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無知)에

그림에 대해 나는 문외한(門外漢)이다. 내가 모르는 게 비단 그림 뿐만이 아니겠지만, 그림에 관한 한 거의 완벽할 정도로 무지 무식한 편이다. 이런 나의 무지 무식을  종종 고등학교 때 미술 선생 탓으로 돌리곤 한다. 나는 그를 거의 선생으로 여기지 않았는데 딱히 그에게 엄청 두들겨 맞았던 기억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수업 시간은 아주 독특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미술시간은 일주일에 두시간이었다. 한시간은 그림을 그리는데, 미처 못다 그린 그림은 다음 시간까지 숙제로 남았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엔 열 명 씩 교단에 올라가 서서 각자가 그린 그림을 들고 서서 그의 평가를 받았다. 그는 우수 가작 선외 낙선 등으로 학생 하나 하나의 그림을 평가했는데 내 그림은 언제나 선외 거나 낙선이었다. 물론 그에게 엄청 두들겨 맞은 이후에 받은 평가들이다.

약이 오른 나는 옆 반 친구가 우수작 평가를 받은 그림을 빌려 들고 평가를 받았었는데 여지없이 그는 ‘낙선!’이라고 외쳤던 것이다. 그날 이후 그는 내게 더 이상 선생이 아니었다. 물론 그림 역시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되었다.

그저 내 기억일 뿐, 내 타고난 솜씨 없음이나 게으름에서 오는 무지 무식을 가리려는 수작 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제 아무리 유명하다는 그림 앞에서도 아무 생각이 없다. 그게 잘 그린 건지, 못그린 건지, 왜 유명해졌는지 등등에 대한 느낌 자체가 없다는 말이다.

이따금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을 찾아 그림 앞에 서기도 한다만, 솔직히 그저 사치일 뿐이다. 그림에 대한 아내의 식견 역시 내 수준을 크게 웃도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한 성격의 아내는 그림이나 미술 그 자체를 있는 대로 즐기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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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을 찾은 일도 미술이나 예술에 밝아서가 아니라 파리에 가면 한번은 들려 보아야한다는 사치성 발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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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한가지 제법 위대한 발견을 하게 되었다. 그림과 그림 사이에 다름을 발견한 것이었는데, 사실 눈 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알아챌 수 있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나도 그림 보는 눈이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일대 사건이었다.

그림들이 시대순으로 주욱 전시되어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림들의 색감, 구도, 인물의 표정 등등이 확연하게 다름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어서 이미 지나 오며 보았던 그림들을 다시 보았었다.

명암이 극도로 대비되어 밝은 쪽에 있는 탐욕스런 얼굴들과 어둠 속에 있는 찌든 얼굴들, 종교에 얽매어 찌든 시대 곧 중세의 그림들과 사람 사는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표현되어가는 르네상스 이후 시대의 그림들의 차이는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그 그림들의 대비는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된다.

사람들이 살아 온 모습들을 보면 미술이나 예술 쪽은 비교적 진보가 빠른 편이다. 종교적 틀이나 제도를 벗고 신 앞에 홀로 선 신앙인을 내세웠던 키에르케고르가 고민하던 시대는 19세기이고, 그가 사람들에게 인정 받은 일은 20세기였다. 그리고 21세기인 오늘에도 여전히 중세로 살아가는 이들은 차고 넘친다. 종교에.

종교 같은 이념도 공허하거나 더디기는 마찬가지다.

남북한 정상회담 이후 오래 전에 유행하던 데탕트(détente)라는 말이 뉴스에 등장하고, 각종 해설과 의견들이 쏟아진다.

남북, 북미, 한미 또는 일 중 러 등등의 문제들에 너나없이 모두 해박한 지식들이 넘쳐나는 이들의 소리가 높다. 솔직히 허공을 치는 공허한 소리들이 넘친다.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불트만 등등의 서구 생각들을 두루 섭렵한 이후 예수 곧 종교란 민중이 주인이 되어 일으킨 사건이라고 주창한 이는 안병무선생이다. 예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새 시대를 이루는 주인공은 민중이라는 선생의 선언이었다.

쏟아지는 신 데탕트 뉴스 속 진정한 주인공은 민중이요, 시민이요, 인민 이어야 한다. 분단에 얽매어 찌든 시대를 벗고 진정 자유롭게 홀로 서서 떳떳한 나라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이들은 바로 인민이요, 시민이요, 민중 이어야 한다.

무지하거나 무식한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다. 분단의 굴레를 벗어내야 한다는 생각 하나 만으로 족할 따름이다.

그 생각 하나 세우려고 70년을 헤맨 일인데 그리 서두를 일도 아니다. 제 생각 하나 바르다면.

내 무지한 생각으로.

민중의 적

하늘이 내린 이틀 연휴였습니다. 비록 눈치우노라고 다섯시간 가까이 운동 아닌 노동을 하였지만 넉넉한 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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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덮힌 동네 한바퀴를 돌고나서 입센(Henrik Ibsen)의 희곡 “민중의 적( An Enemy of the People)”을 읽었습니다.

예상되는 눈폭풍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강설량을 비롯한 하늘의 변화를 거의 분단위로 미리 알아 맞추어 사람들에게 대비케하는 21세기에, 19세기말 작가의 작품이 가당키나 한 것이냐는 생각도 없지 않았답니다.

읽고난 후의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사람 사는 일 또는 사람이란 참 변하지 않는 구석과 변하더라도 더디게 정말 더디게, 수천 수만년을 겪어야 변하는 것들이 있구나”하는 생각이었습니다.

19세기말 노르웨이에서 그 당시 세계, 곧 유럽이 중심이었던 세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불었던  예술 운동의 하나였던 리얼리즘(realism)을 내세운 입센의 작품 가운데 하나인 ‘민중의 적’은 바로 변하지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리얼리즘적인 작품이었습니다. 현실주의(現實主義) 또는 사실주의(寫實主義)라고 번역되어지지만 그저 사람사는 일들을 사진 찍듯 표현한 사실(寫實)적인 희곡입니다.

정말 간단히 작품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주인공인 스토크먼은 자기가 사는 동네 발전에 유익하다고 선전하며 강행되고 있는 사업인  온천개발 사업이 사실상 오염된 온천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건 아니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돈에 눈이 먼 지역 이기주의들<권력(시장을 비롯한 행정, 정치권력), 언론권력, 일반인들(민중들)>에 의해 ‘민중의 적’으로 낙인찍히는 과정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민중을 위해 나선 주인공이 민중의 적이되는 과정을 그린 것이지요.

작품속에선 민중을 향한 두개의 서로 다른 목소리를 이렇게 전합니다.

스토크만: 내겐 진실이 있고 민중이 함께합니다. 온천은 오염됐으며 정치도 썩었다고 외치겠습니다.

시장(mayor): “이 나라는 지금 파산 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어쩌다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모두 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정의를 외쳐대는 사람들 때문이 아닙니까? 행정 당국이 파괴되면 남는 게 뭡니까? 혁명과 혼란을 원하십니까?”…. “난 5년 안에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을 세계 최고의 부자 시민으로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장하는 대로 온천의 작은 문제를 확대하고 과장하여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민주적 권리’를 주장해도 되겠습니까?…. 죽느냐 사느냐를 가르는 선은 분명하게 그어져야 하고, 누군가 그 선을 넘을 때는 우리 민중은 그자의 목덜미를 움켜쥐고는 ‘안 돼!’라고 단호하게 선언해야 할 것입니다.”

스토크만: “‘다수’가 깨닫기 전에 먼저 한 사람의 ‘소수’가 알아야 하는 게 아닙니까? 진리는 언제나 같습니다. ‘소수의 권리’는 ‘다수’에게 공격을 받더라도 신성한 것입니다. (시장이 ‘저자의 입을 막으라’고 소리친다) 모두 알아두셔야 합니다. 온천물은 오염되었습니다.

주민들(민중): “오염이란 말 한마디만 더 하면 가만 안 둔다!” “이 동네에서 살기 싫으면 짐 싸가지고 조용히 떠나라!” “저놈을 체포하라!” “저놈은 간첩이다!” “적이다, 적! 적이다, 적! 강물 속에 쳐 넣어라!” “적이다!배반자! 반역이다!”

그리고 이제 민중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적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제가 “민중”이라는 말을 배운 것은 서남동, 안병무 목사님들에게서 입니다.

특별히 안병무선생님께서는 “민중이란 예수”라고 말씀하셨던 분입니다. 그는 예수란 어떤 개인적 인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인격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신 어른입니다. 민중과 예수는 더불어 함께라고 하셨습니다. 민중이 곧 예수라고 말한 이였습니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건’들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쯤 흥미로운 것은 예수는 바로 입센의 ‘민중의 적’에 나오는 ‘민중’들의 외침 곧 “저놈을 체포하라!” “저놈은 간첩이다!” “적이다, 적! 적이다, 적! 강물 속에 쳐 넣어라!” “적이다!배반자! 반역이다!”라는 소리에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事實)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실(寫實)적으로 믿는 것은 신앙입니다.

내가 눈이 내리는 이곳에 사는한 겨울이면 눈은 내릴 것이고, 눈을 치울 힘이 있는한 눈을 치우며 살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있는한 누구나 때론 민중이 되기도 하고 민중의 적이 되기도 하며 살 것입니다.

그리고…

무릇 신앙이란 결단이어야 합니다. 민중이라는 말 없이도.

30년만에 만나는 자리에 당신을…

라디오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이 흘러나온지도 벌써 여러날 되었습니다. 이렇게 올 한해도 서서히 저물어 갑니다. 이번 주간엔 한해에 대한 감사(thanks)를 드리는(giving) 날인 Thanksgiving Day를 맞습니다. 한해의 감사를 드려야만 할 대상들을 꼽아보는 일도 제법 뜻이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는 아침입니다.

제 자신과 가족들이 드려야할 감사의 내용들과 드려야할 대상들을 헤아려봅니다. 꼽자하니 꼬리를 잇습니다.

그러다 올 한해 제 마음이 자꾸 흐트러질 때마다 붙잡아 주었던 옛 선생님의 말씀 하나 떠올려봅니다.

올 한해 동안 제 마음이 자꾸 흐트러져 일상을 벗어났던 까닭은 “내가 이제껏 잘못 생각하고 살아온 것이 아닐까?”하는 물음 때문이었습니다. 일테면 그것은 제 신앙적 물음이었습니다.

이즈음에 이르러 오만하거나 무지한 자들에 의해 거의 “빨갱이들의 언어”로 규정지어지는 듯한 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민중”입니다. 이 “민중”이란 말은 어찌보면 제가 살아오면서 (비록 가까이 하지도 못했고, 스스로 그 범주에서 자꾸 벗어나려고 애써왔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겠지만) 꼭 붙잡고 싶었던 화두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제가 이해하고 믿는 성서의 가르침 탓인데, 올 한해 그 이해와 믿음이 자꾸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를 추스리고 깨우쳐주신 선생님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바로 “민중과 함께 했던 예수”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안병무목사님은(1922-1996) “민중이란 정치, 경제, 문화, 종교 할것없이 ‘어떤 체제로부터 버림받고 밀려난 소외계층’이다.”라고 말씀하셨고, “그리고 그 민중이란 오늘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그때 그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객관화시켜 절대화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라고 가르쳐 주셨답니다.

바로 2015년 오늘, 소외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민중들이고, 그 소외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이들이 민중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비록 2015년의 제 삶이 민중적인 것이 아니고, 민중과 함께하는 삶도 아니였지만, 그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흉내라도 낸 까닭은 바로 안목사님의 가르침이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 감사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이해와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성서를 손에 들고 질문하게 했던 신앙에 대한 감사입니다.

세월호 유가족들, 나그네나 이방인으로 이민자로 살아가는 사람들. – 모두 2015년 감사절에 위하여 기도해야만 할 민중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30년 넘는 세월동안 흔들림없이 민중들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꿈꾸며 외길 걸어온 벗을 소개 드립니다. 저도 30여년만에 이 친구를 처음 만납니다. 헤어져 만난지 30년이 넘었지만, 그가 서 있는 곳에서 한결같이 첫 마음 그대로 “어떤 체제로부터 버림받고 밀려난 소외계층”과 함께 하고 있는 김규복목사입니다. 그는 오늘도 함께하는 이들에게 ‘희망과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희망과 소망으로 산다는 것은 오늘 이 자리에서 내일을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을 초대합니다. 뜻깊은 2015년Thanksgiving이 되리라는 생각으로…

김규복목사 초청 온라인

제목 : 한국내 이민 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정

일시  : 2015 11 24() 오후 9오후11(미국 동부시간 기준)

장소 : 온라인 모임방https://zoom.us/j/6998016922  ) – 당일(11/24) 오후 8시 50분부터 입장 가능합니다. 녹색 글씨 링크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필라 세사모에서 당신을 온라인 강의에 초대합니다.

Join from PC, Mac, Linux, iOS or Android: https://zoom.us/j/6998016922

Or join by phone:

+1 646 558 8656 (US Toll) or +1 408 638 0968 (US Toll)

Meeting ID: 699 801 6922

참조 : http://conta.cc/1Lrc3ug

김규복목사 약력보기 (http://www.seomna.or.kr/page/m1s2.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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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이주민과 함께하는 모임> 사진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