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인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을 잇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느해와 마찬가지로 삼월과 사월 사이는 몹씨 바쁘답니다. 이런 저런 봄맞이 준비도 있거니와 제가 운영하는 가게의 각종 보고 및 검열 등이 몰려있는 탓입니다. 게다가 이즈음 새 일을 준비하느랴 시간을 좀 나누어 쓰다보니 글을 쓸 여유가 그리 만만치 않답니다.
이야기의 진행상 예수가 하셨던 비유말씀들을 풀어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이번 한주간은 고스라니 건너 뛰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사순절 곧 예수의 삶 가운데 마지막 순간들을 곱씹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비록 연재글은 잇지 못하지만 예전에 제가 쓴 글 가운데 예수의 비유 말씀에 대한 것이 있어 소개 드립니다.
혹시라도 제 글을 읽으시는 분들 가운데, 교회에서 배우고 믿는 신앙으로 보는 성서 이야기 또는 자신의 신앙(전통적인?)과 제 이야기 사이에 다른 느낌을 받는 분들이 계시다면 계속 이어질 제 이야기를 조금 더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마 바울 이야기로 넘어가면 많은 부분 서로간에 같음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은 쉬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신약성서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있다. 나그네가 산길을 걷다 강도를 만나, 있는 것 다 빼앗기고 반쯤 죽은 상태로 누워 있다. 그 옆을 사제(그 시대의 최고의 귀족계급)와, 레위 사람(하급 성직자들), 사마리아인( 당시 유태인들이 가장 미워했던 사람들로 유태인과 이방인 사이의 혼혈족)이 지나간다.
사제와 레위는 그냥 못 본 체 지나치고 사마리아인이 반쯤 죽은 피해자를 응급조치하여 그를 여관으로 데려가 쉬게하고 여관 주인에게 넉넉한 돈을 지불하며 간호를 부탁한다.
예수와 율법학자(오늘날 목사나 신학자들쯤 될까? 일정기간의 정규 연구과정을 거친 이들이다. 단지 이것이 직업은 아니었고 포도주장수, 기름장수, 목수등의 생업을 따로 갖고 있었다)의 대화체 서술인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 – 사제, 레위인, 사마리아인, 강도들, 강도 만난 사람, 여관주인 – 가운데 누가 예수의 역을 담당한 사람일까?
전통적인 교회의 해석대로라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의 역을 담당해서 강도 만나 죽을 고비에 있는 사람을 구원했다는 것이 정답이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같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어려운 이웃을 돌보자는 뜻으로 이 비유는 곧잘 사용된다.
그런데 이 물음 “누가 예수의 역할이냐?”라는 질문에 엉뚱한(?) 답을 한 사람은 고(故) 서남동(徐南同)목사이다. 그는 비록 그 흔한 신학박사 학위 하나 없었지만 살아 생전 “한국 신학계의 안테나”라고 불릴 만큼 큰 학자였으며 이른바 ‘민중신학’, ‘한(恨)의 신학’, ‘단(斷)의 신학’의 틀을 세운 분이다.
그 서남동목사가 내 놓은 답은 “강도 만난 사람” – 바로 그 이가 예수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신학적 용어로 ‘한(恨)의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강도를 만나서 얻어 맞고 빼앗기고 죽을 고비에 빠져 “살려달라”고 애처로이 신음하는 그 사람이 바로 “예수”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예수가 강도를 만났다. 애당초 가진 것 없었으니 빼앗긴 물건이야 변변하겠냐만 반쯤 죽을만큼 맞아 쓰러져 신음하고 있다. 그 옆을 내가 아니면 당신이 지나간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조차 뭉개져 나오는 절박한 소리, 그 소리의 주인공이 예수라면 어떻게 응답하고 일해야 할까?
예수의 비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이렇게 풀어야 한다는 것이 서남동목사의 해석이다.
자! 강도를 만난 예수를 찾아 떠나자. 그의 신음소리를 듣고 그의 상처를 감싸주고 마침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자. 진정 참된 이웃이 되기 위하여! 멀리 갈 것 없다. 나는 지금 내가 사는 이 곳 델라웨어에서 찾을 터인즉, 그대는 그대가 사는 곳에서 그 소리를 찾아 볼 일이다.
예수를 믿느냐, 아니 믿느냐의 전제는 단연코 필요치 않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들의 전제이니 그들의 몫이다. 살면 살수록 답답함이 늘어 가는 이민(移民), 귀와 입 트이지 않아 늘 당하고 산다는 생각, “오직 새끼들만 잘 되면…”하는 소원으로 하루 열 몇 시간을 노동으로 보내지만 만만치 않은 세상.
“나도 옛날엔 한국에서…” 큰 소리 쳐 보지만 끝내 허한 가슴 쓸어내야 하는 오늘. “이쯤 살았으면 넉넉한데…” 그래도 밀려오는 외로움 -이 모두 “강도 만난 예수”의 소리 아니겠나.
***서남동 목사가 이런 이야기를 하셨을 때가 1970년대 한국이었다.
2014년 오늘, 때때로 듣는 한국발 뉴스 속에서 그리고 여기 내가 발딛고 사는 미국에서 여전히 “강도 만난 예수”의 한맺힌 소리들을 듣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