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와 의무

아직 TV토론은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 돌아오긴 한 모양입니다. 투표 장소와 투표 일정을 알리는 안내우편을 받고서 든 생각입니다. 시민으로서 누릴 권리를 행사하라는 안내입니다.

Polling Card

며칠 앞으로 다가온 Jury service 는 시민으로서의 의무입니다.

권리든 의무든 일상에 매어사는 시민들에게는 때론 거추장스러운 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저처럼 자영업자들에겐 그 거추장스러움이 더할 수도 있습니다.

Jury Service

이번이 세번 째인 배심원 의무는 그 통지를 받은 날부터 묵직한 스트레스가 함께 한답니다. 행여 배심원으로 선택되어 며칠 동안 시간이 뺏기는 것은 아닌지 하는 염려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지난 두 차례 배심원 소집에서는 모두 하루 시간이 동원되는 것으로 끝났는데 이번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투표에 이르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의무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고, 의무를 다하지 않을 때는 불이익 또는 벌칙을 감당해야 하지만, 권리란 나의 의지에 달린 일이므로 행사를 하지 않는다 하여도 당장 어떤 불이익을 당하거나 벌칙이 주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살 때 국가공동체에게 의무를 다한 것은 병역의 의무였습니다. 만 31개월 며칠 동안의 군생활과 거의 10여년에 가까운 향토예비군 의무를 다한 것이지요.

한국에서 대통령선거를 해본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살 때는 저처럼 보통 시민들은 대통령을 직접 선택할 권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무렵부터 한국을 떠날 때까지 대통령 선거는 이른바 체육관 선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인지는 몰라도 여기와서는 의무는 의무대로 권리는 권리대로 시민으로서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들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종종 한국내 선거 풍토에 대한 절망감을 토로하는 글들이나 이야기들을 보거나 들을 때가 있습니다.

지나간 일(역사)들을 뒤돌어볼치면 여기나(미국) 거기나(한국) 매한가지 아닐까 합니다.

19세기가 끝나갈 무렵의 조선은 패망 직전이었습니다. 그 무렵의 미국은 동(뉴욕)에서 서(샌프랜시스코)까지를 완전 통합하고 세계 판도의 새 주역으로 떠오를 때였습니다.

그 무렵의 미국의 모습을 앙드레 모로아는 그의 미국사에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실리주의적인 모사꾼들이 정치에서 주로 한 가지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것은 어떻게하면  헌법, 의회, 주정부 그리고 시청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유혹은 크고 허술했기에 사업가가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정치인에게 이익의 일부를 제공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 중략 – 각 주의원들의 소행도 별로 나을 게 없었다. 연방의회마저 대사업가의 이익을 대표해 선출된 의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시대에 미합중국의 첫째가는 위험 요소는 파렴치였다.”

오늘이라고 뭐 크게 달라진 게 있겠습니까만, 앙드레 모로아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런 사족을 달았답니다.

“아메리카의 민주주의는 실패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다만 아메리카의 민주주의가 너무 빨리 성장하는 바람에 법률과 도덕이 뒤따르지 못했을 뿐이다.”

사람 – 곧 시민들의 깨우침을 요구한 것입니다.

19세기나 21세기나, 미국이나 한국이나, 언제 어디에서건 여전히 유효한 권리와 의무에 대한 시민들의 깨우침입니다.

우리들의 상식(常識)

<민주주의적 자유와 비판의 권리가 일반적으로 확립되지 않은 사회에서, 그 소수자 권력의 이익에 상응하는 사상, 가치관의 신념체계는 ‘특수주의 이데올로기’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반대되는 신념체계, 즉 다수를 위한 그것을 ‘보편주의 이데올로기’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비민주주의적 사회에서는 그 특수주의 사상이 그 사회의 ‘공인(公認)’ 또는 ‘제도적’ 사상으로, 그리고 보편주의 사상이 ‘이단적(異端的)’ 또는 ‘비판적’ 사상을 구성하게 된다. 이 두 입장이 적대관계냐 협력관계냐 하는 것은 주로 그 공인, 제도적 사상과 입장의 관용도에 달려 있다.

권력층의 세계관과 정치적 성숙도가 높을수록 ‘이단적’, ‘비판적’ 사상 및 입장의 정당한 가치와 기능을 승인하며, 양자간의 부단한 변증법적 통일을 발전의 계기로 이용할 줄 안다. 그 사회의 구성원이 합의하는 궁극적 목표와 이상을 공유하는 한, 그 양자는 동반자이지, 적이 아니다.

‘공인’사상과 ‘비판’사상간의 이 모순관계를 항구적으로 협조, 통일 및 발전의 관계로 활성화하게끔 제도화하는 장치가 민주주의임은 우리의 상식에 속한다. 한 사회의 생존과정에 개제하는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 그 쌍방의 입장, 관점, 접근 방법이 다를 수 있다. 그럴수록 발전의 잠재적 범위는 확대되게 마련이다.>

돌아가신 리영희선생님께서 1980년에 쓰신 <민주주의와 진실의 추구>라는 글의 한 대목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민주주의를 정의하시며 그저 1980년 현재 ‘우리들’의 상식에 속하는 문제라고 지적하며 여러 다른 생각과 사상들 곧 다양성이야말로 민주주의 발전의 자양분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1980년은 광주 민중항쟁이 일어난 해이고, 당시 자연 변화까지 주관한다는 뉴스 멘트를 받았던  전두환이 권력의 정점에 오른 해이기도 합니다.

선생은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이렇게 단언합니다.

<’반공법 적용에 있어서는 정부 대리인이 위반이라고 해석하면, 그것이 결정적 판단이다. 피의자는 다만 그것에 복종할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중략-

관료의 판단은 절대적인 것이다. 이 법과 그 운용에 관한 한 그것은 공인사상과 체계적 특수 이데올로기의 ‘신성불가침’으로 되어버린 감이 없지 않다. ‘절대화’의 규범을 넘어서 하나의 ‘종교’가 되어버린 채, 일체의 반대도 비판도 허용치 않으려 한다. 이것이 한 법률의 종교화라는 뜻이다.>

그로부터 35년이 흐른 2014년도 저물어 갑니다. 참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2014, 2015몇 주전인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는 모임을 통해 만났던 이의 소리는 2014년과 함께오래 기억될 듯합니다. 그녀는 장난감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예쁘장하고 똘똘하게 생긴 세살 아이를 둔 30대 젊은 엄마입니다.

“그 동안 저는 내 모국(母國)이 자랑스러웠답니다. 정말 짧은 시간에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게다가 민주주의를 그렇게 빨리 정착시킨 나라도 없다는 그런 자부심을 준 모국이었답니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과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뭐랄까요, 부끄러움이랄까요, 안타까움이랄까요, 그냥 이건 아닌데…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아요. 그래 모국을 위해 뭔가라도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해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리영희선생이 “우리들의 상식(常識)”이라고 말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는 1980년 당시의 대한민국의 ‘비상식(非常識)’적인 모습에 대한 한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비상식적 모습으로 2014년을 보내는 한반도 남북의 모습에 이는 안쓰러움과 그나마 나은 게 있다면 그래도 몇 십년 동안 이루어낸 다양성이 보장된 남쪽이라는 생각마저 잃게하는 분노가 쉽게 가시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상식(常識)”이 이루어지는 날을 꿈꾸며 아주 작은 일이라도 쉬지않고 꾸준히 노력하려는 다짐으로 2015년 새해를 준비해야 할 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