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부활에

유난히 더디 오는 봄입니다. 올핸 봄꽃 보다 먼저 부활절을 맞습니다. 부활 이야기의 주인공은 예수입니다. 예수와 부활과 봄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함께 생각해 보는 말들입니다.

하여 성서를 펴봅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 마가복음 1장 14-15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 마가복음 16장 6 – 7

예수 이야기가 시작된 첫 장소가 갈릴리였고, 이야기를 맺는 장소 역시 갈릴리라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물위를 걷고, 거친 풍랑을 잠재우고, 귀신을 내쫓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의 숱한 가적과 치유의 역사를 만들어 냈던 곳이 바로 갈릴리였다고 기록자 마가는 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못박혀 죽고, 무덤에 머물다 부활한 예수는 다시 갈릴리로 갔다고 기록한 것도 마가입니다.

갈릴리 – 그 땅에서 예수는 나병환자를 고치고, 중풍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고, 귀신들린 자의 정신을 바르게 하고, 눈먼 자를 보게 하고, 혈루증 걸린 여인을 치유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예수는 병 고침을 받은 이들을 향해 ‘집으로 돌아가라’라고 명령했다고 마가는 이야기합니다.

이런 예수의 명령을 <가족(사회)에게로 돌아가라는 귀환명령>이라고 규정한 사람은 일본 신학자 아라이 사사구(荒井献, 그의 책 ‘예수의 행태’에서) 입니다.

예수 당시 병든 자들은 죄인이요, 소외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죄가 있어 죄인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외로운 처지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죄 없는 죄인이요, 원치 않은 소외였기에 한맺힌 이들이었습니다. 예수의 귀환명령은 바로 한 맺힌 이들에게 한을 풀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예수의 명령에 따라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성서는 귀환 이후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지 않습니다. 전해지는 당시의 관습이나 체제로 미루어 귀환 이후 그들의 삶은 여전히 곤고 하였을 것입니다. 가족과 이웃들은 여전히 그들을 비정상적이었던 사람으로 취급 하였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을 생각해 보면 쉽게 답이 나옵니다. 예수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고 가족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지만, 여인이 돌아간 곳에는 여전히 손에 돌멩이를 들고 아무 때나 그들이 맘만 먹으면 던질 수 있는 이들이 넘쳐 났을 것입니다.

바로 부활한 예수가 먼저 가 있는 곳, 갈릴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2018년 오늘, 예수가 먼저 와 있는 곳 내가 발 딛고 사는 여기의 모습입니다.

소외된 이들, 한 맺힌 이들이 사람 본래의 모습으로 살기 위해 애쓰는 현장에서 오늘도 함께한다는 예수의 선언 – 바로 부활입니다.

이 봄에 필라델피아  Schuylkill 강변을 함께 걷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예수가 먼저 와 걷고 있던 갈릴리를 떠올려 보는 까닭 역시 바로 그 부활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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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에

만우절 이자 부활절.

뭔가 어울리지 않는 듯도 하고, 어쩜 참 잘 어울리는 조합 같기도 하다. 부활, 누군가에겐 치열한 믿음일 터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한갓 농담일 뿐.

물론 내겐 삶의 마지막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리 무거운 것은 아니다. 일 테면 어느 도(道)트인 신앙인의 절절한 기도문 가운데 탁하고 내 가슴을 치던 고백이 그렇다.

“아내에 대해 늘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지게 해 주시고, 혹 상처 입하는 말을 하게 될 때는 저의 혀를 묶어 주시옵소서.”

부활이란 그렇게 늘 치열하지만 농담처럼 가까운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