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 – 신(神)의 무상급식법-4

(당신의 천국-  다섯 번 째 이야기)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요한계시록 21: 3-4, 공동번역) 

탈애굽한지 달 반이 지나서부터 탈출 노예부족인 히브리족들은 하나님께서 차려 주시는 밥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메추라기 고기가 곁들여진 만나로 차려진 밥상입니다.  그리고 이 밥상 메뉴는 그들이 가나안 지경에 이를 때까지 약 40년 동안 이어졌다고 합니다.(출 16:35)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는 누구도 굶어 죽지 않도록 먹을 것을 거저 주는 나라라고 이미 말씀 드린바 있습니다. 

거저 주되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절대 공평한 밥상에 둘러 앉는다는 것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히브리족들에게 보여주신 천국 곧 신의 나라 모습입니다. 

equality-and-diversity

탈출 노예들인 히브리족의 수는 당시 군인이 되어 싸울 수 있는 장정의 수만 약 60만이 넘는 무리였다는 성서의 기록입니다. (민수기 1:46) 민수기의 기록에 따르면 12지파별로 수를 셉니다. 레위지파를 제외한  11지파의 군대 종사 가능한 인력들의 수를 세고 대표를 뽑습니다. 

무리들 가운데 총 우두머리인 모세와 부장이자 최고 참모이자 대변인이었던 아론을 위시한 지도부가 있었고 그 아래로 12지파로 나누인 지파 지대장들과 참모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 가운데는 분명 야훼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의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바로 권력 소유의 차이가 존재했고, 지위의 차이가 존재했고, 권력 소유와 지위 차이에 따른 해야 할 일들의 명확한 규정과 책임들이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먹는 것에 관한한 누구도 특별한 대접을 받지 않는 절대 평등의 밥상을 나누었다는 것이 성서의 기록입니다.

음식의 질 뿐만 아니라 먹는 양에 이르기까지 하루 하루 각자가 배부를 정도까지만 똑같이 먹을 수 있는 무상급식을 신이 베풀었다는 애굽탈출 노예들의 고백이 바로 성서의 기록입니다. 

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두번 째 모습은 바로 누구에게나 공평한 밥상입니다. 

성서는 우리들에게 이런 아주 공평한 밥상의 모습을 두군데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만나 이야기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모습에서 입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나누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사도행전 2장 44-46, 공동번역) 

여기에서 우리가 아주 눈여겨 보아야할 지점이 바로 출애굽기 16장 35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착지에 이르기까지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 

끝나는 기간이 있었다는 말이고 그 기간이 사십년이라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죽음, 부활, 승천 이후에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초대교회의 모습도 이와 똑같습니다. 그들의 공동체 생활 곧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먹고 나누는 모습도 한정적인 기간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모세의 시내산 십계명과 광야에서 이루어진 여러가지 신과 히브리족 사이에 이루어진 계약들과 신약시대 초대교회 신도들의 공동생활이 한세대나 두세대에 걸쳐 철저히 믿고 지켜졌을 것이라는 추론에 많은 학자들이 동의를 하거니와 저 역시 그랬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일정 기간이 지나서 사람사는 사회에서 이런 절대 평등의 모습은 사라졌다는 성서의 기록입니다. 

성서에 기록된 이 두가지 경우의 절대평등의 모습 이외에도 사람들이 만들어 온 역사 가운데는 유사 절대평등의 노력들이나 시도들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이 있었답니다. 그러나 어떤 노력과 시도들도 한세대나 두세대를 넘어선 경우는 없습니다. 

이 절대평등의 역사적 경험은  종말론적 삶에 대한 공동의 인식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시기에서만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종말론적 삶의 공동체가 무엇일까? 

우리들이 나누어야 할 다음 이야기입니다. 

신의 무상급식법은 하나님 나라 곧 천국,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밥상을 지배하는 법입니다. 바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공짜와 절대평등의 밥상법이랍니다. 

이제 당신의 천국 이야기는  종말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믿음 – 신의 무상급식법 -3

(당신의 천국 – 네번 째 이야기) 

성서는 묻지 않으면 침묵한다. 그런데 어떻게 묻느냐 하는 것이 그 대답을 유도한다. 성서를 자명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이미 대답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성서 대신 아집에 정좌하게 된다. – 안병무 

수년 전에 받았던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이 생각납니다. 호주에서 삼십여년 이민 목회를 담당하시다가 이제는 은퇴하신 어느 목사님께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흰 눈이 내리는 계절에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에 감사하라.”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시월의 주일 아침, 창밖을 내다 보다가 문득 떠오른 카드에 대한 추억입니다. 

가을을 누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의 축복인 셈입니다. 

우리들의 천국 이야기를 더 이어가기 전에 전제해야 할 것, 이왕이면 꼭 한번 짚고 넘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신앙, 종교라고해도 좋겠습니다. 글을 쓰는 저나 단 한 분이라도 제 글을 읽는 누군가나 서로 불편한 마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짚어보자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대해 “옳다, 그르다”의 판단이나 “맞다, 틀리다”의 잣대를 사용하지 말아달라는 전제입니다. 다만 “같다, 다르다” 라는 관점으로 읽어 주시면 편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지요. 

일테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탈애굽을 한 일단의 히브리 노예족들이 광야로 나와서 한달 반 쯤 이후에 터져나온 불평과 불만들을 출애굽기와 민수기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출 16:1-12, 17:1-7, 민 11:1-6, 14:1-3 등등) 

불평과 불만의 주된 내용들은 “배고프다, 고기 먹고 싶다, 목마르니 물 달라” 라는 사람들이 살기 위한 아주 기본적 욕구에 대한 것들입니다. 

야훼 신은 만나와 메추라기와 므리바 반석의 물로 사람들의 불평과 불만을 잠재운다는 것이 성서의 기록입니다. 

이런 성서의 기록을 보면서 해석하고, 따지고, 묻는 사람들의 성향을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봅니다. 아마 일반적으로 믿음, 신앙, 종교 등에 대한 태도들 역시 비슷할 것입니다. 

물론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 또는 종교 무관심자론자들은 별 뜻없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사람 사는 모양이라는 게 다 저마다 다른 법이니, 관심있는 이들을 이렇게 세가지 범주로 나누어 보는 것이지요. 

Point of View

첫째는 있는대로 믿는다는 사람들이 있겠습니다. 만나를 내려주시고, 메추라기 떼를 몰아다 주시고, 반석에서 때아닌 생수를 쏟아내 주신 분은 야훼 하나님이시고, 성서의 기록은 실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는동시에 오늘날 자신들이 신뢰하는 과학이라는 것으로 검증 가능하다는 사람들입니다. 

두번 째는 그런 기록들은 다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일테면 당시 탈출 노예들의 수를 다 먹일만한 메추라기떼가 날아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과학적 이론을 들이대거나 지금도 시내광야에 가면 연지벌레로 인해 생기는 만나와 똑같은 먹을 거리를 볼 수 있음으로 만나란 단지 자연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세번 째로는 신앙적 고백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나가 자연적 현상이던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이던 그것의 중요성 곧 역사적 사실 여부의 중요성 보다는 당시 사람들의 공동체가 자신들의 경험을 어떻게 고백했는냐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그 고백을 믿고 공유하는 것에 촛점을 맞추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에 대한 이런 서로 다른 입장은 비단 종교적 관점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문득 재미난 예가 생각납니다. 나이들수록 점점 더 확고해 지는 생각 가운데 하나가  한민족은 참 종교적인 인자의 뿌리가 깊다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의 기초노령연금에 대한 기사들을 보면서 한국인의 종교성을 떠올린 것이지요. 

지난해 12월 대통령 선거 후보들의 TV토론에서 당시 박근혜후보는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월 20만원씩 일괄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합니다. 이에 토론 상대인 문재인후보는 그러려면 돈이 필요한데 세금은 더 걷지 않겠다면서 돈 마련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박근혜후보가 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대통령 되려고 한다.” 

그리고 박근혜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출애굽기 16장을 보면 배고프다고 불평하는 무리들에게 야훼는 “내가 준다”라고 선언을 합니다. 모세를 비롯한 지도부나 불평을 늘어놓던 무리들 누구도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라고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내린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며 야훼가 일하셨다고 믿습니다. 믿음입니다. 신앙입니다. 

다행히도 박근혜가 신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왜?”라는 물음이 필요치 않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신처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말한(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나, 그녀를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들이나 저는 종교적 신앙행위로 해석해 본답니다. 

신앙 또는 믿음에 대한 세 부류의 사람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쯤 제 믿음의 방법과 제가 글을 쓰는 관점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사람들의 행위와 고백을 통해 만났고, 지금도 만나고 있고, 이후로도 만날 신에 대한 믿음 위에서 이 연재를 이어간다는 말씀입니다.

공짜- 신(神)의 무상급식법-2

(당신의 천국- 세번 째 이야기) 

야훼의 명령이니 저마다 먹을 만큼씩 거두어 들여라. 한 사람에 한 오멜씩 식구 수대로 거두어 들이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키는 대로 하였다. 많이 거두어 들이는 사람도 있었고 덜 거두어 드리는 사람도 있었으나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결국 저마다 먹을 만큼씩 거두어 들였던 것이다. (출애굽기 16장 16-19절, 공동번역) 

제 나이 어렸을 때의 기억입니다. 아마 국민학교 입학 전후 무렵일 터이니 1950년대 말에서 1960대 초 쯤의 제 기억일 것입니다. 친가보다는 외가 친적들이 많았답니다.  특히  한남동 토박이 외할아버지의 권위가 대단한 시절이어서 명절이면 외가에 모인 친척들이 수십명이 넘었답니다. 

제가 한 살 터울 외사촌 형과 막걸리에 취해 어른들의 놀림을 받던 시절이었답니다. 

잔치상에 한 잔 얼근해 지신 어른들의 이야기는 한 곳으로 모이곤 했답니다. 대청 마루에 진을 치셨던 외할아버지 항렬의 할아버지들이나 건너방의 외삼촌들과 큰 형님들 사랑채 차지였던 아버지나 이모부들 예외가 없었답니다. 

이야기의 꼬리가 물려 이어지던 이야기는 바로 6.25 전쟁 때 이야기였답니다. 

6.25a

할아버지들의 피난 이야기나, 큰 외삼촌의 국민방위군 시절 이야기, 아버지와 둘째 외삼촌의 전쟁 이야기, 막내 삼촌과 큰 형님의 피난 이야기 등등 오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리 만큼 듣고 또 들은 이야기들이랍니다. 

외가 일가들이(당시 용산 미군 부대에서 일하시던 아버지 덕에 우리 가족들도 한남동 외가의 일원이었답니다.) 피난 행렬에 합류한 것은 한강다리가 끊어진 이후였다고 합니다. 다행히 한강을 접하고 있는 한남동의 특성상 배를 타기가 쉬었기에 한강을 쉽게 건넜다고 합니다. 

외가의 피난 행렬이 천안을 지날 무렵 이고 지고 온 먹을 거리들이 동이 났고, 가락지들을 팔아야 하는 끼니를 때우는 처지들이 되었답니다. 그리고 식구들이 뿔뿔이 헤어지게 되고 부산에서 다시 합류하여 한남동으로 되돌아 오기까지의 그 긴 소설들을 들을 수 있었답니다. 

국민방위군_징집자들

제 외가의 피난 이야기를 돌아보면 급하게 짐을 꾸려 떠났지만 서울서 천안까지는 먹을 만큼의 양식을 이거나 지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의 양식이면 바로 돌아 올 수 있겠거니 하는 생각들도 조금은 했을 것이고, 당시 지니고 떠날 양식의 전부가 그 것 뿐이었을 수도 있겠고, 운반 수단상 그 이상은 짊어지거나 이고 갈 수가 없었을 수도 있었을 겝니다. 

그 피난 대열에서 외가의 모든 식구들은 무사했고, 다시 다 한남동으로 모였다고 합니다. 다만  저 보다 일곱 살 위인 누님이 어머니 곁을 떠났다는 이야기와  제일 거지 차림으로 해골만 남은 모습으로 돌아 온 가족은 국가에서 불러서 동원되어 국민방위병이 되었던 큰 외삼촌이었다는 이야기가 아직 생생하답니다. 

자! 3500여년 전으로 중동의 시내 광야로 돌아가봅니다. 

탈애굽을 한 백만(사실 이 숫자는 아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직은’ 이라는 말을 기억해 두시면 좋겠습니다.)에 이르는 노예 무리들이 강을 건너 광야에 들어섰습니다. 

이들이 애초 목적지로 정한 가나안은 무리들이  약 한달 정도 걸으면 도착 가능한 거리였습니다. 적어도 한 달 정도 먹을 양식은 탈애굽을 할 때  너나없이 챙겨왔을 것입니다.  한 달 반쯤 지났을 때 굶어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며 무리의 우두머리인 모세를 비롯한 왈 지도부에게 원망의 소리를 드높혔다는 기록을 보면 적어도 한 달 정도는 먹는 것으로 걱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출애굽기 16장의 기록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 탈출 노예들이 원망하고 항의하는 대상은 모세와 지도부였습니다.(출애굽기 16장 3절) 모세와 지도부가 모여서 구수회의를 하고 대책 마련을 하고 어쩌고 하는 일은 없습니다. 무리들의 원망에 바로 야훼 신이 개입해서 해결책을 내어 놓습니다.(출애굽기 16장 4절) (모세와 지도부는 허당이었다는 것인데요. 요거 나중에 또 이야기 합니다.) 

“내가 먹을 것 준다”는 약속입니다. 

야훼라는 신이 개입하는 세상, 곧 야훼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의 기본은 “먹을 건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나라는 음식이건 햄버거건 육개장이건 아니, 하다못해 풀죽이건 굶어죽이지는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성서 이 부분에 대한 뛰어난 주석들도 많고, 오늘도 많은 설교가들이 다양한 해석들을 남기지만 신의 선언은 “내가 다스리는 한 굶어 죽지 않을 먹을 거리는 공짜로 준다”는 것입니다. 

제가 성서 이야기에서 실락원 이후에 처음으로 만나는 하나님의 나라 바로 천국의 모습입니다.  제가 죽음 이후에 만날 천국의 첫 모습인 동시에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첫 번째 동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라도 굶어 죽지 않을 만큼 공짜로 먹을 거리를 받을 수 있는 세상의 확대사”야말로 인류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대사가 인류 역사라는 말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도 있는 사람들,  곧 절대 기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10억에 가깝다고 하지만 그 퍼센테이지는 인류 역사의 발전과 함께 꾸준히 줄어왔습니다. 

성서 이야기에 나오는 신(神)의 무상급식법 제 일장 제일조는 “누구라도 굶어 죽지 않을 먹을 거리는 공짜로 준다.”는 것입니다. 신이 세상을 다스리는 한 그렇다는 말입니다. 

한달 정도 걸릴 거리를 사십년이 지나서야 도달한 히브리족의 숱한 사연들 처럼 아주 간단할 것 같은 “누구라도 굶어 죽지 않을 먹을 거리는 공짜로 준다.”는 신의 선언은 ‘하나의 조건’으로 하여 35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미완성의 선언으로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답니다. 

하늘나라의 두번 째 모습,  바로 평등의 문제랍니다.

만나 – 신(神)의 무상급식법-1

(당신의 천국 – 두번째 이야기)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먹을 것을 내려 줄 터이니, 백성들은 날마다 나가서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않은지 시험해 보리라.”(출애굽기16장 4절, 공동번역) 

성서에 나오는 출애굽 이야기는 대충 기원전 1500년경의 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고조선시대 쯤일 것입니다. 인류의 발전과정으로 보면 아직 철기시대는 꿈도 꾸지 못한 청동기 시대쯤이 될 것입니다. 피라밋 제국인 이집트의 중간왕조 시대이니, 우리들이 아주 먼 서양역사로 생각하는 그리스 로마는 아직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입니다. 동양으로치면 중국의 은 (殷)나라 시절쯤입니다. 은나라는 실제로 존재했다는 역사학자들의 이야기이고 보면 중국 역시 그 때쯤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때이랍니다. 

인류의 역사시대가 막 시작할 무렵의 이야기라는 말씀입니다. 

시각을 잠깐 돌려 3500여년 후의 한국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21세기 고도의 문명을 구가하는 시대에  단지 7년전 있었던 기록에 대해 진실여부를 따지고 존재 여부를 따지는 2013년 10월 현재의 위대한 대한민국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신실한 기독교인 그리고 한글을 사용하는 한국인이시라면 한번 눈감고 잠시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 7년도 지나지 않는 문서의 내용과 존재를 신뢰하지 않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3500년의 이야기들을 철썩같이 믿고 있다면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바로 그 지점에서 제 이야기는 시작된답니다. 

“진짜 일어나고 있었던 사실”과 “믿고 이야기(고백)하는 사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상관없음은 결코 옳고 그름의 싸움으로 딱 잘라 결과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진실입니다. 

일테면 진짜 일어 났었고, 있었던 사실이라도 그 사실을 보고 경험한 사람들의 고백에 따라 그 내용의 진실이 달리 알려지고, 수많은 사람들이그렇게 믿거나 역사가 그랬다고 기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모세와 히브리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500여년 전 이집트 노예 무리들이었던 히브리족이 출애굽을 합니다.  출애굽이라지만 사실은  탈애굽입니다. 수십만 거의 백만에 육박하거나 그 수를 넘었다는 한 무리들이 애굽을 탈출한 것이지요. 

그들의 목적지는 분명했습니다. 가나안이었습니다. 야훼라는 신(神)의 계시를 받아 이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모세였습니다. 당시 모세는 신과의 직통대화가 가능한 인물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신과 직통대화가 가능한 수많은 인물들이 전 세계에 널려 있지만, 모세가 누렸던 특권에 비하면 언급할 가치가 없을겝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거리는  정상인의 걸음걸이로 약 보름이 걸리는 거리라고 합니다. (아! 물론 저도 걸어보진 못했지만 그냥 남들 이야기랍니다.) 백만명 정도가 이 거리를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건 도대체 가늠할 수가 없는 시간이랍니다. 여러가지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축하연

제가 한국군대 생활을 한게 1970년 초중반 일인데요. 그 당시 육군 보병으로 100Km 완전군장 행군을 분기마다 했답니다. (개인적으로는 요령도 많이 피어서 다 하지는 않았답니다만.)  아마 대대별 시간 측정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답니다. 그 때 우리부대 사단장님의 존함이 장태완장군님이었는데 전두환 반란 사건 이후  저는 그 분을 진짜 장군으로 생각하지만 제가 100Km 행군을 했을 당시의 장태완님은 제겐 미친 개또라이였답니다. 

아무튼 장장군님의 훈련 효과 때문이었던지 처음 100Km 행군에서 24시간 정도 걸렸던 대대행군 속도는 훈련을 거듭하면서 스무시간 이내로 단축시켰던 기억이 아직 남아 있답니다. 

하물며 3500년전 백만명의 탈출행로에 있어서 모세와 그의 수족들이 자신들이 계획대로 된 일들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가라! 모세!”라는 신의 명령으로 백만여명의 노예들의 탈출 대열에 선봉이 된 모세와 그의 측근들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저 야훼를 믿는 마음으로”만 그 길을 떠났을까요? 거의 백만명에 달하는 노예들이 단 하나의 이견(異見)조차없이 보따리를 쌓았을까요? 

만나이야기는 애굽 탈출 후 약 한 달 반이 지난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랍니다. 

자! 이쯤 아주 중요한 지점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가야할 목적지가 분명했던 탈출 노예들이 배고픔을 호소하고 그 호소를 신이 들어 응답했던 시점 말입니다. 탈출 후 한달 반 쯤 지난 때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적지까지 걸릴 것이라고 오늘날 우리들이 예상할 수 있는 시간 약 한 달 전후고요. 

이야기의 진행상 최소 한 달 반 정도 탈출 무리들이 먹을 식량은 준비하고 떠난 일이라는 것 쯤은 상상이 가능한 일이지요. 

그런데 한 달 반은 커녕 사십년이 지난 이후에야 그들이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것이 성서의 이야기이고요. 

탈출 후 약 한 달 보름 후 최소한 배고픔을 면할 정도의 먹을거리가 없었던 탈출 노예들인 히브리족에게 나타난 것이 바로 ‘만나’라고 하는 식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