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를 새롭게 다시 읽고 있는 중입니다.통독을 전제로 창세기부터 주욱 읽어나가기로 맘을 먹었는데, 참 오랜만의 일입니다. 살아오면서 성서통독을 몇차례 한 적이 있습니다. 제 필요에 의해서거나 그 일 밖에는 다른 할 일이 없었을 때, 그리고 성서에서 해답을 찾지 않으면 희망이 보이지 않았을 때, 통독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젊어 한 때는 밥먹고 자는 일 이외에는 성서만 들고 있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성서와 예수”가 헛것이라면 제 지나온 삶도 헛것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성서를 손에 들었답니다.
몇 장 넘기자마자 제 생각을 놓지 못하게하는 구절을 만났답니다. 바로 이 구절입니다.
<셋도 아들을 얻고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어 불렀다. 그 때 에노스가 비로소 야훼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였다.> -창세기 4장 26절(공동번역)
제가 헛것을 믿고 살지는 않았다는 생각을 첫번 째로 확인시켜주는 구절이랍니다.
사실 문자로만 읽어 나가면 창세기는 앞뒤가 맞지않는 이야기들이 많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였다.”(창세기 2장 4절)라고 시작하는 두번 째 창조 이야기에서 이미 여러번 “야훼”라는 이름이 나온답니다. 그러니 그로부터(창조때로 부터) 시간이 지난 에노스 때에 이르러 “비로소 야훼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였”다는 말은 좀 생뚱 맞기도 하답니다.
물론 “야훼”라는 신의 이름은 알았지만 그 때까지는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고, 예배를 드리지도 않았다고 한다면 뭐 그럴 수도 있겠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에노스의 아버지인 셋은 아담이 낳은 세번 째 자식입니다.
아담이 셋보다 먼저 낳은 자식들 둘의 이름은 그 유명한 카인과 아벨입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처럼 카인은 자신의 친동생인 아벨을 쳐죽입니다. 단지 신이 자신의 제사는 외면하고 동생의 제사만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리 했다고 합니다. 성서는 왜 신이 카인의 제사는 거부하고 아벨의 제사는 받아드렸는지 명쾌히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카인에게 (제사를 받아 드리지 않아 치민) 화를 나무랄 뿐입니다. “카인의 제사를 받아드리지 않은 까닭은 이러저러하다”는 설명도 없이 그저 불공평한 것에 화를 내는 카인만을 나무라는지 카인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신은 참 불공평합니다.
그러나 아벨의 입장에서 본다면 불공평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천추의 한이 풀리지 않을 일이었습니다.
“왜, 아무 까닭도 없이 형의 제사는 받지 않고 내 제사만 받아 들여서 형에게 맞아 죽어야만 했는지?” 아마 죽어서도 풀리지 않았을 숙제였을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 성서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우리들이 살아가는 오늘을 돌아봅니다.
특별한 이유나 까닭도 없이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이 하는 일들이 거부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일들을 찾아 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아무 까닭도 없이 불이익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일들도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비일비재하기 마련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 쉽게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핵심은 바로 폭력(살인)과 비열함(잡아뗌, 뻔뻔함, 몰염치, 부끄러움을 모름)입니다.
<야훼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 창 4 : 9, 공동번역
바로 이 지점입니다.
전후 사정을 보아 신은 카인이 행한 일을 몰랐을리 만무하지만 묻습니다. 그 물음에 대한 카인의 응답이었습니다.
카인은 아담의 장자였습니다.
성서이야기의 흐름은 카인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맥없이 죽은 아벨에게서 시작 된다는 선언이 바로 창세기4장 26절에 나오는 구절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셋도 아들을 얻고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어 불렀다. 그 때 에노스가 비로소 야훼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였다.>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배를 시작하면서 시작하는 성서이야기는 정말 아무 까닭없이 맥없이 형에게 맞아죽은 아벨의 피가 땅에서 외치는 소리를 듣고 나온 새로운 생명체 셋(신이 아벨 대신 아담에게 허락한 세째 아들)의 대물림인 에노스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에노스’란 ‘연약한 존재’,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바로 “인간”이라는 뜻이랍니다.
성서가 말하는 신 “야훼 하나님”은 바로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 그 곳에서 부터” 일하신다는 깨달음이랍니다.
“권력과 폭력”을 휘두르기 일삼고 “ 잡아뗌”에 능숙한 이들과, 오늘 아무 까닭없이 무시당하거나 목숨을 잃기까지 하는 지경에 다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많은 경우에 저처럼 이 두가지 경우가 공존하는 보통사람들에게 새롭게 다가가야 마땅할 창세기 이야기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