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추석, 그리고 어느 민란

삼의사2“여기 세우는 이 비(碑)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식이 될 것이다.” – 대한민국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있는 제주대정삼의사비(濟州大靜三義士碑)에 적혀있는 비문입니다.

어느새 잊혀져가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어록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유족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그가 한국땅을 이륙한 비행기 안에서 “세월호 추모 행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답으로 던졌던 말입니다.

그리고 며칠후 천주교 서울 대교구장인 염수정추기경은 “(세월호 참사)가족들이 생각하는대로 이루워지면 좋겠지만 어느 선에서는 양보해야 서로 뜻이 합쳐진다.”라는 말로 잠시 뉴스 촛점 인물이 되었었습니다. 마치 교황과는 뜻이 다른듯한 뉴앙스를 풍기는 말이였기 때문입니다.

염추기경의 발언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있는 가운데 눈에 뜨인 글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오마이뉴스에 실린 백찬홍의 주장 “박근혜 편드는 염수정 추기경, 프란치스코 교황 때문?”입니다.

자신(염추기경)의 재임시 남길 또는 남겨야할 업적에 대한 욕심(?)때문에 권력지향성 발언을 했다는 내용입니다.

염수정추기경은 제14대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겸 평양교구 교구장 서리라는 직함을 갖고 있는 이입니다. 한국천주교 또는 서울대교구하면 떠오르는 상징은 명동성당입니다.

천주교인도 아닌 제가 명동성당을 들락거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1978년 이 무렵이었습니다. 오원춘사건 또는 안동교구 카톨릭농민회 사건으로 알려졌던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해 8월 말,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카톨릭 농민회 사건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특별조사령을 발동했을만큼 권력과 천주교가 일대 맞싸움을 벌였던 큰 사건이었습니다. 카톨릭을 빨갱이로 몰았거니와 명동성당을 들락거리는 것만으로도 불순세력이 되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후 고작 일년이 조금 지나서 박정희는 끔직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명동성당 – 한국천주교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상징입니다. 그 명동성당을 세운 사람은 민덕효(閔德孝)입니다. 본명이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인 프랑스 신부입니다.  그는 명동성당 건립뿐만 아니라 신학교 건립 등 한국천주교 발전에 지대한 공로를 남긴 이입니다.

그가 남긴 일기 몇 구절을 인용합니다.

“토마스(안중근)의 사형 집행이 26일에 있었다. 일본인들은 그 시신을 유족에게 넘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나를 붙잡고 나라가 이렇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울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하고 정말로 무서운 모습이었다. 마침내 그들에게 질서를 지키라고 간청했고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신학교를 떠나라고 했다.”(3.1운동 당시 천주교 신학생들을 언급하며 남긴 일기)

그의 일기에서 보듯 그는 조선의 독립을 반대하고 독립운동가들을 밀고하기도 했던 철저한 친일주의자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친일행각은 바로 그가 생각하는 한국천주교의 발전, 또는 천주교의 발전에 닿아 있었던 것입니다.

염수정추기경의 발언에서 떠올린 뮈텔 곧 민덕효신부였습니다.

그(뮈텔)가 제 8대 조선교구장으로 있던 때인 1901년 제주도에서는 큰 민란이 일어납니다. 이 민란으로 약 300명이 넘는 천주교도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이를 ‘제주신축교란(濟州辛丑敎亂)’이라고 부르는데 ‘이재수의 난’으로 알려진 민란입니다.

제8대 조선교구장인 뮈텔이 제주도에 프랑스 선교사 페네와 그의 보좌로 조선인 김원영신부를 파견하여 제주에 성당을 건립한 때는 1899년 5월이었습니다.

그리고 약 일, 이년 사이 제주도에 새로 늘기 시작한 천주교도들은 당시 제주도의 권력자들과 손을 맞잡고 행세를 부립니다. 물론 천주교도들의 뒤에는 프랑스라는 외세의 힘이 있었습니다. 아주 짧은 기간동안 제주도에서 천주교도들이 저지른  살인, 강간, 유부녀 윤간 등 악행과 만행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일설에 따르면 이들은 진정한 천주교인들이 아니라 당시 권력과 배를 맞춘 현지깡패들이 행한 일들이라고도 합니다.

천주교도(또는 교도를 빙자한 이들)들의 만행과 이들을 보호하는 권력에 항거하여 일어난 민란이 바로 이재수의 난입니다.

이재수를 비롯한 민란의 주인공들은 제주를 장악하고 삼백명이 넘는 천주교인들과 프랑스 신부들을 참수(斬首)합니다.

이에 프랑스 군대가 움직입니다. 제주도에 프랑스군대가 들어오자 깜작놀란 조선조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경에 빠집니다. 민(民)을 향해  큰소리치고 각종 조세를 부과하며 군림하던 모습은 간데없이 외국군대 앞에서 속수무책인 조선조정이었습니다.

노예-관노(官奴)- 출신이었던 이재수는 프랑스군대에 짓밟힐 제주도민들을 생각하며 약 일만 여명에 달했던 민란의 주인공들인 저항군을 자진 해체하고 자신은 자수를 합니다. 그리고 그해 10월 9일 사형을 당합니다.

후에 제주의 시인(詩人) 문무병은 이 사건을 “날랑 죽건 닥밭에 묻엉…”이라는 장시로 풀어 놓습니다.

그 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재수는 긴 한숨, 뜨거운 눈물을 마셨다.

끝까지 싸워야 한다. 그러나 장두(장수)는 외로웠다.

뿔뿔히 흩어지는 군중들. 그러나 당당하게

재수는 관덕정 마루에 올라 외쳤다.

어르신네들, 내 말 들읍서.

이제 우리의 꿈은 이루어집니다. 싸움은

이 한 목숨 버리면 그만이주마는

태 사룬 땅에 의지가지 없는 것들 배곯아 울고,

늙은 할망은 병들어 누었우다. 우리가

오늘, 이 다 이긴 싸움을 그만 두는 것은

배고프고  병든 식솔들을 살리는 일이고

조상의 땅을 지키는 일이라마씸

다들 집으로 돌아갑서, 헤어지는 마당에

서러운 것은 이 한 목숨 아깝지 않으나

저 불국(프랑스) 잡귀들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될 뿐이우다. 다시는 우리 땅을

아무도 범접하지 못할 거우다. 이 재수의 눈알은

죽지 않고 살아서 제주땅을 넘보는

축산이들을 지켜볼꺼우다. (축산이: 저승도 못가고 떠도는 배고픈 원귀)

날랑 죽건 펄에다 묻어 줍서.

날랑 죽건 닥밭(닥나무밭)에 묻엉… >

 (*** 이 시에서 닥나무는 양반을 비유해서 쓴 말입니다.)

삼의사 1그리고 그들을 기려 세운 비(碑)가 바로 제주대정삼의사비(濟州大靜三義士碑)입니다.

2014년 음력 팔월 한가위, 대한민국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이 명절을 기리는 세월호 집단 생수장 사건의 피해 유가족들에 대한 소식을 보며 떠올린 우리네 지난 이야기 하나였습니다.

당시 조선(대한제국) 조정처럼 광장의 유가족들을 이제 곧 흩어질 “이재수의 무리”로 여기는 대한민국의 권력가들을 생각하며…

조선민국9 – 민란2

프랑스혁명은 인류사에 있어 분명 하나의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습니다.  혁명이 일어나게 된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거니와 그 과정을 통해 사회 질서의 커다란 변화도 겪었고, 혁명의 결과에 따라 세계사의 물결이 커다랗게 출렁이었습니다.

프랑스대혁명(1789.7.14 – 1794.7.27)을 전후로 한 한 세기 동안의 유럽과 프랑스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 전에 혁명의 주요 원인과 결과 가운데 한가지를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고 넘어 가려고 합니다.

혁명의 큰 원동력 가운데 한 축은 “배고파 이대로는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대부분은 문맹자들이었고, 좋게 말해서 평민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프랑스를 떠바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숫자로는 당시 전체 인구의약  90%를 넘어서는 그야말로 주류였습니다. 그들의 노동과 세금으로 국가가 지탱해 나가고 있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프랑스혁명

이들은 프랑스 혁명의 시발과 과정에서 아주 주요한 한 축이였거니와 민란의 주인공이었지만, 프랑스 혁명 이야기를 할 때면 늘 그늘에 가려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왕실, 제1 계급(카톨릭 고위성직자), 제2계급(귀족), 제3계급(평민 귀족, 브르조아 신흥 귀족) 등이 주인공인 듯 그려집니다. 그들의 숫자라야 다 합해도 인구의 10분의 일을 넘지 않았으며, 특히 왕실 및 제 1, 2급 귀족들의 숫자는 2% 미만이었습니다.( 이숫자는 후에 이야기할 한반도 조선 말기 양반 숫자와 비교해 보면 재미있습니다.)

혁명 과정을 통해 약 17만명이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대부분이 “배고파 못살겠다고” 외치던 좋게 말해 평민이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대혁명이 끝난 후 채택된 이른바 프랑스 인권선언문에 나오는 “자유와 소유권, 안전과 억압에 대한 저항권” 곧 자유, 평등, 박애(권리)라는 위대한 선언에는 사실 90%에 이르는 평민들을 제외된 선언이었습니다. 왕실과 제1, 2, 3 계급의 귀족들 곧 10% 미만의 사람들만의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은 인간 곧 사람에 대한 존엄과 생명의 고귀함을 부르짖는 천부인권사상이 전제 되어 있다고들 평가하지만 분명 거기에는 차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영향으로 공산주의, 사회주의 이론들과 신봉자들이 기세를 드는 형국으로 변화는 이어집니다.

오늘 뉴스에  세월호 집단 생수장 학살사건에 대한 특별법에 여야가 합의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프랑스 대혁명 시절 이야기가 연상되어 몇 자 적어 봅니다.

조선민국 8 – 민란1

19세기는 농민항쟁의 시기였다. 농민항쟁은 19세기 이전부터 봉건적 사회모순이 첨예화되는 과정에서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항쟁과정이 잘 들어나지 않은 소극적 경제투쟁에서부터 폭력적 봉기에 이르기까지 농민들은 끊임없이 봉건지배체제에 반대하여 투쟁하였다. – 한국역사연구회 편 <한국사강의> 208쪽 

천명(天明, 1781-1788)의 대기근에 이은 대판과 강호의 식량폭동(1787), 천보(天保, 1830-1843)의 대기근에 이어 1837년 대판에서 일어난 오오시오의 반란은 식량의 절대적 부족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백성의  반란이든 기근이든 도시의 파괴소동이든 결국은 막번체제(幕藩體制)가 사회경제상황의 발전에 뒤져 낡은 전례나 자연경제에 매달리는 이외에 아무런 방책도 가지지 못한 탓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 한길사편 <일본 현대사의 구조> 162 쪽 

중국의 토양개조, 사회구조의 변혁을 말하면 누구나 농민전쟁을 연상할 것이다. 특히 소작료 인하를 목표로 한 항조운동(抗租運動: 조세 거부 운동)이 농민의 밑바닥으로부터 일어났던 세상을 바로잡자는 행동임은 분명하다. 물론 농민들에게 변혁의 이상(理想)이 있었을 리는 없고 그 운동은 지주나 관료들에 의해 곧 진압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이것이 집중적으로 일어난 것은 남송(南宋), 명대(明代) 중기 이후, 청대의 건륭(乾隆, 1736 – 1795) 말년 이후였다. – 한길사편 <중국현대사> 10쪽 

세계사의 흐름을 보면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오는 시점은 이른바 민란(民亂) 전성시대였습니다. 유럽에서 아시아를 관통하는 일대 유행이었습니다.

이즈음 유행은 서울, 동경, 북경, 파리, 뉴욕을 비롯한 내노라하는 도시는 거의 동시에 퍼지고 누리는 세상입니다.

지리적으로 멀고 가까움이 유행의 흐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뉴욕에서 150마일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제가 사는 촌동네는 유행에서 벗겨나 있는 곳입니다. 서울과 뉴욕이 동시패션을 구가하지만 제가 사는 촌동네는 90년대 쯤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느 쪽이 좋은지(유행에 민감한 대도시 쪽 또는 유행에는 별반 관심없이 사는 촌동네 쪽)는 개개인들의 선호에 달린 일이기도 하겠거니와 때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뉴욕이나 서울에 가면 빨리 이 촌동네로 돌아오고 싶답니다.

아무튼 그건 이즈음 세상이야기이지만, 어찌보면 약 이백 여년 전 민란전성시대에 살았던 사람들 역시 선택의 여지없이 자신들이 살았던 땅에서 역사의 일원이 되어 살았을 것입니다.

이즈음이야 중동 가자지구에서 밤에 일어난 일들도 실시간으로 전세계로 퍼져나가거니와, 부산 해운대 앞바다 실시간 영상을 보고자한다면 이곳 미국 촌동네에서도 손바닥 들여다 보듯 볼 수 있는 세상이어서 동시간에 유행을 탄다는 게 전혀 신기할 것이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신기한 점은 지금으로 200-300여년 전 아직 동양과 서양이 서로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던 시절인데 이 민란만큼은 거의 동시대에 일대 유행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민란이 유행하게 된 원인 역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같았다는 사실인데요, 바로 먹고 살겠다고 일어난 반란이었다는 것입니다.

Les_Miserables7

그렇다면 먹고 살겠다고 난리를 일으킨 사람들이 있겠고, 그 난리를 유발한 난리 이전에 “자기들 끼리 배불렸던”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그 무렵 프랑스 혁명을 통해 잘 알려진 말인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인 바로 “배불렸던” 한 쪽 축입니다. 구체제(舊體制)입니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오는 싯점은 바로 이런 구체제와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무리들의 일대 충돌이 일어났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를 어떻게 보냈느냐 하는 역사적 경험들이 20세기 이후에 보는 각나라의 이미지로 굳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외면한 채 한반도 내에서 일어난 일들만 들여다보면 그 시절 양반의 뒤를 잇는 소수의 앙시앙 레짐들이 오늘날에도 사회 엘리트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으로  “민족성이 게으르고…”운운하는 사기꾼들에게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게되는 것입니다.

자! 프랑스 혁명부터 이야기하지요. 뭐 거창하게 자유, 평등, 박애라는 구호가 처음부터 등장한 것이 아니랍니다. 그저 배고파서 일어난 난리였답니다. 언놈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데 언놈들은 세금 한푼 안내고 떵떵거리며 사는 세상이 더러워서 일어난 난리였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배고파 손가락 하나 까닥거리기조차 힘든 지경에 빠져있는 사람들 뿐이었다면 난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배부르고 가진 게 있지만 구체제는 싫고,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배고픈 이들과 손을 잡고 난리를 일을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 세월호 유가족들의 단식 소식과 쓰러질 듯한 사내의 모습을 보며, 그들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일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