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매일 업데이트되는 뉴스들 가운데 구글 서비스를 통해 제가 받아보는 특정 항목에 해당하는 뉴스들이 있습니다. 우선은 직업상 세탁업(dry cleaning business)에 대한 뉴스가 있고, 미국내 한인 이민자들의 주업종인 micro business에 대한 뉴스와 미국경제에 대한 뉴스들이 있습니다. 그 다음이 한반도관련 뉴스입니다.

이런 항목들에 대한 영문뉴스들은 매일 같은 시간에 제 이메일함에 들어옵니다.

세월호-이호진거기에 엊그제부터 하나 추가한 항목이 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 3보1배”라는 한국어 검색을 추가한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로 아들 이승현군을 잃은 아버지 이호진씨와 그의 딸 이아름씨에 대한 기사를 받아보기 위함입니다. 바라기는 한국내 언론 가운데 이들과 함께 3보1배하며 이들의 고행에 대한 기사를 이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랍니다.

좀 사사롭고 사치스럽기까지한 이야기지만 이호진씨의 나이가 제 아내와 같거니와 제가 제 아내의 본 이름대신 즐겨 부르던 이름이 이아름이었다는 사실이 뉴스를 쫓는 정말 하찮은 이유도 되었다는 말씀을 덧붙이면서, 그 나이에 30만번의 큰절을 해가면서 520km를 길을 걷는 부녀의 모습을 잊지 않기위해 부녀에 대한 뉴스를 쫓고자 하는 것이랍니다.

교회력으로 사순절기랍니다.

사순절(四旬節)이란 부활주일 이전에 주일(일요일)을 뺀 사십일 동안을 말합니다. 예수가 겪었던 고난을 되새김하면서 오늘 살아있는 자로서 그를 따르고자하는 신앙고백으로 보내는 40일이랍니다.

“예수를 믿는다” 또는 “예수를 따른다”는 말은 바로 내 자신이 예수가 된다는 말입니다. “나의 나됨” 곧 내 정체성과 “예수의 예수됨” 곧 예수의 정체성을 하나로 일치한다는 말이지요.

이천년 전 예수가 명령한 “나를 따르라”는 말에 따라 2015년 오늘을 사는 내가 그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가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의 상황속에서 했던 것처럼 오늘 내가 사는 상황 속에서 내가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물음과 결단으로 살라는 말일겝니다.

이천년 전 예수의 모습 가운데, 그 때의 상황과 예수의 삶을 표본처럼 축약해 주는 성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마가가 전하는 예수의 말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마가복음 2:27-28, 개역개정본)

예수시대에 안식일은 바로 법이었습니다. 하여 이 성서 본문은 이렇게 읽어도 무방합니다.

“법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법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사람이 법의 주인이니라.”

그 당시의 법 곧 안식일법에 대해 전해지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들 가운데 이런 것들도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안식일이란 금요일 해질 무렵부터 그 다음날인 토요일 해질 무렵까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금요일 해질 무렵에 나귀가 끄는 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막 집에 도착한 순간 해가 서산으로 꼴깍 넘어갔습니다. 이제 안식일이 시작됐으니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물건을 나르거나 옮기는 일은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만 하루동안 나귀는 무거운 짐수레 굴레를 지고 지내야만 하는 것이지요. 안되었다 싶었던지 예외조항이라는 것이 하나 있었답니다. 한번만 딱 쳐서 나귀에게 매인 수레의 끈을 풀 수는 있다는 조항입니다. 딱 한번만 쳐서 말입니다.

당시 안식일법이란 아주 엄격한 법률이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이 법은 있는 사람들만 지킬 수 있는 법이었습니다. 일주일에 만 하루를 아무 일도 하지않고 지낼 수 있는 사람이란 이미 어느 정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먹고 살기위해 안식일에도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 몸이 성치 않거나 아파서 안식일에 회당에 나갈 수 없는 사람들은 그냥 바로 죄인이 되는 세상이었습니다.

사람 특히 없고, 누리지 못하고, 억눌려 사는 사람들에게 안식일법이란 곧 죄인이라는 족쇄를 채우는 도구였습니다.

본래 성서적 의미의 안식일이란 없는 자, 부려 지는 자, 노예, 비정규직 노동자, 품팔이 등등을 위해 하루 쉼을 주는 날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안식일에는 이것도 하지말라 저것도 하지말라는 금지조항들이 하나 하나 추가되면서 (있고 누리는) 사람들이 (없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족쇄를 채우는 법으로 바뀐 것입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안식일법 만능시대에 예수가 내렸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선언은 가히 혁명이었습니다. 이즘식으로 말하자면 예수는 가히 좌빨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를 따라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제임스 콘(James Hal Cone)이라는 미국인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교회의 인종차별과 인종분리에 정면으로 “No”를 선언하며 백인들이 이야기하는 해방신학과는 완전히 다른 흑인해방신학을 주창한 신학자입니다.

그는 그가 쓴 책 <눌린 자의 하느님( God of the Oppressed)>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어서 죄와 악과 죽음의 세력을 결정적으로 이겨냄으로써 인간에게 아픔의 실체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자유와 능력과 희망을 준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이다.”

제임스 콘은 “아픔의 실체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자유와 능력과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오늘날 살아있는 예수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자유와 능력과 희망을 안고 아픔의 실체에 대항하여 싸우고자” 3배 1보의 길을 걷고 있는 이호진씨 부녀에게서 제가 느끼는 성서적 예수의 모습입니다.

이들 부녀를 향해 “가만히 있어라”거나 “이젠 그만하라” 나아가 “종북 좌빨”을 뇌까리는 교회나 기독교인이 있다면, 적어도 제가 믿는 신앙의 잣대로 그들은 종교적 사기꾼들일 뿐입니다.

이즈음 기독교인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 가운데 하나로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의 고난은 세상 도처에서 “여기 지금 나와 함께”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라는 노랫말을 “여기 지금 내가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곱씹는 일이야말로 이 사순절에 예수쟁이들이 해야만 하는 일일겝니다.

태(胎) – 3보 1배

<황사가 잔뜩 낀 23일 오전 10시, 세월호 참사로 숨진 고 이승현(단원고)군의 아버지 이호진씨와 누나 아름씨가 진도 팽목항 부둣가에 섰다. 참사 314일째 되는 이날, 부녀는 세월호 참사의 진실규명을 위해 ‘진도 팽목항~서울 광화문 3보 1배’를 시작했다(유튜브에서 동영상 보기).- 중략 –

100 여일 동안의 약 500km 여정에 나선 부녀는 “참혹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실종자 가족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이호진씨는 “(참사) 1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 뭐 하나 제대로 밝혀진 게 없다”며 “(우리 부녀가) 30만 번 절을 하는 동안 적어도 세월호를 다시 한 번 떠올려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기사 전문보기)

오늘자 오마이뉴스가 전하는 기사 <팽목항→광화문 3보1배 “하늘 위 아들 위해 멈추지 않아”>의 도입부입니다.

일년 전 이호진씨와 그의 딸 아름씨는 승현군의 이름 앞에 “고(故)자가 붙고, 2015년 이 추운날 부녀가 함께 세걸음 걷고 큰절 한번하며 500km를 걷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던 일일겝니다.

어느 인생이나 어느 가족에게나 아픔과 슬픔, 기쁨과 즐거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세상 누구에게라도 말입니다. 소소한 일상적 삶속에서 누구라도 겪게되는 아픔, 슬픔, 기쁨, 즐거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상상치 못했던 재난이 개인이나 가족에게 다가오는 일은 뉴스로는 흔한 일이지만 실제 그런 일들을 당하는 사람들은 뉴스가 될만큼 흔치않은 일입니다.

국가라는 공동체를 꾸리고 사는 까닭은 바로 그런 상상치 못한 재난이 국가 구성원인 개인이나 최소 공동체인 가족에게 닥치지 않도록 미리 방지하고, 재난이 닥쳤을 경우엔 국가의 모든 역량을 다해 그 재난으로부터 개인이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국가가 필요한 까닭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34조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에는 다음과 같은 항목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1.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2. 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

3. 국가는 여자의 복지와 권익의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4. 국가는 노인과 청소년의 복지향상을 위한 정책을 실시할 의무를 진다.

5. 신체장애자 및 질병•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6.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이호진씨와 그의 딸 아름씨는 지금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포기”한 상태입니다. 500km의 길을 (누구엔가 드리는 것인지도) 모를 30만 번 정도 큰절을 하며 백여일 동안 걷는다는 일은 <인간다운 생활> 을 “포기”’하는 사건입니다.

태

이들 부녀의 행동을 얼핏 이렇게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포기”한 행위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녀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인간다운 생활”을 스스로 포기하고 항거하고 투쟁하는 긴 여정에 오른 것입니다.

국가가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았고, 여전히 “노력하지 않고”있기 때문입니다.

오마이뉴스는 험하고 먼길을 떠나는 부녀와 나눈 대화를 이렇게 전합니다.

부녀는 “광화문에 도착했을 때 (대한민국이)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가”라는 질문에는 이구동성으로 비관적인 답을 내놨다.

이호진씨는 “실종자 9명 수습하고, 진상 밝히고, 책임자 처벌하고, 법질서 올바르게 확립되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우리가 3보 1배로) 광화문까지 간다고 해서 그렇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며 “개인적으로 쌓인 한을 조금이라도 길에 내려놓고 싶다”고 한탄했다.

이아름씨는 “정부에 바라는 게 있나”라고 묻자, “그냥 하던대로 하면 될 거 같다”고 싸늘하게 답했다. “별로 기대하는 게 없는 건가”라고 다시 물으니, 그는 “그렇다”며 고개를 숙였다.

저는 이 기사를 일으며 오래전 대만 신학자 송천성(宋泉盛, Choan Seng Song)이 말한 “태(胎)의 신학”이라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송천성은 ‘태(胎)’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창조와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가 말한 태의 신학은 인간의 자궁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데서 오는 투신의 신학입니다. 이는 어머니가 자신의 몸속에 깃든 생명이 결실을 맺기까지 혼신을 다 하는데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태의 신학은 궁극적으로 희망의 신학입니다. 생명의 궁극적 의미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이호준씨와 딸 이아름씨는 죽은 아들과 동생인 이승현군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고통속에 투신하는 여정에 나선 것입니다. 이호준씨 부녀의 투신은 죽은 고 이승현군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모든 이들이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결실을 맺기 위해 혼신을 바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투신이 “태(胎)”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희망으로 이어지려면 그들의 긴 여정에 함께하는 사람들의 연대는 필수조건인 동시에 충분조건이 될 것입니다.

교회력으로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의 삶은 수난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의 수난은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신(神)이 스스로 몸소 겪었다는 고백 위에 있는 것입니다. 신과 사람이 고난과 고통 속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선언 위에서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호진씨 부녀가 한 말처럼 그들이 걷는 고난의 삼보일배의 끝에서 눈에 띄는 변화가 보이지 않더라도 그들의 행위는 이미 희망을 품은 태(胎)입니다.

잊지 않는 일

어제(18일)부터 이번 토요일(21일)까지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 있는 힐튼 뉴올리언스 리버사이드 호텔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에 대한 뉴스를 보았습니다.

국제학 학회(International Studies Association) 주최로 열리는 56차 연례 학술대회(ISA’s 56th Annual Convention)에 대한 소식입니다.

이 학술대회에서 내일(20일) 우리들에게 아주 귀에 익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내일 오후 4시부터 열리는 이 행사에서 한국인 학자들 몇 분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회과학적 연구결과를 발표한다고 합니다. 보도는 그들의 연구결과를 요약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발표자 네명은 모두 한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활동하는 분들로서 남태현(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과), 서재정(일본 국제 기독교대학 정치학과), 유종성(호주 국립대 정치사회변동학과), 이윤경(미국 빙햄튼뉴욕 주립대 사회학과) 교수 등이랍니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를 한국의 민주화, 국가론, 신자유주의 정책, 부패 등 각기 다른 측면에서 다각적으로 분석하여, 이 참사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한국 사회 및 정치의 구조적 문제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임을 드러낼 것이라고 합니다.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결과물”<이윤경 (미국 빙햄튼 뉴욕 주립대 사회학과 교수)>, “참사는 부패가 불러온 당연한 결과”<유종성 (호주 국립대 정치사회변동학과 교수)>, 박근혜정부와 정치 엘리트들의 비민주성이 낳은 결과”<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과 교수)> 등 모두 고개를 끄덕이게하는 연구들인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 제 관심을 끌어들인 것은 서재정 (일본 국제 기독교 대학 정치학과 교수)의 주장입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신자유주의’라는 말과 ‘한국적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구별하는 듯합니다.

일반적으로 시장의 역할을 극대화하고 이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과정을 신자유주의라고 하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분단체제’가 파생시키는 국가안보의 필요성이 국가 권력을 강화하고 국가가 사회에 침투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한국적 신자유주의’란 모순구조라는 것입니다.

이 모순구조에서 일어난 세월호 참사는 신자유주의라는 말 속에 숨어있던 국가의 폭력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화의 비용과 국가 폭력행사의 결과는 시민사회의 희생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주장한답니다.

세월호와 조국분단을 한 평면에 올려놓고 분석하는 그의 이야기에 고개가 많이 끄덕여졌답니다.

이와같이 일어난 사건에 대한 지속적인 분석과 연구는 물론이거니와 실제적으로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과 재발방지를 위한 모든 노력들은 “한인”이라는 공동체에 묶인 모든 사람들의 몫일 것입니다.

지난 해 7월, 서울에서 열렸던 ‘2014 서울국제학술대회’에서 울리히 벡(Ulrich Beck) 독일 뮌헨대 교수가 했다는 말은 우리들의 몫을 다하기 위해 꼭 붙들고 있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고, 정치인들은 과거 관행을 답습할 것이다. 하지만 위험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정치제도의 정당성 약화가 거세지면서 정치제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시민들이 이러한 사태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잊지 않는 일” 말입니다.

여기 날짜로 치자면 오늘이 설날입니다.

ash wed어제는 기독교력으로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이, 자신과 인류를 위해 대신 죽은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잊지 않기 위해 지키는 사순절을 시작하는 첫날이었습니다.

설날은 우리 민족의 전통을 잊지 말자는 날이요, 사순절은 구원에 대한 신앙을 잊지 말자는 기간입니다.

“잊지 않는 일”의 중요함을 알리는 날들이 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