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선생과 배신자

고 백남기(白南基, 1947. 10. 8  – 2016. 9. 25)선생에 대한 소식들을 듣고 보는 심정은 매우 아리고 쓰리고 아픕니다.

크고 거창할 것도 없이 자신이 사는 삶의 자리에  ‘생명과 평화’를 심고 가꾸는 일에 충실했던 사람, 일컬어 농민이었던 백남기선생은 여기 이민(移民)의 땅에서도 종종 만날 수 있는 이웃의 모습이었습니다.

쌀값 몇 만원에 대한 공약이 누군가에게는 호객행위에 불과했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을 지탱해주는 꿈이었을겝니다.

공약이 헛되지만 않았더라면 백남기선생이 오래전에 등진 서울행에 나서지 않았을 일입니다.

그날 이후, 선생께서 결코 만만치않게 버텨왔을 일년 가까운 시간들 그리고 선생의 죽음 뒤에 그 가족들이 겪고 있는 모진 고통들을 나눌 아무런 방안도 없습니다. 그저 아플 뿐입니다.

십여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난 이선관시인(1942-2005)은 백남기선생을 죽음으로 내몰고, 주검조차 다시 죽이려는 자들을 배신자라고 이름지어 불렀습니다.

배신자

가요방에 한번도 가보지 않은 자라도/ 이인섭 작사 김광빈 작곡 배호가 불렀던/ 배신자를 모르는 분은 아마 우리나라 사람치고/드물 겁니다

이 신파조의 노래 가사를 쉽게 이야기하자면 / 어떤 순진무구한 더벅머리 총각이 사랑하는 이에게 / 청춘과 순정을 다 바쳤는데 지울 수 없는/ 아픈 상처만 주고는 야멸차게 떠나버렸다고/ 한마디로 배신자라고 노래한 겁니다

각설하고

해방 되고 오늘날까지 반세기 동안 / 우리나라에 대통령이 된 분이 / 몇 명인 줄 알고 계시기나 한 겁니까 / 그 분들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그 많은 약속 / 그 많은 다짐 / 그 많은 공약 공약 공약을 했습니다

만약 그분들의 그 많은 약속 그 많은 다짐 /그 많은 공약 공약 공약이 지켜졌다면 지켜졌다면

지켜졌다면……

배신자, 이 땅에 사는 전 국민의 배신자

고 백남기선생께서 즐겨 부르셨다는 ‘동지를 위하여’라는 노래는 그가 할 수 있었던 배신자에 대한 끝없는 항거의 몸짓이었을 겝니다.

그저 아픔으로.

가을, 주일아침 그리고 생명

<안식일이 되어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 가셨는데 마침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기만 하면 고발하려고 지켜 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는 “일어나서 이 앞으로 나오너라” 하시고  사람들을 향하여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말문이 막혔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노기 띤 얼굴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펴자 그 손은 이전처럼 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나가서 즉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 예수를 없애 버릴 방도를 모의하였다.> – 성서 마가복음 3장 1 – 6절, 공동번역

지난 20일 노스 캐롤라이나 샬롯(Charlotte)에서 일어났던 경찰관에 의한 용의자 피살사건 현장 녹화영상이 공개되었다. 경찰관들이 착용하고 있었던 몸부착 카메라(officer’s body camera)에 찍힌 영상이다. 영상으로 흑인 용의자가 총을 손에 들고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다만 경찰관들이 쏜 총소리임에 분명한 네발의 총성과 마치 토끼몰이하듯  포위하는 경찰관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찰측은 용의자의 차량에서 용의자의 지문과 DNA를 확인할 수 있는 권총과 마리화나를 증거로 용의자가 공공 안전을 위협하는 인물이었음을 주장하고 있지만,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가 경찰관에 의해 피살 되었다고 주장하는 시위대들을 무마시키기에는 어림없어 보인다.

한국에서는 지난해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후 317일 동안 사경을 헤매던 백남기선생이 끝내 숨졌다는 소식이다.

%eb%b0%b1%eb%82%a8%ea%b8%b0%ec%84%a0%ec%83%9d백선생을 치료해온 서울대병원은 돌아가신 백선생의 사인은 신장 기능이 갑자기 떨어지는 증세인 급성신부전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경찰측은 오래전부터 백선생이 쓰러져 누우신 일과 물대포 살수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불명확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으며, 지난 9월 12일 국회에서 열린 이른바 ‘백남기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던 사고 당시 경찰청장이었던 강신명은 “(시위 진압 과정에서) 사람이 다쳤거나 사망했다고 무조건 사과하는 것은 적절치 않고 원인과 법률적 책임을 명확히 하고서 해야 한다”고 답변한 바 있다.

명백한 것은 두 사건 모두 법질서를 내세운 측이 힘(총과 물대포)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간 사건이다. 마흔 세살의 흑인 Keith Lamont Scott은 법질서를 집행하는 권력인 경찰이 판단하기에 공공 안전을 위협하는 인물로 여겨져 목숨을 잃은 경우이고, 일흔살 농민 백남기선생은 “대통령의 공약인 쌀값 21만원을 보장하라”는 요구가 공공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주장하는 권력의 최첨병인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숨진 것이다.

오래전에 이유를 막론하고 사람을 상하게 하고 죽이는 법질서를 파괴했던 이가 있었다. 바로 예수이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법질서를 앞세운 이들에게 던졌던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는 예수의 물음은 ‘법의 존재’ 이유를 묻는 것이었다.

무릇 법이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법을 위해 있지 않다는 것이며, 법이 사람들의 삶을 보호할 때 그 존재 의미가 있는 일일 뿐 그것에 반하여 사람들을 상하게하고 죽게하는 법은 언제든지 폐기할 수 있다는 선언이었다.

외형적이고 형식주의를 우선시할 수 밖에 없는 사회통념과는 별개로, 적어도 예수쟁이라면 성서를 삶의 지표로 삼는 신앙인이라면 “법은 사람을 위해 있어야 한다”는 이 명제를 놓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최근 대한민국 국회에서 있었던 대정부질문 답변에 나선 황교안총리가 교언영색의 화술로 법질서를 앞세워 세월호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들의 가슴을 후비고 파며 또 다른 죽음을 안기는 장면이 떠오른다.

황총리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포장되어 소개되는 오늘의 종교는 예수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뚝 떨어진 수은주 따라 성큼 다가선 가을날 주일 아침, 떨어진 낙엽에서 다시 솟아날 생명을 보았던 예수와 숱한 예수쟁이들을 그리고 생각하며…

다시 이해찬

지난해 11월 14일 대한민국 서울에서는 ‘민중 총궐기 대회’라는 집회가 있었습니다. 그날 밤, 만 68살의 농민 백남기 씨가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오늘 이 순간까지 생사가 불분명한 상태로 누워 있습니다.

농민 백남기씨가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까닭을 그의 딸 백민주화씨는 “쌀값이 너무 많이 떨어져 다른 농민들을 대변해서 그 자리에 말을 하려고 갔던” 것이라고 합니다.

백민주화씨는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우리 아빠는 그냥 70세 농민이다. 아빠는 쌀 값이 개 사료보다 싸다, 제발 쌀값을 올려야 한다, 그 말을 하려고 간 건데.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 나이에 서울까지 보성에서 5~6시간 거리인데 거기를 가셨겠나. 우리 아빠가 왜 거기를 나갔는지는 어느 언론에서도 보도하지 않고 니네 아빠가 앞에서 폭력시위를 했기 때문에 우리는 폭탄을 써서 니네 아빠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거다. 아무도 본질은 모르고 있다. 폭력시위가 초점이 아니다. 10만명이 넘게 서울 그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은 할 얘기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 백남기씨가 그날 있었던 대회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공약을 지키라”는 지극히 원칙적인 요구였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녀가 대통령이 되려고 했던 공약 가운데 농가와 농민들을 위해 80 kg 쌀값을 21만원대로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런 약속을 했던 시점의 쌀값인 17만원 보다 더 떨어진 15만원인 현실을 알리고 싶어했던 것이 그가 그날 밤 그 자리에 있었던 까닭이라고 합니다.

그와 한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백남기씨를  “흥 많고 성실한 사람. 서둘러 밀을 뿌리고 다음 날 전국농민대회, 민중총궐기에 참가한 백남기 농민은 아내와 함께 밀농사 등을 짓고 된장, 고추장을 담그며 평생을 땀 흘리며 살아온 사람.  자기 농사뿐만 아니라 이웃 농민들과 더불어 살며 우리 농업 살리기에 매진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백남기

백남기 – 위키백과는 그의 이력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1947년에 전라남도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에서 태어났다. 1968년에 중앙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했지만 민주화 운동을 했다가 박정희 정부시기에 2회 제적을 당해 천주교 수도원에서 수도사로 생활했다. 1980년 서울의 봄때 복교해 총학생회 부회장을 맡아 1980년 5월초까지 계속 민주화운동을 벌였지만 5·17 쿠데타로 비상계엄이 확대되면서 계엄군에 체포되었다. 중앙대학교에서 퇴학되고,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72년에 대학에 들어갔던 저는, 농민 백남기씨와 젊은 시절 이력이 비슷한 많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들에 매우 익숙한 편입니다.

개중에는 제 잇속와 제 배속 채우노라 얼굴상까지 바뀐 사람들도 많지만, 농민 백남기씨처럼  “흥 많고 성실하게. 가족과 함께 평생을 땀 흘리며. 자기 자신의 일뿐만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살며 공동체를 살리기에 매진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더 많답니다. 적어도 제가 풍문으로라도 아는한 말입니다.

백남기씨처럼 농민으로 살아온 사람들도 있고, 더러는 노동으로, 상업이나 기업인으로, 언론인 또는 학자로, 더러는 종교인으로, 정치인으로 살아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하고 살아왔던 젊은 시절처럼 흥겹게, 성실하게, 이웃과 더불어 공동체를 살리자는 크고 작은 생각과 실천을 이루며 살아온 이들은 비단 백남기씨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이 세대들은 어느덧 환갑에서 칠순 나이에 이르른 노인이 되었습니다.

물론 살아오며서 때론 진창에 빠지기도 하고, 돌이켜 비난받아 마땅한 실수도 저지르기도 했을 수도 있겠지만 자신들이 믿고 지키고자하는 원칙과 상식만은 지키고자 노력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이 세대에 분명히 분명히 숱하게 있답니다.

그리고 한국 정치인들 가운데 이 세대로는 이해찬이 손 꼽을만 하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농민 백남기선생께서 “흥 많고 성실하게. 가족과 함께 평생을 땀 흘리며. 자기 자신의 일뿐만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살며 공동체를 살리기에 매진하며” 살아온 사람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후대에게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세대의 시대정신을 고집스럽게 이어온 이해찬의 정치역정이 멋지게 마무리될 수 있도록…

다시 이해찬을 위하여.

*** 행여라도 이 글을 읽는 이들 가운데 세종시 유권자 또는 그 곳 유권자를 아는 한사람이라도 있다면 백남기와 함께  ‘이해찬’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