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늘 무모했다. 역사앞에서

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많은 뉴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른바 꼴보수 매체에서부터 극좌빨 매체에 이르기까지, 매체 영향력의 크기를 떠나 심지어 저 같은 골방 샌님까지 입가진 자들이 던지는 소리들이 넘쳐납니다.

그 숱한 소리들을 가로지르는 큰줄기가 하나 있는 듯합니다. 바로 이념논쟁입니다. 친일, 종북논쟁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명백한 허구입니다. 지금 왈 논쟁중인 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는 이념에 초점을 맞추어 볼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역사학’이라는 학문적 성과도 그렇거니와, 2015년을 살아가는 ‘한국어 사고형 인간들’에게 ‘한국사’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던 싯점은 바로 1970년대였습니다. 이른바 유신시대였습니다. 지금 여왕놀이에 빠져있는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시대였습니다.

오늘날 이른바 꼴보수들이 말하는 ‘민족주의 사관’이니 ‘민중사관’이니 하며 ‘종북사관’으로 연결지어 매도하는 역사학적 연구들이나 그 결과물들이 대중전파하게된 까닭은 바로 박정희 탓입니다.

왜냐하면 정통성이 매우 취약한 반민주적 정권이었던 탓이었습니다. 그 토양에서 ‘올바른 사관’에 대한 연구와 대중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한국어 사고형 인간들’의 ‘역사 바로보기’가 시작되었던 것인데, 김영삼의 군불때기를 시발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그 문제적 ‘사관’이 일반화된 시각이 될수도 있겠다는 염려가 공포수준에 이른 세력들이 일대 반격을 꾀하고 있는 상황이 지금의 교과서 국정화 문제라는 것은 일개 샌님인 제 발상입니다.

그렇게 박근혜 시대에 이르러 향수에 젖어 옛노래를 부르는 세력들이 기승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 유신의 시대를 돌아가신 리영희선생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리고 리영희선생이 말한 세가지 부류의 지식인들 가운데 지난 40년 동안만 끊어서 본다면 아직도 제일부류들의 전성시대임에 틀림없는 듯합니다.

허나 역사의 발전은 분명 제3부류의 지식인들과 시민들의 힘에 의해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답니다.

book리영희선생이 <우리의 상황과 실존적 결단>이라는 제목으로 쓰신 “누군가 말해야 한다.(삼민신서, 1984년)”의 서문중 일부입니다.

<1970년대의 이 나라는 이른바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에 의한 통치시대였다. 명분이야 무엇이었던간에 그것은 민주주의 정치에서는 ‘변칙적’형태였고, 따라서 그 시대는 이 나라 지식인에게 특수한 마음가짐(사상)과 행동(실천)을 요구했던 상황조건이었다.

돌이켜볼 때, 그 한 시기를 살은 지식인에게는 세 가지의 태도가 있었다.(일반 대중의 경우는 굳이 여기서 문제시하지 않는다.)

첫째는 상황에 순응 내지는 적극 호응하는 자세였다. 둘째는 상황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태도였고,  셋째는 그 상황을 과제로 인식하여 그 해결을 모색하는 사상과 태도였다.>

1970년대의 끝무렵였던 1979년 10월, 박정희의 죽음이 그렇게 다가오리라고는 이들, 제일, 제이 부류의 사람들은 차마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치 1930, 4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1945년 8월을 차마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즈음 ‘역사논쟁’을 보면서, 이건 단지 1970년대 ‘공주놀음’하던 박근혜가 ‘여왕놀음’하는 2015년 버전이요, 그 주변에서 제 밥그릇 하나 챙기기에 혈안이 된 도적놈들의 날뜀, 그리고 눈먼 백성들의 완장놀음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날 이런 놀음과 완장에 취한 이들 역시 도둑처럼 올 내일이 자기들에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취해있을 터이지요.

무모하게 역사 앞에서.

우리들의 상식(常識)

<민주주의적 자유와 비판의 권리가 일반적으로 확립되지 않은 사회에서, 그 소수자 권력의 이익에 상응하는 사상, 가치관의 신념체계는 ‘특수주의 이데올로기’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반대되는 신념체계, 즉 다수를 위한 그것을 ‘보편주의 이데올로기’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비민주주의적 사회에서는 그 특수주의 사상이 그 사회의 ‘공인(公認)’ 또는 ‘제도적’ 사상으로, 그리고 보편주의 사상이 ‘이단적(異端的)’ 또는 ‘비판적’ 사상을 구성하게 된다. 이 두 입장이 적대관계냐 협력관계냐 하는 것은 주로 그 공인, 제도적 사상과 입장의 관용도에 달려 있다.

권력층의 세계관과 정치적 성숙도가 높을수록 ‘이단적’, ‘비판적’ 사상 및 입장의 정당한 가치와 기능을 승인하며, 양자간의 부단한 변증법적 통일을 발전의 계기로 이용할 줄 안다. 그 사회의 구성원이 합의하는 궁극적 목표와 이상을 공유하는 한, 그 양자는 동반자이지, 적이 아니다.

‘공인’사상과 ‘비판’사상간의 이 모순관계를 항구적으로 협조, 통일 및 발전의 관계로 활성화하게끔 제도화하는 장치가 민주주의임은 우리의 상식에 속한다. 한 사회의 생존과정에 개제하는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 그 쌍방의 입장, 관점, 접근 방법이 다를 수 있다. 그럴수록 발전의 잠재적 범위는 확대되게 마련이다.>

돌아가신 리영희선생님께서 1980년에 쓰신 <민주주의와 진실의 추구>라는 글의 한 대목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민주주의를 정의하시며 그저 1980년 현재 ‘우리들’의 상식에 속하는 문제라고 지적하며 여러 다른 생각과 사상들 곧 다양성이야말로 민주주의 발전의 자양분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1980년은 광주 민중항쟁이 일어난 해이고, 당시 자연 변화까지 주관한다는 뉴스 멘트를 받았던  전두환이 권력의 정점에 오른 해이기도 합니다.

선생은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이렇게 단언합니다.

<’반공법 적용에 있어서는 정부 대리인이 위반이라고 해석하면, 그것이 결정적 판단이다. 피의자는 다만 그것에 복종할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중략-

관료의 판단은 절대적인 것이다. 이 법과 그 운용에 관한 한 그것은 공인사상과 체계적 특수 이데올로기의 ‘신성불가침’으로 되어버린 감이 없지 않다. ‘절대화’의 규범을 넘어서 하나의 ‘종교’가 되어버린 채, 일체의 반대도 비판도 허용치 않으려 한다. 이것이 한 법률의 종교화라는 뜻이다.>

그로부터 35년이 흐른 2014년도 저물어 갑니다. 참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2014, 2015몇 주전인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는 모임을 통해 만났던 이의 소리는 2014년과 함께오래 기억될 듯합니다. 그녀는 장난감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예쁘장하고 똘똘하게 생긴 세살 아이를 둔 30대 젊은 엄마입니다.

“그 동안 저는 내 모국(母國)이 자랑스러웠답니다. 정말 짧은 시간에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게다가 민주주의를 그렇게 빨리 정착시킨 나라도 없다는 그런 자부심을 준 모국이었답니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과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뭐랄까요, 부끄러움이랄까요, 안타까움이랄까요, 그냥 이건 아닌데…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아요. 그래 모국을 위해 뭔가라도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해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리영희선생이 “우리들의 상식(常識)”이라고 말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는 1980년 당시의 대한민국의 ‘비상식(非常識)’적인 모습에 대한 한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비상식적 모습으로 2014년을 보내는 한반도 남북의 모습에 이는 안쓰러움과 그나마 나은 게 있다면 그래도 몇 십년 동안 이루어낸 다양성이 보장된 남쪽이라는 생각마저 잃게하는 분노가 쉽게 가시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상식(常識)”이 이루어지는 날을 꿈꾸며 아주 작은 일이라도 쉬지않고 꾸준히 노력하려는 다짐으로 2015년 새해를 준비해야 할 터입니다.

리영희 – 그의 되살아남

“괴로움으로 엮어진 만 7년간의 군대생활은 1957년 8월 16일 육군소령으로서의 진급명령과 제대비 8천 원이 덧붙여진 223848 군번의 예편통지서를 받아든 것으로 그 지루했던 막을 내렸다.

1950년 8월 16일 입대했을 때 스물 두 살이던 철부지 젊은이는 스물 여덟 살의 고민하는 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이북에서 내려온 한 청년으로서 이 나라와 사회가 요구하는 모든 의무에 거의 무조건 맹목적으로 순응하고 복종하던 개체의 내면에서는, 이제는 거의 모든 것을 회의하고 질문하고, 허위와 가식으로 가려진 진실된 가치를 밝혀내어, 진실 이외의 그 무엇에 대해서도 충성을 거부하는 종교같은 신념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 자신은 그 변화를 분명히 자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고 하나의 되살아남이었다. 되살아난 그 후의 삶은 그에게 많은 고난과 시련을 안겨줄 것이 분명했지만 그의 삶은 그 변화로 말미암아 충족될 것이었다.”

리영희작고하신 리영희선생님께서 1984년에 쓰신 ‘전장과 인간’이라는 글의 마지막 한 부분입니다. 자신의 6.25 전쟁체험을 자전적으로 엮은 글입니다. 선생께서는 이 자전적 이야기에서 줄곧 “나”라는 화자(話者)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갑니다. 그러다 글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글의 화자를 “그”라고 객관화 시킵니다.

그 시점부터 리영희선생님의 삶은 “나”라는 자기 중심적 삶에서 “그”라는 공동체적 삶으로 바뀝니다. 그 공동체를 정의하여 리선생님은 “민족도 아니요, 국가도 아니다”하셨습니다. 그는 “진실을 찾는 공동체” 안에 자신을 객관화시켰습니다.

그 이후 그가 걸어온 언론인과 학자로서의 길은 바로 그런 자기 객관화의 삶이었습니다.

같은 시대의 인물로 청암(靑巖) 송건호(宋建鎬)선생님이 계십니다. 한겨레신문 초대사장을 지내신 분입니다. 그 역시 자신을 민족과 민중 속에서 객관화 시키기 전까지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삶”에 빠져있었다는 고백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두 분 모두 편안하게 많은 것 누리시며 사시다 가셨을 수도 있는 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두 분 모두 스스로 고난의 짐을 메고 사시다 가셨습니다.

리영희선생님은 평북출신의 피난민이었습니다.

이즈음 70여년 전 서북청년단 흉내내기에 빠진 미친놈들 뉴스를 보다가 떠올려본 두 분 선생님 이야기였습니다.

리선생님께서 ‘전장과 인간’이라는 글에 남기신 이야기 하나 더 소개 드립니다.

“동물적 생존본능에 있어서는 지식이나 교양이라는 것이 그 후 경험하고 목격하게 된 무식한 사병들이나 형무소의 파렴치 잡범들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정말 쓸쓸한 심정이었다. – 중략 – 이런 동물화된 인간군의 상태는 그 현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으리라.”

이즈음 세월호 집단 수장사건의 처리과정 모습은 바로 이런 “동물적 생존본능”이 “집단 이기주의”로 발전한 한 양태일 것입니다.

혹자는 리영희선생님나 송건호선생님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실패로 규정하기도 할 것입니다. 거의 광기에 빠져있는 이즘 세태로 보자면 분명 실패로 규정지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리영희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의 경지에 이르고보면, 그 즐거움이 여간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맛본 사람들만의 몫입니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되살아난 그 후의 삶은 그에게 많은 고난과 시련을 안겨줄 것이 분명했지만 그의 삶은 그 변화로 말미암아 충족될 것이었다”

이런 충족하고 만족한 삶을 꿈꾸며 자유하는 삶을 누리는 이들이 많아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