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

올 초에 프랑스 혁명에 대한 책 몇 권을 읽었다. 알베르 소불의 ‘프랑스 혁명사’, 마르크스의  ‘프랑스 혁명사 3부작’, 노명식이 쓴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육영수가 쓴 ‘혁명의 배반 – 프랑스 혁명의 문화사’와 앙드레 모로아의 ‘프랑스사’ 들이었다.

딱히 이 나이에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는 지적 허영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주일 여 짧은 일정으로 돌아 보았던 파리 여행에 들였던 내 시간과 발품에 대한 예의랄까? 아무튼 여행 시간보다 몇 배 많은 시간을 들여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후반까지 약 백 여년의 프랑스 혁명사를 읽었던 적이 있다.

책을 덮고 여행을 돌아보며 서너 가지 정리했던 생각들이 있었다.

우선은 나이 들면 고집 뿐이라는 말이 정말 옳다는 생각이었는데, 내가 살아 오면서 쌓인 내  생각에 대한 신뢰였다. 이른바 신앙이다. 내가 믿고 고백하곤 하는 성서적 역사관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뜻인데, 역사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곧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이루어 나가는 과정이라는 내 믿음에 확신을 주었다는 말이다.

백 여년에 걸친 혁명과 반혁명 또는 역사의 진보와 반동은 나선형을 그리며 나아가는 역사 발전 곧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여성, 인권, 노동, 복지, 동성애, 난민 등등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갈등과 고민들 역시 당연한 논쟁과 투쟁의 과정일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 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프랑스 혁명이나 파리 코뮌은 이 백 여년 전에 끝난 일들이 아니라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내가 새롭게 깨달은 사실은 사람 사는 모습에 대한 근래의 역사들을 돌아 봄에 있어 십년 단위로 끊어서 역사를 정리해 읽고 그 시간들을 다시 연결해 보는 생각을 익혀 보는 일이었다. 그것은 내가 오늘, 사람 사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어쩌면 이 새로운 깨달음이 파리 여행과 프랑스 혁명사를 읽으며 내가 얻었던 가장 큰 수확일 것이다.

이즈음 나는 몇 권의 책들을 틈틈히 시간을 내어 읽고 있는 중이다. 19세기 말 부터  20세기 중반 까지 한반도에 대한 생각들을 기록한 책들이다. 내가 겪어 보지 못했지만 오늘의 내 생각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시간들에 대한 기록들이다.

나는 십 년 단위로 이 시대의 이야기를 끊어 읽고 다시 연결해 보기도 할 것이다.

살며 때때로 ‘내가 이런 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가 믿는 신께 감사를 드리곤 한다. 이즈음이 그렇다.

이 나이에 가르쳐주는 선생을 만나고 함께 배우는 뜻 맞는 좋은 벗들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