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에

똑 같은 일을 삼 십 수년 동안 이어오다 보면 대충 이골이 나도 단단히 나게 마련일 터입니다만, 해마다 맞는 첫 더위는 제겐 여전히 낯설고 일터의 하루는 몹시 길답니다. 제 일터의 환경은 예전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쾌적하기 그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바뀌었습니다만, 여전히 보일러 스팀 열기에 끈끈하게 습도 높은 첫더위의 후끈한 바깥 바람이 들어와 함께 노는 날의 세탁소 하루 일은 늘 그냥 처음 겪는 일인 듯 하답니다.

며칠 동안 이어지던 비가 그치고 난 뒤 찾아 온 첫더위를 또 그렇게 맞았답니다.

이런 날이면 혼자 중얼거려보는 말이 있답니다.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어느새 아주 오래 전 일이 되었습니다. 이강백이라는 떠오르는 신예 극작가가 있었습니다.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는 그의 작품 제목입니다. 그 제목의 연극 구경을 했던 날의 기억을 아직도 담고 있답니다. 솔직히 연극의 내용은 이젠 전혀 떠오르지 않습니다.

정동 세실극장이었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극장을 나서자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비닐 우산을 받쳐들었지만 겨우 머리나 적시지 않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정동에서 신촌까지 걸었었답니다. 제 곁에는 그 무렵 막 연애를 시작했던 아내가 있었답니다. 78년도였으니  그 사이 마흔 여섯 해가 흘러가 버렸습니다.

변덕스럽기가 날씨만 한 것이 어디 있겠느냐고들 하곤 합니다만, 따져 보면 그 보다 더 변덕스러웠던 게 제 삶의 걸음걸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뜰에 나와 앉아 오늘 하루와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게 하는 저녁바람은 아직은 시원합니다. 첫더위 타고 장미꽃이 활짝 피기 시작했습니다.

날씨에 따라 변하는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허나 이젠 날씨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들을 꼽고 쫓는 때에 이른 나이가 되었습니다. 신(神)에 대한 경외와 사랑, 사람 사랑, 내게 주어진 시간과 삶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이어지는 감사들.

24년 첫 더위에.

어느 덕담에

평생 동남아 선교 사역을 이어 오신 아니 지금도 이어 가고 계신 허춘중 목사님께서 제 가족 사진을 보시곤 덕담 한마디를 얹혀 주셨다. ‘두 분 옛날 70년대 모습이 있군요.’라고.

내가 그리 살지 못한 탓 때문일 터이지만, 젊었을 때 잠시라도 함께 했던 이들이 오롯이 한길, 외길을 변치 않고 걸어가며 늙어가는 모습을 보거나 듣노라면 그저 존경의 맘이 앞서곤 한다.

그이가 말한 ‘70년대’라는 말에 꽂혀 오늘 뜰 일을 하는 내내 내 스물 무렵이었던 70년대를 생각하며 잡초를 뽑고 꽃을 심었다. 신촌과 종로 5가, 서소문 거리과 골목을 헤매면서.

1970년대와 오늘 2020년대, 참 많이 변했다.

그 무엇보다 내 자신이 엄청 많이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옛날 그나마 푸르고 맑았던 우리 내외의 70년대 모습을 기억해 주시는 허목사님께 감사를.

70년대나 칠십 대 나이 오늘이나 <세상엔 사랑이 가득한 것 같지만 우린 여전히 외롭고 허전합니다.>, <사랑, 친절, 섬김의 본질과 순수성을 잃어버>린 현실 속에서 늘 깨어 살아가야 한다고 깨우쳐 주시는 호주의 홍길복 목사님.

세상 모든 것 다 변해도 <바닥이 하늘인 세상>에 대한 믿음은 변치 않을 것이라고 오늘도 외치고 사는 내 참 벗, 대전 대화동의 김규복목사님.

필라델피아에서 80년 광주를 알리기 시작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월호 가족, 이태원 가족들과 이 땅의 이민자들을 생각하며 사람사랑, 이웃사랑을 외치며 사는 김경지선생을 비롯한 오늘 이 땅의 내 친구들.

어느덧 우리 세대도 저무는 때를 맞는다만….

비록 오락가락 비틀거리며 살아온 나이지만, 변치 않고 오직 신에 대한 믿음, 사람살이 올곧은 방향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온 이들과 생각을 나누고 살아온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 뿐.

두어 주 전 작은 텃밭에 마구 뿌려 둔 상추 싹이 트기 시작했다. 꽃보다 아름답다던가? 새 싹을 바라 보노라면 늘 설렌다.

70년 대처럼. 암만, 화단엔 가을 국화도 새 싹이 올라오거늘, 내일에 대한 설렘만은…

시간여행 – 2, 우연(偶然) 또는…

돌아볼수록 신기한 일이다. 치밀한 계획은 커녕 어설픈 밑그림 조차 없이 엄벙덤벙 여기까지 왔건만, 지금 내가 누리는 삶은 온통 감사해야 마땅하다. 오늘 가게 손님 한분이 내게 건넨 말이다. “당신 얼굴이 참 편해 보여요. 휴가를 통해 넉넉한 쉼을 즐기신 것 같아요.”

  1. 고모님을 뵙고 온 지 겨우 한 나절 정도 시간이 지났을 새벽이었다. 사촌동생이 ‘어머님께서 떠나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튿날 아침 고모님을 모신 빈소를 찾았다.

문상을 마친 우리 내외에게 동생이 말했다. “저쪽으로 가시죠”. 동생을 쫓아 따라간 곳은 이웃한 빈소였다. 그곳엔 동생의 부인 제수씨가 상복을 입고 서 있었다.

그랬다. 사촌 동생 내외는 몇 시간 사이로 함께 떠나신 ‘어머니와 장모’ 또는 ‘어머니와 시어머니’의 장례를 함께 치루고 있었다.

2.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 내외는 얼기설기 어설픈 계획을 세웠었다. 만나야 할 사람들, 가보고 싶은 곳들, 먹고 싶은 것들을 나열한 그저 낙서 비슷한 계획이었다. 어찌어찌 그 어설픈 계획대로 시간을 보냈다만, 전혀 이루지 못한 것들도 있거니와 반면에 전혀 계획치 않았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곤지암 제법 깊은 산골에서 지낸 하루 밤은 전혀 계획치 않았던 우연이었다, 허나 그 우연이 우리 내외에게 베푼 여유로운 쉼은 오래 기억될 듯하다.

아내가 친구를 만나러 곤지암을 간다고 했다. 늦은 시간이었다. 나는 곤지암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찾아보니 우리들이 묵었던 숙소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전철을 타고 늦은 시간에 아내 혼자 거기까지 오가는 것이 무리다 싶어 함께 가기로 했다. 그렇게 나섰던 길인데 하루 밤을 거기에 묵게 되었다.

잠자리에 매우 예민한 내가 숙박업소 이외에 누군가의 집에서 하루 밤 묵은 일은 거의 몇 십년 만의 일이었다. 그 밤의 편안함과 이튿날 아침 누렸던 그 상큼함은 오래 간직될 듯. 아내의 오랜 친구 내외에게 깊은 감사를. 우연하게 누린 곤지암의 하루 밤에.

3. 내겐 나이 터울이 크게 뜬 사촌동생이 있다. 계획에 없던 일이었는데 그 동생을 만났다. 처음 만난 동생의 남편 곧 내 매제는 내 여행길 피로를 싹 가시게 하는 참 좋은 인상이었다. 동생 내외와 초등학교를 다니는 두 조카들을 보며 나는 마냥 사람 좋은 웃음을 닫을 수 없었다. 동생 내외가 우리 내외 서울 구경을 시켜주다 내려준 곳이 명동입구였다. 아하! 그렇게 우연치 않게 옛 젊음의 거리 명동을 아내와 팔짱 끼고 걸었다. 참으로 우연한 일이었다. 몇 십년 만에.

4. 따지고보니 신촌 대현교회 홍목사님을 비롯한 옛 친구들을  만나게 된 일도 그저 우연이었다. 우리 내외가 계획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이 나이에  누린 큰 복이었다. 그야말로 우연하게.

돌아볼수록 신기한 일 투성이다. 어찌보면 삶은 우연의 연속이다.

돌아와 생각하니 이젠 그 우연들의 뜻을 새겨야 마땅할 나이가 되었다.

어쩜 이제야 믿음의 첫걸음 내딛고 있는 게 아닐런지.

우연 또는…

믿음 아닌 물음에

연말연시라 고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저 하루하루의 연속일 뿐이다. 허나 단지 그렇게 치부하기엔 삶은 때론 지나치리 만큼 역동적이기도 하고 지루하게 늘어지기도 하는 법이다. 하여 순간순간 단락 지어 되뇌이며 사는 지혜를 터득한 사람들이 만든 결과물 또는 그 지혜를 허락한 신의 은총으로 낳은 게  월력이 아닐런지?

아무튼 이런저런 연말 어수선한 일들이 많은 어제, 한 주간의 일을 마치고 ‘필라델피아 민주시민모임’이 주최한 <10.26 참사 희생자 추모 및 윤석열 퇴진 촉구를 위한  모임>에 다녀 왔다.

생각이 엇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는 비록 처음 본 얼굴 일지라도 그저 즐겁다

오랜 벗들도 있고, 어제 처음 얼굴 마주 한 이들도 많았다. 어제 함께 자리하게 된 까닭들도 여러가지였다.

나는 그저 반갑고 만난 얼굴들이 고마웠다.

세상사 믿음이라는 엉뚱한 잣대로 재는 삶이 아니라, 내가 사는 삶, 내가 사는 시간, 나와 더불어 사는 우리를 묻는 물음으로 사는 얼굴들이 참 고마왔다.

엊저녁 멀리서 전해 드리는 위로가 참사 유가족들에게 전해지기를…. 하루가 다르게 뒷걸음질 하며 퇴행하는 내 모국(母國)을 위해 추운 날 거리에 나선 이들과 함께 하는 마음으로.

원컨데 넋 잃은 믿음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삶 바로 사람에 대한 물음으로.

옳은 싸움

내 어릴 적 성경을 심히 공박(攻駁)하는 사람들이 ‘모세가 백 이십 살까지 살았다는 게 말이 안된다’며 ‘믿음이라는 게 다 헛것이다’ 라고 하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암만, 당시만 해도 나이 칠십이면 정말 오래 살았다는 소리 듣던 시절이었다. 백세시대라고 하는 이즈음에 나이 백 이십이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거니와, 나이 칠십은 노년의 시작일 뿐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허나, 모든 믿음이란 게 각기 제 맘과 제 생각에 달린 일인 것이고, 나이 칠십이면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살만큼 산 것을 깨닫는 나이 아닐까? 어쩜 그게 내 믿음이기도 하고.

사실, 나이가 뭔 상관이랴! 예수처럼 서른 셋을 살든, 모세처럼 백 이십을 살든, 동박삭이처럼 삼천갑자를 살든 제 나름의 뜻에 따라 살다 가면 족한 삶이 아닐런지.

내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세상 어지럽기는 매양 마찬가지다만,  “내 힘이 닿는데 까지 끝까지 싸우다 갈거야.” – 그 맘과 몸짓으로 살다 가신 어른들 여럿 생각 나고, 오늘도 여전히 그리 사는 이들의 얼굴도 떠오른다.

그들의 싸움은 평화롭게 더불어 함께 살아갈 이웃의 지경을 넓히는 일이었으므로.

오늘도 제 힘 닿는데 까지 작은 싸움들을 이어가는 내 참 좋은 이웃들을 생각하며.

*** 내가 살았던 남쪽을 ‘겨울 공화국’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내 푸르게 젊었던 날들을 보낸 시절이었다. 이제 노년의 초입에 서서 그 남쪽이 ‘사기(詐欺)단 독재 공화국’으로 변한 모습을 본다.

허나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낙관적이다. “내 힘이 닿는데 까지 끝까지 싸우다 갈거야.”하는 민(民)이 있기 때문이고 그 민이 곧 신(神)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예견했던 일이다만 나도 조만간 이웃 필라 한인 상가 앞에서 촛불과 깃발 들고 싸움에 또 나서야 할 듯.

photo_2022-10-16_21-39-19

기도

1.
오랜만에 세탁물을 찾으러 온 그의 얼굴은 텁수룩하게 기른 턱수염 탓인지 매우 수척했다. “장사는 좀 어때?”라며 묻는 그의 목소리와 표정은 좀 공허했다. “뭐, 그저 그렇지만 아무래도 여름철이라 한가한 편…”이라는 내 대답에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 틈새로 아내가 그에게 물었다. “어떠세요? 부인께선….”

잠시 두 눈을 껌벅 이던 그가 입을 뗀 말, “떠났어요.”

나보다 몇 살 위인 Charlie는 삼십 년 가까운 내 단골이자 내 이민생활의 좋은 멘토였다. 큰 회사의 중견간부로 있다가 은퇴한 후 그와 그의 아내는 이런저런 병마와 싸우며 지냈다. 그는 지팡이를 벗삼아 내 가게를 들락이면서도 늘 여유로움을 잃지 않았었다.

어제, 아내가 세상 떠난 짧은 인사를 던지고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이 남긴 그 공허한 잔상이 아직 내게 이어지고 있다.

2.
이번 주말, 살아 생전에 후배들의 존경을 받으며 외길 걸었던 선배의 삼주기 기일을 맞아 필라 인근에 사는 그의 후배들이 함께 하려 했었다.
그러다 듣게 된 참으로 느닷없는 부음(訃音). 선배의 아들 노릇했던 아직 쉰 나이에 이르지도 못한 맏사위의 갑작스런 떠남.

그 부음을 알리는 선배 가족의 알림. “……..정말 통탄스럽게도……담에 연락할 때는 정말 더 밝은 소식으로 만나기 바래요.”

아직 내 속 아림이 이어지고 있다.

3.
죽음 앞에 서면 나는 예수쟁이가 된다. 더욱 예수쟁이가 되고 싶다. 죽음이란 단지 어딘가 닿을 또 다른 떠남이기에. 하여 오늘을 다시 되새기게 하는 종말론적 삶을 재촉하는 깨침이기에.

… Charlie와 선배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밤에.

믿음에

일요일 하루 쉼이 큰 축복으로 여겨지는 날이 있다. 그럴 땐 참 좋다. 주중 일터에서 마주하는 아침 하늘을 바라보며 속마음에서 감사가 일곤 할 때는 부끄럼이 따라오기도 한다. 내가 살아온 흔적에 비해 누리는 기쁨이 너무 큰 까닭이다.

어제 오후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만났던 무지개 뜬 하늘은 그야말로 경외(敬畏)였다.

무지개 – 성서 속 옛사람들의 고백이다.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 구름 사이에 무지개가 나타나면, 나는 너 뿐 아니라 숨쉬는 모든 짐승과 나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동물을 쓸어 버리지 못하게 하리라. When I send clouds over the earth, and a rainbow appears in the sky, I will remember my promise to you and to all other living creatures. Never again will I let floodwaters destroy all life. – 창세 9:14-15>

노아의 홍수 이후 성서 속 옛사람들이 고백한 신의 음성이다. 기억은 사람이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신이 잊지 않고 간직해 가는 것이라는 신앙고백, 바로 믿음이다. “내 계약을 기억하고…I will remember my promise…”의 주체는 내가 아니고 신이라는 바로 그 믿음.

모든 축복, 감사, 기쁨은 신의 기억을 전제로 한다는 생각에 이르면 그저 경외다.

무릇 믿음이란.

DSC03135A DSC03138b

믿음에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이후 달라진 풍경 가운데 하나는 온라인 모임인 zoom meeting의 일대 유행이다.

나는 온라인 모임 프로그램을 십 수년 전부터 사용해 왔다. 이즈음 유행인 zoom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한 프로그램을 이용했었는데 사용료는 월 120불 정도의 고액이었다.  미주 전역의 세탁인들과 정보를 나누고 대화를 잇는 목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사용했었다. 내가 세탁업으로 거부가 된 사람도 아니거니와 지식도 일천하지만, 그저 세탁업이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조금씩이라도 어제보다는 나은 세탁소를 운영해 가는 방법들을 함께 나누던 지난 세월 이야기다.

나이는 점점 들어가고 일이 힘에 부치기 시작한다는 생각에 하나 둘 일을 정리하면서 그 일도 접었다.

그래도 온라인 미팅은 이어와 이즈음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젠 나도 zoom을 사용하고 있고, 매주 한 번 모이는 모임에는 세탁인들이 아니라 필라 인근에 살며 세월호 가족들과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이 모인다. 나는 이들에게서 참 많은 것들을 배우며 산다.

팬데믹 이후 아내가 나보다 zoom meeting을 더 많이 사용한다. 한국학교 수업 및 교사회의, 이사회, 한인회 등등 이즈음 아내는 가히 유행 따라 산다.

아내가 참석하는 온라인 모임 가운데 옛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이 있다. 일주일에 한 차례 모이는 이 모임이 시작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어린 시절에 교회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족히 사십 년 넘는 세월이 흐른 후 화상으로 얼굴 맞대고 만나는 모임이다.

카톡 등으로 간간히 서로 간의 소식을 주고 받던 친구들 가운데 한 친구가  중한 병을 얻었단다. 그 친구를 위해 서로 기도해 주자고 시작한 온라인 모임이란다. 그렇게 한 주간 한 차례 씩 모여  함께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며 사십 여년 만나지 못하고 살아 온 지난 세월들의 이야기도 나누곤 한단다.

그 친구들 몇몇은 나도 익히 기억하고 있다. 아내와 나는 한 교회를 다녔고 내게는 사 년 후배가 되는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그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 또래 친구들을 생각했다.

한 해 후배인 종석이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난 말이유,  어릴 때 주일학교라도 다녔기에 요만큼이라도 살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우.’ 그를 본 지도 어느새 십년이 흘렀다. 그가 은퇴를 코 앞에 두고 있던 때였다.

최근 몇 년 사이 노부모들이 연이어 병상 생활을 하시다 한 분 두 분 떠나시며, 먼 여행길은 한 해 두 해 미루어져 왔다. 이즈음엔 한 분 홀로 남으신 아버지 얼굴 한 번 들여다 보는 일이 일과이다. 더더우기 지루하게 이어지는 팬데믹 까지 한국 여행은 이젠 계획에서 멀어졌다.

나는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옛 벗들을 생각한다.

어찌 보냈건 흘러간 세월들에 감사를, 어떤 연으로 잇던 오늘의 소식들에서 서로 간에 위로를, 지나간 세월에 비해 턱없이 짧을 내일에 대한 소망과 희망을 나누는 만남들이 되기를 빌며.

믿음이란 딱히 극적일 까닭도 없고 절벽 끝에 서야만 만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므로.

우리 부부가 다니던 교회 이름은 대현大峴교회. 큰고개(大峴)에서 함께 뛰놀던 옛 벗들을 생각하며.

(십년 전, 딸아이와 함께 찾았던  옛 시간은 지금도 소중하다.)

어느 하루

‘오늘 교회하고 예배 어땠어?’ 엊그제 딸아이가 던진 물음이다.

어제 낮에 내 일터로 전화를 한 장인은 말했다. ‘외출하고 돌아오니 뭔가 좀 이상해. 여기 반란이 일어난 거 같아!.’ 장인이 장기 요양원에서 꼼작 않고 누워 계신지는 이미 몇 달이 지났다.

엊저녁엔 일을 마치고 돌아와 귀가 전화 인사를 드리는 내게 어머니가 물었다. ‘너 오늘 일 안나갔었니? 아까 너희 집에 들렸더니 네 차가 집 앞에 있더라.’ 어머니 역시 누군가의 도움없이 집을 나서지 못하신지 여러 달 째이다.

장인이나 어머니나 이즈음 정신이 많이 오락가락 하신다. 때 되어 겪는 수순이다. 아직 정신이 맑으신 아버지도 기분이 크게 오락가락 하시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저런 연유로 딸 아이에게 한 번 간다 간다 하면서 미루다 큰 맘 먹고 길을 나선 게 엊그제였다. 모처럼 나선 길에 아들 내외가 함께 했다. ‘올라 가마!’라는 내 말에 딸아이가 ‘어디 가고 싶은데 있느냐?’고 물었었다. 나는 아이가 다니는 교회엘 한번 가보고 싶었다.

아들 내외가 다니는 교회엔 가본 적이 있지만 딸아이가 다니는 교회에 대핸 그저 아이의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었다.

멋진 brunch에 이어진 교회 안내, 예배 후 Brooklyn Bridge 걷기와  인근 상가와 강변 안내 그리고 풍성한 저녁 식탁, 오가는 교통편 까지 딸아이의 준비와 배려는  매우 세심하고 고왔다.

서울내기인 내게 도시는 어느새 낯선 곳이 되었다. 높고 복잡하고 소란스러움 속에서 졸음이 자꾸 밀려왔다.

DSC05815DSC05820DSC05821DSC05822DSC05829DSC05845

DSC05889

사람사는 곳엔 어디나 사람들의 일상이 있고, 그 일상에 녹아 있는 아름다움도 있을 터.

DSC05819DSC05853DSC05866DSC05887DSC05888DSC05892DSC05899DSC05941DSC05944

그 복잡한 도시에서 우리 가족이 저녁상을 함께 나눈 곳은 ‘초당골’이었다. 딸아이는 그 ‘초당골’에서 내게 물었었다. ‘오늘 교회하고 예배 어땠어?’

소주 한 잔에 풀어진 나는 아이들에게 말했었다.

DSC05971

‘오빠 내외가 다니는 교회나 네가 다니는 교회 예배 형식과 분위기는 솔직히 아빠 취향은 아니란다. 그런데 그게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고 중요하지도 않다고 생각해. 믿음을 표현하는 방식엔 정말 여러가지 많은 것들이 있겠지. 그 여러가지들을 인정하면서 자유로워지는게 진짜 믿음이라고 아빠는 생각해. 주일 하루 예배가 일주일 동안 너희들이 사는 일에 기쁨이 된다면 좋겠어. 그런 뜻에서 오늘 참 좋았어.’

흔쾌히 하루를 함께 한 아들과 며느리, 딸아이가 고개를 끄덕여 주어서 얼마나 고마웠던지…

DSC05859DSC05964DSC05912DSC05947DSC05797

언제나 그렇듯 웃음은 아내로 부터 이루어졌던 하루를 새기며.

DSC05924

 

 

연식年食

이젠 조금 과한 노동은 버겁다. 예전에 비할 바는 아니나 그래도 메뚜기 한철이라고 가게 빨래감이 밀린다. 바쁘게 움직이다가 문득 가게 밖에 머문 가을에 끌려 일손을 멈추고 하늘을 담다.

DSC03525

먼저 떠난 어느 천재는 신은 없다고 했다지.

DSC03530

세탁쟁이인 내가 천재의 고뇌와 고백에 고개 끄덕일 수 있음은 그만큼 연식年食이 쌓였다는 증표다. 허나…

DSC03526

그가 신의 자리에 올려 놓은 ‘자연발생적 우연’에서 나는 신을 고백한다. 그런 내 모습에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 또한 살아온 연식 탓에.

DSC03510

일테면 사람과 신 사이에서 제 배 채우는 이들이 말하는 신은 없음에 분명하고…

DSC03514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이들이 도움을 청하며 부르는 이름의 신은 분명 있음으로.

DSC03531

하늘을 담는 내게 오늘에 대한 감사를 토해 내게 하는…

DSC03518

오늘 낮에 내겐 신이 함께 했다. 내 일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