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書藝)- 2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4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서예(書藝)- 2

권불십년(權不十年) 이야기를 적는다는 것이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의 휘호(揮毫)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휘호란 붓을 휘둘러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인데,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국 대통령들의 붓글씨에 관한 것 몇가지를 골라서 적어 보려고 한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휘호를 많이 남긴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일 것이다. 그의 재임기간이 길기도 했지만, 하여간 그의 이름이 적힌 휘호를 많이 남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자(漢字)를 잘 몰라서인지 눈에 뜨이는 한자 휘호가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중의 휘호가 여러 점 있으나 노태우 전 대통령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한문을 배웠고, 평생을 붓글씨와 가까이 하면서 살아온 사람으로 알려진 이승만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필체(筆體)를 남긴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붓글씨 이야기를 하는 김에 몇기지 더 적고 다음 이야기인 ‘4월 혁명’으로 넘어 간다.

붓으로 글씨 쓰는 것을 한국에서는 書藝라 하고, 중국에서는 書法이라고 하며, 일본에서는 書道라고 한다.

영어로는 대개 Chinese brush pen writing이라고도 하고, Chinese calligraphy 라고도 한다.   한데, calligraphy 라는 것를 풀이해 보면,  calli [beautiful] + graphy [forms of writing] = beautiful forms of writing 이라는 답이 나온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書>는 시각적인 조형미를 평면에 나타내는 조형(造形) 예술이며, 온 몸과 힘과 정신이 붓끝에 모여 그것이 점(點)이나 선(線)에 나타나도록 심혈을 가울이는 동작이다.

붓글씨는 그렇게 예술적인 감각으로 쓰는 경우도 있고, 단순히 기록을 위한 하나의 필기 방법으로 쓰이기도 한다.

붓글씨의 발상지는 중국이다.

그러나 한문이 한국 것으로 소화시키듯이 붓글씨도 그렇다.

예를 들면, 추사체(秋史體)가 바로 그러한 것인데, 그것은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1786-1856, 조선 말기의 금석학자[金石學者]이며 서예가) 가 만든 것이다.

  • 추사체는 굵고 가늘기의 차이가 심한 필획과 각이 지고 비틀어진 듯하면서도 파격적인 조형미(造形美)를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남의 것을 모방(模倣)하지 앓고 창작한 그의 정신은 본받을만 하다.

한글에도 그러한 점이 있다.  한글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필법(筆法)은 한자를 쓰는 것과 같았으나, 붓을 움직이는 방법을 한자의 그것과 다르게 하여, 선이나 점획이 부드 럽고 단정한 궁체(宮體) 글씨를 만들게 된 것이다.

  • 궁체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쓰기 시작하여 발전해 온 전통적 한글 서체다.

요즈음 세상은 어느 때보다도 육체 단련을 위한 운동법이 널리 보급되어 있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몸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닥치는대로 먹는 사람도 있고, 값비싼 각종 보약과 건강식품의 수요가 늘어난다고 한다.

한편, 마음이 초조하고 정신이 불안하여 심적 불안을 가지고 지내는 사람도 적지 않은 듯하다.

다음과 같은 현상이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몸에 해로운 것인 줄 알면서도 술울 마시거나, 담배나 마약에 의지하는 사람도 있고, 용하다는 점술가를 찾아다니거나, 무슨 종교에 발을 들여 놓는 사람도 있다.

그 밖에, 무슨 오락에 취미를 가져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싶다. 그러한 것은 사회가 불안정할수록 더 심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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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때에, 손에 붓 한 자루 쥐고, 붓끝에 먹물을 묻혀 화선지에 글씨를 써보는 것도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우선, 마음을 비우면,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될 것이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되면, 불안 속에서도 안정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글씨는 어떻게 쓸 것인가?

평소에 좋아하는 글 한 구절이면 더욱 좋고, 그런 것이 아니라도 상관 없다.   어떤 글씨라도 또는 어떤 모양이라도 괜찮다라는 말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로든 세로든 간에, 그냥 붓 가는대로 팔을 움직여 보면, 종이 위에 붓끝이 움직이는대로 그 흔적(痕跡)이 남게 된다.

  • 그것은 정신을 붓끝에 집중시키며 붓을 움직여나갈 때, 그 <붓 움직임> 에 따라 까만 먹물이 하얀 화선지에 스며들면서 생기는 필적(筆跡)이다. 

그 필적은 붓에 묻은 먹물의 질이나 양에 따라 달라지고, 종이에 붓을 대는 각도와 붓을 내리 누르는 힘과 붓이 앞으로 움직이며 나가는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 붓글씨는 그래서 쓰는 묘미(妙味)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붓글씨를 쓰다보면, 세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 도 생길 수 있으리라 ……   붓글씨를 꾸준하게 쓰면, 세상을 보는 안목(眼目)도 달라질 것이라는 뜻으로 해보는 말이다.

붓글씨 쓰는 이야기를 적다보니, 개칠(改漆)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改漆이라는 글자가 말해주듯이 개칠은 다시 고쳐 칠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개칠’한 글씨는 그것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어설프게 쓴 ‘개칠’하지 않은 글씨만 못하다. 붓글씨에 관한 전문가는 개칠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붓 이야기를 적는 김에 한 가지 더 적는다.

붓(毛筆)은 원래 가는 대끝에 털을 꽂아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데 쓰려고 만든 물건이다.

하지만 철필이나 만년필 등도 붓이라 하고, 신문이나 잡지, 방송 등, 언론을 ‘붓’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한데, 아무리 체계를 갖춘 학문적 지식이나, 능숙한 재능을 가지고 만들어내는 말이나 글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대하여 책임질 줄 모르면 아니 될 것이다.

말은 진실(眞實)해야 되고, 글은 곡필(曲筆, 어떠한 사실대로 쓰지 않고 거짓으로 쓰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붓>과 <혀>는 항상 조심해야 될 것인데, 특히 공인(公人) 이나 연장자(年長者)는 사석(私席)에서라도 말을 함부로 하지말고, 항상 조심하여 화(禍)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될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명상서예(瞑想書藝)라는 말이나 태교서예(胎敎書藝)라는 말이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필적요법(筆跡療法, graphotheraphy)이라는 것도 있고, 서예치료(書藝治療, calligraphy treatment)라는 것도 있다.

아무튼, 이번 이야기는 시작에서부터 이리 저리 빙빙 돌다가 여기까지 왔다.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서예(書藝)- 1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3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서예(書藝)- 1

광화문 현판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붓글씨 이야기가 나왔는데, 글씨 쓰는 법을 가르치는 학원을 대개 ‘서예학원’이라고도 한다.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이면‘영어학원’이고, 음악을 가르치는 학원이면‘음악학원’이라고 하는데, 붓글씨를 가르치는 대부분의 학원들을 서예학원(書藝學院)이라고 한다.

붓글씨와 서예의 다른 점을 적어보려고 해본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붓글씨>와 <서예>는 그 개념(槪念)부터가 다른 것이다.  붓글씨와 서예라는 말의 뜻이나 글씨를 쓰는 방법, 즉 필법 (筆法)에 관한 것 등을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서예(書藝)는 붓글씨를 맵시 있게 쓰는 예술(藝術)이고, 붓글씨는 붓으로 먹을 찍어 그냥 쓴 글씨다.

이쯤에서 <붓글씨>와 <서예>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붓글씨와 서예의 공통점은 그것에 쓰여지는 종이, 붓, 벼루, 먹 등이 서로 같음으로 붓글씨와 서예는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붓글씨는 ‘붓으로 쓴 글씨’라는 것에 반(反)하여, 서예는  ‘書藝’라는 글자가 말해주듯이 ‘글씨를 붓으로 쓰는 예술’이다. 달리 설명하자면, 서예는 ‘예술성(藝術性)이 담겨있는 글씨다.’라는 것이다.

각설하고, 6.25전쟁이 휴전된 다음부터, 특히 서울지역에서 번창하게 된 것 중 하나를 꼽는다면 그것은 학원(學院)이 아닌가 싶다. 오늘날엔 여러 가지 외국어를 비롯해, 음악, 미술, 컴퓨터, 웅변, 연예, 자동차운전 등 400여 종의 학원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6.25전쟁 직후에는 사정이 달랐다. 오늘날 학원들이 범람하고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은 아니었다라는 말이다. 그러했었는데, 오늘날의 실정(實情)은 어떠한가?

예를 들어본다.   서예학원에 경우, 임시수도(首都)였던 부산에서의 피난살이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생기고, 사람들의 생활형편이 점점 나아짐에 따라 문화생활의 질(質)을 높혀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 수는 날이 지날 수록 늘어났다. 다른 말로 하자면, 외형적인 것을 사람들에게 돋보이게 하면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극단적(極端的)인 예를 들어본다.

‘강남부자(江南富者)’라는 말도 있고, ‘벼락부자’라고도 하는 졸부 (猝富)들도 생기게 되었는데, 그러한 사람들 중엔 집안에 무슨 전집(全集)이니, 총서(叢書)니, 대전(大全)이니, 또는 여러 가지 전문사전(事典)들로 채원진 고급 책장(冊欌)을 갖추어 놓고,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다라는 이야기다.

너무 과장(誇張)된 표현인가? 당시의 사회상(社會相)의 한 부분을 누가 비꼬아서 지어낸 말일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붓글씨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한다.

원래 붓글씨의 주요 목적은 실용이다. 필기(筆記)가 목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서예는 실용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이 감상(感賞)할 수 있고, 심미가치(審美價値)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붓글씨와 서예를 구분(區分)할 수 있는 것은 예술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의 폭을 조금 넓혀보기로 한다.

6.25전쟁이 멈춘 다음, 부산이나 그 밖에 남쪽 땅 어디에선가 피난살이를 하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게 된 사람도 있었고, 환도(還都)와 함께 서울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나도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다가 서울로 돌아갔다.

14334570신촌에서 ‘신촌인쇄소’라는 간판을 걸고 도장포를 겸한 인쇄소를 운영하며 살게 되었는데, 나는 신문에 실린 서예전시회(展示會)광고를 보면, 거의 그러한 전시회장에 가서 전시된 작품들을 둘러보았다.

한편, 1970년대 초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서예잡지 ‘書藝’와 ‘書通’이 나왔다. ‘書藝’는 서예가인 월정 정주상(月汀 鄭周相) 선생이 발간한 것이고, ‘書通’은 서예가인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 선생이 발간한 것이다.

서통나는 1970년대 중엽에 대한민국의 서예연구단체인 동방연서회 (東方硏書會)의 김응현(金膺顯) 선생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는데, 내가 모아놓은 ‘書藝’와 ‘書通’ 그리고 동방연서회에서 쓰던 교본(敎本)인 ‘東方書藝講座’와 서예전시회장에 갈 때마다 모아둔 전시작품에 관한

설명서와 그밖에 서예에 관한 책 등을 미국으로 이주할 때 가지고 왔다.

미국에서 살려면 영어도 필요하겠지만, 한국에 관한 것 몇가지 정도는 한국을 잘 모르는 미국인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자료가 있으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했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책들을 활용(活用)하고 있다.

미국생활을 한지 10년 쯤 지난 어느날 동내 도서관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 앞에서 붓으로  ‘大道無門’을 쓰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었다. 책 이름은‘KOREA’다.

한데, 그 사진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東亞日報 [1993.7.12.]에 실린 것을 이 글에 옮겨적는다.

<金대통령은 조찬후 자개농과 문방사우등이 있는 방으로 옮겨 클린턴대통령에게 ‘大道無門’ 휘호를 써주었으며 클린턴대통령 은 매우 흥미로운 표정으로 서예장면을 세심히 관찰.  金대통령은 “이 뜻은 어려운 일이 있을때 정정당당하게 자세를 취하면 어려움을 극복할수 있다는 것”이라고 휘호의 의미를 설명해주자 클린턴대통령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두고 그 뜻을 생각하겠다”고 사의를 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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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적은 것과 같은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이 글을 엮으면서 필요한 것을 대조(對照)해보기 위해 이것저것 인터넷 검색을 해보던 중,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는 것을 보았다.   President Bill Clinton Watching South Korean President Kim Young-sam prepare a Calligraphy Scroll.   The scroll was later presented to President Clinton, at Blue House in Seoul,       South Korea. 7/11/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