” 그들이 한껏 웃음을 띠고 했던 대답이었다. “저희들은 일본사람이예요. 일본에서 왔어요.” 깜작 놀라 우리들이 물었다. “아니 어떻게 한국말을 그렇게 잘해요?”  아이들의 이어진 대답. “한국 드라마 보며 배웠어요.” 그 순간 아내의 뜬금없이 빨랐던 반응, “아! 겨울연가?” 아이들이 웃으며 답했다. “아니 그건 오래 된 것이라 잘 모르고요…. 이즈음 거.”

그랬다. 한국 드라마와 K-pop의 위세는 최근 십 수 년 사이 한국을 새롭게 각인 시키는 촉매였다. 아내가 삼십 수년 이어오고 있는 우리 동네 한국학교의 큰 변화도 바로 한국 드라마와 K-pop이 만든 것이다. 이즈음 아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은 한국계 다음세대들이 아니라, 한국 드라마와 K-pop에 반한 비한국계 미국인들이므로.

“감사합니다”하며 떠나는 일본 아이들이 더 예뻐 보였다. 이즘 애들은 계집아이나 사내녀석이나 어찌 모두들 그리 예쁜지.

나는 그 분수 연못에 동전을 던지며 빌었었다. ‘그저 이 순간이 고맙고 감사합니다. 봐주실 수 있다면, 우리들이 몇 번은 더 이런 여행을..”

카트를 운전하며 우리들을 안내했던 멋진 사내 Willy는 이태리인 아버지와 이집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단다. 그는 이태리에 대한 사랑 못지 않게 이집트에 대한 자부가 크게 드러나는 이야기들을 하곤 했다.

우리들의 여행의 준비자이자 이끄는 대장이자 일꾼인 최권사는 다음 여행 예정지로 이집트를 꼽곤 했었다. 그 말이 생각나 Willy 앞에서 내가 한 말이었다. “우리들의 다음 여행 예정지는 이집트라오!”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요리강습 이었는데,  그것이야말로 최권사의 뛰어난 발상이었고 우리들의 여행을 오래 간직할 수 있게 된 경험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들에게 파스타 만들기를 가르쳐 준 Romina 선생댁은 바티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파트였다. 학생들은 우리 일행 넷과 뉴욕에서 영화배우를 꿈꾸며 공부하고 있는 학생 한 명, 그렇게 다섯이었다.

우리들은 Romina 선생의 시범을 보며 밀가루 반죽을 하고 반죽을 밀대로 밀어 국수를 만들거나 만두를 빗듯 라비올리를 만들었다. 그렇게 멋진 저녁상을 함께 만들고 나누는 멋진 시간들을 즐겼다.

나는 어린 시절 교회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자랐다. 그 시절만 하여도 교회는 ‘거룩함(聖)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 주었었다. 머리 굵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거룩함(聖)’과 ‘사람살이(俗)’가 구별되어 따로인 것으로 생각하며 살았었다.

그 이후 참 오랜 세월 ‘사람살이(俗)’하며 줄곧 부대끼며 여기까지 왔다.

이제 노년의 초입, 성(聖)과 속(俗)은 그저 늘 함께 하는 것임을 배운 여행이었다.

하여 또 감사! 오늘에.

여행 – 성(聖)과 속(俗)-4

화분이 아닌 땅에 뿌리를 내린 화초나 나무 한 그루 찾기 힘든 돌의 도시 피렌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갈릴레오의 도시이며 마키아벨리의 도시이기도 했던 피렌체. 피렌체는 돌의 도시이자 ‘거대한 돈과 권력의 도시’, 그 돈과 권력에 항거하는 ‘풍자의 도시’로 내게 다가 왔다.

우피치 미술관(Uffizi Gallery, Galleria degli Uffizi)을 안내해 준 RaFael은 그야말로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단지 우리 일행 네 명을 위해 그는 정성껏 피렌체와 우피치와 메디치 가문과 르네상스와 신이 된 종교와 돈과 권력 나아가 그것들을 풍자하는 예술에 대한 설명에 온 열정을 다했었다. 그는 피렌체를 휴머니티(humanity)와 휴머니즘(humanism)의 도시로 소개하려고 많은 애를 썻다.  나는 그런 그의 노고 덕에 종교와 돈과 권력의 역사 그리고 그에 항거하는 사람 사랑 곧 진정한 신의 역사를 이루고자 한 옛 사람들의 노고를 맛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참 재밌었던 사내 RaFael을 만난 것은 이번 여행에서 맛 본 은총 중 하나다.

미술관에서 내려다 보이는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를 설명하던 RaFael의 말이었다. “저기 가면 금, 은, 다이아몬드 등 보석상들과 유명 시계점들이 저 다리를 차지하고 있는 걸 보실거예요. 근데요. 처음에 저 다리엔 정육점 등 서민들이 찾는 음식점들이 많았다고 해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 그런 가게들이 모두 문닫고 보석상과 시계상으로 바뀌었데요. 왜냐하면요. 도시의 돈을 다 움켜잡고 있는 메디치 가문에서 그랬데요. ‘돈 많은 우리 가문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는 가게만 장사하게 하자’고요.” 물론 우스개 소리였겠다만 나는 사람사는 세태를 풍자한 그의 우스개가 단지 우스개로만 들리지 않았었다.

미술관과 베키오 다리 등을 구경 한 후 저녁식사를 위해 어느 골목의 그럴싸한 식당문을 두드렸었다. 바깥에서 보기에 작지만 잘 꾸며진 식당이었다. 분명 영업시간 중이었는데 가게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문을 흔드니 종업원이 문을 열며 물었다. “예약 하셨나요?” ‘아니’라는 우리들의 응답에 잠시 난색을 표하는 듯 하더니, “몇 분이지요?”라고 물었다. ‘넷’이라는 응답에 또 잠시 멈칫 하더니만 “들어 오시지요.”했다.

그렇게 들어 간 식당엔 우리들이 첫 손님인 듯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들어오는 손님들 마다 우리와 똑 같은 대화와 종업원의 표정과 몸짓이 똑같이 반복되는 것이었다. 작은 가게 안은 이내 만석이 되었는데 내가 들은 한, 딱 한 팀만 예약 손님이었을 뿐, 나머지 모두는 우리처럼 지나가다 들어 온 손님들이었다. 참으로 뻔뻔한 상술이었늗데, 면벌부(또는 면죄부) 상술로 도시를 이룬 후예들 답다는 생각으로 그냥 많이 웃었다. 그 날 저녁 음식도 참 맛있었다.

여행의 참 맛은 밤거리에 있다던가. 그 날 피렌체의 밤거리에서 우리 일행은 잠시 청춘이었다. 거리의 악사들 연주에 맞추어 무리 지어 춤을 추던 한 떼의 젊은이들을 보며 몸에 시동을 걸던 아내가 그 무리에 섞여 춤을 추고 악사들과 함께 북을 두드렸고 우리는 한껏 즐거웠었다.  

허나 참 바보같기도 하지. 기껏 사진을 찍다가 흥에 취한 아내 모습을 담을 생각 못하고 그냥 서있기만 했으니. 쯔쯔…본래 바보였는지도.

하여 잊지 못할 피렌체의 밤.

여행 – 성(聖)과 속(俗)-1

한 두어 주 전 일이다. 까닭 없이 왼쪽 발바닥이 아파 걸음걸이가 불편할 정도였다. 한 이틀 심하게 이어지던 통증이 조금은 가라 앉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발 앞꿈치로 바닥을 밟긴 불편했다. 계속 통증이 멎지 않으면 의사를 찾아 보면 될 일이었지만, 문제는 오래 전에 계획한 걷기 여행이 코 앞으로 다가 온 것이었다.

그렇다고 걸음을 전혀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여행을 취소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걱정은 함께하는 친구 내외와 아내에게 행여 부담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여드레  걷기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마치 내가 여행 전 며칠 동안 엄살을 떨었던 듯이, 떠나던 날까지 이어졌던 통증이 비행기를 타며 슬금슬금 사라지더니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땐 말끔히 가신 것이었다.

그렇게 걷다 온 곳들이 물의 도시 베네치아, 돌의 도시 피렌체, 이야기의 도시 로마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걸어 다녔던 곳들은 여섯 곳의 박물관과 미술관, 음악회 한 곳, 몇 곳의 성당들과 시장 그리고 맛집들과 숱한 유적들이었다.

사진 인화비 염려 없는 디지털 세상덕에 마구 셔터를 눌러 찍은 사진들이 거의 천 장에 이르렀으니 걷긴 참 많이도 걸었다. 그 걷기 운동 덕에 내 발바닥 통증이 절로 사라진 듯 하다.

지나온 이야기들을 일컬어 ‘족적(足跡)’이라 하는 걸 보면 걷는다는 게 곧 사람살이 일 터이다.

그렇게 걸으며 옛 사람들이 걸어 온 이야기들을 보고 들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사람들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자연의 이야기, 사람과 자연을 품은 신의 이야기들이 넘쳐 났다. 그 모든 이야기들을 안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은 그저 덤이었다.

짧은 걷기 여행 동안, 순간 순간 내 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던 감사의 기도가 있었다. 나 혼자 걷지 않고 함께 하는 이들이 있음에 대한 감사였다. 바로 최권사 내외와 아내에 대한 감사 그리고 집을 나서서는 좀처럼 디지털 대화는 커녕 전화조차 하지 않던 내가 카톡 대화를 나누던 옛 친구들에 대한 감사….

어찌 이번 여행 뿐이랴! 때론 성급한 걸음으로 어느 땐 누구보다 뒤처진 걸음으로 걸어 온 내 인생살이 모든 걸음걸음 마다 함께 했던 이들에 대한 감사, 끝내 신에 대한 감사에 이르기 까지…

그 맘으로 이어보는 사진 정리와 여행 이야기. 이름하여 “여행 – 성(聖)과 속(俗)”

여행 – 성과 속

이즈음 세상에 외국 여행 한번도 못했다면 ‘촌스럽다’라는 말 듣기 딱 십상이다. 허나 어찌하리! 그게 내 모습인 것을. 딱히 여행 경험 유무로 따지는 촌스러움이 아니더라도 어쩌면 ‘촌스러움’은 늘 내게 붙어 다니는 수식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나는 큰 맘 먹고 첫 번 째 외국여행을 다녀왔지만 평생을 함께 한 촌스러움을 벗지는 못할 것이다.

그랬다. 정확하게 내 인생의 반은 한국에서, 나머지 반은 미국에서 살았다만 두 곳 모두 내게 외국은 아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내 일상을 이어가는 삶의 터전이었고, 현재도 마찬가지다. 하여 이번 여행이야말로 첫 외국 나들이였던 셈이다.

내 나이 스무 살 무렵에 어지간히 싸돌아 다녔었다. 그래봐야 한반도 남쪽이었지만 웬만한 명산과 바닷가에 작은 발자국 꽤나 찍고 다녔던 때가 있었다.

서른을 넘어설 즈음 생활인이 된 내게 싸돌아 다닐 여유는 이미 사치였다. 미국 이주 이후 삶은 작은 사치도 허락하지 않았다. 변변한 재주가 없는 내게 이민은 그저 일상을 이어가는 일이었다. 그래도 차마 버리지 못한 버릇으로 돌아 다니기는 했으나 그 역시 미국을 벗어 나지는 못했다. 그나마 어찌하여 작은 여유를 부릴 기회가 오면 연어처럼 한국을 찾곤 했으므로 해외 여행은 차마 꿈꾸지 못하였다.

시간은 늘 생각과 무관하게 흘러 어느새 은퇴 시기를 저울질 하는 나이가 되었다. 몇 해 전 일이다. 아직 무릎이 쓸만할 때 다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밀려 왔었다. 그 생각 끝에 속다짐을 했다. 아직 걸을 만 할 때, 해마다 며칠 동안 만이라도 싸돌아 다니며 걸어 보자고….

그 다짐의 하나로 짧게 해외 여행을 다녀왔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내 체력이 딸릴 만큼 어지간히 걸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눈이 내려 앉은 뒤뜰을 바라보며 짧았던 여행길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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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聖, 性, 城, 成)과 속(俗, 贖, 速, 屬)들을 확인할 수 있었던 여행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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