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그리고 사랑에

  1. 멀리 캘리포니아 사돈께서 잘 키워 거두신 대추 한 상자를 보내주셨다. 호두알 만큼 큼직한 대추가 마치 설탕처럼 달았다.  누이들에게 크게 한 움큼씩 나누어 주고, 대추를 이용한 음식에 대해 알아본다.

성탄절에 찾아 오겠다는 아들, 사위, 딸, 며느리들을 생각하며 대추       넉넉히 들어간 갈비찜과 약식을 해 보아야겠다. 우리 내외를 위해         대추고를 좀 만들어 놓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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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내 생일을 맞아 아내의 사촌동생이 자신이 부른 노래를 보내왔다.  내가 그를 본지도 족히 사십년은 되었을 터. 그가 부른 ‘겨울아이’와 ‘Holiday’다.  ‘Holiday’는 아내가 어렸을 적 흥얼거렸던 게 기억나 불러 보았단다. 그도 이젠 환갑나이란다.

 

3. 어제 필라델피아 아주 낮은 곳에서 목회 하시는 이태후목사님께서 준비하신 지역사회 성탄잔치에 내가 참 좋아라 하는 필라세사모 친구들이 선물상자를 마련해 함께 했단다.

내  아들  며느리가  짝을  맺은 지가 어느새 육 년 전 일이 되었다. 당시 나는 아이들 결혼에 극심하게 반대 했었다. 그런 내게 아이들이 제안을 해 왔다. ‘우리 목사님을 한 번만 만나 주시라.’고. 나는 단칼에 아이들의 제안을 거절 했었다. “이 눔들아! 이건 목사가 해결해 줄 문제가 아니야! 이건 내가 내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야!”라고.

그렇게 시간은 내 부끄러움을 깨닫게 해 주었고, 이젠 까만 얼굴의 며느리가 얼마나 고맙고 사랑스러운지 말해야만 할 지경이다. 그 때 아이들이 나를 만나게 하려고 했던 목사가 바로 이태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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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추상자와 함께 보내 온 캘리포니아 사돈의 카드인사.  “우리 서로 멀리 있어도,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사람 그리고 사랑에.

  • 올겨울엔 불을 많이지 펴야겠다.  두루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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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리

반 년 만에 주(州) 경계를 넘나들었다. 주 경계를 넘었다 했지만 고작 집에서 한 시간도 안 걸리는 뉴저지 남단이었다.

이제 세월은 쏜 살이 아니라 방아쇠 당긴 탄환이다. 그가 떠난 지 어느 새 일년이 되어 조촐히 한 번 모이자는 후배의 전언을 받은 것은 두어 주 전 일이다.

장광선선생님은 뉴저지 남단 조용하고 한적한, 작은 호수를 낀 언덕에서 쉬고 계셨다. Lake Park Cemetery 선생의 쉼터는 그에게 참 걸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지에는 오랜 동지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장선생님을 먼저 보내신 사모님의 지난 일년 여 시간들이 고스란히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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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함께 했던 벗들에 비하자면 내가 그를 안 세월은 짧다. 벗들은 그를 형님 또는 선배라고 부르지만 내가 그를 늘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를 안 세월이 짧아서가 아니라 그가 진정 내 삶의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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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짧은 이력이다. <김대중 구출위원회, 5.18 진상규명, 전두환 독재타도 위원회 조직, 독립신문 편집장, 한국수난자 가족 돕기회 간사, 해외한민보 편집장 및 논설위원, 미주민주연합총무, 재미한국청년연합, 국제평화대행진 활동, 재미한겨레 동포연합 재정부장, 필라델피아 녹두회 등등>

그는 조국의 통일과 민주를 이루는 일을 자신의 업으로 여기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내가 그를 깊이 알게 된 때는 고작 스무 해도 지나지 않은 무렵이었다. 내가 아주 짧은 세월 잠시 동포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던 때였다. 매 주 그의 컬럼을  신문에 싣고 있었는데 내게는 그의 컬럼이 신문의 얼굴이었다.

전라도 장흥에서 태어나 장흥과 강진에서 유소년과 초기 청년기를 지냈던 그의 기억속에 남아 있는 남도의 바람과 물결, 그리고 사람들 그 터 위에 세우고 꿈꾸어 온 그의 세상을 풀어 놓은 글들이었다.

그가 꿈꾸던 통일과 민주는 모두 함께 주인 된 사람들이 사람처럼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으로 향하는 도구였다. 그즈음 나는 그의 남도 억양에서 나는 진한 사람 냄새를 맡곤 했다. 때론 그의 지나치게 과격하거나 많이 뒤쳐진 생각들이 그가 풍기는 사람냄새를 덮을 수는 없었다.

두 해 전에 후배들의 성화로 그가 남긴 글들을 책으로 펴낸 적이 있다. 그 책을 여는 그의 말이다.

<밀려가는 물>

나는 델라웨어강 하구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강변에 마을사람들을 위한 작은 쉼터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한해 두어 차례 나는 그 곳에 나가 강변 의자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에 젖어 봅니다.

어제 지나던 물은 오늘의 물에 밀려 떠나고, 오늘의 이 물은 내일의 물에 밀려 바다로 사라지리라.

어제의 물과 오늘의 물 그리고 내일의 물은 지나간 물, 지금의 물, 새로운 물과 다른가 같은가? 다르다면 하염없이 다른 물을 받아들이는 바다는 어찌 그 많은 양의 물을 품을 수 있을까?

이제 그는 먼저 바다 되었다.

그가 흐르는 물이었던 시절에 소리쳤던 이야기들을 잊지 않으며 오늘의 물소리를 내며 흐르는 벗들과 후배들이 있다.

그의 고향 남도에서 한반도 남과 북을 넘어 전 세계에서 한국어로 느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마땅히 꿈꾸며 살아가야 하는 세상을 위해 오늘을 흐르는 물결같은 삶을 생각하며.

딱히 건강하게 오래 잘 사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가 늘 문제일 뿐. 그가 오늘 다시 깨우쳐 주는 가르침이다.

우리들이 묘지에서 머무르는 내내 매 한 마리  높은 나무가지 위에서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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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광선선생님 일주기에.

뉴스에

뉴스들은 언제나 흉흉하다.

매일매일 호들갑스럽지만 찬찬히 돌아보면 하루도 새삼스러울 게 없다. 짧게는 내가 살아 온 세월이 그러하고, 길게 보면 사람들이 사람살이를 시작한 이래 변함 없었다.

다만 오늘만 사는 우리들에겐 오늘도 호들갑스럽게 흉흉하다.

내 가게가 있는 도시에는 인종 혐오 특히 동양인 혐오 전단지가 뿌려져 범인을 찾고 있다는 소식도 있고, 나같이 동네 구멍가게를 하는 이들은 점점 힘든 세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뉴스들도 제법 그럴싸한 자료들을 내밀며 다가서고, 총기사고 등의 사고사건 기사들은 어제만큼 여전히 이어진다.

트럼프나 바이든이나 재어서 우열을 가리기 힘든 노인들이 얼굴로 나선 선거판도 그렇고, 한반도 뉴스들도 우울하긴 마찬가지다.

허나 따지고보면 이게 어제 오늘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늘 그렇게 이어져 온 일이다.

시간이 흐르며 변하는 유일한 사실 하나는  사람 또는 시민들이 조금씩 조금씩 아주 더디고 느린 걸음으로 사람다워 진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건 내 믿음일수도 있다.

하늘에는 여느 해 유월과 다름없는 초여름 구름들이 나른하게 흐르고, 뜰에는 여름 꽃 봉우리가 트이고, 새들이 노닌다. 뒷뜰 언덕배미에서 풀 뜯던 노루 한 마리 나와 함께 눈싸움하다 슬며시 피해 달아나다.

뉴스들이 여전히 흉흉한 하루가 진다. 사람들은 늘 그렇게 또 하루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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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오랜만에 John이 가게에 들렸다.  John은 내 오랜 친구이자 선생이다. 지금은 빈 상태로 오래 되었지만 내 가게 옆엔 Radio Shack이 있었다. Malmstrom John은 바로 그  Radio Shack Manager로 오래 일했던 사람이다.

내가 세탁소를 처음 열었던 삼십 여년 전 그 때도  John은  Radio Shack Manager였다. 그는 매우 친절한 사내였다. 당시 막 새 가게를 열어 모든 것이 낯선 내게 그는 아주 자상한 조언들을 아끼지 않았었다. 드라이클리닝 기계와 장비들을 처음 들여오던 날 그가 내게 했던 말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친구야! 새로 마련한 네 장난감으로 돈도 많이 벌고 네 인생을 맘껏 즐길 수 있기를 바래!”

그렇게 오랜 동안  가까운  이웃으로, 친구로 선생으로 매일매일 얼굴을 마주하던 그와 어느 날 멀어지게 되었다. 그가 그만 일을 잃고 말았기 때문이었는데,  그가 떠난 Radio Shack은 활기를 잃더니 어느 날 끝내 문을 닫고 말았다.

해마다 7월이면 John은 그의 집에서 가까운 이웃들을 초대해 큰 야외 파티를 연다. 어느 해 부터인가 우리 부부도 그 파티에 단골손님이 되었다. 그러다 최근 몇 해 들어 그 때마다 이런 저런 일들이 겹쳐  함께하지 못했었다.

John은 이 달 말에 있을 그의 잔치에 꼭 참석하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 내 가게에 들렸던 것이었다. 이즈음 어떻게 지내느냐는 내 인사에 일흔 다섯 살 John이 웃으며 한 대답이다. “벌어 놓은 돈, 약값으로 쓰면서 잘 지내지!”

활짝 웃는 광대 분장과 옷차림을 즐겨했던 John이 웃으며 돌아서는 모습을 보며 거의 30년이 다 되어가는 세월을 잠시 되돌아 보았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딱히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쓸쓸함과 행복감에 잠시 젖었었다.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쓸쓸함과 누군가 서로를 기억해 주는 이웃이 있다는 행복감이었다.

어제는 하늘의 뭉게구름이 참 아름다웠었다.


이 달초 여행길에서 얼핏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이 사진 속에 남아있다.

점점 더 팍팍해 지기만 하는 삶을 토로하던  내 또래 그 섬의 토박이 관광차 택시운전사 할아버지.

아무리 적게 잡아도 70대 후반의 할머니였던 lyft택시 운전사, 그녀의 차에는 핸디캡 스티커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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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여객선 안 일꾼들 중엔 영어가 되고 몸값이 싼 필리핀계와 인도네시아계들이 많았다. 그들에게서 영어 안되고 몸 값만 쌌던 내 모습이 잠시 어른대기도 했었다. 일본과 벨기에의 월드컵 경기가 있던 날선상에서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벨기에가 역전승을 거두던 순간 그들과 우리는 까닭없이 한 패가 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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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내 고향 신촌 기차역 앞 서커스 천막을 떠올렸던 공연 속 주인공들과 얼굴색과 나이에 걸맞게 나뉘어 즐기던 사람들 속에서 나와 아내는 그저 구경꾼이었다. 까만 사람들 속에서 까만 가수가 자마이카풍의 노래를 부르던 연회장에 우리 내외가 오래 앉아 즐겼던 까닭은 까만 내 며느리와 아들이 생각났기 때문이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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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 관광지 번화한 거리에서 “회개와 예수 천국”을 드높이 들고 있던 할머니는 그 거리에서 가장 가난한 차림이어서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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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거리에서 가장 행복해 보였던 부부는 아동복 코너에서 옷을 찾는 나보다도 작은 이들이었다.  끊임없이 속삭이며 해변을 향해 걷던 그들의 행복한 모습에 그 누구도 특별한 시선을 주지 않았던 그거리의 사람들에게서 나는 아직은 남아있는 이 땅의 희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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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일상 속 헛것에 취해 비틀 거리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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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행 길에도 하늘엔 푸근한 구름이, 그리고 내 곁엔 우리라는 이름으로 아내와 벗들이 함께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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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 그 사랑과 아픔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7

제 6강 – 1 : 인문학의 주제 – 사람(Saram) (2)

♦ 人文學의 핵심이며 제 1 주제인 ‘사람’에 대한 두번째 이야기 입니다.

종교나 하느님 문제 까지를 포함하여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는 결국 사람 문제로 귀결이 됩니다. 사람이 우리에게 기쁨도 주고 사람이 우리를 슬프게도 합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은 대부분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탄핵된 박근혜 보다는 마약으로 교도소에 있는 우리 아들이 나를 더 불행하게 합니다.

소포클레스의 말대로 ‘이 세상에는 이상한 것이 정말 많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이상한 것이 사람입니다.

‘우리는 50년을 함께 살아온 우리의 배우자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식은 우리가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니까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우리 곁에 앉아있는 <인문학의 친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지난 시간엔 주로 서구적 입장에서 보는 ‘사람’을 살펴보았습니다만 오늘은 동양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는 사람에 대한 이해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추천 도서는 신영복선생이 성공회 신학대학 인문학 교실에서 한 강의를 책으로 출판한 ‘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돌베개 2015)와 그 분의 다른 책인 ‘강의 – 나의 고전 독법’(돌베개 2004)과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돌베개 1998)입니다.

♦ 들어가는 말 – 우리가 무엇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데는 어떤 ‘인식의 틀’, ‘인식의 도구’(The Frame of Knowledge, The Structure of Understanding, The Tool of Cognition)가 있게 마련 입니다.

그런데 서양, 혹은 서양 사람들은 이 인식의 틀과 도구를 주로 ‘문사철文史哲’ –문학과 역사와 철학- 로 여겨왔습니다. 사람들이 남겨놓은 문학작품들, 역사적 흔적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담은 철학을 추적해 보면 그들의 사상과 인식의 틀이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을 흔히 ‘이성적 인식 방법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동양, 혹은 동양인들은 이 인식의 방법을 시서화‘詩書畵’ –시와 글씨와 그림- 이라고 여겼습니다. 시와 글씨와 그림이라고 했습니다만 이는 시와 그림과 소리를 뜻하는 겁니다.

즉 동양인들은 시를 짖고 그림을 그리고 (대부분의 동양화를 보면 시에는 그림이 있고 그림에는 시가 깃들입니다) ‘소리’를 하는 곳에 인간의 온갖 흔적들이 묻어난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감성적 인식 구조’를 여실히 보여 줍니다.

동양에서는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는 요소를 머리라고 보지않고 가슴이라고 본 것입니다. 동양인들은 말 잘하고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 보다는 마음씨 곱고 인정이 깊고 생각이 바른 사람을 보다 더 좋은 사람으로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문사철文史哲에서 시서화詩書畵로 가야한다’, ‘서양에서 동양으로 가야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동양인들이 지닌 사고의 틀이요, 인식의 구조입니다.

*** 다음 글은 ‘동양적 사람 이해’ 혹은 ‘동양적 사람 이해의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나는 사람일까?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6

제 5강 – 3 : 인문학의 주제 – 사람(Saram) (1)

♦ 다음은 오늘의 주교재인 ‘사람, 장소, 환대’를 중심으로 서구 인문학에서 보는 ‘사람됨’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김현경에 의하면 아무 것도 걸치지 아니한 순수한 몸은 사람이 아닙니다. ‘몸’이 사람으로 인식 되려면 의복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문화적 기호들을 입어야만 합니다. 문화가 제공하는 다양한 소품과 도구로 몸을 변형하여 전시 가능하게 만들어야만 사람이 됩니다. 공공 장소에서 나체를 금지하는 것은 순수한 몸 그 자체는 언제나 불완전한 사람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2) ‘인간’은 태어난 후 일정한 ‘사회적 성원권’ (Social Membership)을 얻음으로 드디어 ‘사람’이 됩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연적 ‘사실’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회적 인정을 받지 않아도 ‘인간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사람이 됩니다.

‘사람’이란 일종의 ‘자격’이고 ‘인정’이고 ‘승인’입니다. 사람은 ‘사회적 성원권’을 통해서만 ‘사람’이 됩니다. 이것을 그는 ‘사회적 환대’(Social Hospitality)로 보았습니다. 사회적 환대를 받지못한 인간은 아직 사람으로써 인정이 안되었다고 봅니다.

(3) 김현경은 전통적으로 ‘인간’이기는 하지만 ‘사람’으로는 쳐주지 않았던 group, 즉 사회적 환대를 받지 못해온 집단을 5개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는 태아, 둘째는 노예, 셋째는 여성, 넷째는 군인, 다섯째는 사형수 입니다.

(4) 애기는 태어나는 순간 ‘인간’이긴 하지만 아직 ‘사람’은 아닙니다. 태아가 ‘사람’이 되는 데는 그의 부모와 가정이 기뻐하고 축하하고 법적, 행정적 절차를 통하여 사람들이 사는 사회 속으로 들어와야 ‘사람’이 됩니다. ‘유산’이 된 애기나 강간에 의해서 태어난 애기를 낙태 시키고 일정한 애도의 의례를 행하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 입니다.

태어난 애기는 이름을 지어주고 이름을 불러주고 사회가 그를 인정하고 환대함으로 ‘사람’이 됩니다. 신생아는 태어나서 사회적 환대라는 통과의례를 거침으로 사회 속으로 들어옵니다. 식구들과 친구들의 방문과 축하, 감사의 기도, 세례식, 백일잔치 같은 공동체의 의식을 통해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만약 그 이전에 죽으면 태아는 사산을 한 것 과 같이 여겼습니다. 아기에게 아직 이름도 지어주지 않고 여전히 배내옷을 입히는 동안은 아기가 세상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문지방 단계’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물론 오늘날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아기가 태어나는 즉시 국가가 개입합니다. 출생 자체를 통과의례로 보고 사람으로 승인하고 사람으로 보호를 받습니다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5) 전통 사회에서는 노예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노예는 태어날 때나 죽을 때나 일체 아무런 통과의례를 치루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노예에게는 얼굴(체면 Face), 명예(Honor), 이름(Family Name은 물론이고 개인의 이름도), 권리, 의무가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었기 때문 입니다. 물론 사고 팔 수 있었고 같은 노예 사이에서 애기를 낳아도 그 애기의 소유권은 주인에게 있었습니다. 노예는 잘못해도 피고가 되지 않았고 주인이 모든 민사상 책임을 집니다. 집에서 기르는 개가 잘못했다고해서 개를 재판에 걸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였습니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Orlando Patterson, Slavery and Social Death, Harvard Uni. Press, 1982)

(6) 유교적 전통 사회에서는 여자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말은 여인을 집단 사회에서 제명 처분했다는 뜻 입니다. 여자는 시집에서 쫓겨나도 다시 친정으로 돌아 갈 수 없었고 일체의 종교의식(제사)에 참석 할 수 없었고 재산을 물려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여자는 친정이나 시집, 그 어는 쪽으로 부터도 가정의  성원권(Family Membership)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름도 족보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시집살이는 종 살이’였고 여자는 애 낳는 기계로 여겼습니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대 히브리인들도 여자는 남자가 마음대로 처치 할 수 있는 물건 중 하나였고(아브라함과 사라 등) 로마 시대 이후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건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

(7) 과거는 두 말할 것도 없고 현대전에서도 군인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입니다. 적군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나 범죄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으로써의 군인이 한 행동이 아니라 ‘국가라는 기관’이 한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군인은 전투 중의 살인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법적인 추궁을 당하지 않습니다. 군인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파괴하는 기구이기 때문입니다. (1914년 크리스마스 때 서부전선에서 있었던 자발적 휴전은 그 후 어떻게 처리 되었나요?)

뒷골목의 깡패들에게는 싸워도 명예나 규칙이나 위신이 있습니다만 군인에게는 인격, 명예, 위신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으로 치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초기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백인들이 대표자의 맞대결도 없이 무조건 대포를 쏘고 무차별적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것은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라고 보았습니다.)

(8) 죤 로크 이후 사형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국가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폐기처분 한다고 여겼습니다. 사형수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먼저 ‘너는 사람이 아니다. 너는 이미 사람의 자격이 박탈되었다’는 점을 확인 시키고 난 후 국가는 국가의 이름으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한 때는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쓸모없고 유해한 물건이 되어버린 물건을 폐기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국가가 살인을 하면 안되지! 국가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의 자격을 상실한 물건을 폐기처분 할 뿐이다’ –이것이 사형수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처형할수 있는 근거였습니다.

(9) 모든 사람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사회적 성원권을 갖고 그가 속한 사회로부터 환대를 받을 때 마침내 ‘사람’이 됩니다. 그 이 전에는 ‘인간’의 모습을 지닌 존재이기는 하지만 아직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로부터 환대를 받음으로 ‘사람이 되어가는 것’ 이라고 보는 겁니다.

(10)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사람’으로 인정 받으려고 노력하고 투쟁을 한다고 해서 누구나 쉽게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간들은 다른 사람을 ‘사람’으로 받아드리지 않으려는 존재이고 먼저 자신이 사람으로 받아드려진 집단 속에 다른 인간을 받아드려 자신과 동일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을 원치 않는 존재이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인간은 인간을 배제 시키고 거부하고 자기와 다른 존재를 구별하고 빗금을 긋고 차별화 하려고 합니다.

먼저 어떤 club의 member가 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과 똑같이 member로 가입하려고 하면 여러가지 규정과 제도를 만들어서 제한 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Orlando Patterson은 이런 인간의 심리와 역사를 ‘타이모크라시’(Timocracy)라고 했습니다. 이는 ‘노예제도와 명예에 집착하는 문화’를 말 합니다. 여기에는 남보다 우월해 지려는 욕망, 권위를 앞세우고 그 권위를 행사하려는 욕망, 권력에 대한 욕망, 군인다움을 높이고 군인정신을 높이 사는 태도, 물질에 대한 집착 같은 것들이 포함 됩니다.

패터슨에 의하면 행복이란 성원권이고 존재란 곧 소속이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란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즉 사람으로써의 성원권을 갖고 사람들 속에 끼기 위해서는 치열한 투쟁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나도 끼워주십시오. 나도 당신들과 같이 먹고 자고 놀고 살고 싶습니다. 우리도 당신들 집단의 member로 받아주십시오. 나도 제발 사람으로 쳐 주십시오’라고 부르짖는 성원권 투쟁이 바로 인권운동이요, 사람으로 인정 받기 위한 투쟁이라고 보는 겁니다.

(11)  한편 법률적으로 ‘사회적 성원권’(Social Membership)을 갖고 그 사회로부터 외형적 환대를 받는다고 해서 진정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그 사회 속에 소속이 되느냐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예컨데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절차를 밟아서 호주에 이민을 왔습니다. 호주에 도착한 후 당당하게 일도하고 세금도 내고 이 나라의 법규도 지킵니다. 공공의 장소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환대를 받습니다. 식당에 갔을 때는 영주권이 있느냐,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국적은 어디냐 하는 것을 묻지는 않습니다. 이 경우의 환대는 사회적 성원권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사회에서 우리의 주장과 권리를 당당하게 행사하고 어디에서든지 차별을 받지 않고 사람으로써의 기본적 권리를 행사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인간성 속에는 진정 지구의 종말이 와도 극복해 낼 수 없는 편견과 편당심과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 입니다.

트럼프나 폴린 핸슨은 도처에 있고 은근히 그들을 편들어주고 지지하는 이들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흑인들이나 아시아 이민자들이나 히스패니아 계통의 이민자들의 경우, 진정으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가?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21세기가 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종교적으로 ‘불가촉 천민’의 문제를 지닌 인도의 인종 차별이나 일본이 계속하는 재일 조선인에 대한 차별 정책이나 홈랜드를 잃어버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원주민 문제나 세계도처에서 진행되는 여성의 차별 문제등은 실로 사람이란 무엇이고 ‘사람이 된다’ 거나 ‘사람으로 대접을 받는’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여실히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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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으로 태어났고 또 인간의 몸과 얼굴을 지니기는 했지만 아직도 ‘사람’으로 여겨지지도 않고 ‘사람’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봅시다. 세계적으로든 아니면 우리 주변에서든 각자가 돌아가면서 그런 사람들을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그리고 이렇듯 사람으로 인정 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우리와 내가 할 수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를 토론해 봅시다.

(2) 나(우리)는 호주라고하는 다문화 사회(이민자의 땅)에서 사람으로 환대받지 못한 경험있는지? 어떤 경우, 왜 그랬는지? 인문학을 공부하는 우리들로써 이를 개선해 나갈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의견을 나누어 봅시다.

아니다!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5

제 5강 – 2 : 인문학의 주제 – 사람(Saram) (1)

♦ ‘사람’이라는 개념의 의미 – 사람을 부르는 말은 나라마다 다릅니다.

우리 말의 ‘사람’이라는 말은 우리 고유의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영어로도 Saram이라고 표기했습니다. ‘사람’은 ‘삶’과 ‘앎’의 합성어라는 것이 지금 까지의 지배적인 주장입니다. ‘사람’이란 자신의 ‘삶’을 인식하고 그 삶의 의미를 ‘아는’ 혹은 ‘알아가는’ 존재라고 봅니다.

사람은 자신의 출생과 성장, 자신의 목표와 죽음을 알고 자신은 그런 과정을 통과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데 그의 사람됨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도 흔하게 쓰기는 하지만 일본 사람들이 먼저 사용한 ‘人間’(닝겐)이란 개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말합니다. 여기에는 일찍부터 그들의 집단의식, 혹은 집단적 이해가 깔려있다고 보겠습니다. 인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상호의존적 존재라는 생각입니다.

그런가하면 중국인들은 사람을 ‘인류人類’라는 개념으로 씁니다. 이는 대륙적 성격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사람을 하나나 둘 혹은 몇몇 사이의 관계 개념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이며 우주적인 포괄적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땅위에 존재하는 온갖 유인원類人猿 모두를 사람의 범주에 포함시킵니다.

한국어 – 사람  / 라틴어 – Homo  / 영어 – Human, Human race 혹은 Mankind  / 독일어 – Mensch  / 중국어 – 人類  / 일본어 – 人間  / 히브리어 – Adam / 그리스어 – androphos  / 학명은 라틴어로 표기합니다. – homo sapiens

♦ 라틴어 homo를 머리로 하는 여러가지 인간의 모습들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homo sapiens – 생각하는 인간 , 혹은 지혜로운 인간 / homo habilis – 도구를 쓰는 인간 / homo erectus – 직립하는 인간 / homo sexual – 동성애자 / homo ludens – 놀이의 인간 / homo movens – 이동하는 인간 / homo demens –광기의 인간 / homo academicus –학문하는 인간 / homo aestheticus – 심미적 인간 / homo artex – 예술적 인간 / homo biblos – 기록하는 인간 / homo consumes – 소비하는 인간 / homo economicus – 경제적 인간 / homo culturalis – 문화적 인간 / homo duplex – 이중적 인간 / homo ecologicus –생태적 인간 / homo viator –떠도는 인간 / homo technicus –기술적 인간 / homo superior – 초인, 영웅적 인간 / homo symbious – 더불어 사는 인간  / homo solus – 외로운 인간 / homo socies – 사회적 인간 / homo sexcus  – 섹스하는 인간, 몸으로 교감하는 인간 / homo sacer – 성스런 인간, 혹은 벌거벗은 인간 / homo religious –종교적 인간 / homo resistance – 저항하는 인간 / homo politicus – 정치적 인간 / homo nomad – 유목민, 떠돌아 다니는 인간 / homo knowledgian – 신지식인 / homo hundred – 백세까지 사는 인간 등등이 있습니다.

♦ 과거에는 사람과 다른 동물들 사이를 구별해 주는 것이라고 여겼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례들도 퍽 많습니다.

(1) 사람만이 사회적 동물이다. – 아니다. 개미나 꿀벌들도 공동체를 형성하고 질서와 상하계층과 역할분담을 통하여 그들 사회를 조직화하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이들도 경우에 따라 집단 속에서 ‘반란이나 ‘혁명’’을 일으키기도 한다.

(2) 사람만이 문화를 형성하고 정치적 행동을 한다. – 아니다. 돌고래나 침팬지나 까마귀들이나 다른 포유류들도 그들 세계에서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고 같은 종들 사이에서는 동맹을 맺기도 하고 다른 집단들과 전쟁을 한다. 그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소수의 리더를 형성하여 다수의 개체를 다스리며 통치하는 국가나 정부체제를 가지고있다. 오히려 이들은 인간들 보다 훨씬 더 민주적이다.

(3) 사람만이 약육강식의 이론에 사로잡혀있다. – 아니다. 약육강식의 논리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타의 동물계에도 존재한다. 특정 국가나 엘리트들이 다른 나라나 다른 사람들을 억누루고 지배하듯이 동물들도 개체 사이나 혹은 다른 개체에 대해서 똑같이 침략하고 정복하며 지배하고 억압하는 형태와 체제를 가지고 있다.

(4) 자유, 평화, 사랑, 신뢰 같은 가치는 사람만이 추구하는 것이다. – 아니다. 다른 동물들도 포위, 체포, 죽음 앞에서는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고 자유로운 삶을 갈구한다. 평화를 사랑하고 종족을 보존하고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를 지키려는 본능과 의도적 노력을 기울인다. 이를 위하여 집단 사이의 단결을 유지하고 외부의 적을 막아내기도 한다. 이 안에는 자손을 번식 시키고 후손을 남기려는 본능도 포함된다. 우리는 이들 동물의 세계가 오히려 인간 세계보다 훨씬 더 규율적이고 도덕적인 면들을 보여 줌으로 ‘짐승 보다도 못한 인간과 인간 세계’를 목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5) 동물들에게는 종교가 없다. – 아니다. 심리학자 스키너의 연구에 의하면 비둘기를 포함한 몇몇 동물들도 인간들과 유사한 종교적 제의행위를 한다.

(6) 자살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 아니다.  돌고래도 자살하는 것이 종종 보고된다. 자식을 잃은 곰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벽에다 머리를 찧어 자살을 한 사건도 보고 되었다.

사람 만나기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4 

제 5강 – 1 : 인문학의 주제 – 사람(Saram) (1)

♦ 이제 인문학의 핵심 주제인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topic을 가지고 함께 생각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첫째는 서구 인문학에서 보는 인간문제를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두번째로는 동양 인문학에서 보는 인간 문제를 이야기해 보고 마지막 세번째에는 종합적으로 ‘인간의 품격’( The Road to Character, David Brooks)을 읽으면서 ‘균형잡힌 인간형’에 대한 생각을 나누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번째 주제를 취급함에 있어서 추가로 추천해 드리는 책은 김현경지음, ‘사람 장소 환대’ 입니다.(문학과 지성, 2015년) 먼저 서론적인 이야기를 드린 후, 주로 이 책을 중심으로 현대 서구 인문학이 관심하는 ‘사람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들어가는 말 – 서양의 정신사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입장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하나는 유대적 전통과 사고를 대변하는 ‘헤브라이즘’(Hebraism)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적 전통과 사고를 반영하는 ‘헬레니즘’(Hellenism)입니다. 헤브라이즘은 종교적, 심미적, 신앙적이고 헬레니즘은 이론적, 합리적, 이성적입니다. 신과 인간, 신앙과 이성을 제각기 앞세우려고 하는 이 두 가지 사상은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타협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생명의 기원과 인간의 의미에 대해서도 이 두 사상은 서로 다른 입장을 갖습니다. 헤브라이즘에서는 생명은 창조된 것이고 따라서 인간이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고 주장 합니다.

유대교와 그 뒤를 이어받은 기독교의 성경과 이슬람교의 코란은 물론이고 히브리적 세계관에 기초한 고대인들 역시 대부분 모든 생명은 조물주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들은 자연을 관찰 하면서 먼지나 흙 같은 데서 벌레들이 기어 나오고 작은 미생물들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면서 생명의 창조설이 아니라 ‘자연 발생설’을 믿게 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이론화하였고 그 후 뷔퐁(Buffon 1707-1788 확율과 통계 이론)과 라마르크(Jean Lamarck 1744-1829 용불용설)를 거쳐 다윈(C. Darwin 1809-1882 진화론)에 이르러 이 생명의 자연 발생설은 진화론으로 발전, 확립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이론의 우열을 비교 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주로 인문학적 입장에서 헬레니즘의 주장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 다음 10개의 예문을 읽으면서 ‘사람을 설명하는 여러가지 방법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 나는 정치하는 ‘사람’과는 가까이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 그는 전라도 ‘사람’입니다. 그는 안동 ‘사람’입니다. 그는 충청도 ‘사람’입니다.

– 일을 시키려고해도 어디 ‘사람’이 있어야지요?

– 돈 좀 있다고 해서 ‘사람’을 무시하지 마십시요.

– 야 이 ‘사람’아 우리가 어디 남이가?

– ‘사람’ 팔자 시간 문제다

–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같아야 사람이지

– ‘사람’과 산은 멀리서 보아야 아름답고 좋게 보입니다.

–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났나?

♦ 이제 인류의 진화 모델 중 몇가지만 살펴보시겠습니다.

(1) 지금의 인간과 어느 정도 유사한 형태의 유인원(類人猿)의 출현은 기원 전 약 500-700만년전 아프리카로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봅니다.

(2) 그 다음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의 출현인데 지금부터 약 300-400만년 전 이라고 봅니다.

(3) 이어서 발견된 화석을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lis,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라고 하는데 이는 약 100-200만년 전입니다.

(4) 이를 전후하여 출현한 것이 ‘호모 이렉투스’(Homo erectus)인데, 두 발로 서서 걷는 인간, 즉 직립원인(直立猿人)입니다. 이때는 약 100만년 전입니다.

(5) 현재의 인간과 가장 유사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명명된 화석은 인간의 출현을 약 20만년 전이라고 추측 합니다. 화석 연구에서는 이들을 ‘네안데르탈인’ 이라고 부릅니다.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돌이나 나무를 가지고 사냥을 위한 도구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6) ‘크로마농인’이라고 이름하는 ‘신인간’의 출현은 지금 부터 약 3-4만 년 전이라고 봅니다. 이들이 현재의 인간과 비슷한 두개골과 골격 구조를 지녔다고 봅니다.

♦ 사람에 대한 일반적 이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람은 포유류과에 소속된 영장류입니다. 포유류(哺乳類)란 Mammalia에 속하는 동물로써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동물을 말합니다. 암컷에게는 젖이 나오는 유선이 있고 대부분 몸에는 털이나 가시나 비늘이 있습니다. 영장류(靈長類, Primates)란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닌 존재라는 뜻으로 주로 인간을 가르킵니다.

영장류의 특징은 가슴에는 보통 한쌍의 유방이 있고 사지는 물건을 잡기에 알맞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각기 5개씩 있으며 손톱과 발톱이 있습니다. 눈은 앞을 바라보고 후각은 발달되지 않았고 뇌와 이빨이 발달되어있으며 종류에 따라서는 꼬리가 있고, 비교적 많지 않은 새끼를 낳고, 새끼를 키우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동물입니다.

(2) 두 발로 일어서서 움직이며 일하는 직립원인(直立猿人) 혹은 척추동물(脊椎動物)입니다. 따라서 손이 발달되었고 손으로 여러가지 일을 합니다.

(3) 도구를 만들어서 사용할 줄 아는 공작인(工作人)입니다.

(4) 언어를 만들고 그 언어를 사용하여 의사를 소통하는 동물 입니다.

(5) 생각을 하고 그 생각에 따라 말하거나 행동하는 ‘생각하는 존재’요 ‘이성적 동물’입니다.-

(6) 무리를 지어서 이동하거나 집단을 형성하여 삶을 유지하는 공동체적 존재요 사회적 동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