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 그 날 4

(당신의 천국 – 일흔 여덟 번 째 이야기)

그 때에 (천사)미가엘이 네 겨레를 지켜 주려고 나설 것이다.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찌기 없었던 어려운 때가 올 것이다. 그런 때라도 네 겨레 중에서 이 책에 기록된 사람만은 난을 면할 것이다.  티끌로 돌아 갔던 대중이 잠에서 깨어나 영원히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영원한 모욕과 수치를 받을 사람도 있으리라.  슬기로운 지도자들은 밝은 하늘처럼 빛날 것이다. 대중을 바로 이끈 지도자들은 별처럼 길이길이 빛날 것이다.  너 다니엘아, 이 말씀을 비밀에 붙여 마지막 그 때가 오기까지 이 책을 봉해 두어라. 많은 사람들이 읽고 깨쳐 잘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갈팡질팡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다니엘 12 : 1 – 4 

어릴 때 즐겨 부르던 찬송 가운데 “어머니의 성경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즐겨 불렀던 것은 아니었고, 당시 유년주일학교에서 수시로 부르게 했던 찬송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찬송 가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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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말 그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옛날 용맹스럽던 다니엘의 경험과 유대임금 다윗왕의 역사와 주의 선지 엘리야 병거타고 하늘에 올라가던 일을 기억합니다/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그때 일은 지나고 나의 눈에 환하오 어머님의 말씀 기억하면서 나도 시시때때로 성경말씀 읽으며 주의 뜻을 따라 살려합니다 

후렴>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말 이책중에 있으니 이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사자굴 속에서도 살아난 다니엘의 이야기도 어릴 적에 많이 듣던 성경 이야기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요즈음 어린아이들이 교회에서 배우고 듣는 찬송과 성경이야기들은 어떤 것들이 주된 것인지는 제가 잘 모릅니다. 종종 손녀 딸의 교회학교 뒤바라지를 하는 제 누이는 이즈음 아이들이 노는 테를 제법 아는 것 같습니다만 아직 손주를 보지 못한 저는 어린 아이들 문화에 대해서는 젬병인 셈입니다. 

제가 주일학교를 다니던 때인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의 어른들은 일본 제국주의와 한국동란을 체험한 세대들이었고, 이즈음처럼 문화의 변화가 빠른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자신들이 어릴 적 배우고 들었던 것들을 그대로 전수하는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구약 이야기와 다니엘 이야기가 그 당시만 해도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단골 레파토리가 되었던 까닭은 일제시대 식민지를 경험한 선조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성경, 특히 구약시대 후반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던 성경이야기에 투영시킨 까닭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답니다. 다니엘은 그런 용도로 사용하기에 아주 좋은 성경 이야기 자료였답니다. 

아, 그리고 한가지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제 가슴에 쌓였던 생각 하나가 떠오른답니다. 어머니의 성경책이라는 제목과 어머니가 읽고 들려 주시던 성경책 이야기는 저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제 어머니는 교회는 다니셨으나 문맹이셨답니다. 한글을 읽지 못하셨습니다. 그저 고개만 끄덕 끄덕하시는 신자이셨지요. 

어머니는 저희 남매들을 다 키우신 다음에 한글을 깨우치셨고, 성경을 손에서 놓지 않게 되셨답니다. 

이쯤 다니엘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다니엘서 1장 1절을 시작하는 시점은 기원전 600여년 경입니다. 남왕국 유다왕 여호야킴이 바벨론으로 끌려 갈떄 그 무리에 끼였던 “흠없이 잘 생기고, 교육을 받아서 막히는 데가 없었으며 무슨 일에나 능숙하고 사리에 밝은” 젊은이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다니엘이었다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다니엘서가 쓰여진 것은 그로부터 약 400여 년이 세월이 흐른 후인 기원전 165년 경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기원전 167년은 안티쿠오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신이 모셔지고, 유대인들의 전통과 야훼 하나님을 위한 예배의식이 전면 금지된 해입니다. 이 왕의 명령을 어겼을 때 쫓아오는 것은 가차없는 죽음 뿐이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대다수 유다인들은 숨죽인 채 살고 있었고, 잽싸게 이런 이방왕의 명령에 쫓아 줄을 서는 사람들도 있었고. 마카베오 일가 처럼 반항하고 항거하는 투쟁을 벌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한편의 사람들이 다니엘서 같은 문학서를 쓰고 기록으로 남깁니다. 그들은 조상들의 전통과 신앙을 쉽게 저버린 동족들 뿐만 아니라, 목숨걸고 항쟁하는 사람들, 특히 이젠 유대족으로는 희망이 없다고 절망하는 동족들을 위해 희망을 선포하고, 야훼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들이 모르는 원대하고 큰 곳에 있다는 구원의 메세지를 전하는 일에 매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쓰고 있는 이야기는 이미 오래 전에 오늘을 위해 준비하고 비밀스럽게 감추어진 이야기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당시는 전통적으로 전해오는 율법서나 역사서들 곧 모세오경을 비롯한 그들만의 성서를 지니고 다니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이야기로 전하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대상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야기는 가명으로 숨기도 하고, 환상과 꿈같은 이야기로 잘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 되기도 하고, 숫자와 상징속으로 하고 싶은 뜻을 숨기기도 하는 그런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다니엘서는 크게 두 개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장에서 6장까지는 사자굴 이야기로 잘 알려진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7장부터 12장 까지는 세상 왕국들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다니엘의 환상이야기입니다. 

다니엘서가 쓰여진 당시 유대인들의 상황은 마치 세상 끝날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서는 그런 동족들을 향하여 야훼 하나님의 말이 곧 도래할 것이고, 하늘이 보내신 ‘인자(人子) 같은 이’가 나타나 민족의 구원자가 될 것이라는 소망과 기대를 전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에 대한 본격적인 신앙적 기록이 남아있는 책이 다니엘서입니다. 

다니엘이 전하는 이런 미래에 대한 꿈들이 약 160년 후 예수가 태어나는 세상이 될 때까지 유대인들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서에는 구약의 다니엘, 신약의 요한계시록 두 권이 묵시록으로 남아있습니다만, 비록 성서의 정경으로 채택되지는 못한 것들이지만 많은 묵시록들이 그 무렵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당시 쓰여진 주요 묵시문학서들과 그 기록 연대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다니엘서 (165 BC),  *  에녹 1서 (대략 164 BC 이후), *  희년의 서 (대략 150 BC)  *  시빌라인 신탁서 3권 (대략 150 BC 이후) *  열두 족장의 유언서 (BC 2 세기 초)  * 솔로몬의 시편 (대략 48 BC)  * 모세의 승천기 (AD 6-30) * 이사야의 순교 ( ? )   * 아담과 이브의 생애, 모세의 묵시록 (AD 70 바로 직전)  * 아브라함의 묵시록 9-32 (대략 AD 70-100)11) * 아브라함의 유언 (AD 1 세기)   * 에녹 2서, 에녹의 비밀서 (AD 1 세기) * 시빌라인 신탁서 4권 (대략 AD 80  * 에스드라 2서( = 에스라 4서) 3-14 (대략 AD 90)   * 바룩 3서 (AD 2 세기) * 시빌라인 신탁서 5권(AD 2 세기) 

묵시문학의 초기 기록인 다니엘서는 다가올 메시아왕국은 지상에 건설되는 왕국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록 죽음 이후의 문제나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다하지만,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생각한 예언자적 전통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묵시문학서인 셈입니다. 

본격적인 묵시록에 대한 이야기는 신약시대에서 이으려고 합니다. 

이제 마카베오 일가의 혁명 이후 세워진 유다왕국 하스몬왕조 때의 이야기와 헤롯대왕의 시대까지의 시대 변화와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두 차례에 걸쳐 이야기 하는 것으로 구약 이야기를 마치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진정 만나야만 하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 신약시대로 넘어갑니다.

상생(相生) – 그 날 2

(당신의 천국 – 일흔 여섯 번 째 이야기)

2013년 성탄절 아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예수가 그 때(2013년 전 12월 25일) 거기(팔레스타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것에 대한  역사적 사실 여부, 또는 그가 구세주로 오신 신의 아들임을 믿는 신앙의 여부를 묻지 않더라도 일반적인 상식이 된 일은 예수로 인해 신기원(新紀元)이 열린 사실입니다. 

물론 유태력(猶太曆Hebrew calendar)이나 한국의 단기력(檀紀曆), 일본의 천황력( 天皇曆) 등 자기 민족만이 사용하는 기원력들이 있거니와 불기력(佛紀曆), 회교력 (回敎曆Islamic calendar) 등의 종교력도 있지요. 요즘 젊은이들은 모르겠지만 저희 새대가 어릴 적만 하여도 달력에 단기표시가 있었답니다. 서기 2014년과 단기 4347년이 달력에 함께 박혀 있거나 단기만 박혀 있기도 했답니다. 

현재 전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서기력(西紀曆)은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뉘어져 있지요. 기원전은 B.C. 곧Before Christ라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의 시대를 말하고, 기원후는A.D. 곧Anno Domini라는 라틴어를 사용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해의 시작을 말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예수로 인해 기원(紀元)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이즈음에는 예수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호칭이 특별한 종교(기독교)에 치우쳐 있음으로 새로운 용어를 써야한다는 운동이 있습니다. 바로BCE(기원전)과 CE(기원후)라는 말입니다. BCE는 Before Common Era (공동 시대 이전)의 약자이며, CE는 Common Era (공동 시대)를 줄인 말인데 점점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추세랍니다. 

그러나 이름을 바꾸어도 기원이 바뀌는 것엔 차이가 없는 것이지요. AD 2014와 CE2014는 같은 것이니까요. 

신기원이 열린다는 말은 옛 세상이 지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한반도에서 이런 새로운 세상을 고대하는 종교, 사상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던 때가 있었습니다. 임진왜란(1592 – 1598)과 병자호란(1636 – 1637)이라는 두 개의 큰 난리를 겪고난 한반도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삶은 실로 팍팍한 것이었습니다. 나라의 기강은 무너져가고, 전통적으로 사회 근간을 이루어 오던 유학의 세력도 약해지면서 그야말로 나라 꼴이 꼴이 아닌 세월이 이어져 가고 있었답니다. 

그 무렵부터 민간에 소리없이 퍼져나간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바로 정감록(鄭鑑錄)과 조선의 노스트라다무스로 불리우는 남사고(南師古)의 예언들입니다.  이씨조선은 망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되는데 새시대에 살만한 곳들은 남쪽에 있다는 남조선사상(南朝鮮思想)이 일기 시작한 것입니다. 

민간사이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설왕설래하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마침내 종교운동으로 변한 것은 19세기 들어서서의 일입니다. 

최제우(崔濟愚)의 천도교(天道敎, 동학), 강일순(姜一淳)의 증산교(甑山敎), 김일부(金一夫)의 정역사상( 正易思想),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의 원불교(圓佛敎) 등이 일어난 때입니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바로 새로운 세상입니다. 후천개벽사상(後天開闢思想)이라고도 합니다. 수 백년 동안 불안과 고통, 차별, 빈곤 등으로 이 세상이 아닌 어떤 구원을 이루어주는 세상을 갈망하는 백성들에게 구원이 이루어지는 새 세상을 선포한 것입니다. 

상생

후천개벽사상 또는 종교란  지난 시대 곧 선천시대(선천시대)는 지났고 이젠 모든 재난과 고통에서 해방되는 새로운 세상 곧 후천시대가 열렸으며, 이 새로운 세상에서는  해원상생(解冤 相生) 곧 맺힌 원한들이 모두 풀리고 온 세상 사람들이 한 가족처럼 더불어 사는 일이 일어나며, 사람들모두가 무자기(無自欺)의 마음 곧 스스로 속이지 않는 마음을 안고 사는 세상이 열린 것을 믿는 것이랍니다. 

천도교의 지상선경(地上仙境), 증산교의 후천선경(後天仙境), 김일부(金一夫)의 정역(正易), 원불교 의  이상적인 불국토(佛國土) 등이 모두 후천개벽에 대한믿음과 이제 올 후천낙원에 대한 가르침이랍니다. 

이런 새로운 신앙운동은 사회변혁운동의 힘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동학운동이나 삼일운동 등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역할도 하게된 것입니다. 나중에 감리교인이 된 백범 김구선생도 젊은 시절엔 천도교인으로 동학혁명운동에 참여하였었답니다. 

한반도에 후천개벽 세상을 염원하는 민족종교들이 일어난 후 이미 백 오십여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한반도에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고대가 이어지고  있지요. 

자! 여기서 하나 생각해 보고 지나가기로 하지요. 어느날 갑자기 최제우가, 강증산, 김일부가 원불교의 박중빈이 한반도 역사속에 툭하고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이들이 큰 깨달음을 얻기까지 이미 고통에 신음하는 백성들이 삶을 이어오고 있었고, 백성들 가운데 정감록과 남사고의 이야기들이 떠돌아 다녔었다는 것입니다. 

이천 여년 전 팔레스타인 광야에서 앞 뒤 자르고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는  예수의 선포 역시 그 선포를 듣는 당시 팔레스타인 갈릴리 지방 사람들이 이어온 삶과 그들 가운데 떠돌던 이야기들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비행접시를 타고 다니다가 어느날(2014년 전) 어떤 곳(베들레헴)에  갑자기 짠!하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퍼져 살았던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던 이야기 곧 사상과 종교적 운동은 바로 묵시문학사상이요, 묵시종교였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 묵시문학운동, 묵시종교가 널리 성행했던 시절은 예수가 오기 약 200여년 전 곧 기원전 200여년 경부터, 예수 나신 뒤 약 200여년 곧 기원후 200여년 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이 묵시운동이 사라져 버리고, 그것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이어져 오게 된답니다. 

묵시 운동은 마지막 때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시작됩나다.  그 마지막 때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밀을 알려주는 천사와 마귀이야기가 나오고, 그들이 알려주는 메시아 왕국의 모습이 전해집니다. 그리고 사람들이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 그 이후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것이 바로 묵시문학운동입니다. 

그러면 묵시문학운동은 언제 어떻게 일어나게 된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