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의 역사추리소설 <장미의 이름> 끝부분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나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 중략 –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들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소설속에서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던 연쇄 살인 사건의  진범(호르헤)이 드러나자, 범인  호르세는 모든 살인 사건들의  비밀이 담겨 있는 도서관에 불을 지르고 도서관과 함께 재로 변한다.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윌리엄 수사가 그의 제자이자 소설의 주인공인  아드소에게 건네는 말이다.

중세 교회시대에 신학적 교리와 교회의 권위라는 권력은 진리 또는 진실이라는 이름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당시 진리와 진실을 가리는 단순한 잣대는 선과 악이었다. 그리고 권력은 늘 선의 자리에 놓여 있었다.

소설 <장미의 이름>의 무대는 1327년 11월, 이탈리아에 있는 수도원이다.

2017년 3월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했다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는다”는 말에 떠올린 소설 <장미의 이름>이다.

20세기 이래, 일본 식민 지배를 근대화로 위장하고, 남북 분단을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삼는 무리들이 내세운 진리 또는 진실이라는 깃발 아래서 그 무리들 대신에 먼저 간 이들을 생각해본다.

‘진실’ 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헛된 꿈을 이어가는 이가 어찌 박근혜  하나 뿐일가? 이제 ‘진실 또는 진리’라는 이름으로 한반도를 지배해 왔던 거짓 권력들을 불태워 재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장미의 이름으로.

그 거리

<결국 피청구인의 위헌 위법 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헌법 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 행위라고 봐야한다. 피청구인의 법위배 행위가 헌법 질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과 파급효과 중대함으로 피청구인을 파면 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할 것이다. 재판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주문 선고한다.> – 헌재 박근혜 탄핵심판 판결문에서

1979년 10월 27일 아침,  거리에는 호외신문들이 뒹굴고 있었다. <박정희대통령 피격서거被擊逝去>라는  대문짝 같은 제목이 달린 호외였다. 그 무렵 나는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게 말이 출판사이지 생업이라고 할만한 수준의 것이 아니어서 실제로는 준실업자 상태였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아무튼 그날 아침 출근길에서 그 호외를 마주했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내 출판사 사무실로 담당형사가 찾아왔고 당분간  함께 지내게 되었노라는 통보와 함께 내 동선에 늘 함께 하는 그림자가 되었다. 당시 내 집과 사무실이 모두 마포구에 있었으므로 마포서 정보과에 속한 형사들이었는데 그 중 한 명과는 호형호제를 할 정도로 친하게 지냈던 기억이 있다. 종종 다니던 학교가 있던 구역인 서대문서 정보과 형사들도 손님으로 오곤했었지만, 늘 붙어다니던 양반들은 주로 마포서 직원들이었다.

지금와서 돌이켜볼수록 웃음이 나온다. 도대체 이십대 중반 어린 나이, 게다가  준실업자에 다름없는 나를 감시하는 담당형사가 있었다는 사실에  나오는 웃음이다. 아무튼 그땐 그랬었다.

그리고 며칠 후  11월 3일 아침, 집을 나서려는데 일찍감치 내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던 담당형사 둘이  “오늘은 집에 있어야겠다”며 나를 막아섰다. 그들과 꽤 긴 흥정 끝에 나는 그들과 함께 광화문 비각쪽 거리에 설 수 있었다.

그날은 박정희 전 대통령 장례식 날이었다. 집을 나서지 못하게 막는 담당형사들에게 “이건 참 역사적인 날이다. 당신들이나 나나 그 역사적 현장에 함께 서 있다는 것만 하여도 얼마나 의미있는 일이냐? 내가 도망칠 일도 아니고 당신들과 함께 서서 그 현장을 보고  다른 일 안하고 누구도 만나지 않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될 일 아니냐?”

그렇게 우리들은 광화문 사거리 비각쪽에 서서 박정희 장례행렬과 그곳에 인산인해로 모인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날 광화문 거리와 그곳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몇해전이던가 김정일이 죽어  장례행렬을 이루던 평양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보았던 일이…. 적어도 내 기억엔 김정일 장례행렬이 이어지던 평양거리와 1979년 박정희 장례행렬이 있었던 서울 광화문 거리 모습은  거의 똑같았다.

바로 며칠 전 자기 딸 나이 또래 젊은 처자들을 앉히고 술마시다 부하의 총에 정말 말같지도 않은 죽음을 맞은 박정희는 그날 그 거리에서는 왕을 넘어 신이었다. 그렇다. 이제 내 이 나이 60대 중반, 이 세월에 이르기까지 그는 신이었다.

광화문 거리는 박정희 만큼이나 내겐 추억이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던 해 나는 국민학교 2학년이었다. 그리고 그의 치하에서 초, 중, 고, 대학을 마치거나 다니고 군생활을 했다. 내 어리고 젊은 시절 추억은 모두 그 시절의 일들이다. 광화문 비각에서부터 내자동, 청운동, 효자동에 이르는 거리는 골목골목들을 기억할 만큼 내겐 숱한 추억들이 묻어있다. 중, 고등학교 6년 동안 나는 그 거리를 등하교길로 오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6년, 해가 저물 무렵부터 광화문 그 거리를 매운 사람들은 2017년 3월 마침내 신의 형상을 부수기 시작하였다.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헌법 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 행위라고 봐야한다. 피청구인의 법위배 행위가 헌법 질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과 파급효과 중대함으로 피청구인을 파면 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2017년 헌재의 판결문이 1979년 10월 김재규가 쏜 총알 대신 그때 박정희를 향할 수 있었다면, 지금쯤 어떤 세상이 되었을까?

오래 전에 떠나 온 그 거리에서  전해지는 소식에 꿈이라도 꾸어보는 것이지만, 이제라도 신의 형상을 한 우상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너, 나, 우리라는 사람이 설 수 있는 광장, 나라, 공동체로 나가는 걸음을 내딛는 소식에 그저 들뜬 마음으로.

 

물러날 때를 알아야

주일아침, 유교(儒敎)의 경전 가운데 하나인 역경(易經)에 있는 가르침을 우습게 아는 이들이 차고 넘쳐나는 세상 뉴스를 보면서 몇 자 적어 봅니다.

주역(周易)이라고도 부르는 역경을 보면 태극, 음양, 사상, 팔괘 등등의 용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64괘가 있고 그 64괘 중 제일 윗자리에 건위천(乾爲天)이라는 괘가 있습니다.

이 건위천이라는 괘에 해당하는 사람의들 운세는 이렇게 설명되곤 합니다.

“용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형상이다. 사업에 비하면 盛業(성업), 完全操業(완전조업)을 의미한다. 따라서 긴장한 상황 속에 있으며 또한 책임도 무겁다. 그래서 이 괘는 가장 좋은 괘이다. 너무나 좋기 때문에 모든 것은 차면 기운다는 것으로 도리어 불길한 것으로 역전할 우려가 있다.”

“현재 귀한 위치에 있는 이거나 또는 평소에 부지런하고 자신을 잘 다스리는 사람에게는 지극히 좋은 괘이지만, 평소에 근면하지 아니한 사람, 거짓말이 많은 사람, 오만한 사람들에게는 악운으로 역전되기가 십상이다. “

“보통 사람들에게 운이 꼭대기에 다다른 것이서 오만심을 불러일으키기 쉬우니 조심하라.”

“너무 높이 올라간 용의 형국이다. 용은 떨어질 우려가 있다.”

그리고 주역(周易) 건위천(乾爲天)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아감은 알되 물러남은 알지 못하며<知進而不知退(지진이불지퇴)>, 존함은 알되 망함은 알지 못하며<知存而不知亡(지존이불지망)>, 얻음은 알되 잃음은 알지 못하니<知得而不知喪(지득이불지상)> “

“나아감은 알되 물러남은 알지 못하며<知進而不知退(지진이불지퇴)”라는 말은 얼핏 승승장구하는 군대나 연전연승하는 스포츠팀이나 선수들에게는 아주 듣기 좋을 수도 있겠습니다.

capture-20150607-091559-vert조선시대 양반과 관료사회에서는 이 역경의 가르침을 벼슬아치들이 반드시 곱씹어야 할 교훈으로 삼았었다고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벼슬자리 곧 권력을 부리는 자리에 앉다보면 계속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제 목적을 이루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갖은 권모술수와 부정하고 부패한 방법으로 제 목적을 달성했지만 끝내 패가망신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그런 개인이나 집안의 패가망신 뿐만 아니라 자칫 나라가 절단나는 사단이 될 수도 있겠기에 벼슬아치들에게 곱씹기를 강조했던 말 “나아감은 알되 물러남은 알지 못하며<知進而不知退(지진이불지퇴)”라는 교훈이 뼈저리게 들려야만하는 오늘입니다.

제 자리 아닌 것은 탐하지 말 일이며, 설혹 그 자리에 올랐다 하더라도 제 자리가 아닌 줄 알면 물러나야 개인이나 나라에 득이 될 일입니다.

자기가 오른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도 모르고 공주놀음에 빠져있는 대통령을 비롯해 부정부패의 교본으로 기록될 만한 이들이 연이어 국무총리 자리를 놓고 출사표를 던지는 인간들, 입으로는 독감정도의 감기라면서 그 조차 수습못해 전 국민을 유언비어의 도가니속에 빠뜨려 놓고 허둥지둥 거리는 장차관 이하 실무 담당 공무원들, “경제가 세월호에 발목잡혀…”운운히며 한(恨)조차 풀지 못하고 죽은 귀신 불러내어 제 면피에 급급한 국무총리 대행이라는 인간들이 오늘 절실히 곱씹어 마땅한 “知進而不知退(지진이불지퇴)”입니다.

종북귀신

capture-20141215-223911<박 대통령은 15일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면서 “최근 소위 종북 콘서트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우려스러운 수준에 달하고 있다”라며 “몇 번의 북한 방문 경험이 있는 일부 인사들이 북한 주민들의 처참한 생활상이나 인권침해 등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자신들의 편향된 경험을 북한 실상인 양 왜곡과장하면서 문제가 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오늘자 오마이뉴스에 <박 대통령, ‘신은미 콘서트’ 비판… 백색테러엔 침묵, 토크콘서트 겨냥 “편향된 경험 왜곡·과장”… ‘정윤회 파문’ 언급도 피해>라는 제목으로 실린 기사의 일부입니다.

이렇게나 빨리, 그것도 대통령의 입으로 “종북 콘서트”라고 적시하는 일이 벌어진 한국 상황은 정말 심각한 수준에 이른 듯합니다.

저는 <그 놈들>이라는 연재글 네번 째(글보기)에서 이런 언급을 하였습니다.

<재미동포 신은미씨와 황선 전 민주노동당 부대변인이이 남한 전국을 돌며 벌이는 토크 콘서트의 주제는 “평화와 통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연합뉴스를 비롯한 뉴스매체들은 <‘종북 논란’을 빚고 있는> 토크 콘서트로 의도적인 믿음을 독자들에게 심어줍니다.

그리고 이제 조만간 <‘종북 논란’을 빚고 있는>에서 <…을 빚고 있는>이라는 말이 사라질 것이고, <논란>이라는 말도 사라질 것입니다. 늘 그래왔듯 말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머리 속에 <종북>이라는 말만 남기게 이들의 교묘함은 작동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설마 대통령의 입에서 이렇게 튀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답니다.

조중동이나 관변단체들을 통해 서서히 그 쪽으로 몰아가리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대통령이 최일선에 서서 이렇게 <종북>이라고 적시할 줄은 정말 몰랐답니다.

용감한 것인지 무식한 것인지 그 결과는 의외로 빨리 나타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답니다.

그리고 더욱 확실해 진 사실은 <그 놈들> 스스로 만들어 홀린 헛 것, 곧 <종북귀신>으로 하여 자신들의 명(命)을 재촉하리라는 것입니다.

찌라시와 어떤 예언

<박대통령 “찌라시에 나라 흔들”> – 온라인 한국일보의 기사에 달려있는 작은 제목입니다. 그 기사의 큰 제목은 <朴, 찌라시·애국심 키워드로 결백 호소.. 의혹 본질엔 함구>였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7일 청와대에서 새누리당 지도부 및 당 소속 예산결산특위 위원들과 가진 오찬 회동을 보도한 기사입니다.

이날 박근혜대통령은 모인 이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시작하기 전,후에 짧게 글을 읽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가 읽는 글 속에는 ‘나라’라는 단어는 15번, ‘대한민국’은 3번, ‘국민’은 19번 씩을 사용했다는 기사였습니다.

나라,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말들을 자주 읽어 내려가면서 스스로 “오직 나라가 잘 되게 하는(일에 빠져)…”, “일생을 나라 걱정을 하며 살았다”는 생각에 도취되어 국민(아마 그녀는 백성이라고 생각할 듯하지만)들이 이런 자신의 애국심을 믿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듯(아니면 연출자의 뜻이었던 듯)합니다.

어쩌면 그런 믿음에 스스로 빠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찌라시전후 사정이야 어떠하던 그 기사가 제 마음에 꺼림직한 까닭은 “찌라시”라는 말 때문이었답니다. 저희 세대쯤만 하여도 익히 아는 일본말입니다. 바로 ‘ちらし(散らし)’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광고를 위해 뿌려지는 인쇄물을 일컫습니다. 선전지, 광고지를 뜻하는 일본 말입니다.

무려 ‘나라’, ‘대한민국’, ‘국민’에 빠져 사시는 대통령이 했다는 말이라 제겐 참 난감하게 들렸답니다. 그이나 저는 거의 같은 세대이거니와 해방후 세대랍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엄중한 직책을 맡고있는 그이가 쓰기에는 참 부적절한 낱말이거니와 그이나 저나 일본말이 그리 입에 베지 않은 세대이기 때문에 그 놀라움이 컷답니다.

물론 그이가 5개 국어인가 6개 국어인가를 능숙하게 사용한다는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라 아무 때나 자기 나름의 적절한 외국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문득 그이의 아버지 시절이 떠올랐답니다. 저는 그이의 아버지 시대에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니까 1974년의 일이랍니다. 제가 대학교 3학년 때의 일입니다. 아마 박근혜대통령이 대학을 졸업했던 해일 것입니다. 그해 정월달에 이웃 일본국의 수상이었던 다나까 가꾸에이(田中角榮)는 동남아 5개국 친선방문 길에 나섭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방문지였던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봉변을 당합니다. 일본대사관 앞에 게양된 일장기가 끌어내려지고 찢겨지고 짓밟히고 불태워지는가 하면 일제 자동차들을 불태우는 반일 시위대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호텔방에서 꼼작없이 갇혀있다가 귀국을 하게됩니다.

1974년 1월 한국에서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에게 “헌법상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긴급조치 1호가 발동했습니다. 바로 박근혜씨의 아버지가 모든 국민의 자유과 권리를 제 멋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권한을 쥔 것이랍니다. 이후 5년 동안 박정희와 국민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설정되었고, 바로 그 시절에 박근혜 현 대한민국 대통령은 이른바 영부인 역할을 대행하며 국민에 대해 배웠답니다.

아무튼 그 해 1월 동남아 5개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다나까수상은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을 받게됩니다. 인도네시아에서 겪었던 반일데모를 잊지 못했던 다나까는 만만한 게 한반도 남한 정부였던지 이런 말을 쏟아냅니다.

“과거 한일사이에 합방시대가 길었지만 그 후 한국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해 볼 때 긴 합방 역사 속에 한민족 마음 가운데 심어 놓은 것은 일본의 휼륭한 교육제도였다.  ….역시 경제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을 국민생활 가운데 뿌리를 박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 동남아 순방길에서 절실히 느꼈다.”

그 당시 한국인들의 공분을 자아낸 이른바 다나까 망언이라는 것이데, 애처롭게도 그 공분을 오늘까지 가슴에 간직하고 사는 한국인들은 거의 없는 듯합니다. 오히려 다나까의 말이 옳다는 이들이 현재 대한민국을 이끌고 가는 듯하다는 생각이 결코 과한 것이 아닌 현실입니다. 다나까는 40년 전에 망언을 한 것이 아니라, 예언을 한 셈인 것 같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찌라시” 발언이 가져다 준 생각들입니다.

그날 밥상머리에서는 각하(閣下)라는 호칭도 이어졌다는 보도입니다. 집권당 원내대표라는 이의 입에서 연이어 나온 호칭이라고 하는데, 그게  일본 국왕이 임명한 문무관리들을 부르던 말인지는 알기나 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행간(行間)을 읽어야 하는 세상

오늘  뉴스들을 훑다보니 북의 김정은에 대한 이런 저런 소문들이 눈에 뜨이는군요. 그가 거의 지난 한달동안(29일) 세상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은 중국발과 이슬람지역발로 무성하게 퍼져 나간다고 합니다. 소문인즉은 북에 쿠테타가 일어나 그가 감금되었다든가 아주 죽었다든가에서부터 심장질환으로 쓰러져 살아도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등등의 내용이랍니다.

이런 소문에 남과 북은 함구이고, 중국은 유언비어라며 강력한 부인을 했고, 미국은 아는바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뉴스입니다.

뉴스라인에서 모습을 감춘 김정은에 대한 궁금증이 만들어낸 뉴스들입니다. 허기사 젊은 친구가 그 땅에 사는 제 또래들과는 걸맞지 않게 비대한 모습으로 우스꽝스럽게 뒤뚱거리며 걷는 뉴스를 볼 때면 “저 친구 곧 쓰러질 것 같네”라는 생각이 들곤 하였습니다만, 모를 일이거니와 워낙 숨기는 것을 좋아하는 곳이니 그 진실을 누가 알겠습니까?

북의 그(권력자)들이 만들어낸 유언비어성 뉴스들이라는 생각입니다.

남쪽이라고 별로 크게 다른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른바 “대통령의 7시간에 대한 진실”입니다. 각종 유언비어가 꼬리를 물었고 역시 국제적 뉴스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늘 선진화를 부르짖으며 세계 열 몇 번째를 꼽기 좋아하는 자칭 민주주의 국가 수장인 대통령의 시뻘건 대낮 근무시간 7시간 행방이 오리무중이라는 뉴스였지요. 그러다보니 각가지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운 유언비어들이 난무한 것입니다.

이 역시 남쪽의 그(권력자)들이 만들어낸 유언비어성 뉴스들일겝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 김정은은 29일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중일까? 박근혜는 그날 7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럴 때 우리는 “소문과 뉴스의 행간(行間)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쓰고는 합니다.

행간을 읽어야 하는 세상은 불행한 곳입니다. 떳떳하지 못한 세상이지요. 이른바 자유하는 세상이 아닌 것이지요.

제가 청년이었던 1970년대야말로 “행간을 읽어야만 하는 시대”였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답니다. 그렇게 착각하며 살아온 것이지요. 여전히 행간을 읽어야만 하는 세월인 것을 잊고 산 것 뿐이지요.

신라 48대 임금인 경문왕 때 이야기라니 약 1100년 이전의 이야기입니다.

“…왕위에 오르자 왕의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당나귀 귀처럼 됐다. 왕후와 궁전의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이를 알지 못했지만 오직 복두(幞頭-관리가 쓰는 모자)만드는 사람만이 그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평생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다가 죽을 때가 돼서야 도림사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 소리치기를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와 같다´고 했다.

그 후에 바람이 불면 대나무가 소리를 내어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와 같다´ 하였다. 왕이 이것을 싫어하여 곧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더니 바람이 불면 ´임금 귀가 길다네´하는 소리가 났다….”

우리들이 익히 잘 알고있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옛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왕의 귀가 당나귀 귀처럼 되다´는 당나귀는 미련한 짐승을, 귀는 쇠귀에 경 읽기처럼 무능한 경문왕에게 진실이 들리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하지요. 재해와 반란으로 곤궁한 백성들을 헤아리지 않고 대규모 부역동원과 같은 미련한 정책을 강행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또한 ´복두´는 왕의 무능과 미련함을 감추는 허위의 상징이요 ´대나무 숲을 베었다´ 함은 여론의 탄압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권력은 늘 힘으로 민심을 통제하려 한다는 옛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유효한 일이기도 하고요.

행간문제는 최소한 “행간을 읽을 수 있도록”이라도 판을 깔아 주어야 할 이른바 언론들이, 북에는 군사적 힘에 남에는 돈의 힘에 묶여 그저 제 잇속 차리기에 바쁘다보니 그나마도 어려워진 세상입니다.

1,100여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북은 인민이 남은 시민들이 행간이라도 찾아 읽어야 하는 한반도입니다만 여전히 사랑해야만 할 모국이랍니다.

매국?

매국(賣國) : (명사) 제 나라의 주권이나 이권을 남의 나라에 팔아먹음 

모처럼 한국어 사전을 들추어 그 뜻을 찾아 보았습니다. 한국을 떠나온지도 벌써 한 세대가 흐른  시간이 되었으니 행여 제가 뜻을 잃어버렸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매국에 대한 예제로는 이런 게 있었습니다.

“그는 매국 친일파의 후손이다.”

종일 일을 하면서 머리속을 떠나지 않은 말 “매국”이었습니다.

졸지에 제가 매국하는 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매국하는 놈, 곧 나라를 팔아먹은 놈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나라의 주권이나 이익을 남의 나라에 넘기는 것, 개인의 이익을 위해 제 나라의 주권이나 이익을 남의 나라에 팔아먹는 역적을 일컬어 매국적(賣國賊)이라고 하고, 사리사욕을 위하여 남의 나라의 앞잡이가 되어 자기 나라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을 일컬어 매국노(賣國奴)라고 한다고 사전은 정의하고 있습니다.

제가 매국적 또는 매국노라고 불리우는 나라를 팔아먹은 놈이 된 까닭은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씨(또는 양 孃(계집 양)가 미국을 방문하는 시점에 세월호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시위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랍니다.

그렇게 제게 매국이라는 딱지를 붙여준 이들은 대한민국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 대변인이라는 이와 조선일보입니다.

애초 종북이니 좌파니 하는 매도는 예측해온터라 전혀 새로울 일이 아니었답니다. 제 나라 대통령을 지낸 이까지 나라 땅과 바다를 북에 상납한 종북 좌파라고 우기는 사람들인데 하물며 이름조차 내밀 건덕지없는 평범 이하의 사람 하나 종북 좌파로 만든다 한들 그게 무슨 큰 사건이겠습니까?

북의 김정은 입장에서는 새누리당과 조선일보가 희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한순간에 삼백명이 넘는 종북 좌파가 뉴욕 맨하턴을 휘젓고 다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새누리당과 조선일보가 있으니 말입니다.

종북 좌파라는 소리는 그냥 웃고 넘어갈 수도 있겠는데 “매국”은 참 생소하기도 하기도 하거니와, 아무리 박근혜씨가 사개국어인가 육개국어를 잘 한다고 하더라도 한국어는 못한다는 사실이 익히 알려진 터에 이른바 종박주의자들이 그것조차 따라하느랴고 그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모습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매국

“제 나라의 주권이나 이권을 남의 나라에 팔아먹는 행위”가 곧 매국입니다.

매국 운운하는 이들이 말하는 교통사고가 나서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 교통사고가 일어났는지, 그 사고로 인해 꼭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만 했었는지, 행여 그 모두를 살릴 방법은 없었는지, 살릴 수 있었는데 그대로 죽음을 방치하지는 않았는지, 아무리 단순사고라고 하여도 그 사고를 예방, 수습, 처리하는 정부기관들이 있는 법이고, 그들이 그 때 제대로 대응을 한 것이지를 묻는 일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하물며 대통령이 여러차례, 하물며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까지 “왜?”에서부터 “어떻게?”까지 해결하겠노라 했으면 그거 하나 제대로 마무리 지으라는 주장이 매국이 되어야하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도대체 자기 나라 말 하나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위인들이 정치를 하고, 신문을 만드는 꼴이 우습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무릇 언어습관은 제 버릇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이 모두가 아마 새누리와 조선, 매국(賣國)을 밥 먹듯 해 온 “매국 친일파”라는 자기네들 가계(家系) 탓일 겝니다.

믿음 – 신의 무상급식법 -3

(당신의 천국 – 네번 째 이야기) 

성서는 묻지 않으면 침묵한다. 그런데 어떻게 묻느냐 하는 것이 그 대답을 유도한다. 성서를 자명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이미 대답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성서 대신 아집에 정좌하게 된다. – 안병무 

수년 전에 받았던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이 생각납니다. 호주에서 삼십여년 이민 목회를 담당하시다가 이제는 은퇴하신 어느 목사님께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흰 눈이 내리는 계절에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에 감사하라.”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시월의 주일 아침, 창밖을 내다 보다가 문득 떠오른 카드에 대한 추억입니다. 

가을을 누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의 축복인 셈입니다. 

우리들의 천국 이야기를 더 이어가기 전에 전제해야 할 것, 이왕이면 꼭 한번 짚고 넘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신앙, 종교라고해도 좋겠습니다. 글을 쓰는 저나 단 한 분이라도 제 글을 읽는 누군가나 서로 불편한 마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짚어보자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대해 “옳다, 그르다”의 판단이나 “맞다, 틀리다”의 잣대를 사용하지 말아달라는 전제입니다. 다만 “같다, 다르다” 라는 관점으로 읽어 주시면 편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지요. 

일테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탈애굽을 한 일단의 히브리 노예족들이 광야로 나와서 한달 반 쯤 이후에 터져나온 불평과 불만들을 출애굽기와 민수기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출 16:1-12, 17:1-7, 민 11:1-6, 14:1-3 등등) 

불평과 불만의 주된 내용들은 “배고프다, 고기 먹고 싶다, 목마르니 물 달라” 라는 사람들이 살기 위한 아주 기본적 욕구에 대한 것들입니다. 

야훼 신은 만나와 메추라기와 므리바 반석의 물로 사람들의 불평과 불만을 잠재운다는 것이 성서의 기록입니다. 

이런 성서의 기록을 보면서 해석하고, 따지고, 묻는 사람들의 성향을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봅니다. 아마 일반적으로 믿음, 신앙, 종교 등에 대한 태도들 역시 비슷할 것입니다. 

물론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 또는 종교 무관심자론자들은 별 뜻없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사람 사는 모양이라는 게 다 저마다 다른 법이니, 관심있는 이들을 이렇게 세가지 범주로 나누어 보는 것이지요. 

Point of View

첫째는 있는대로 믿는다는 사람들이 있겠습니다. 만나를 내려주시고, 메추라기 떼를 몰아다 주시고, 반석에서 때아닌 생수를 쏟아내 주신 분은 야훼 하나님이시고, 성서의 기록은 실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는동시에 오늘날 자신들이 신뢰하는 과학이라는 것으로 검증 가능하다는 사람들입니다. 

두번 째는 그런 기록들은 다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일테면 당시 탈출 노예들의 수를 다 먹일만한 메추라기떼가 날아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과학적 이론을 들이대거나 지금도 시내광야에 가면 연지벌레로 인해 생기는 만나와 똑같은 먹을 거리를 볼 수 있음으로 만나란 단지 자연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세번 째로는 신앙적 고백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나가 자연적 현상이던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이던 그것의 중요성 곧 역사적 사실 여부의 중요성 보다는 당시 사람들의 공동체가 자신들의 경험을 어떻게 고백했는냐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그 고백을 믿고 공유하는 것에 촛점을 맞추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에 대한 이런 서로 다른 입장은 비단 종교적 관점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문득 재미난 예가 생각납니다. 나이들수록 점점 더 확고해 지는 생각 가운데 하나가  한민족은 참 종교적인 인자의 뿌리가 깊다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의 기초노령연금에 대한 기사들을 보면서 한국인의 종교성을 떠올린 것이지요. 

지난해 12월 대통령 선거 후보들의 TV토론에서 당시 박근혜후보는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월 20만원씩 일괄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합니다. 이에 토론 상대인 문재인후보는 그러려면 돈이 필요한데 세금은 더 걷지 않겠다면서 돈 마련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박근혜후보가 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대통령 되려고 한다.” 

그리고 박근혜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출애굽기 16장을 보면 배고프다고 불평하는 무리들에게 야훼는 “내가 준다”라고 선언을 합니다. 모세를 비롯한 지도부나 불평을 늘어놓던 무리들 누구도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라고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내린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며 야훼가 일하셨다고 믿습니다. 믿음입니다. 신앙입니다. 

다행히도 박근혜가 신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왜?”라는 물음이 필요치 않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신처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말한(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나, 그녀를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들이나 저는 종교적 신앙행위로 해석해 본답니다. 

신앙 또는 믿음에 대한 세 부류의 사람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쯤 제 믿음의 방법과 제가 글을 쓰는 관점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사람들의 행위와 고백을 통해 만났고, 지금도 만나고 있고, 이후로도 만날 신에 대한 믿음 위에서 이 연재를 이어간다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