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 – 4, 변화에

변화는 늘 놀라운 것이지만, 내가 적응하지 못할 때는 그저 불편함 뿐이다. 그런 불편함이 자꾸 쌓인다는 것은 내가 늙어간다는 표징일게다. 하여 애를 쓰는 편이다. 변화로 인한 불편함을 최소화 하려는 노력을 최대화 시키는 애씀인데, 그런 모습에 스스로 ‘쯔쯔쯔’ 혀 찰 때가 자꾸 늘어간다. 그럴 때면 스스로 위로하는 한마디, ‘내 노력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변화가 너무 빨라서…’

서울은 내가 쉽게 적응하기엔 지나치게 많이 변했다. 십 삼 년 만에 나섰던 나들이였는데, 그 변화의 폭은 내 가늠 이상이어서 불편함 보다 먼저 다가선 것은 놀라움이었다.

무엇보다 먼저 다가선 놀라움은 사람들이 건네는 말소리들 크기와 억양이 매우 작고 부드러워진 변화에서 왔다. 지하철이나 버스, 식당이나 거리에서 사람들의 말소리는 분명 내 기억 속 서울사람들의 그것이 아니었다. 이웃에 대한 배려에서 온 듯한 이런 변화는 실로 큰 놀라움이었다. 솔직히 뉴스 속에서 만났던 서울소식들은 매우 거칠게 소리 높은 소음처럼 다가오곤 했었는데, 실제 사람들의 말소리들은 부드럽고 온유했다. 그게 참 좋았다.

지하철 친절한 안내 방송도 좋았는데, ‘발빠짐 주의’나 ‘나빠짐 주의’, ‘하차입니다.’라는 경고 등은 외국어처럼 매우 낯설었다. (불편함, 놀라움이라는 말을 쓰다보니 생각난…)

그 보다 큰 놀라움을 느낀 것은 어디를 가나 잘 꾸며진 조경(造景)을 바라보면서 였다. 얼핏 쉽게 잔상으로 남게 되는 풍경들, 일테면 아파트 공화국이니 콘크리트 공화국이니 하는 말들을 잘 치장해 주는 놀라운 변화는 내겐 실로 경이롭게 다가왔다. 놀랍게 변한 종로통 뒷골목 직장인들의 점심시간 풍경과 그들의 여유로운 걸음걸이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잘 꾸민 조경 때문이었다. 돌아와 내 가게 손님들에게 자랑할 요량으로  조경과 자연 사진들을 제법 많이 찍었다.  

또 다른 놀라움은 딱 두 시간 오분이 걸린 서울과 속초 간의 거리였다. 아주 오래 전 고등학교 친구들하고 북평해수욕장에서 놀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때 청량리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밤새워 거의 열시간 넘게 달려 닿던 곳이었다. 터널 예순 세 개로 이루워 졌다는 서울 속초간 도로를 달린 일은 내게 완벽한 시간여행 경험이었다. 아내와 단 둘이 맞았던 속도 앞바다 해돋이 풍경은 우리들의 내일로 품고.

그 동창들을 거의 오십 년 만에 만났다. 졸업사진을 떠올리며 옛 이야기를 나눈 몇 몇은 졸업 후 처음이었으니 만 오십 이년이다. 동창회를 이끄는 친구가 말하길, 졸업 동기들 중 1/4이 먼저 이 세상길 떳고, 1/4 정도는 연락 두절, 1/4 정도는 연락은 닿지만 모임에는 나오지 않고, 나머지 1/4이 이런저런 모임으로 연과 끈을 맺고 늦은 시간들을 함께 걷고 있단다.

실로 오십 년만의 변화인데, 또 다른 놀라움 하나는 바로 모두가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함께 한 동창들 중 몇몇은 그 옛날 북평 해수욕장에서 같이 놀았던 친구들이었는데, 그들은 물론 다른 친구들도 떠들고 즐기는 동안 변하지 않은 옛모습 그대로 둘러 앉았었다.

그랬다. 해 아래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만, 분명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으련다. 바로 나다. 내 마음에 따라.

느긋하게 맞는 추수감사절 아침이다. 해마다 Thanksgiving, 이 맘 때면 읊조려보는 시 한 편이 있다. 언제부터 인지 잘 모르겠으나, 이젠 철들 때도 되지 않았나는 생각이 들었던 내 나이 환갑 전후일게다. Shel Silverstein이 읊은 관점(Point Of View)의 첫째 연이다.

<추수감사절 만찬은 슬프고 고맙지 않다/ 성탄절 만찬은 어둡고 슬프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칠면조의 관점으로 만찬 식탁을 바라본다면.

Thanksgiving dinner’s sad and thankless/ Christmas dinner’s dark and blue/ When you stop and try to see it/ From the turkey’s point of view.>

2013년 추수감사절 아침, 돌아볼수록 그저 감사한 일 하나 꼽는다. 살아오며 보아 온 숱한 변화들 또는 기억조차 못하는 나의 변화들 나아가 옹고집으로 변치 않는 모습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관점의 잣대가 비록 어설프고 부끄러움 투성이지만 예수라는 잣대, 성서라는 잣대라는 믿음을 잊지 않았다는 감사이다.

큰고개(대현) 언덕 옛 친구들이 일깨워 준 감사이다.

변화에

십 수 년 동안 한국관련 뉴스 하고는 거의 담 쌓고 살던 때가 있었다. 내가 의도했던 바가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물리적으로 한국 소식을 접할 기회가 정말 적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리 살 수 밖에 없던 때였다. 컴퓨터니 인터넷이니 하는 물건이나 기능들이 아직 나와는 낯 선 때였고, 한국 소식을 들으려면 필라델피아나 뉴욕 또는 워싱턴 나들이를 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전두환 시대가 끝날 무렵부터 김대중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나실 즈음까지의 한국 소식은 언제나 내겐 낯설다.

그러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이르러 거의 실시간으로 한국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 무렵 내게 다가온 한국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박정희가 피살되어 그의 장례가 있던 날, 광화문 일대를 메우고 통곡하던 국민들이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세우는 시민이 되어 내게 다가온 세상은 그야말로 경이로운 새 세상이었다.

세상이 워낙 빠르게 변하다 보니 이젠 내가 서울에 사는 것인지, 미국 촌구석에 사는 것인지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내 손 전화 뉴스 알림 기능은 실시간으로 내가 사는 동네 소식부터 우리 주 소식과  미국내 소식 나아가 한국 소식들을 속보로 알려주는 세상이 되었다.

그렇게 내가 실시간으로 소식을 접하기 시작한  그 무렵부터 그렇게 빠르게 변했던 한국의 변화는 더디거나 뒷걸음 치기 일수였다.

빠른 소식으로 변화는 그렇게 너무나 더디어졌다.

오늘 그 더딘 변화에 대한 답답함 끝에서 떠오른 생각 하나.

변화는 언제나 답답한 걸음으로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지만, 그 변화를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은 나에게 달린 것이라는.

내가 한국 소식에 한참 민감했던 십 수 년 전 어느 날,  우연찮게 잠시 마주쳐 인사 나누었던 추미애라는 사람은 나처럼 작고 연약했지만, 그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음에도 겸손하고 당당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가 웃음으로 새로운 변화가 이는 한국 소식을 기다리며.

오늘 따라 하늘에 구름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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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부수는 건 순식간이네!’ 손님 한 분이 가게에 들어서며 내게 던진 말이다. 이즈음 내 가게가 있는 상가의 반을 부수는 공사가 진행 중인데 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원래 내 가게는 지금 부수고 있는 상가 쪽에 있었다. 그 쪽에서 30년을 있다가 올 봄에 맞은 편에 상가가 살아남는 쪽으로 이전하였다. 내가 30년 정(情)을 붙였던 곳도 다음 주면 더는 볼 수 없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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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 건물주는 상가의 반을 헐고 그 곳에 아파트를 짓기로 하고 공사에 돌입한 것이다. 건물주의 청사진에 따르면 아파트가 완공되면 내 가게는 그야말로 동네 최고의 명당이 될 것이라고 했다. 물론 내가 그의 말에 귀 기울였을 만큼 순진하거나 어리지 않았으므로 그저 그의 청사진이었을 뿐이었다.

당장의 내 고민은 공사로 인한 내 손님들이 불편을 감내할 수 있는 최대치와 건물주의 청사진을 이루는 시간 사이에서 내가 참아내야만 하는 어려움을 가늠하는 일이다. 그 간극은 어쩌면 내가 상상하는 이상일수도 있다. 그래 떨칠 수 없는 불안이 있기는 하지만, 믿는 것은 내 경험과 나이다. ‘내가 여기까지 온 세월이 얼마인데….’

일을 마치고 돌아와 상가 건물이 부숴지는 모습을 담은 모습을 보다 문득 떠 올린 글 하나. 단재 신채호선생이 쓰신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이다.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그러나 파괴만 하려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하려고 파괴하는 것이니, 만일 건설할 줄을 모르면 파괴할 줄도 모를 지며, 파괴할 줄을 모르면 건설할 줄도 모를지니라.   – 중략-

다시 말하자면 <고유적 조선의> <자유적 조선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이족통치의> <약탈제도의> <사회적 불평등의> <노예적 문화사상의> 현상을 타파함이니라. 그런즉 파괴적 정신이 곧 건설적 주장이라. 나아가면 파괴의 <칼>이 되고 들어오면 건설의 <깃발>이 될지니, 파괴할 기백은 없고 건설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생각만 있다 하면 5백년을 경과하여도 혁명의 꿈도 꾸어보지 못할지니라.>

내 나이 스물 적에 내 가슴을 마구 뛰게 했던 단재 선생의 외침이었다.

세월 흘러 역사 속 모든 혁명이란 순간적 변혁일 뿐 늘 다시 돌아간다는 생각이 굳어지고 혁명보다는 개혁을, 아니 어려운 개혁보다는 서서히 감히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변화가 좋은 것이라는 노회함이 어느새 익어버린 나이에 단재 선생의 선언이 떠오른 것은 아마도 이즈음 내가 한국 뉴스에 너무 몰입해 있기 때문일게다.

어쩌겠나? 이 땅에서 산 날이 한국에서 산 날보다 많을지라도 여전히 한국어로 사고하는 한 한국인인 것을.

이즈음 한국뉴스를 보면서 곰곰이 생각할수록 한국과 한국인들이 자랑스럽다.

역사 이래 어느 공동체도 감히 이루지 못한,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아주 서서히 혁명적 변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단재 선생께서 꿈꾸었던 혁명을 이루되 결코 혁명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변화를 이루어내는 모습이 그려 지기 때문이다.

하여 여의도에 모이는 시민들에게, 나와 같은 세대로 흔치 않게 참 떳떳한 삶을 이어온 듯한 문재인 대통령과 이해찬 대표에게,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변화가 끝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응원을 보내며…

오늘 내 가게 손님 한 분께 받은 작은 화분과 분에 넘치는 찬사보다 수 천 수 만 배 큰  박수가 여의도에 모이는 시민들과 문대통령과 그들과 꿈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들리는 그 날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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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에

1.

얼마 전 우리 마을 한인회 봉사하는 이들에게서 부탁 메일을 받았다. 그들의 부탁이란 한인회 회칙을 새로 정비해 개정하려 하는데 검토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인회 일을 하는 이들이 대부분 영어가 주언어인 관계로 영문본을 먼저 만들었고, 그를 번역해  한글본을 만들려고 하는데 특히 그 부분에 대한 검토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짧은 시간 세상 참 많이 바뀌었다. 이십 여 년 전 내가 한인회 봉사를 할 때 가장 큰 일 가운데 하나는 한글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이젠 그게 바뀐 것이다. 그렇게 한인 사회가 바뀐 것일 게다. 그 바뀜이 참 좋다.

나는 그 부탁에 감사하다는 말을 붙여 거의 내 의견을 덧붙이지 않은 응답으로 대신했다. 솔직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기까지 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대견하다고 말할 만큼 늙지는 않았고, 그들과 함께 할 만큼 젊지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이란 박수 치며 말없이 쫓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2.

가게 이전이 코 앞에 다가오자 노 부모님들이 목사님 모시고 개업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신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거창하게 기복(祈福) 의식에 대한 거부를 내세울 일도 아니었다. 남들은 은퇴를 하는 나이에 가게 옮긴다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일이 남사스럽기도 하거니와 솔직히 의식에 대한 내 심한 거부증도 한 몫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인네들에 대한 미안함은 끝내 가시질 않았다.

그러다 손님 몇 몇이 농으로 우리 부부에게 던진 말, ‘새 장소로 가는데 잔치 안 해?라는 말’이 꽂혀 진담으로 받았다.

하여 가게 손님들 몇 몇에게 조촐히 신장개업 잔치 자리를 열면 오겠느냐고 물었더니  좋다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한국음식 몇 가지 차려 놓고 단골 손님들 몇 십 명 초대해 잔치를 하겠노라는 말에 노 부모님들 얼굴 환해 지셨다.

변화가 두루 모든 이들에게 맞는 일이란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