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업(生業)에

엊그제 손님 한 분이 신문 한 장을 전해 주었다. 월 스트리트 저널이었다. 그가 읽어 보라고 준 기사의 제목은 “고전하는 세탁소 가격인상 마땅(Struggling Dry Cleaners Are Forced to Lift Prices)”이었다.

기사가 전하는 내용들은 내게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익히 경험으로 아는 사실들이기 때문이었다.  세탁소에서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물품들 – 일테면 행어, 폴리백 등-의 가격과 개스 전기료 등이 턱없이 뛰어오른 현실은 비단 세탁소에만 국한 된 일은 아니지만 최근 그 인상 폭은 전에 경험에 보지 못한 정도이다.

게다가 팬데믹 이후 재택근무자가 급증하고, 캐쥬얼 의상을 주로 입는 사회적 변화는 세탁소가 고전하는 치명적 요인들이 되었다. 더하여 일할 사람들 구하기가 어려워 올라 간 종업원 임금도 세탁소 하기 힘든 한 요인이 되었다.

기사의 내용들이었는데 모두 내가 이미 겪고 있는 일들이다.

또 기사에 따르면 펜데믹 이후 미국내 세탁소들의 약 30%가 이런 저런 어려움으로 문을 닫았다는 것인데 이 또한 내 주변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기사를 마무리하는 미주리주 한 세탁소 여주인의 말이다. “세탁료 인상? 내가 어쩌겠어요. 세상이 그렇게 변하는 걸요.”

힘든 게 어디 세탁소 뿐이겠나? 미주리나 내가 사는 델라웨어나 크게 다를 바 없듯, 세상 어디나 이즈음 거의 한 흐름으로 돌아가는 형편이니 그저 나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들은 거의 엇비슷 할 터.

그나마 내 걱정 해주며 ‘너도 가격 올려서 버텨 보라!’고 신문 한 장 건네 주는 손님 한 분 있어  한 주간 일의 피로를 덜 수 있는 기쁨에.

삶에…… 감사에!

생업(生業)

일을 마치고 돌아 오는 길, 이제 막 어둠을  내리기 시작하는 하늘에 둥근 보름달이 훤한 얼굴을 내민다. 음력 섣달 보름이니 설이 멀지 않았다. 바람은 아직 차고, 다음 주에는 많은 눈이 내린다는 예보도 있지만 예부터 설은 이미 봄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참 좋다고 느낄 때가 있다. 삼십 수 년 어린 시절을 보낸 내 고향 신촌의 옛 날씨들을 그대로 만끽하는 순간들이다. 신촌에서 보낸 삼 십 수 년보다 조금 더 긴 세월들을 이 곳에서 살았다. 그렇게 따져보니 내 평생을 거의 엇비슷한 날씨 환경에서 산 게다. 내가 누리며 사는 또 하나의 복이라 생각한다.

굴곡 없는 삶을 꾸려온 사람들이 거의 없듯,  나 역시 평범하게 그 대열에 섞여 살아왔다. 헛 꿈도 참 많이 꾸었다. 지금도 아차 하는 순간, 엉뚱한 곳으로 달아나는 생각들을 다잡아 다독일 때가 있다. 다행이랄까 아님 늙었다 할까, 행동이 그 생각을 쫓아가는 일은 매우 드물다.

이 곳에서 살며 시작한 세탁업에서 벗어 나고자 용을 쓰던 시절이 있었다. 그 무렵 나는 큰 꿈을 꾸고 있노라고 스스로를 다졌었다. 큰 꿈이 헛 꿈이었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쇠할 나이에 이른 후였다.

그제서야 세탁업을 내 생업이자 평생의 업으로 받아 들였었다.

그 무렵 즈음이었을 게다. ‘단 한 사람만이라도..’ , ‘단 한 사람에게 만이라도…’라는 말을 되뇌이며  산 것이.

손님 한 분이 너나없이 어려운 시절을 잘 이겨내라며 작은 선물과 카드를 전했다. 말의 고마움이라니.

세탁소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만난 보름달에 새겨보는 감사에.

DSC01586ab

 

생업(生業)

길 건너에서 같은 업(業)을 하고 있는 6.25선생께서 손을 턴단다. 그가 힘들어 한다는 이야기는 이따금 들었지만, 막상 이렇게 가게 문을 닫아야 할 만큼 곤궁한 처지인지는 몰랐다.

그를 처음 본 지도 어느새 스무해 전 일이 되었다. 어느 한인들 모임에서였다. 한 사내가 남도 특유의 사투리로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그의 주변에는 내 또래 사내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사내는 6.25 전쟁 때 자신과 가족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었는지 열변을 토하고 있었는데, 바로 어제 일어났던 일을 설명하듯 하던 것이었다. 이런 첫 만남 때문에 한동안 나는 그를 적어도 1945년생 전후의 나이로 여기고 깍듯히 대하곤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시간이 지난 후, 그의 나이를 알게 되었을 때부터 나는 그를 6.25선생이라고 불렀다. 그가 나보다 18개월 먼저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을 안 이후에 나는 그의 얼굴만 보면 6.25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피난지 부산에서 태어난 나는 부산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거니와, 아무리 용을 쓰고 어릴 적 기억을 되뇌어 본다한들 고작 1950년대 후반에 일어났던 일들 혹은 그 시절 풍경에 대한 것이 고작일 뿐이건만,  6.25 때 일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그는 가히 내가 쫓아갈 수 없는 비범함이 있었을 터이다.

아무튼 말이 좀 많은 편이기는 하나 그는  썩 괜찮은 사내이다. 인물이 착하기도 하거니와 동네 한인들 대소사에 손이 필요할 때면 앞뒤 가리지않고 흔쾌히 나서서 평판도 나쁘지는 않다. 그저 한 마을에 살고있는 한인 가운데 한사람 사이 정도이던 그와 내가 얼굴을 자주 부딪히게 된 것은 한 십 수여년 전 쯤부터이다. 그가 내 가게 길건너에 있는 세탁소를 인수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나는 그 이전 십 수년 해오던 세탁업에 지쳐 딴데 한눈을 팔고 있었거니와, 당시만 하여도 아직 세탁소 형편이 썩 나쁘지만은 않은 때여서 그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아니하였다.

내가 세탁업을 시작했던 때만 하여도 ‘세탁소 간판만 붙이면 밥은 넉넉히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이 떠돌 때이고, 적어도 2,000년도 전후만 하여도  그 말은 타당하지 않았는가 싶다. 처음 내가 세탁소를 시작할 때 가까운 주변 몇 마일 안에 세탁소 숫자라야 한 손으로 꼽을 정도이었지만, 2,000년도 초반에는 이미 두손 열손가락으로는 모자라고 두발 열발가락을 다 동원해야 할만치 늘어나 있었다. 6.25선생께서 세탁업에 발을 들여놓던 때는 바로 그 무렵이었다.

6.25선생이 인수한 가게주인으로 그가 네번 째이다. 그 이전에 주인이었던 세사람 모두 내가 한자리에서 겪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지난 십여년 동안 세탁업은 세상이 변한 만큼보다 더 큰 변화를 겪었다.

최근 몇 년 사이, 두 손 두 발 모든 가락수를 꼽아야 할만큼 많던 내 주변 세탁소들 숫자가 손만 동원해도 충분히 세고도 손가락이 남을 만큼 변했다.

변하는 세상풍경이 끝내 6.25선생을 비껴가지 않은 모양이다.

늘어가는 내 나이 숫자보다 줄어드는 세탁소 숫자가 자꾸 밟히는 까닭은 나 역시 변하는 풍경 한가운데 서있기 때문일게다.

쉬는 날, 내 업(業)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