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여행 – 12

Reno의 밤

해가 떨어지자 도시 Reno는 불야성이 되었다.

네바다주가 본래부터 도박을 허용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1861년 네바다주 초대의회는 모든 도박을 금지하고, 도박을 할 경우 벌금형과 징역형 모두를 선고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하였단다. 이후  1869년에 면허제도를 도입하면서  도박행위를 합법화하는 대신에 고액의 면허료를 납부토록 하거나 청소년 입장을 제한하는 등의 규정을 두었다고 한다.

1877년에는 채무가 있는 사람, 아내나 미성년자를 동반한 성인남자를 경범죄로 벌하는 규정도 두었고,  1909년에는 다시 도박을 금지하면서 중벌로 다스렸으나 1931년에 완전히 합법화하면서 도박으로 유명한 주가 되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도박으로 유명한 네바다주에서 복권은 금지되어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재미를 더하는데,  약자인 시민들로부터 이익을 취하는 행위인 복권판매가 정부를 부패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도박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고 한다.  “도박은 신성한 인간을 좀 먹고 인류에 대한 적개심을 키울 뿐이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정치인들은 도박사업이야말로 네 가지 E 정책 곧  education(교육), environment(환경), elderly(노인복지),  economic development(경제발전) 정책을 제대로 이루는데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아주 적합하다고 주장하곤한다. 심지어 도박사업은 국가에 도움을 주는 애국적인 행위라고 하는 정치인들도 있다.

세상 참 많이 바뀌었다 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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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떨어진 후 우리는 식당을 찾아 나섰다. 스시바가 그럴듯하여 자리를 차지하였다. 셰프는 자못 거만하였다. 일식요리엔 자신한다는 얼굴이었다. 어찌하리! 하나아빠가 천하의 미식가인 것을. 사케 한잔에 이미 만사 오케이가 된 나와 달리, 하나아빠는 연신 뭔가 부족하다는 웃음을 날렸던 것이다. 셰프는 내심 그런 하나아빠가 걸렸던 듯하다. 마침내 그를 폭발시킨 것은 하나아빠가 던진 이 말 한마디였다. “당신이 제일 자신있게 잘하는 것을 맛보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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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젊은 나이의 셰프는 우리들의 입과 배를 만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내가 보기에도 하나아빠를 만족시키기에는 수가 부족하였다. 그러나 하나아빠를 비롯한 우리 모두를 만족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들 앞으로 건넨 계산서에는 우리들이 예상했던 밥값의 반 정도가 청구되어 있었고, 사람좋은 웃음을 끊이지 않던 하나아빠는 호기롭운 팁을 셰프에게 건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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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증명사진 몇 장을 찍고, 피할 수 없는 도박장의 유혹을 그냥 피하고 지나가기에 미안한 마음에 하나아빠는 호기롭게 주사위게임을, 하나엄마와 아내는 슬럿 머신에 잠시 ‘여기 왔었다’는 표식을 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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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우리는 요세미티를 향하기 전에 든든한 아침으로 배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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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여행 – 11

Tahoe – 그 푸르름

기차에서 맞는 마지막 식사시간에 아내는 서빙하는 승무원 한사람에게 “이 사진, 당신이지요?”  라고 물었었다. 아내는 어느 한글 블로그에서 California Zepher 기차를 소개하는 글을 읽었단다. 거기에는 식당칸에서 일하는 승무원 사진이 있었는데, 아내는 스마트폰으로 그 사진을 보여주며 “사진속 인물이 당신 아니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 젊은 친구가 그렇게 좋아하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자기가 유명인사가 되었노라며 박장대소하던 젊은이는 동료 승무원들에게 자랑을 했고, 승무원들이 다투어 그 사진을 보자고 우리 테이블을 오갔다. 그 중 젊은 친구가 자기도 한장 찍어 널리 알려 달라며 우스개 소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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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열차 종착지가 아닌 네바다 Reno에서 내렸다. 타호(Tahoe) 호수와 요세미티((Yosemite) 공원을 보고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한때 골드러쉬의 주무대였던 네바다주는 라스베가스와 리노로 대표되는 도박으로 유명한 곳이다.

20세기 초까지 금광을 따라 이루워졌던 도시들 대부분이 유령도시가 되었고,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는 라스베가스와 리노 그리고 곳곳에 들어선 카지노에서 황금빛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곳으로 바뀌었지만, 네바다주는 사우스 아프리카와 호주에 이어서 여전히 세계에서 세번 째로 큰 금 생산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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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o는 해발 4,505 ft (1,373 m)에 위치한 도박장으로 유명하고, 인근해 있는 타호 호수와 요세미티 공원 진입도시로써 관광지로 알려진 곳이다.

예약한 호텔은 기차역에서 두 블록 거리 아주 가까이 있었다. 아내들은 방에 짐을 풀고, 하나아빠와 나는 예약해 놓은 렌트카를 픽업하러 나섰다.

wedding거리로 나선 우리에게 다가온 낯선 풍경들 가운데 하나는 속전속결로 끝내주고 주 7일 자정까지, 더하여 차를 탄채로 속성으로 치루어준다는 결혼식장이었다. 결혼과 이혼 수속이 자유롭다는 네바다의 풍경이었다.

길을 건너려 사거리 신호등에 서서 기다리는데, 저쪽에서 오토바이를 탄 젊은 백인청년 하나가  우리들을 향해 팔을 내밀어 손가락질을 하며 달려왔다. 가죽조끼 하나 걸친 그의 양 팔뚝은 문신으로 가득 채운 도화지였다. 그는 우리 앞을 지나며 손가락으로 총잡은 흉내를 내며, 입으로는 총소리를 내며 지나가던 것이었다. 장난질로 치부하긴엔 씁쓸한 풍경이었다.

우리는 빌린 차를 타고 타호 호수로 향했다. 운전대만 잡으면 날아다니는 하나아빠 덕에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에 많은 곳들을 보고 다닐 수 있었다. 더하여 말수 적은 하나아빠와 서로가 지내왔던 어리고 젊은 시절을 함께 나눌 수 있었던 시간들은 이번 여행이 내게 준 즐거움 가운데 하나였다.

차는 지그재그로 언덕길을 올라가며 산꼭대기에 드리워진 하얀 천 가까이 가고 있었다. 그렇게 오르다 눈앞에 놓인 팻말을 보고서야 그 하얀 천이 눈이었음을 믿게되었다. 팻말에는 고도 해발 10,000ft(약 3,000m)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가 넘고 있었던 산이름은 생김새와는 전혀 다른 ‘장미 산(Mount Rose)’이었는데 최고 높이가 10,785 ft (3,287 m)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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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내리막길을 한참 달려간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타호 호수. 그 푸르름에 내게서 나온 소리, 그저 탄성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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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와 네바다 경계선상 해발 6,225 ft (1,897 m)에 있는 타호호수의 물속 깊이는 자그마치 1,645 ft (501 m)라고 한다.(백두산 천지의 깊이 384m) 그런데 마치 그 속이 다 드려다 보일듯이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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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버거 맛이 일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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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행 중이던 하나가 제 아빠에게 문자를 보냈단다. “타호에 가면 맑은 물에서 수영 한번 하라”고. 우리는 호수에 몸을 담구는 대신 호수를 가로질러 오가는 보트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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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여행 – 10

유타 – 신앙의 힘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기차는 몰몬교인들의 땅 유타로 들어섰다. 나는 몰몬교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바 없지만 잘 아는 몰몬교인은 있다. 매우 근검화순 (勤儉和順)하고 독실한 사람이다. 이민온지 거의 40여년이 된 그는 아직도 첫번 째 기도제목을 “모국통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사람 사랑”이 바로 신앙이라고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한때 나는 퀘이커 모임에 들락거렸던 적이 있었다. 집에서 오분 거리도 안되는 곳에 그들의 모임장소가 있다. 그들의 예배의식은 나를 매료시켰었다. 친교방식도 부담이 없어 좋았다. 그들과 함께한 주일아침 명상기도를 통해, 한동안 나는 1시간을 5분 정도의 시간으로 느낄만큼 명상을 즐기는 기쁨을 누리기도 하였다. 결국 핑계이지만, 아내와 아이들 생각때문에 퀘이커교도가 되지는 아니하였다.

아무튼 몰몬이나 퀘이커나 장로교나 감리교나 침례교나 다 한묶음이요, 불교도나 유교도나 이슬람교도나 천주교인이나 개신교인이나 무종교인이나 다원주의 신봉자나 모두 함께 살 수 있다는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나라가 미국이라는 모범을 보여준 땅이 유타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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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몬교도들이 유타주에 정착한 과정을 보면 히브리인들이 겪었던 40년 광야 이야기나 2만 5천리 길을 걸어서 피신했던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 이야기가 떠오를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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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브링햄 영(Bringham Young)은 박해받는 신도들을 사막지대로 인도했다. 당시 1만 5천명의 몰몬교도가 3천대의 포장마차를 타고 길을 떠났다. 온갖 고난 끝에 브링햄 영은 눈 쌓인 봉우리로 이뤄진 산맥에 둘려싸여 햇빛에 반짝이는 새하얀 호수, 즉 소금호수를 발견했다. 그곳이야말로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할 땅이라고 믿은 그는 그 사해로 들어오는 강을 요르단 강이라고 명명하고 Salt Lake시를 건설했다. – 앙드레 모로아의 미국사에서>

이 몰몬교도들은  고난의 장정과 정착과정을 통해 인디언들과 미리 정착해 있던 이민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어두운 역사를 만들었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런 흑역사는 비단 몰몬교도들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디언(원주민이라는 말이 맞겠지만)들과 멕시코인들의 땅을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점령해 나갔던 대륙의 개척자들 모두에게 드려진 흑역사일 뿐이다.

몰몬교도의 유타주 정착은 대륙의 동과 서를 잇는 전환점이었다고 한다. 어떤 신앙이든 신앙공동체는 때때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기도 한다. 그 공동체 안 구성원들이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어떤 절박함이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을 때 터지는 힘으로.

어두움 속을 달려 유타주를 건너며 저절로 입밖으로 터져 나오는 소리가 있었다. “미국, 정말 크다!” 약 200만명이 산다는 유타주의 넓이는 거의 한반도 크기와 맘먹는단다.

새벽녘에 눈을 떠 차창밖을 보니 무수한 별들이 떠있었다. 기차는 네바다 사막을 달리고 있었고 열차안에서 시간은 두번째로 바뀌어졌다. Central Time Zone에서 Mountain Time Zone으로, 그리고 다시 Pacific Time Zone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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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희미한 어둠속에서 첫번 째 만난 네바다주 아주 작은 마을에서 본 첫번 째 간판은 Casino였다. 먼동이 트자 이어지는 것은 광야였다. 네바다는 사막이라기 보다는 척박한 광야였다.

기차여행 – 9

꿈을 꾸다

대평원을 달려온 기차는 덴버에서 긴 시간을 쉬었다. 이제 로키산맥과 시에라 네바다 사막과 산맥을 넘기 위해 호흡을 조절하기 위해서였다. 역무원들은 열차에 새로운 공급물자들을 나르기에 바빳다.

덴버는 고도 해발 1마일(5,280ft, 1,610m) 높이에 위치하고 있단다. 솔직히 우리는 그렇게 높은 곳인지를 느끼지 못했다.

이제 열차는 최고 높이 14,440 feet (4,401 m)에 이르는 로키 산맥을 넘어간다. 열차를 타고가며 산꼭대기에 흰천처럼 덮어있는 것이 만년설이라는 것을 우리가 믿게된 것은 로키가 아닌 시에라 네바다의 요세미티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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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고 바라보는 로키의 풍경들이 한라산, 백두산보다 높다는 게 실감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자연에서 노는 곰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콜로라도 강변에서 유유자적하며 우리가 탄 기차를 쳐다보고 있는 곰을 넋나간 채로 쳐다보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일을 잊었던 것이 지금도 아쉽다.

콜로라도 강에는 rafting 놀이를 하는 젊은이들이 많았는데 기차를 보고 이들이 보내는 인사가 재미있었다. 바지를 무릎까지 내리고 맨 엉덩이를 드러내서 손을 흔들듯 엉덩이를 흔드는 것이었는데 사내 아이들 뿐만 아니라 젊는 처자들도 그 대열에 끼어 있었던 것이다. 곰과는 다르게 차마 카메라를 손에 들수 없었다.

나는 로키를 넘어가면서 신과 인간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이라고 해도 좋고, 인간과 인간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그 산을 넘으며 꿈을 하나 키웠다. “언젠가 겨울에 이 산을 다시 넘으리라”고.

동영상 편집을 좀 할까하다가 말았다. 그저 자연과 인간을 그대로 느끼고 싶었다.

기차여행 – 8

해 아래

선잠이 들다 깨다 새벽을 맞았다. 아내는 한밤중이다. 깰세라 조용히 방을 나와 lounge 칸으로 갔다. 동트는 지평선을 보기 위해서였다. lounge에는 불은 꺼져 있었고 여기저기 장의자와 바닥에 누워 잠을 자는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일반 좌석 손님들이 누워 편안한 잠을 자기 위해 이곳에서 밤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번 여행에 책을 한권도 가져 가질 않았다. 공연히 짐만 될듯도 하였고, 테블릿 하나면 충분할 듯해서였다. 열차 안내 광고에도 와이파이가 연결된다고 하였고, 뉴욕을 오가는 기차처럼 당연히 인터넷 사용이 가능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차 전구간에 걸쳐 와이파이는 터지지 않았다.

대평원과 높은 산악지대를 오가는 기차안에서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는 것은 이해를 할 수는있겠으나 열차광고에 제공되는 서비스에서 이는 삭제해야 마땅할 듯하였다.

그러나 책 한권 없이, 인터넷이 연결안되는 상황은 오히려 내게 여행의 깊이를 더해주었다. 나는 어둑한 lounge에 앉아 테블릿에 여행 메모를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새벽 4시 30분쯤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떠오르는 해를 보기까지는 거의 한시간이 넘게 걸렸던 듯하다. 지평선 저쪽 동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인 후 태양은 제 얼굴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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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었던 시간에 지나친 네브라스카 Hastings는 꼭 가보고 싶었던 여행지 중 한 곳이었다. 백 여년 전에 여기 네브라스카 평원에 떠오르는 아침해를 보며, 조국 광복을 무장투쟁으로 이루고자 꿈꾸었던 사내들이 살았던 곳을 언젠가는 밟아보고 싶었다. 우성 박용만과 소년병학교 생도들이다. (오래전에 박용만선생에 대해 썻던 글 : 문무쌍전(文武雙全) 박용만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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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이나 한듯이 하나네와 아내는 해가 떠오르는 시각에 lounge로 왔다. 우리는 해돋이의 장관을 보며 이른 아침을 탄성으로 맞이하였다.

열차내 아침식사도 우리를 든든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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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열차는 네브라스카를 달리고 있었다. 콜로라도주로 넘어서기 직전 넓은 평원에 세워진 공화당 후보 Trump 선전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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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트럼프 선전 간판을 보며 이 땅에서 내몰렸던 인디언들과 맥없이 땅을 빼앗겼던 멕시칸들을 생각했다.

“텍사스와 멕시코의 광대하고 비옥한 지역은 테네시, 미시시피, 루이지애나의 개척자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 중략 – 멕시코는 미국인 Stephen Austin에게 거주지에 정착할 수 있는 허가를 내주었다. 성문화된 이 조건은 토지 소유자는 카톨릭교도여야 한다는 것과 멕시코의 법률을 지키며 자치를 시행한다는 것 뿐이었다. 사실 영국계 미국인 중에는 카톨릭교도가 거의 없었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던 이주자들은 필요한 증명서를 얻는데 드는 10분 동안만 카톨릭교도 행세만 하면 그만이었으므로 그렇게 우물쭈물 넘어갔다.” – 앙드레 모로아의 미국사에서

그때가 1821년 즈음이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20여년 후인 1834년 멕시코는 그곳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이 멕시코 법률을 심히 위반하므로 그 땅에서 내쫓고자 하였으나 전쟁에서 대패하고 말고, 그렇게 맥없이 텍사스를 빼았기고 만다.

평화롭게 살고 있던 원주민들 곧 인디언들에 대한 약탈과 살육의 참혹함에 이르면, 이 땅을 일군 초기 개척자들의 후손들은 아직 씻어야할 손에 대한 생각이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

열차는 콜로라도 덴버로 들어서고 있었다.

기차여행 – 5

촌스러움

‘촌스럽다’는 말이 딱히 부정적인 뜻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시대에 좀 뒤쳐진 모습을 표현할 때 흔히들 쓴다. 그런점에서 나는 충분히 촌스럽다고 할만하다. 실제 촌에서 산지도 삼십년이 되었다.

가까이 필라델피아를 나갔다가 돌아오면서도 내 촌스러움을 느끼곤하지만, 뉴욕이나 워싱톤을 다녀오는 날이면 그 느낌의 크기가 제법 커지는 것이다. 뉴욕이나 워싱톤보다 더 큰 느낌으로 내 촌스러움을 확인했던 때는 한국방문 후의 일이였다.

촌에 살아서 갖는 촌스러움에 위에 내 쓸데없는 고집이 그 촌티를 더하곤 한다. 일테면 아직도 cell phone 곧 손전화없이 산다는 것이랄까, 삼십 수년전 결혼 때 입었던 양복을 입고 다닌다거나, 아직도 아내에게 머리깍는 일을 맡긴다거나 하는 일들이 그렇다.

툭하면 아내가 내게 던지는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촌스럽다”이다.

미국 기차에는 바로 그런 촌스러움이 함께 한다. 그러나 나의 촌스러움과는 다르다. 나는 한때 잘 나갔거나 최첨단 유행의 첨병이었던 때란 꿈에도 꾸어보지 못한 처지지만 미국의 기차는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 기차는 한때, 그러니까 서부개척시대였던 19세기 초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100여년간 신흥제국 미국의 힘을 상징하는 대표주자였다.

그러다 1940대 이후 미국에 자동차들이 덮히기 시작하고, 1970대 이후에는 비행기가 미국 하늘에 사통팔달로 길을 내기 시작하면서 촌스러움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아마 한국에서 KTX를 타본 사람이 워싱톤 dc에서 보스톤까지 오가는 기차를 타본다면 아마 “아이고, 이게 무궁화호냐? 통일호냐?”냐고 할지도 모르며, 그 라인이 미국내 철도에서는 그나마 현대식이란 사실을 알면 아마 크게 놀랄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통일호, 무궁화호를 모르는 세대도 있겠지만)

화물은 그런대로 기차가 유용한 편이 많이 있겠지만 여객 운송에 있어 기차는 자동차와 비행기에 대부분 그 역할을 뺏긴지 오래되었고 이즈음에는 버스에게도 그 자리를 내주고 있는 형편이다.(일테면 내가 사는 곳에서 뉴욕 맨하턴 Penn station 까지 기차로는 편도 100달러 정도인데 이즈음 Greyhound(왕복 50달러 정도)와 경쟁하는 Megabus를 잘 골라타면 1달러에  편도 이용할 수도 있기에.)

통상 한나절이나 하루 길이면 자동차를 이용하는 편이고, 그 이상의 거리면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기차는 점점 교통수단으로 후순위에 놓이게 된 것이다.

심지어 기차는 생활인들의 교통수단이라기 보다는 시간과 돈의 여유있는 사람들이 이따금 이용하는 교통수단 정도로 인식되기까지하는 현실이다.

그러니 당연히 열차여객사업이란 곧 적자사업이었다. 그것이 개별 회사에서 운영하던 전국의 열차운행 사업을 연방정부가 받아 Amtrek이라는 공기업으로 묶고 열차여객 사업을 전면 재검토하게 된 연유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0년 기준치로 보면1억3000만 달러의 적자를 보았다고 한다.

capture-20160825-200417우리가 탓던 시카고에서 샌프란시스코를 달리는 관광열차 California Zephyr 역시 바로 이런 적자를 면하려고 내놓은 상품 가운데 하나이다. 다행히 우리가 탓던 기차는 정시에 출발하였지만 Amtrek 웹사이트에 나타난 이 관광열차의 정시 운행율을 보면 여전히 촌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할만하다.

그렇다하여도 이번 기차여행은 내겐 거의 100% 만족한 것이였으며, 이점에는 아내나 하나엄마 아빠도 동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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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 1실 침대칸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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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를 펴서 침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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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으로 침대 하나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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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내 lounge 차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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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내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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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카봉으로 처음 찍은 사진 – 이 촌스러움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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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음이…(노란 세월호 팔찌를 차고 다녔다)

기차여행 – 2

<하나와 한나>

새벽 3시 30분에 집을 나서 하나네로 향했다. 하나는 이번 여행을 함께할 친구 부부의 맏딸이다. 내 딸아이 이름은 한나인데, 같은 영어 이름을 서로 다르게 불러 그렇게 굳었다. 하나 아빠와는 한 이십년 가까이 한 사이이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하여도 우리 모두 아직은 청춘이었다. 동네에서 같은 업을 하는 사람들끼리 협회를 만들어 서로 도우며 커가자는 생각으로 처음 의기투합했던 우리들은, 당시만해도 몸과 마음 모두 청춘이었다. 그렇게 협회와 한인회 일을 함께하며 가까워졌고, 세상을 보는 눈높이가 많은 부분에서 엇비슷하여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이다. 물론 하나엄마와 한나엄마도 가깝다. 제법 긴 세월을 가까이 지낸 뒷면에는 조금은 뾰족하고 협량한 우리 부부를 언제나 가까이 받아주는 하나 엄마, 아빠의 넉넉함이 있었다.

손에 잡힐 듯한 저쪽 세월인데, 그 시절에 함께 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이미 세상을 뜬 사람들도 있거니와  은퇴하여 두분불출인 사람들도 많고, 더러는 노환으로 앓는 이도 있다. 그 중 많은 이들이 은퇴 일시를 저울질 하고 있는 가운데, 당시 젊은 축이었던 하나 아빠와 나는 아직 씩씩한 현역이다. 물론 하나 아빠도 업을 바꾸어 세탁업보다는 조금 규모가 큰 세차업을 하고 있기는 하다.

우리집에서 하나네까지는 약 20여분, 하나네에서 필라델피아 공항까지 역시 20여분 걸리는 거리이므로 그곳에서 출발하기로 한 것이다.

하나네와 우리가 함께 이번 여행을 함께하게 된 것은 어찌보면 내 딸아이 한나 덕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6월 중순에 아내와 함께 딸아이 얼굴을 보러 갔었다. 그동안 몇번의 시행착오 덕으로 이젠 맨하턴 지하철 노선이 낯설지가 않다. 그날 우리는 Ground zero를 갔었는데 그곳을 가는 길에 한나가 물었던 것이다. “올해 한국갈 계획이 없냐?”고. 15일 정도 쓸 수 있는 휴가일이 있는데 엄마, 아빠가 한국 나갈 계획이 있다면 함께 나갔다 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내 대답은 아내와 딸아이에겐 사뭇 뜬금없었겠지만 그 무렵 내 생각을 아주 솔직히 던진 것이었다.

“엄마는 내년에 한국 나갈 계획이 있고, 그 때 아빠도 함께 갈려고 했는데…. 이러면 어떨까? 한국은 내년에 엄마랑 한나랑 함께 갔다 오고, 올 여름엔 한나랑 아빠랑 기차타고 미국 횡단을 한번하면 어떨까?”

머뭇거리는 딸아이를 나는 밀어부쳤다. “어때? 좋지? 한나야! 내가 구글에서 좀 조사를 해보았는데 열차여행이 아주 멋있겠더라고. 네 휴가 기간에 맞추어 한번 계획을 짜보자구? 아빠가 열차정보 링크 알려줄 테니까, 한번 계획을 짜볼래?”, 그렇게 다구치는 나에게 딸아이는 웃음으로 대답했던 것이다. “엉”

딸아이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내게 던진 말이다. “아이고, 그렇게 자기 딸을 몰라요? 행여 한나가 아빠랑 여행을 가겠다?  꿈깨세요!”

늘 그렇듯 아내는 정확했다. 내가 사랑하는 딸 한나는 그날 이후 열차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7월초쯤에 특별한 일없이 우리부부는 하나네 집에 들려 차 한잔 나누게 되었는데, 그날 나는 이번 여름에도 그저 꿈으로 남게된 기차여행 이야기를 하였던 것이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난 하나아빠는 아주 간단히 대답하였다. “그럼 우리끼리 한번 갑시다!”

고향이 충청도인 하나아빠는 말이 어눌하고 느린 편이지만, 내가 운전해 가면 한 시간이 걸릴 거리를 반 시간이면 족히 갈만큼 행동은 빠른 편이어서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완벽한 여행계획을 짯던 것이다.

우리 부부가 새벽 3시 30분에 집을 나선 것 역시 하나아빠가 세운 계획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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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nd zero를 찾았던 날, 새로 조성된 World Trade Center Transportation Hub에 걸린 성조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십수년 전 했던 내 생각 하나가 떠올라 여기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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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ell W. Peterson은 올해 여든 네 살의 노인이다.

그는 지난 해, 백 쪽도 채 안 되는 작은 책자를 출간하며 제목을 애국자들이여, 궐기하라!(Patriots, Stand Up!)”라고 하였다. 러쎌 피터슨은 DuPont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였고 1970대초 공화당원으로 델라웨어 주지사를 역임한 바 있다. 그는 과학자이자, 정치가인 동시에 시민운동가이며 환경론자이다. 그는 1996년 민주당으로 당적을 바꾸었다.

책의 제목만큼이나 책의 내용이 직정(直情)적이다. 부시행정부에 대한 그의 비판과 독설, 그리고 애국민임을 자처하는 미국인들에 보내는 그의 충언을 읽으며 그가 팔순 노인은 커녕 스무 살 팔팔한 젊음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하였다.

그는 9.11참사 이후 불어닥친 미국내의 애국주의가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비뚤어진 애국심과 애국주의의 선동으로 미국은 지금 처음 국가를 건설하며 꿈꾸었던 참되고 큰 미국정신을 잃어 버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선두에 부시행정부로 대변되는 극우 보수 공화당원들이 앞장서고 있다고 비난한다. 부시행정부가 이라크와의 전쟁을 시작하며 내걸었던 전쟁의 당위성 일곱 가지들 일테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 알 카에다 조직과의 연계, 우라늄생산을 위한 시설 보유, 독가스로 수천 명의 인명 살상, 우라늄의 대량 유입, 생화학 무기 생산을 위한 연구 시설 보유, 미국의 안전 위협 등의 모든 전쟁 이유들은 단지 구실이었을 뿐 모두가 거짓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참다운 애국주의의 개념을 바로 세워야 할 때이며, 생각있는 미국인들이 이 운동에 앞장 설 것을 주문한다. 그는 진정한 애국심과 애국주의는 미국의 첫 정신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주창한다.

“들어라! 선조들이 어렵게 지켜온 미국인들의 삶의 방식 곧 자유와 정의를 구가하는 생활 양식을 버리라고 주문하는 오늘날 극단주의 지도자들을 향해 이 미국이 울고 있는 통곡의 소리를!”

연이어 러쎌은 주창한다.

“애국자들이여, 궐기하라! 수 세대 동안 싸워 이룩한 이 위대한 국가의 명예를 위하여! 법 아래서 누릴 수 있는 자유와 정의를 구가하는 이 땅의 삶을 위하여! 전 세계 민중들의 꿈을 집중시켰던 식민주의, 노예제도, 파시즘,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통해 이룩해온 이 땅을 위해! U.N.헌장과 권리장전, 독립선언서에 명시된 우리들의 기본적 권리들을 위해! 궐기하라!”

팔순 노인이 치켜든 열정적 반 부시의 깃발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미국민의 거의 반수는 부시행정부의 지지층들이다. 나는 지금 친부시, 반부시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양쪽 모두 의견이 다른 우리들, 바로 미국이라는 대전제를 깔고 논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함이다. 애국의 길은 생각에 따라 차이가 날 수도 있다. 가는 길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단 한가지 함께 공유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인류 보편적인 가치 곧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아래 상식적인 보편의 가치의 기반 위에 서서 부르짖는 애국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기반을 상실한 채 애국을 호도하는 세력은 타도의 대상이며 실로 애국자들이 궐기해야만 하는 세상인 것이다.

미국뿐만 아니다. 어디에서건 보편 상식적인 가치를 따져 애국을 논해야만 한다. 그 가치를 호도하고 왜곡하는 세력은 타도해야만 할 대상이다. 그러나  미국이든 한국이든 역사의 흐름을 바라보는 시각은 늘 희망적이고 긍정적이어야 한다.

역사란 인류의 보편적 자유확대사라는 헤겔의 말은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2004. 3. 26)

<후기> – Russell W. Peterson은 지난 2011년 2월,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