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이즈음 틈나는 대로 묵자(墨子)에 빠져 지낸다. 예수쟁이라면 한번은 깊게 맘 담구어 마땅한 큰 못이라는 생각이다. 기세춘(奇世春)선생님과 문익환, 홍근수 목사님이 남기신 묵자에 대한 해설은 그 못의 깊이와 넓이를 헤아리는데 큰 도움이 된다.쉽고 간결하기로는 신영복선생님의 ‘강의’인데, 묵자에 대한 언급이 지나치게 부분적이고 짧아 아쉽다. 아무튼 신영복선생님의 가르침 하나.

<성공회대 정보과학관 휴게실에 ‘겸치별란兼治別亂’ 이란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내가 쓴 글씨입니다. 겸애하면 평화롭고 차별하면 어지러워진다는 뜻이며 물론 묵자의 글에서 성구(成句)한 것입니다.

묵자의 겸(兼)은 유가의 별(別)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 별(別)이야말로 공동체적 구조를 파괴하는 가장 근본적인 해악이라는 것이지요. 나와 남의 차별에서 시작하여 계급과 계급, 지역과 지역, 집단과 집단과의 차별로 확대되는  것이지요. 가(家)와 가, 국(國)과 국의 쟁투가 그것입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가장 큰 해악이 바로 서로 차별하는 교벌자(交別者)라고 묵자는 주장합니다.

조금 전에도 예시문을 들어 소개했듯이 “큰 나라가 약소국을 공격하고, 큰 가(家)가 작은 가를 어지럽히고, 강자가 약자를 겁탈하고, 다수가 소수를 힘으로 억압하고, 간사한 자가 어리석은 자를 속이고, 신분이 높은 자가 천한 사람들에게 오만하게 대하는 것, 이것이 천하의 해로움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오늘날의 세계 질서와 우리 사회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을 금치 못합니다.>

2500여년 전 옛사람이 오늘의 뉴스들을 보며 던진 말씀 같다는 생각에.

내 뜰엔 마지막 여름 꽃이 자태를 뽐내고.

어른들의 말씀과 꽃의 아름다움은 늘 곁에 있다만 나는 언제나 그렇듯 잊고 지내다 어느 한 순간 잠깐.

휴일 그리고 좌파

노동절 휴일도 저물었다.

어제 농사짓는 벗이 땡볕에서 땀 흘려 키운 열무 몇 단을 보내왔다. 그의 노동을 생각하며 열무김치를 담갔다. 실히 병 하나를 채우고도 남았다. 농사짓는 친구 덕에 이젠 김치도 곧잘 담게 되었다.

얼마전에 만두 먹으러 중국인촌에 갔다가 사서, 다듬어 얼려놓은 오리고기를 꺼내어 주물럭구이를 만들었다. 기름기가 노인들에게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아 고기만 저며 했더니 양이 참 적었다.

이즈음 다리가 불편해 거동이 힘드신 아버지는 “이게 다 6,25 때 박힌 수류탄 파편 탓”이라며 혀를 차신다. 내일 MRI 찍기 위해 병원 나들이를 하신다.

암기운이 다 가신  듯  가신 듯 하면서도, 잊힐만 하면 문제가 있다는 의사 소견에 움찔하시는 장모도 내일 병원 나들이를 하신다.

양쪽 노인들 몫으로 조금씩 떼어 놓고보니 우리 부부 양념에 비벼 한끼 식사로 딱 적합하였다.

이런 저런 뉴스들을 훑어 보다가 저녁나절 묵자(墨子)를 읽는다. 묵자를 읽는다기 보다는 문익환과 신영복을 읽는다가 맞겠다. 그 분들이 읽은 묵자를 내가 읽고 있기 때문이다.

묵자나 예수나 그들이 살았던 그 시대의 눈으로 비추어 보면, 아니 어쩌면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극단에 서 있는 좌파 일수도 있을 것이다.

“강자는 약자를 억누르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능멸하고, 귀한 사람은 천한 사람에게 오만하며 간사한 자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며, 천하의 화와 찬탈과 원한이 생겨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愛人若愛其身)”는 묵자의 가르침은 예수에 닿아 있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愛人若愛其身)”는 선언은 이미 혁명일 것이다. 입으로 말고 몸으로 서로가 실천하는 세상은 혁명 이후에나 가능할 것 아닐까? 극좌에 있는.

휴일 뉴스들은 나를 좌파로 몬다. 일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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