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4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시늉을 해 본다. 물론 결과는 모른다. 어떤 끝이든 연연하지 않으려 한다. 내 나이 값은 해야 하므로. 그저 오늘 하루 흙을 만지며 보낸 하루에 감사하다.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씨앗들, 고작 일 센트에 수십 개를 손에 넣은 씨앗들을 이리 애지중지 귀히 여기고 다루는 새로운 경험에 그저 놀라며 땀을 흘리는 참 이상한 기쁨을 맛본다.

DSC00057 DSC00063 DSC00065 DSC00073

삽질을 하다가 생각난 옛일 하나.

이제껏 살아오며 누군가에게 매를 맞기는 많이 맞았으되 누군가를 때려 본 적은 거의 없다. 거의라는 말을 덧붙여야 하는 까닭은 딱 한차례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맞기는 많이 맞아 보았으되 부끄러운 적이나 때린 이들에게 져 본 적은 없다는 우김질을 해본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러하다.

딱 한차례 남을 때려 본 일이 있다. 사십 수 년 전 군대에서 겪은 일이다. 삼십 수 개월 군대생활을 하면서도 맞기는 많이 맞아 보았지만 누군가를 때려 본 적은 없었다. 제대를 거의 앞두고 일어났던 그 일 말고는.

전방 교육사단 말단부대 소총수였던 내 군생활은 그저 밥 먹고 훈련 받고 봄 가을로 땅 파는 일의 연속이었다.  땅 파는 일이란 고지에 교통호를 파고 떼를 옮겨다 심고 벙커를 짓고 하는 일들이었다.

말단 소총수였다고 하지만 나름 열외병으로 다른 병사들과 달리 여러 편익들을 누렸었다. 이른바 문제 학생으로 끌려갔던 군대생활은 초기 한 반년 동안은 몹시 힘들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적응되다 보니 견딜만하게 되었다. 중대 인원 120여명 가운데 대학 재학중 이상의 학력자가 나 혼자이다 보니 비록 비밀취급인가를 받을 수 없는 처지에서도 여러 열외 조건들을 참 많이 누렸었다. 일테면 각종 위탁 교육들은 도맡아서 다녔고 툭하면 대대급 이상의 부대에 임시 차출되어 가곤 했기에 그리 혹독한 훈련이나 심한 노동에서 제외되곤 했었다. 동료 부대원들에게 미안함도 있었고 그런 까닭으로 많이 맞기도 했었다.

그렇게 제대 한 두어 달 남겨두고 나갔던 벙커 작업이었다. 산 아래 쌓아 둔 자갈과 모래 등을 산 정상으로 옮기는 작업을 맡은 우리 소대원들은 등짐을 지고 오전에 서너 차례, 오후에 서너 차례 산 정산을 등짐을 지고 오르락내리락 했다.

말년이라 텐트지기를 했었을 수도 있었는데 때론 아둔했던 나는 등짐을 지고 그 산을 오르고 내렸다. 그러다 보게 된 일이다.  체격 좋은 울릉도 출신 원일병이 갓 전출 온 이등병 두 명을 마구 때리고 있는 것이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두 명의 이등병이 요령을 피우며 남들이 두 번 산을 오르고 내릴 때 한 번 밖에 하지 않아 군기를 잡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웬지 모르게 화가 나서 원일병을 엎드려 뻗쳐를 시키고 주변에 있던 나무 몽둥이로 그를 몇 대 때렸다.

내가 유일하게 남을 때렸던 일이다.

원일병이 제대하던 날, 그와 동대문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 국밥집에서 소주 한잔을 나누었다. 그가 꼭 보자고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그가 한 말이었다. ‘김상병님(나는 만기 제대 상병이었고 그는 예비역 병장이었다.) 내가요, 이젠 울릉도 가면 언제 육지 올지 몰라요. 김상병님 올 여름에 울릉도 꼭 한 번 오셔! 내가 멋지게 모실게요. 김상병님이 나 때릴 때 웃음 나와서 혼났어요. 아픈 게 아니라 그냥 간지럽더라고요. 암튼 김상병님한테 맞은 건 내게 참 좋은 추억이예요.’

그해 여름 나는 포항에서 거의 열 시간 동안 배를 타고 울릉도를 찾았었다. 도동에서 그의 집까지는 통통배를 타고 반시간여, 고작 이십 여 호 가구들이 이룬 작은 마을이었다. 그 곳에서 보낸 열흘 간의 시간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꿈만 같다.

원일병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원색의 바다 속에 들어가 작살로 잡은 각종 해물 회와 막걸리와 소주로 나를 대접했고, 열합(홍합)밥에 고추장을 썩썩 비벼 내 배를 채워 주었었다.

아! 원일병 그도 이젠 더는 작살질은 못하리라.

삽질에 떠오른 옛 생각에 하루를 웃다.

저녁나절에 미하엘 엔데의 ‘자유의 감옥’을 읽다.

<완전한 자유는 완전한 부자유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루 – 12

오늘 내가 사는 곳의 주지사는 학교 문을 일년 동안 닫을 수도 있다고 했단다. 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아직 확정한 것은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 그렇게 결정할 수 있다고 했단다. 지난 달에 5월 15일까지 학교 문을 닫겠다고 발표한 이후 나온 주지사의 말이다.  아무리 빨라도 9월 새학기가 시작되기 까지는 각급 학교가 문을 열지 않을 것 같다.

학교 앞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내 입장에서 보자면 올 여름이 끝날 때까지 내 가계 형편은 긴 겨울이 될 듯 하다. 살며 걱정 없던 날이 얼마나 되었던가?

뒤돌아 보며 곰곰 생각해 보니 상업고등학교를 나왔건만 난 이재(理財)와는 참 거리가 멀다. 나를 조금만 아는 이들은 거의 모두가 동의하는 일이다.

이제껏 살며 몇차례 하고 싶은 일들을 해보겠노라고 야심차게 일을 벌려 보았지만 그 때 마다 번번히 거의 만신창이 실패로 끝났었다. 그나마 삼십 년 넘게 붙들고 있는 세탁소 하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붙들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를 너무나 잘 아는 아내가 버텨낸 산물이다.

가게 문을 제대로 열지 못한 지 어느새 한달 째이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아직 가늠할 수 없는 시간들의 가계를 재단해 볼 능력이 없는 내가, 그래도 살아 온 나이 값은 하노라고 나름 주판알을 튕겨 보는 이즈음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내는 주판알엔 관심 없고 그렇게 주판알을 튕기는 나를 기특히 여기는 듯 하다.

솔직히 돈이야 이 나이에 없으면 없는 대로 살 수 있는 준비가 이미 끝난 터이라 주판알 엎어 버리면 그만일 터이고, 문제는 느닷없이 남아 도는 시간이다.

남아 도는 시간 사이로 잽싸게 찾아 드는 놈은 게으름이다.

그 게으름 이겨보고자 손에 든 것은 삽, 바로 삽질이다. 집 앞뜰 화단을 뒤엎고, 지난 해 가을 몽땅 베어버린 뒤뜰 대나무 밭을 뒤집는 삽질이다. 꽃 심고, 채마밭 한번 일궈 보자고 작심하며 해 보는 삽질인데, 모를 일이다. 꽃을 보게 될런지 또는 우리 부부 저녁상에 올릴 푸성귀를 거둘 수 있을지도.

그냥 요 며칠  하루 하루 그 꿈으로  삽질하는 즐거움에 그칠지라도, 그 또한 하루의 즐거움이려니.

늦은 저녁, 뉴스들을 훑다 보게 된 동영상 속 장면 하나에 딱히 뭐라할 수 없는 눈물 흘리며 감사하는 마음 하나.

세월호 6주기 추모 행사에 참여한 국회의원 당선자 세 사람의 모습을 보며 흐른 눈물이었다.

이런 젊고 따듯하고 유능한 이들을 앞세운 시민들이 만들어 나가는 세상을 그려보는 재미라니.

욕심이 아니라 하루를 위하여 드는 모든 삽질엔 뜻이 있을 터이니.

또 하루에.

DSC09990A DSC09994A DSC09996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