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시늉을 해 본다. 물론 결과는 모른다. 어떤 끝이든 연연하지 않으려 한다. 내 나이 값은 해야 하므로. 그저 오늘 하루 흙을 만지며 보낸 하루에 감사하다.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씨앗들, 고작 일 센트에 수십 개를 손에 넣은 씨앗들을 이리 애지중지 귀히 여기고 다루는 새로운 경험에 그저 놀라며 땀을 흘리는 참 이상한 기쁨을 맛본다.
삽질을 하다가 생각난 옛일 하나.
이제껏 살아오며 누군가에게 매를 맞기는 많이 맞았으되 누군가를 때려 본 적은 거의 없다. 거의라는 말을 덧붙여야 하는 까닭은 딱 한차례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맞기는 많이 맞아 보았으되 부끄러운 적이나 때린 이들에게 져 본 적은 없다는 우김질을 해본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러하다.
딱 한차례 남을 때려 본 일이 있다. 사십 수 년 전 군대에서 겪은 일이다. 삼십 수 개월 군대생활을 하면서도 맞기는 많이 맞아 보았지만 누군가를 때려 본 적은 없었다. 제대를 거의 앞두고 일어났던 그 일 말고는.
전방 교육사단 말단부대 소총수였던 내 군생활은 그저 밥 먹고 훈련 받고 봄 가을로 땅 파는 일의 연속이었다. 땅 파는 일이란 고지에 교통호를 파고 떼를 옮겨다 심고 벙커를 짓고 하는 일들이었다.
말단 소총수였다고 하지만 나름 열외병으로 다른 병사들과 달리 여러 편익들을 누렸었다. 이른바 문제 학생으로 끌려갔던 군대생활은 초기 한 반년 동안은 몹시 힘들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적응되다 보니 견딜만하게 되었다. 중대 인원 120여명 가운데 대학 재학중 이상의 학력자가 나 혼자이다 보니 비록 비밀취급인가를 받을 수 없는 처지에서도 여러 열외 조건들을 참 많이 누렸었다. 일테면 각종 위탁 교육들은 도맡아서 다녔고 툭하면 대대급 이상의 부대에 임시 차출되어 가곤 했기에 그리 혹독한 훈련이나 심한 노동에서 제외되곤 했었다. 동료 부대원들에게 미안함도 있었고 그런 까닭으로 많이 맞기도 했었다.
그렇게 제대 한 두어 달 남겨두고 나갔던 벙커 작업이었다. 산 아래 쌓아 둔 자갈과 모래 등을 산 정상으로 옮기는 작업을 맡은 우리 소대원들은 등짐을 지고 오전에 서너 차례, 오후에 서너 차례 산 정산을 등짐을 지고 오르락내리락 했다.
말년이라 텐트지기를 했었을 수도 있었는데 때론 아둔했던 나는 등짐을 지고 그 산을 오르고 내렸다. 그러다 보게 된 일이다. 체격 좋은 울릉도 출신 원일병이 갓 전출 온 이등병 두 명을 마구 때리고 있는 것이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두 명의 이등병이 요령을 피우며 남들이 두 번 산을 오르고 내릴 때 한 번 밖에 하지 않아 군기를 잡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웬지 모르게 화가 나서 원일병을 엎드려 뻗쳐를 시키고 주변에 있던 나무 몽둥이로 그를 몇 대 때렸다.
내가 유일하게 남을 때렸던 일이다.
원일병이 제대하던 날, 그와 동대문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 국밥집에서 소주 한잔을 나누었다. 그가 꼭 보자고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그가 한 말이었다. ‘김상병님(나는 만기 제대 상병이었고 그는 예비역 병장이었다.) 내가요, 이젠 울릉도 가면 언제 육지 올지 몰라요. 김상병님 올 여름에 울릉도 꼭 한 번 오셔! 내가 멋지게 모실게요. 김상병님이 나 때릴 때 웃음 나와서 혼났어요. 아픈 게 아니라 그냥 간지럽더라고요. 암튼 김상병님한테 맞은 건 내게 참 좋은 추억이예요.’
그해 여름 나는 포항에서 거의 열 시간 동안 배를 타고 울릉도를 찾았었다. 도동에서 그의 집까지는 통통배를 타고 반시간여, 고작 이십 여 호 가구들이 이룬 작은 마을이었다. 그 곳에서 보낸 열흘 간의 시간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꿈만 같다.
원일병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원색의 바다 속에 들어가 작살로 잡은 각종 해물 회와 막걸리와 소주로 나를 대접했고, 열합(홍합)밥에 고추장을 썩썩 비벼 내 배를 채워 주었었다.
아! 원일병 그도 이젠 더는 작살질은 못하리라.
삽질에 떠오른 옛 생각에 하루를 웃다.
저녁나절에 미하엘 엔데의 ‘자유의 감옥’을 읽다.
<완전한 자유는 완전한 부자유라는 것을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