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에게 길을 묻다

당(唐)나라 고승(高僧) 조주선사(趙州禪師: AD:778-897)의 일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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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학승(學僧) 하나가 선사에게 물었답니다.

“개(犬)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개도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지요.

선사 왈.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다른 제자가 와서 똑같이 물었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이번엔 선사 왈. “있다”

제자가 다시 물었답니다.

“아니 그럼 부처는 그만 두고 사람이 되지 왜 개로 그냥 있습니까?”

조주선사 호통을 치시며 “얌마! 그건 개한테 가서 물어 봐!”

뭐 당나라 때 뿐이겠습니까?

제 맘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제 안에 있는 부처 하나 느끼지 못하는 처지에 남이 무얼 하건, 개새끼가 무얼하건 그게 도(道)닦는 것과는 뭔 상관이냐는 조주선사의 가르침은 오늘에도 그대로 유효한 것이지죠.

순례자든 방랑자든 아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저 같은 사람이든

진리가 뭐 별거 있겠어요.

때론 화살이 되기도 하고 과녁이 되기도 하고

그게 삶이지요.

눈 뜨면 일어나 세탁소로 나가 보일러를 켜고, 일하며 배고프면 먹고,

집에 들어와 아내와 함께 가요무대 보며 세월도 한탄하고 흥얼거리기도 하고, 그러다 자고…

그 일상적인 바로 나의 삶에 도(道)가 있는 것이지요.

따지고 보면

심심하면 제가 글질하는 이 짓도 다 저를 위한 것이고요.

그게 때로는 누군가에겐 화살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따듯한 모포 한 장이 될 수도 있고…

과녁이 된 그가 하지 말란다고 아니 할 수도 없고

모포 한 장 더 달란다고 줄 여유도 없고

나도 때론 과녁이 되고

내미는 손도 되고…

그렇지 아니한가요?

무릇 도(道)라는 놈이….

그러다 다투기도 하고 표표히 떠나기도 하는.

다시

화살이 되고

과녁이 되는.

쌀값이 얼마인고?

묻노니 ‘스님, 불법(佛法)의 참 뜻이 무엇입니까?’ 답하노니 ‘요즈음 여릉(廬陵)의 쌀값이 얼마나 하는고? 중국 선불교의 고승 청원(靑原)행사선사(行思禪師)의 선문답(禪問答)이다.

행사스님(? – AD740)은 달마대사로 부터 시작된 중국 선종(禪宗)을 크게 꽃피운 제6조 혜능조사(慧能祖師)의 제자로서 남악스님과 더불어 선종사의 초석을 놓은 거목이다.

그에게 어느날 신회(神會)라는 스님이 와서 묻는다. ‘불법대의(佛法大意) 곧 부처님의 참 뜻이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행사스님의 답은 그야말로 엉뚱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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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여릉의 쌀값이 얼마나 하는고?’ 일컬어 <여릉의 쌀값>이라는 유명한 화두(話頭)이다.

행사스님이 계셨던 청원사로 들어 오려면 거쳐야 했던 여릉지방은 당시 쌀이 많이 나는 중국의 곡창지대이었다. 부처님의 길을 묻는 제자에게 한 대답  ‘여릉의 쌀값’은 곧 그 쌀이 존재하는 곳 바로 그 곳에 부처의 길이 있다는 뜻이다.

쌀은 예나 지금이나 대표적인 일상용품이다. 쌀값의 오르내림에 따라 울고 웃는 그 일상성을 되묻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행사스님의 큰 뜻은 바로 일상적인 것 속에 부처의 길, 불법의 참 뜻이 있다는 것이었다.

현실세계를 벗어나 이상적인 불법을 찾아 헤매는 제자에게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 불법의 참 뜻을 찾아 보라고 설파하시는 행사스님 말씀은 오늘을 곱씹게 한다.

도(道)란 원래 평상적 일상속에 두루 존재한다는 것이 동양사상이다. 노장(老莊)에선 이를 ‘도재평상(道在平常)’이라고 한다. 먹고, 마시고, 심지어 싸고 눕는 그 일상속에 도가 있다는 말이다.

예수는 삼년간 그의 공생애를 사는 동안 병든 자를 고치는 기적들을 많이 행하였다. 예수 당시의 병자는 몸이 아픈 사람 이전에 신으로 부터 저주받은 사람들로 사회로 부터 버림받은  자들이었다. 눈먼 자, 문둥병자, 정신질환자, 십지어 곰배팔, 절뚝발이까지  육체적 결함은 곧 신의 저주나 신 또는 조상의 죄의 댓가때문이라고 당시의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예수의 기적은 병고침 뿐만 아니라 신의 저주에 대한 거부, 나악 죄로부터의 해방까지 선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교훈은 병 고치는 기적 이후에 한 예수의 행태이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마가복음 8:26)”

벳새다의 눈먼 자를 고치신 예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냈다는 이야기이다.

‘눈을 떳으니 나와 함께 가자’, ‘눈을 떳으니 이젠 천국으로 가자’, ‘눈을 떳으니 이제 나를 위한 전도만 하라’가 아니라 ‘집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곧 일상성으로 돌려 보냈다는 것이다.

자! 이제 기적에 의해 눈을 뜬 이는 집으로 돌아가 보이지 않았을 때의 그 답답함과 죄 때문이라는 속박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밝게 보이는 세상을 통해  새로운 도전과 번민을 맞게 되었을 것이다.

바로 그 고뇌가 뒤따르는 일상성의 회복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로 가는 지름길이었기에 예수께서 그리 명령하시지 않았을까?

지난 해 말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 거의 3,000여개의 이르는 한인 교회들이 있다고 한다.

천주교 성당이나 불교사찰은 포함되지 않았으니 그 수가 또 얼마나 될지?

많을수록 좋다는데 자꾸자꾸 세우면 또 어떠하리.

다만 오늘, 여기, 이 땅의 삶을 업수이 여기는 믿음, 교회나 사찰이 오늘의 삶에서 동떨어져 안주하는 방주로 여기는 믿음, 평상심(平常心)과 분리된 열광만이 믿음이라는 독선만은 말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묻노니, 여보!  20파운드 쌀값이 얼마지?

 

*** 오늘의 사족

2001년 3월 15일에 쓴 글인데 어쩜 오늘도 그대로 유효한지…

일상성을 버린 믿음이란 무릇 공허하다.