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문득 생각난 박상원 선생이 떠나신 지도 이미 여러 해가 지났다. 지나간 모든 시간들이 바로 엊그제 처럼 느끼지는 것은 나이든 탓일게다.

한 동안 같은 마을에서 살았던 박상원 선생은 조금 외로운 분이셨다. 얼핏 날 선 듯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 한 몫 한 탓이었기도 하지만, 그의 환경이 그리 만든 연유도 있었다.

그는 나보다 거의 한 세대 나이차를 이를 만큼 까마득한 대학 선배였는데 나를 늘 ‘영근씨’라 불렀었다. 아마도 다 그의 외로움 탓이었을 게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 시절 미국에서 무장 독립투쟁의 꿈을 키웠던 우성(又醒) 박용만(朴容萬)선생의 장조카였다. 한 때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의 의형제이자 열성 지지자였던 박용만선생이 이승만의 정치적 천적이 된 이후 그의 자손들이 겪어 낸 이야기들을 나는 박상원 선생을 통해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김대중대통령 시절 우성 박용만 선생께 추서된 훈장을 가족 대표로 받고 돌아 왔던 날, 상기된 모습의 박선생은 어린 아이 같았었다.

그는 은퇴 후 우리 동네를 떠나 따님이 사는 코네티컷으로 이주하였다. 이주 후에도 이따금 서로 간 전화 안부는 이어졌었다.

아이고, 세어보니 벌써 십 오년이 지난 저 쪽 세월이야기가 되었다. 그와의 마지막 통화가.

그가 노환으로 앓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어느 날, 그의 전화를 받았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 쇳소리가 났었다.

“아니, 영근씨! 어째 이런 일이… 그런 쥐새끼가 한나라의 대통령이 되다니! 아니 5,6,7십년대 건설 노가다판에서 출세했다는 것은 바로 부정 부패 비리에 쩔었다는 이야긴데…그런 사기꾼이 어떻게 나라의 대통령이…”

그의 분노는 한동안 이어졌었다.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 그 무렵 일이었다.

시간이 흘러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나는 박상원 선생을 생각하며 혀를 찼었다. “쯔쯧, 박선생님 먼저 잘 가셨지 이 꼴 안보고…. 이 꼴 보셨으면 또 속 끓이며 전화 하셨을텐데…”

이즈음 한국뉴스를 보며 자꾸 돌아가신 박상원 선생이 떠오른다.

‘설마…’하는 마음이 크게 앞서기는 한다만, ‘설마…’하는 염려가 쉽게 가시지도 않는다.

문과 무를 겸비했던 <문무쌍전(文武雙全)>박용만선생이 역사의 그늘로 사라졌듯 지난 백 수십년 사이 아쉽게 저물어 간 뜻들이 얼마나 많을까?

이즈음 답답한 한국 뉴스들을 훑어보다 떠오른 박상원 선생.

무릇 한(恨)을 품고 살았던 우리들의 선대들이 비관적인 삶은 살지는 결코 않았으므로.

설마 이명박에 박근혜를 더해  수십 년 도둑질에 이골 난 놈들이 채워 준 완장 찬 텅 빈 머리 무당까지…

그리 부끄러운 일이야….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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