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주말 오후, 친구 부부와 우리 내외가 함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펜실베니아  Swarthmore 마을의 소극장에서 락오페라 Jesus Christ Superstar를 보았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이젠 틈나면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며 살아보자는 배포가 맞는 친구의 생각이었다.

Swarthmore는 인구 6천을 조금 웃도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 있는 소극장 Players Club of Swarthmore는 107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다. 비교적 한적한 주택가 마을에 위치한 소극장은 마치 초등학교 강당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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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 입구 제법 너른 로비에는 107년의 역사를 말해주는 게시물들이 벽을 채우고 있었는데, 음료수와 간식들을 파는 매대는 아이들 소꿉놀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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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 입구에서 표를 받고 안내하는 이들을 보니 나는 아직 시퍼런 청춘이었는데, 내 나이는 300여석의 공연장을 거의 매운 관객들의 평균 연령 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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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전에 각종 안내를 하는 사내도 내 또래였는데, 그가 소극장 클럽 멤버들을 위한 안내를 한다면서 멤버들은 손을 들어 보라고 하니 객석의 약 1/3정도가 손을 들던 것이었다. 소극장을 위해 연회비를 내거나 기부하는 멤버들의 연령 역시 대부분 내 나이 또래 중늙은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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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시작되고, 오페라에 무지한 내 눈과 귀의 수준으로 보면 배우들의 연기와 음악성은 놀랄만큼 대단했다.

내 무지함 탓이 우선이지만 이따금 내가 공연에 매몰되지 못했던 까닭은 바로 내 앞자리에 앉아있는 아이 때문이었다. 옆자리 제 엄마와 함께 공연을 보고 있던 아이는 덩치가 제법 큰 십대 나이 즈음의 정신 신체 장애아였다.

무거운 음악이 흐르거나 노래가 고음으로 불려지거나 조명이 갑자기 어두어지거나 하면 아이는 몸을 뒤틀며 제 앞자리나 옆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찌르거나 머리를 만지거나 하곤 했는데, 그럴 때 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꼭 끼어 안고는 했었다. 그런 모자의 모습이 무대를 향한 내 시선을 뺏곤 하였다.

사실 내가 그보다 더 놀라운 시선을 보낸 관객들은 따로 있었다. 중간 휴식 시간이었는데 스물 언저리 처자를 양쪽에서 붙들고 걷는 중년 부부, 아마 가족일 듯한 일행이 그들이었다. 처자는 앞을 못보는 소경이었다.

아이들 소꿉장난 같던 로비의 매대는 중간 휴식이 되자 제법 붐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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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Christ Superstar의 극 내용은 익히 아는 것이었고, 내 젊은 시절 70년대의 파격적인 예수나 유다의 해석이 오늘날에야 전혀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나는 어제 그 자리에서 새롭게 예수를 만났었다.

연극이 끝나고, 배우들을 향한 이어지는 박수 소리도 끝나고 객석의 관중들이 일어난 후의 일이었다. 내 앞자리에 앉아있던 지체아에게 시달림(?)을 받았던 주변의 사람들은 너나할 것도 없이 아이와 엄마에게 인사를 건네던 것이었다. “연극 잘 보았니?”, “재밌었니?”하며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 엄마에겐 따듯한 눈길을 보내며 한두 마디 씩 인사를 건넸는데 그게 결코 건성이 아니었다.

어쩜 예수를 재해석하고 만나 얼싸 안는 일이란 무대 위에서가  아니라 객석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나는 모처럼 문화인 흉내를 내보았다.

초대 – 강도맞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환갑 진갑 다 지났어도 웬만한 모임에 나가면 말석차지랍니다. 하여 자리 펴고 자리 접는 뒷일과 막일들이 제 몫이거니하며 개의치 않는답니다. 물론 말석차지가 좋은 점도 있답니다. 그런 자리에선 이 나이가 아직 청춘이라는 생각도 할수 있거니와 조금 헝클어진다 하여도 눈감고 넘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나이로 따져 저보다 어린사람들이 많은 모임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자리에선 아무래도 더욱 신중해지고 가급적 뒷자리에서 드러나지 않게 조심하려고 애쓰는 편이랍니다. 허나 타고난 성격 때문에 불쑥불쑥 튀는 통에 모임이 끝나고나면 ‘아차!’하는 때가 종종 있답니다.

그렇게 종종 ‘아차!’하면서도 이즈음 제가 즐겨하는 모임이 있답니다. 모임의 이름도 있답니다. 바로 “필라 세사모”입니다. 정식 명칭은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모임”이랍니다.

명확히 말하자면 제 거주지가 필라델피아는 아니지만 제가 사는 델라웨어주도 범 필라델피아 지역 변방에 위치함으로 끼워 주신 것이랍니다. 가급적 박수나 치며 앞서가는 이들을 쫓아나 가자고 얼굴 내민 일인데, 종종 버리지 못한 못된 습관으로 ‘아차!’하면서도 모임을 즐기고 있답니다. 무엇보다 모임에 대해 열성적이며 나이살에 비해 ‘아차!’하는 빈도수가 높은 저를 잘 이해해주는 이 모임의 구성원들이 넉넉한 까닭입니다.

이 모임에서 아주 뜻깊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재외동포들이 온라인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행사랍니다. 이 행사를 위해 어제 저녁에 약 한 시간에 걸쳐 시험적으로, 온라인에서 여러 다른 지역에 있는 이들이 같은 시간에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 연습을 해보았답니다.

한국의 세월호 유가족들 몇 분들을 비롯하여 호주, 영국, 캐나다, 그리고 미국 동부의 뉴욕과 뉴저지 그리고 필라델피아, 중부의 시카고와 테네시, 서부의 켈리포니아 등 여러 곳에 계신 분들이 함께 했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는 일요일(11월 15일) 저녁에 세월호 유가족들과 재외동포들이 온라인에서 만나는 첫번째 행사를 갖는답니다.

자, 이쯤 세월호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들 이야기를 좀 하고 넘어가려합니다. 제가 바라보고 느끼는 세월호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의 모습입니다.

제가 잠시나마 가르침을 받았던 선생님들 가운데 서남동목사님이 계시답니다. 목사님께서 세상 뜨신지 벌써 서른 해가 넘었답니다.  그 어르신께서 즐겨 인용하시던 예수의 비유가 있답니다. 잘 아시거나 한번쯤은 들어보셨음직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 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 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 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0: 29-37

성서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비유 말씀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예수믿는 이들이 해야할 일이라는 해석은 익히 아는 교회의 전통적 이해입니다. 그런데 서남동목사님은 이 비유를 놓고 이렇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의 역할은?” 이라고 말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당신은 누구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서목사님은 “강도만나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예수라고 말씀하셨답니다. 2015년 현재, 제가 이해하고 느끼고 만나는 세월호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의 모습이랍니다. 바로 이들이 제가 섬겨야하는 예수라고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이 길을 가다 강도만났던 일에 대해 적절한 보상과 배상을 받았고, 이미 다 치유되고도 남을 대접을 받았다고 여긴답니다. 더하여 그렇게 강도 맞는 일은 살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인데 유달리 특별나게 군다고 혀를 차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의 시작은 “영생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 바로 영생을 꿈꾸는 이들에게 대한 답변입니다.

서남동선생님은 그 성서적 물음과 답변을 제게 이렇게 해석해 주신답니다. 오늘 네가 보고 있는 ‘강도만나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예수인 줄로 알라고 말입니다. 바로 제가 만나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하는 일은 이런 제 생각을 넉넉히 이해해주는 필라세사모의 구성원들이랍니다.

혹시라도 오는 11월 15일 저녁에 있을 “세월호 유가족들과 재외동포들의 온라인 만남” 행사에 참여 하시기를 원하시는 페친이 계시다면(단, 재외동포 페친들만) 제게 연락 주시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답니다. 이메일([email protected] 으로)을 주시면 함께 하실 수 있는 안내를 보내 드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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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일로 정말 잔인하고 몹쓸 세상도 경험했지만, 사회를 지탱해 주는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됐어요. – 중략- 아, 소수라도 이렇게 힘써 주시는 분들이 있으니 덜 억울하구나, 내가 덜 바보구나, 내가 덜 외롭구나 싶어요. – 중략- 그런걸 보면 외면만 받는 세상속에 있는건 아니네요.” – 세월호희생자 길채원학생의 어머니 허영무씨

“진실이라는 목표 하나 보고 달려가다보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 중략-  어쨌든 내가 할수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간다. 그거예요. 이길 가다보면 또 다른사람들이 있으니까. 우리 가고난 뒤에 다른사람들이 언젠가는 밝혀줄거다. 그건 확신해요. 우리가 앞서서 얼마만큼 가줬으니까 다음사람들이 거기에서 출발하면 되니까….” – 세월호희생자 이창현학생의 어머니 최순화씨

누군가의 외로움을 덜어줄 소수가 되어보지 않으시렵니까? 이 사회를 지탱해 나갈 좋은사람이 되어보지 않으시렵니까? 누군가 앞서가다 지친 이들의 곁에서 잠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지않으시렵니까? 그 자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만남 – 잊지 않을께

지난 3월 8일 필라델피아를 방문했던 세월호 유가족 동혁엄마 김성실님과 경빈엄마 전인숙님이 남긴 말입니다.

9<저희마음에 들어와 주십시오. 그리고 침묵하지 말고 노란리본으로 외쳐주십시오.

우리에게 직접 물어봐주십시오. 홈페이지에도 자주 들어와서 힘을 내라고 해주시고, 광화문과 팽목항과 분향소를 잘 지켜내서 온국민이 원하는 것이 진실이 되도록 힘을 합해주십시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수 있는 국민정신을 회복하도록 해외에서도 많이 알려주십시오.>

 

 

 

 

우리들의 땅끝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증인 되리라” – 성서 사도행전(사도행전1:8)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성서 말씀을 되뇌이며 “땅끝까지, 땅끝까지” 이른바 선교여행을 떠나는 것이 한인교회의 유행이 된 일도 제법 오래 되었습니다.

조금 지나친 비유라고 나무라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이즈음 지구촌 골치거리인 이슬람 국가(IS)의 망상과 한인교회들이 땅끝까지 선교라며 불교, 이슬람 지역을 비롯한 전세계를 향한 자기식 믿음을 내세우는 일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하는 생각도 있답니다.

내가 가서 닿을 수 있는 땅끝에 놓여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언제 어떻게 어느 땅끝에 가 닿더라도 내 코 앞에 언제나 놓여 있는 것은 바로 내 발끝입니다.

바로 내 발끝이 지금 나에겐 땅끝인 셈입니다.

그렇게 지금 내 발끝이 놓인 땅끝에서 오늘 공동체의 문제를 가지고 증인이 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이야기 두개를 전해 드립니다.

<세월호 이야기>

오늘자 한국신문 인터넷판 첫머리를 복사한 사진입니다. 조중동이야 애초 기대조차 없으니 예외로 치더라도 한번 보시지요.

헤드

늘 있어왔던 노란 리본과 “잊지 않겠습니다”,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이 싹 사라져 버렸답니다.

그나마 한겨레만 오른쪽 아래 작은 사각형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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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잊혀져 가는 세월호를 여기 땅끝에서 붙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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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3월 8일 일요일 오후 5시,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인 단원고 2학년 김동혁군과 임경빈군의 어머니 김성실님과 전인숙님이 필라에 오십니다.

참사 직후부터 지난 300여일 동안 진상규명과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유가족들과 국민, 그리고 해외 동포들의 외침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와 여당, 그리고 주류 언론의 외면 속에서도 이러한 노력들이 있었기에 지난 해 11월 세월호 특별법(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진상규명을 위한 어떠한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조사위 설립 준비를 지원하는 주무부처인 해양수산부는 조사위원에 대한 대통령 임명장 수여 실무를 손놓고 있고 파견 공무원을 철수 시키는 등, 오히려 조사위 설립과 활동을 의도적으로 방해하고 있다는 의혹을 사고 있으며, 새누리당 김재원 의원은 조사위를 ‘세금도둑’이라 규정하기도 하였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에 대해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진상규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선체 인양조차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 속에서, 언론의 외면과 왜곡이라는 현실 속에서, 엄마들이 다시 한 번 길 위에 나섰습니다. 세월호 참사 피해 당사자로서, 현재까지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을, 피해 가족이 처한 입장과 앞으로의 방향을, 동포들에게 정확히 전달코자 먼 길을 찾아 오십니다.

유가족 만남3월 8일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글렌사이드에 위치한 필-몬트 크리스천 아카데미(Phil-Mont Christian Academy, PMCA)에서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눌 예정입니다. 참사 사흘부터 20여일 동안 실종자 구조 과정을 취재한 고발뉴스 이상호 기자의 현장기록 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다이빙벨>도 함께 관람할 예정입니다.  특히 이번 자리에서는 한국말을 모르는 분들께도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알릴 수 있도록, 영문 자막이 들어간 <다이빙벨>을 상영하며, 유가족 간담회도 원활한 소통을 위해 사전번역과 현장 통역을 제공할 예정입니다. 또한 간단한 다과가 준비하고, 아이들과 함께 오실 분들을 위해 탁아실도 운영합니다. 널리 알려주시고, 함께 참여해 주십시오.

덧붙여, 이번 주 수요일(2월 18일) 저녁을 시작해 25일, 3월 4일까지 매주 수요일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 행사경비 마련을 위한 ‘일일식당’ 행사가 있습니다. 간담회 준비팀의 회의장소이기도 한 <토담골>(블루벨 위치)에 오셔서 저녁 식사를 하시면, 식사비용의 25%가 간담회 행사경비를 위한 후원금으로 사용됩니다. 오셔서 맛있는 저녁식사도 드시고, 간담회 준비현황도 살펴보세요. 장소와 일시는 아래와 같습니다.

일시 : 2015년 2월 18일 저녁 6시 이후

장소 : 토담골 (1341 Township Line Rd. Blue Bell, PA 19422 (610) 239- 9260)

관심과 참여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필라 세사모 드림

<강정마을 이야기>

또 하나는 강정마을 이야기입니다. 땅끝을 찾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을 땅끝에서 맞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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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소식: 남한내 해군기지 반대 운동  –

미국 전역 영어 순회 강연회: 2015년 3월 17일 – 4월 16

운동가 박희은과 Paco Michelson 특별 강연

포기하지 않으면, 패할 없다”

2007년 이래, 강정 마을 주민과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남한내 유일한 특별 자치도인 제주도에 대한민국 해군 기지의 건설을 반대하기 위해 분투해왔다.

해군 기지는 미국과 남한의 이지스  전투 시스템(Aegis Combat Systems)의 본거지가 될 것이며, 이 전투 시스템은 록히드 마틴이 무기를 추적, 유도하기 위하여 생산하였다. 남한 해군 관리에 따르면  이 기지는 20척의 전함과 15만 톤급 크루즈 선박 두 척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제주도의 한국민들은 남한과 미국 정부의 이해를 위해 문화적 명소와 자신의 땅을 도둑맞는 것을 억지로 받아들이도록 폭력적으로 강요받고 있다. 이 충돌은 미국 신식민주의의 명백한 실례이다.

미국 전역 영어 순회 강연회: 2015년 3월 17일 – 4월 16

운동가 박희은과 Paco Michelson 특별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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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은
: 30년 동안, 박희은은 대한민국에서 창설된 소규모 공동체 네트웍, “개척자들”과 함께 아시아 전역에 있는 분쟁지역에서 평화를 건설해왔습니다. 가장 최근에 그녀는 대한민국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정의를 위해  투쟁하며 때론 울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면서 투쟁했습니다.

Paco Michelson: 대한민국에서 창설된 소규모 공동체 네트웍, “개척자들”과 함께, Paco Michelson은 아시아 전역 많은 분쟁 지역에서, 가장 최근에는 주민들의 소망과는 반대로 전쟁기지가 건설되고 있는 대한민국 제주도에서 거주하며 일해왔다. 그는 군사중심정책과 억압에 직면하고 있는 제주도의 주민들과 함께 강한 저항을 구축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순회 강연회 스케쥴 (상세 행사 내용은 조만간 발표될 것임!):

Boston: March 16 (Mon) – March 19 (Thursday)

Maine: March 19 (Thursday) – March 21 (Saturday)

NYC: March 21 (Saturday) – March 26 (Thursday)

Phila: March 26 (Thursday) pm – March 28 (Saturday)

DC: March 28 (Saturday) – March 30 (Monday)

LA: March 30 (Monday) – April 4 (Saturday)

SF & Santa Cruz: April 4 (Saturday) – April 9 (Thursday)

Seattle: April 9 (Thursday) – April 12 (Sunday)

Portland: April 12 (Sunday) – April 16 (Thursday)

순회 강연회에 대한 정보 문의 연락처:

Juyeon JC Rhee <[email protected]>

www.SaveJejuNow.org

@SaveJejuNow

Facebook.com/Groups/NoNavalBase

호소문

2007년 이래, 강정 마을 주민과 그들의 지지자들은 국가 폭력, 기업 세력, 전쟁을 통한 부당 이득 취득, 환경 파괴와 맞서서 매일매일 분투하고 있다. 그들의 투쟁은 열정적이고  비폭력적이었다.

그들의 평화를 위한 노력의 결과, 아주 작은 강정 마을은 이제 남한 전역에서 “범죄”율이  가장 높은 지역 중의 하나가 되었다. (2012년 현재) 22만 명 이상의 경찰병력이 강정 마을에 상주하고 있다.

지금까지 700명 이상이 체포되어서, 650명 이상을 대상으로 약 200번에 이르는 법정 소송이 행해져서, 대략 27만 달러의 벌금이 부과되었고, 46명이 구속되었다.

외국인 30명 이상이 입국이 거부되거나, 추방, 입국이 불허되었다. 이 모두가 마을주민의 생계, 지역 생태계, 북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해군 기지 건설을 평화적으로 저항한다는 “범죄”를 이유로 행해진 일들이다.

강정마을 주민 다수는 농부이며, 정의를 위한 그들의 투쟁은 작물 생산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강정마을 지지자들 다수는 풀타임으로 투쟁에 임하고 있으며, 생계수단으로 임시 고용 잡일과 임시 농업 근로에 의존한다. 벌금은 더 높아져 가고 있어, 많은 사람들은 납부할 여유가 없는 수천 달러의 벌금을 내야 한다.

정의를 위한 이 투쟁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이들 용감한 평화건설자들(peacemakers)을 생각하시고, 법률 비용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기부를 해주십시요. 기부하려면, 다음 주소에 접속하고  “http://savejejunow.org/donate/”그리고  “Donate Now” 링크에 클릭하십시요. 당신의 기부가 “Jeju legal”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반드시 명시해 주십시요.

어느 은퇴목사의 회고 -4

<떠남, 버림 그리고 만남>

호주에서 33년간 이민목회를 정리하시고 은퇴하신 홍길복목사의 글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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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스토리들이 주는 의미

 

이제는 위에서 나누어 본 몇 가지 이야기들을 통하여 이들 이민 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의 경험담이 주는 의미를 살펴보고 그에 대한 신학적 반성(Theological Reflection)을 해야 할 차례다. 두가지 교훈이 있다고 보는데 이는 모두 다 기독론과 관계된다. 기독교란 결국 예수에 대한 이해와 해석과 고백이요, 그렇게 깨닫게 된 그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따라가는 삶이기 때문이다.

 

첫째로 이민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는 그리스도의 화육사건(The Incarnation )의 연속적 재현이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의 도성인신 사건을 기억하고 회상하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따라, 그와 더불어, 그가 가신 길을 따라가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기독론을 끊임 없이 연습하는 과정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생각 하셨던 방식으로 여러분도 자기 자신을 생각 하십시오. 그 분은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에 계셨으나 스스로를 높이지 않으셨고, 그 지위의 이익을 고집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조금도 고집하지 않으셨습니다! 때가 되자, 그 분은 하나님과 동등한 특권을 버리시고, 종의 지위를 취하셔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 분은 사람이 되셔서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신을 낮추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분은 특권을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심 없이 순종하며 사셨고, 사심없이 순종하며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가장 참혹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 5-8, 유진 피터슨의 신약 번역 “메시지”)

 

예수의 성육신 사건은 행위의 변형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이다. 이는 겸손하게 행동 하신것이 아니라 겸손한 인간이 되신 본질적 변화를 의미한다. 그야말로 두잉(doing)이 아니라 비잉(being)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진짜로 사람이 되셨지, 사람이 되신 것처럼 가면을 쓰고 찿아 오신 분이 아니다. 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고 참 사람이 되신 사건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본질이고 핵심이다. 

 

그런 각도에서 이민자들과 이민교회는 예수를 다시 설명하고 기독론을 재해석한다.

 

이민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누구인가?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는 이민자다. 그는 하늘에서 땅으로 이민을 왔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베들레헴을 떠나 에굽에 가서 피난 살이를 했다. 그는 여권도 비자도 없이 불법체류자로 살았다. 그는 이천 년전에 이미 보트 피플(boat people)로 국경을 넘어간 불법 입국자였다. 그의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온 후 그는 나사렛 사람이 되었다. 자신이 태어난 출생지와는 전혀 상관 없는 땅에서 <나사렛 사람>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주변인간, 변두리 사람으로 사셨다. 그는 한번도 의사 결정의 중심부에 들어가지 못했다. 버려진 땅에서 잊혀진 사람과 함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 가운데서 고난의 시대를 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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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민사건은 하나님의 <떠남>과 <버림>으로 시작이 되었다. 그는 높고 높은 하늘 보좌를 <떠나> 낮고 천한 인간 역사 속으로 들어 오셨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버리고> 사람이 되셨다. 그리하여 <떠남>과 <버림>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기독교 선교의 본질이 되었다.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은 교회는 아직 교회가 아니다. 아직도 여전히 자기 땅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진정한 예수의 제자라고 할 수 없다. 성서는 모두 것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에덴을 떠나고 시날 평지를 떠나고 갈데아 우르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부터 시작이 되어 그랄과 불레셋을 떠나고 다시 하란과 가나안을 떠나고 마침내는 애굽을 떠난 사람들의 떠나고, 버리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나라 잃은 유대인들은 조국을 떠나 이역에서 포로의 삶을 살았으며 나그네와 행인이 되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유대인의 정체성이며 심볼이다. 신약시대의 제자들은 부모와 이웃, 형제와 친구들을 떠나면서 배와 그물, 전통과 관습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일세기 그리스도인들은 환란과 핍박 가운데서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죽음의 행진을 계속했다.  그들의 흩어짐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넓히는 촉매와 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는 아직 떠날 준비 조차도 되어 있질 않다. 그러니 버린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다. 한국의 크리스챤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경험도 없이 하늘로 올라 갈 생각을 하고 있다. 죽지도 않고 부활을 노래하는 것은 헛되고 우스운 일이며, 버리지도 않고 얻겠다고 하는 발상은 어리석은 일이다. 다행히도 오대양 육대주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코리안들은 일단 지리적으로나마 떠난 사람들이다. 이제 그들에게 숙제로 주어진 요구 사항은 이 지리적 떠남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정신적 이별과 함께 영적인 순례의 길을 걷는 일이다.

 

하늘을 떠나 땅으로 오신 하나님은 이제 사람들과 <하나>가 되었다. <떠남>과 <버림> 다음에는 새로운 <만남>이 있어야 한다. 땅으로 내려오신 하나님은 흙과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들을 만나 주셨고 그 인간들과 하나가 되었다. 더 이상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말씀이 살과 피가 되어 우리가 사는 곳으로 오셨다” (요한복음서 1:14절, 개역 개정판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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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목회는 조국과 함께 그 땅에서 맺어졌던 모든 과거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일체의 전통과 습관, 문화와 역사를<떠남> <버림>으로 시작되어,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관계를 맺음으로 꽃피어 진다. 하지만 몸은 떠났지만 생각과 마음은 여전히 경상도와 전라도, 강원도와 충청도 그 어느 곳에 붙박이처럼 박혀 꿈적도 하지 않는 이민자들과 이민 목회자들이 많이 있다. 아직도 나를 이 땅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은 듣지 못하고 혹시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 나를 불러주지나 않을까 하면서 기웃거리는 사람은 아직 떠나지도 않았고 버리지도 않은 사람들이다.

 

오늘날 이민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선교행위는 아직도 1세기의 가현설(Docetism)을 넘어서지 못한채 표류하고 있다. 세상은 교회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수룩하지 않다. 우리가 정말로 가난한지, 아니면 그냥 가난한 척 하고 있는지, 교회가 진짜로 세상을 섬기고 사랑하는지, 아니면 그냥 겉으로만 섬기고 사랑하는 척 하는지, 목사들이 참으로 겸손한지, 아니면 그냥 내숭을 떠는지, 훤히 우리들의 속을 다 들여다 보고 있다.

 

몸에 밴 권위주의적 생각과 습관에 매여 목사랍시고 손가락으로 지시만하고, 물질에 눈이 어두워 높은 연봉과 좋은 사택, 좋은 자동차에만 관심을 갖고, 삼박자 축복을 포함한 기복주의 신앙에 젖에 아무나 보고 축복한다며 자신을 무슨 축복의 통로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 새로운 선교의 현장에 적합한 사람이 못된다. 이민목회는 나라 떠나 찢기고 상처 투성이인 이민자들과 하나가 되어 그들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생각과 삶을 같이 하고 동고동락하는 동화작업이다. 목사나 선교사는 목자이고 신도나 교민들은 양 이라고 생각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이는 개혁 신학이 아니라 카톨릭적 발상이다.

 

목사는 그리스도의 대행자가 아니라 그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양이다. 인간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양이고 오직 예수만이 목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