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설(毒說) -예언자 10

(당신의 천국 -서른 아홉 번 째 이야기)

망할 것들! 권력이나 쥐었다고 자리에 들면 못할 일만 꾸몄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고 마는 이 악당들아, 탐나는 밭이 있으면 빼앗고 탐나는 집을 만나면 제 것으로 만들어 그 집과 함께 임자도 종으로 삼고 밭과 함께 밭 주인도 부려 먹는구나. 나 야훼가 선언한다. 나 이제 이런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 미가 2 :  1- 2, 공동번역 

예언자 미가가 활동했던 시기는 기원전 725년에서 기원전 701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시기이고 남왕국 유다에서는 아하스왕 말기와 히스기야왕 초기에 해당하는 때입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 분단된 남북왕국 가운데 북왕국에 대해서는 지난 글들에서 대충 훑어 보았습니다. 

남북이 분단된 기원전 922년 부터 미가 예언자의 활동시기인 유다왕 히스기야까지의 남왕국 이야기를 북왕국과 비교해서 대충 훑고 넘어 가겠습니다.

남왕국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열왕기와 역대기 두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 상하에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의 역사가 함께 기록되어 있고, 역대기 하에는 유다의 역사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서를 통독하다보면 종종 읽기 지루한 곳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전혀 머리 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 족보이야기가  이어지는 역대기상도 그 중 하나일 것입니다. 

역대기에 대한 이야기와 두 개의 다른 사관(史觀) – 신명기 사관과 역대기 사관 –에 대한 이야기는  남왕국 유다 이야기가 끝나고 바벨론 포로 시기 이야기를 할 때 자세히 설명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남왕국과 북왕국의 드러나는 차이점들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북왕국은 열 개의 부족 지파 동맹체였고, 남왕국 유다는 두 개지파 공동체였습니다. 두 개지파라고 하지만 베냐민지파는 소수였고 유다지파 단일체제로 보아도 무방할 만큼 유다 지파의 세가 컸습니다. 

북왕국은 시작부터 모든 면에서 새로 출발하는 입장이었고, 남왕국은 다윗과 솔로몬의 위업을 계승하며 시작되었습니다. 

북왕국은 수도를 결정하는 일, 성전과 제단을 만드는 일, 정치 체제를 만드는 일 등 모든 면에서 새로 시작하는 처지였던 반면에 남왕국은 다윗의 성 예루살렘과 솔로몬의 성전과 체제를 그대로 이어받고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북왕국은 여러 부족이 함께 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이 넓었고, 남왕국은 북왕국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영토를 갖고 있었습니다. 경작지 곧 수확을 거둘 수 있는 땅의 크기는 북쪽이  남쪽보다 거의 네배나 컷습니다. 지배계층의 입장에서 보자면 다스리기가 남쪽이 훨씬 유리했다는 것입니다.

지리적으로 북왕국은 북쪽의 아시리아 등 외세의 침략을 당하기 쉬운 조건에 있었고 남왕국 유다로써는 그런 북왕국이 일종의 방패막이가 되는 좋은 조건에 놓여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는 북왕국 이스라엘은 왕조가 아홉번이나  바뀌었지만 남왕국은 단일 왕조가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북왕국 이백년 역사에서 아홉번이나 왕조가 바뀌었다는 말은 정권이 그만큼 불안정했다는 말입니다. 일테면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왕씨 고려왕조 오 백년, 이조왕조 육 백년 이렇게 이어오는 것처럼 이백년 사이에 이씨, 박씨, 김씨 등 왕조가 아홉번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그에 반해 남왕국 유다는 약 335년의 역사를 단일 왕조로 이어져 내려 왔다는 것이지요. 다윗과 솔로몬의 후예들이 대를 이어 왕통을 이었답니다.특히 남왕국 유다의 제 3대 임금이었던 아사왕 때부터는 후계를 미리 선정하고 그 후계자와 일정기간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공동섭정 정치전통을 세웠답니다. 

한마디로 집안 싸움없이 왕위를 잘 이어가는 전통을 세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전통이 무너져 가는 시대가 왔습니다. 북의 완충지대였던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남왕국 유다 역시 이제 강력한 외세의 침략 위기에 내몰린 것입니다. 

미가가  예언 활동을 하던 시기는 바로 이런 때였습니다. 

남왕국 유다가 생존하는 방식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들이 충돌하는 시점이었습니다.  이른바 자주(自主)냐 사대(事大)냐 하는 논쟁이 권력의 흐름을 결정하는 시대로 접어든 때였다는 것입니다.

독립문

쉽게 말씀드려서, 강력하고 힘센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고 비위를 맞추어 가며 왕조를 이어갈 것이냐, 나름대로 왕조의 전통을 고수하고 독립 노선을 걸을 것이냐의 싸움이 시작되는 시기였습니다. 

역사 이래 강대국의 영향 아래 있는  모든 약소국들이 겪어 온 모습입니다. 생존을 위한 투항이나 복종을 할 것인지, 죽음을 마다치 않는 항거나 투쟁을 할 것인지 결단이 필요한 때를 맞아 어느 것이 현명한 선택인지 자신들 끼리 노선 싸움을 벌이는 현상이지요. 

그런데  남왕국 유다나 이미 망한 북왕국 이스라엘이나 그 역사를 고백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유사한 다른 민족이나 국가들에 비해 선택의 기준이 남달랐다는 것을 머리 속에 그려 넣으셔야 합니다. 

바로 그들의 선택의 기준은 야훼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 이제 미가의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미가는 예언자 이사야와 같은 시기에 남왕국 유다에서 예언 활동을 한 예언자입니다.

이사야서는 자그마치 66장이나 되는 긴 이야기인데 비해 미가서는 달랑 7장에 그칩니다. 그래 이사야는 대예언서, 대선지서로 부르는 네 개의 이야기 중 하나이고, 미가는 소예언서, 소선지서라고 부르는 열 두 개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그 ‘크다’, ‘작다’의 의미는 기록의 양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미가는 이사야 못지않은 아주 중요한 예언자 가운데 한사람이랍니다. 

미가와 이사야는 같은 시대를 산 사람이지만 아주 다른 점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미가는 촌사람, 이사야는 도시사람이었고 

미가는 가난한 사람, 이사야는 있는 사람이었고

미가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이사야는 뼈대있는 가문이었고

미가는 시장 사람이었고 , 이사야는 왕궁 사람이었고

미가가 쓰는 말은 단순하고 직선적이었고, 이사야가 쓰는 말은 고상하고 문학적이었습니다. 

일테면 “내 겨레의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며 내 겨레의 살을 뜯는구나.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바수며 고기를 저미어 남비에 끓이고 살점은 가마솥에 삶아 먹는구나.”라며 당시의 지도자들에게 쏟아 붓는 미가의 독설(毒說)은 철저히 그의 면목을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미가 이야기 한번 더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