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8
지난 삼개월 동안 구약성서를 중심으로 유대인들의 신앙과 삶에 대해 저나름으로 이야기를 풀어왔습니다. 예수 이야기를 이어가기 전에 당시의 팔레스타인 시대상황도 짧게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세례요한을 시작으로 예수와 바울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이제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제껏 해 오던 이야기들보다 한층 더 제 나름의 의견들과 생각들이 많고 깊게 드러날 것 같습니다. 믿음 곧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늘 예수쟁이라고 말하기를 즐겨합니다. 이제 신약성서를 중심으로 이어질 이야기들은 엄밀하게 보자면 제 신앙고백이 될 것입니다.
“예수는 나의 구주이고, 그로 인해 나는 오늘 여기에서 천국을 누리고 살(며, 아야 할, 수 있는, 아 야만 할) 까닭이 있거니와, 마침내 하늘 문 열고 그의 나라로 들어가는 그 순간 (천상병 시늉으로)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잠시 쉬면서 “그럼 도대체 믿음이란 무엇일까?”라는 이야기를 좀 하고 가려고 합니다.
2011년도에 한국의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만들어 발표한 “한국의 종교현황”이라는 286쪽 짜리 자료가 있답니다. 거기 들어가는 글에 보면 2008년 조사치로 한국내에 자생종교와 외래종교를 합쳐 약 510여 개 이상의 교단과 교파가 있다는 기록이 있답니다.
또한 2003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전체 인구 가운데 약 53% 이상이 스스로 종교인이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이즈음은 한국사회도 다민족 국가로 변해간다는 뉴스들을 종종 보거나 들을 수 있지만, 전통적으로 한국사회는 단일민족으로 여겨지고 이해되어 왔습니다. 단일민족으로 이렇게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사회는 그리 흔치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의 자유’라는 덕목이 마음껏 구가되는 사회라서가 아니라 민족적 특성이 종교적이라서 그렇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위에 도표를 참조하시면 눈에 띄는 점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와 기독교(개신교)의 단체 및 교단 숫자입니다. 천주교, 유교, 천도교, 원불교, 대종교 등은 교회수는 제법되지만 종단, 교파, 단체는 오직 하나일 뿐인데 불교와 기독교(개신교)는 유난히 숫자가 많다는 점 말입니다.
신자숫자로 1, 2 위를 다투는 불교와 기독교(개신교)는 다양한 종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도수에 비해 교직자 숫자가 눈에 띄게 많은 개신교의 모습도 눈에 뜨이지요.
어떤 종교냐하는 다양성은 물론 같은 종교라도 또 다른 모습으로 믿고 있다는 현실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고요, 무엇보다 대한민국인의 거의 반 수 이상이 무종교라는 점도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랍니다.
이제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렵니다.
지난 2009년에 백살의 나이를 꽉 채우고 세상을 떠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라는 프랑스 사람이 있답니다. 이십세기의 내노라하는 세계적인 석학 가운데 한 사람이랍니다.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이자, 구조주의 인류학을 꽃피운 사람으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는 “오늘날의 토테미즘”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소위 문명화된 종교가 원시 종교와 접촉하면 녹아 없어질까 두려워 최대한 그것을 문명화된 종교와 멀리 떨어뜨리고 필요하면 풍자하고 비하했다. 뒤르켐의 경험처럼, 종교이면서 토테미즘이라는 원래의 속성이 없는 이상 그 조합은 새로운 형체를 만들어내지 않았다.>라고 말입니다.
원래 많이 배운 사람들은 쉬운 말도 어렵게 하는 법인지라, 언듯 뭔 소리인지 잘 모르겠는 것이 저나 이 글을 읽는 당신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 양반 이야기의 촛점은 우리들이 보통 토템이즘(totemism : 동물이나 식물 등의 자연에 대한 신앙), 샤머니즘(shamanism : 초자연적인 존재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샤먼 곧 무당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 애니미즘(animism : 무생물계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신앙) 등의 신앙이나 믿음을 이야기하면 옛날 사람들이나 미개한 사회에서나 일어나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로 치부하곤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옛날 수천년 전 사람이나 오늘 2014년을 사는 사람이나, 오늘날 최고의 문명 사회를 구가하는 유럽이나 북미 (아니면 대한민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믿으면 되는 일이고..)에 사는 사람이나 아직도 원시적 삶을 사는 아프리카 어딘가나 아시아의 어딘가에 사는 사람이나 신앙과 생각에는 전혀 아무런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면 2014년 문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각이나 신앙이라는 것이 삼, 사천년 전 또는 이천 년 전에 살던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구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이야기를 하나 드립니다.
헤로도토스(Herodotus)라는 이름을 기억하시는 분들 계실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500여년 전에 살았던 그리스의 역사학자입니다. History(역사)라는 말을 처음 만든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사람입니다. 중국 사마천의 사기(史記)로 대변되는 동양 역사가와 비견되는 서양 역사가의 아버지랍니다.
그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라는 책에 아주 우수꽝 스러운 바벨론의 종교관습이 소개된답니다. 그 진실성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를 일이지만 말입니다.바로 이 구절입니다.
“모든 여자들은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아프로디테 여신의 신전 앞 뜰에 앉아 있다가 지나가는 낯선 남자와 성관계를 가져야 했다”
신앙치고는 참 이상한 신앙인데요, 이게 바벨론 신앙이랍니다. 사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방신이라는 것이 다 이런 종류의 믿음들이었답니다.
참 말도 안되는 신앙행위이자 믿음의 행태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러나 똑같거나 유사한 일들이 오늘날에도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레비-스트로스의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닌 성 싶은 것이지요.
또 다른 신앙이야기 하나 더하고 마치렵니다.
우리 민족의 종교성입니다.
언젠가 유투브에서 검색을 하다가 북한의 태양절인가 뭔가하는 행사를 본 적이 있답니다. “어, 뭐 이런게 다…”하는 생각으로 잠시보다가 결국 눈을 떼지 못하고 몇 십분을 그걸 들여다 본 적이 있습니다.
평양 광장에 수만의 사람들이 정확한 시간은 재보지 않았지만 꽤 긴 시간을 정물화가 처럼 전혀 움직임없이 소리도 없이 마치 정지된 화면처럼 서있는 모습이 계속되었답니다. 저는 그게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장면이었답니다. 그러다 그 정지 화면이 앳된 얼굴의 김정은이 나타나자 일순 열광의 도가니로 변하던 것이었습니다.
그건 종교였습니다. 믿음이요, 신앙이었습니다. 그것이 강요된 것이던 교육에 의한 것이던 말입니다.
또 다른 이야기의 남쪽 케이스입니다.
지난해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일을 앞두고 후보들 간에 있었던 TV 토론 장면이었습니다.
문재인후보가 묻습니다. “과학기술 인력이야말로 국가자원이고 경쟁력이다 . (당신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은 물론이고, 참여정부 때도 이 문제에 대해 깊게 고민했다. 이명박정부는 이런 점을 다 까먹었다. 그 때 박근혜후보는 뭐했나?”라는 질문에 박근혜 후보가 답합니다. “그래서 (제가) 대통령되려는 거 아녜요 지금..(웃음)”
이 장면을 본 그 당시의 제 생각은 “설마 저런 바보가 대통령이 되지는 않겠지…”였답니다.
그런데 그녀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깨달은 사실은 “아! 종교구나”하는 것이었답니다. 제 생각과 다르게 그 생각조차 없는 바보가 다 이루어 줄 수 있는 신처럼 다가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무릇 모든 종교에는 여타의 다른 세상 일들과 마찬가지로 브로커 곧 중간자들이 있습니다. 뭔가를 빙자해 챙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종교는 곧 밥벌이요 , 출세의 도구가 됩니다. 그거 뭐라 할 수 없답니다. 사람이므로…
문제는 그 종교에 내 돈, 내 시간, 내 정성, 내 몸, 내 맘 바쳐 속고 사는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넘쳐난다는 것이지요.
“이 사람들아! 무릇 믿음이란 그런게 아니라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내가 곧 그라네. 나를 믿게! 그 순간 자네가 곧 내가 되는 것이라네. 물론 거긴 브로커나 중간자가 없지! 자네가 곧 하늘이란 말일세. 나만 믿고 오늘 하루 살아보시게! 자네 죽은 다음도 내가 보장하지!”
이제 그렇게 말하다 간 사내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