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야(前夜) – 중간사 7

(당신의 천국 – 일흔 두번 째 이야기) 

그 주변 이방인들은 유다인들이 제단을 다시 쌓고 성소를 복구하여 전과 같이 만들어 놓았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노하였다.  그래서 자기네들과 함께 살고 있던 야곱의 후손들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고 유다인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유다는 이스라엘을 괴롭혀 오던 에사오의 자손들을 에돔의 아크라바테네에서 공격하여 큰 타격을 주고 굴복시킨 다음 많은 전리품을 빼앗았다. – 마카베오상 5 : 1 – 3, 공동번역에서 

유다 마카베오와 그를 따르던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난 뒤 이들이 벌여 온 전투의 성격이 바뀌게 됩니다. 이제껏 벌인 전투들은  광야로 도망가서 살기 위해 벌인 게릴라전이었는데, 이제는 유다의 전통과 신앙을 되찾고 원래 옛날 누리던 영토를 되찾는 정복전쟁으로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들이 탄탄대로를 걷듯 순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다 마카베오가 이끄는 세력이 커갈즈음 셀류커스왕조의 대군이 밀려와 예루살렘성에 가두고 포위하여 전멸의 위기에 놓입니다. 

마사다

바람 앞에 놓인 등불, 왈 풍전등화격이었던 마카베오군대를 살린 것은 셀류커스왕조의 왕위 다툼이었습니다. 마카베오 혁명을 유발시켰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죽자 셀류커스왕조은 극심한 후계 쟁탈전에 휩싸입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셀류커스왕조의 군대들은 평화협상을 제의합니다. 

협상안은 “앞으로 내정 간섭 않겠다. 유대교의식을 억압하는 법령들은 철폐하겠다.대 제사장은 온건한 헬라주의자인  엘리아킴(헬라어로는 알키무스)으로 세운다. 유다 마카비우스와 그  추종자들을 처벌하지 않겠다.”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마카베오는 이 협상안을 거절하지만 종교적 전통을 지키는 것이 제일의 목적이었던 하시딤 일파의 주장에 따라 이 협상안을 받아드리게 됩니다. 

양쪽 모두 위기를 넘긴듯 했지만 칼자루를 쥔 쪽은 셀류커스왕조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앞잡이였던 엘리아킴(알키무스)대제사장은 마카베오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하시딤일파를 처형해 버립니다. 

그제서야 마카베오가 옳았다는 생각으로 다시 뭉친 유다 독립군들의 재항거 운동이 벌여지는데,  재진압에 나선 셀류커스왕조의 의해 유다 마카베오가 전사를 하게 됩니다. 그를 이어 동생인 요나단이 독립군 대장이 됩니다. 

요나단 역시 형과 아버지의 용맹을 이어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새롭게 독립군의 세를 불리고 있을 즈음 , 셀류커스 왕조는 내분에 다시 휩싸이게 됩니다. 더더구나나 신흥 제국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로마가 셀류커스왕조를 위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제국들이 다투고 내분에 쌓인 틈을 타서 요나단은 유다의 정치와 종교의 모든 권한을 쥐고자 유다의 대제사장직에 오르게 되는데, 이 일이 유다의 종파 분열이 일어나는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유다의 전통적 율법으로 보자면 레위지파의 아론계론이 대제사장직을 이어가야 하는데(비록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혁명의 주체였던 유다 마케베오나 그의 동생 요나단은 유다지파였답니다. 

게다가 왕권 다툼에 빠진 셀류커스 왕조는 여러 세력들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 각기 다른 세력 어디에 선을 대고  완장을 차느냐에 따라 유대 종파가 나누어 지는 것입니다. 

우선 “이꼴 저꼴 다 보기싫다, 우린 야훼 하나님 신앙만으로 뭉쳐서 우리끼리 살겠다.”며 동굴을 파고 들어가 자신들만의 규율대로 살게되는 집단이 있습니다. 이들이 사해문서 또는 쿰란문서를 남긴 에세네파입니다.  약 250여년 동안 이 집단의 전통이 유지되며 이어진답니다. 

두번 째는 비록 대제사장의 승계권은 잃었을지라도 전통인 종교 귀족 계급들이 뭉쳐 하나의 집단을 이루게 됩니다. 솔로몬 시대 이후로 부터 내려온, 또한 바벨론 포로 후기부터 세를 불려온 사독계열의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바로 사두개파입니다. 

세번 째는  하시딤(경건한 사람들)의 후예인 바리새파입니다. 

유대인들 사이에 그들 나름대로의 노선과 신앙을 중심으로 뭉친 이런 종파들이 생기고  뭉쳐서 후대까지 기록과 이야기들을 남기게 되지만, 그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답니다. 예수시대에 바리새파의 인원이 대략 6,000여명, 에세네파는 약 4,000여명 정도로 추정되는 바, 귀족계급인 사두개파는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다수 수많은 유대인들과 모계나 부계로 유대의 혈통을 이어온 사람들,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거나  외국에 나가 살던 이들은 어디에 속해 있을까요? 하루 하루 일용할 양식에 매어 살던 사람들 말입니다. 이런 무리가 크게 존재하고 있었겠지요. 새로운 시대는 바로 이들과 함께 열리게 된다는 점 기억하고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이렇게 유다 마카베오의 형제들이 권위를 이어가며 독립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루고 정치 종교적 독립을 이루며 왕국을 세우게 되는데 이를 일컬어 하스몬왕조라고 부른답니다. 

하스몬왕조는 시리아 헬레니즘 왕국인 셀류커스왕조가 저물고 로마왕조가 새롭게 들어서는 때에 복잡한 정세와 맞물려 위태위태한 독립왕국을 이어갑니다. 그 끝무렵에 헤롯대왕의 이름이 나오게 된답니다. 

이제 예수를 맞이하는 신약시대를 코 앞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 중간사 옛날 이야기는 마치고, 그 무렵 바벨론포로 해방기에서 마카베오 독립운동이 일어나던 사이에 이루어진 성경책에 대해 간략히 짚고 넘어 가려고 합니다. 

먼저 시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축제 – 중간사 6

(당신의 천국 – 일흔 한 번 째 이야기) 

셀류코스가 죽고 에피파네스라고 불리는 안티오쿠스가 그 왕위를 계승했을 때에 오니아스의 동생 야손이 부정한 수단으로 대사제직을 손에 넣었다.   야손은 왕을 알현하고 은 삼백 육십 달란트와 또 다른 수입원에서 팔십 달란트를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왕이 자기에게 경기장을 건축할 권한과 청년훈련소를 세울 권한과 예루살렘에 안티오쿠스 청년단을 결성할 권한을 준다면 백 오십 달란트를 더 바치겠다고 약속하였다.   왕은 이것을 승낙하였다. 야손은 왕의 승낙을 받아 직권을 쥐자마자 자기 동족들의 생활을 그리이스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 마케베오 하 4 : 7 – 11, 공동번역 

바벨론, 페르시아, 이집트계 헬레니즘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식민지배가 이어오는 동안 유대인들이 식민지배를 참아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예루살렘에 대한 신정통치권을 인정 받은 때문이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에 대한 예배 의식과 전통을 인정한 식민지배 제국과 적절한 타협을 하며 지내온 것입니다. 

그런데 셀류커스 왕조의 에피파네스왕이 다스리는 시대에 이르러 예루살렘의 신앙과 전통이 깡그리 무너지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대제사장 자리가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자리로 변하였고, 야훼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은 그리스 제우스 신당으로 바뀌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조차 그리스 이름인 안티오키아라고 바꾸려하는 움직임까지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대의 전통들과 신앙은 모두 미개하고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철저히 헬라문화를 받아드리는 것만이 팔레스타인과 유다가 선진화 되는 길이라는 강요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헬라문명을 받아드리기를 거부하고 유대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자에게는 죽음이 대가로 따르는 강요였습니다. 

이런 시대를 맞이하면 예나 지금이나, 동서를 막론하고 이런 시대의 물결을 맞이하는 다양한 모습들이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결치는대로, 세월이 흐르는대로 그 변화에 맞추어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길, 또는 평생 노예가 되는 길이라도 하더라도 생각없이 묻혀가는 것입니다. 

반면에 철저하게 변화에 순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대열의 선두에 서서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지요. 

또한 그 변화에 대해 목숨 걸고 항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지켜온 전통을 앗기지 않으려고 목숨을 거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크게 세가지 부류로 나누어 보았지만 그 세가지도 강도의 세기와 그 길을 선택한 까닭에 따라 수많은 작은 종파들로 또 나누어지는 것이지요. 

뭐 멀리 갈 것 없지요. 다가오는 새해는 갑오년(甲午年)입니다. 한반도 남쪽에서 갑오 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딱 120년되는 해입니다. 그 무렵부터 일기 시작한 한반도의 수많은 종파들이 있답니다. 친로, 친청, 친일, 친미파들이 저마다 무리를 짓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적극적 친일파, 소극적 친일파 등을 비롯하여 민족주의 국내파와 국외파, 공산주의 국내파와 국외파 등 다양하게 시대에 대응하는 무리들이 일어났듯이 말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답니다.  세류커스왕조의 헬라화 정책의 전면에 나서서 유다의 전통인 야훼 신앙을 무너뜨린 것은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완장을 찬 앞잡이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대항하여 유대의 전통과 야훼신앙을 지키려 목숨을 건 사람들 역시 유대인들이였고요. 그런 사람들 가운데 아들 다섯을 둔 마따디아라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이 양반이 바로 새롭게 세워지는 유다왕국의 시조가 되는 셈입니다. 

헬라신전에 머리를 조아린 동족을 때려 죽이고, 헬라 신전에 예배를 강요한 왕의 사신까지 때려 죽인 마따디아는 다섯 아들들과 자신을 따르는 유대인들과 함께 광야로 피신을 합니다. 

그들은 광야와 산에서 게릴라전으로 항쟁을 합니다. 셀류커스의 군대를 피해 다니면서 틈을 보아가며 적군에게 크게 피해를 입히는 게릴라 전술로  이름을 떨치게 되고, 그의 휘하에는 날이 갈수록  항거하는 유대인들이 모여 들게 됩니다. 

그러데 이 무렵 아주 우스꽝스러운(?) 일이 발생합니다. 이들이 지켜내려 했던 신앙과 전통에 대한 신념의 크기를 알 수 있는 사건입니다. 그 때의 일이 마카베오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의 명령을 거역한 사람들이 광야로 피해 가서 숨어 살고 있다는 보고가 다윗의 성 예루살렘에 있던 (셀류커스)왕의 부하들과 군사들에게 들어 왔다.  그래서 큰 군대가 그들을 쫓아 나섰다. 그들이 있는 곳에 다다라 맞은편에 진을 치고 안식일을 골라 공격할 채비를 갖추었다.  그리고는 숨어 있는 사람들에게, “자, 이젠 그만두고 나와서 왕명에 복종하여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하고 크게 외쳤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왕명에 굴복해서 안식일을 더럽힐 수는 없다. 우리는 나가지 않는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즉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대항하여 싸우지 않았다. 돌을 던지거나 자기들의 피신처에 방벽을 쌓거나 하지도 않고  “우리는 모두 깨끗하게 죽겠다. 너희들이 죄없는 우리를 죽였다는 것을 하늘이 알고 땅이 증언할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이렇게 적군이 안식일을 택해서 공격해 왔기 때문에 유다인들은 처자와 가축과 함께 고스란히 죽어 갔고, 죽은 사람은 천 명이나 되었다.” – 마카베오상 2 : 31 – 38 

적군의 공격 앞에서 안식일이라는 이유 하나로 전혀 대항하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마따디아는 비록 안식일일지라도 적군이 쳐들어올 경우는 맞아 싸운다는 계율을 내린답니다. 그리고 이 무렵 하시딤이라고 불리우는 유대의 전통을 경건히 받들어 지키는 무리들이 마따디아 무리와 합세를 하게 됩니다. 하시딤이라고 불리우는 이들 무리가 바로 바리새파의 원조가 되는 것입니다. 

Hanukkah-Dinner-1

마따디아가 죽고 그의 아들 가운데 유다 마카베오(마카비)가 그를 계승하여 게릴라전을 이어갔습니다. 마카베오 역시 연전연승을 거둡니다. 셀류커스의 왕 에피파네스는 처음에는 이들 세력을 우습게 보고 소수의 병력들을 보냈지만 연전연패하자 자신이 제일 신임한  최강의 군대를 내세웁니다. 그러나 마카베오는 야간기습 전략으로 이들을 몰살시켜버리고 맙니다. 그 기세를 몰아 마침내 마카베오는 예루살렘을 점령합니다. 

때는 기원전 165년 12월 25일이었습니다. 이 날로 부터 여드레동안 유대인들의 축제가 연이어 벌여지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에게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바로 하누카(Hanukkah) 축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